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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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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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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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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할리우드 겉멋 그 자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한국 영화인들은 2004년을 무척 바쁘게 보내고 있다.

상반기에만 두 편의 ‘천만’ 관객 영화가 나왔다.

또한 베를린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심사위원 대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영화를 향한 관객들의 아낌없는 지지에 대한 영화인들 나름의 화답이었을까.

아니면.

과거 국가권력으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은 것에 대한 표출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을까.

대통령 탄핵규탄, 민노당 지지, 국가보안법 철폐, 파병반대, 그리고 대마초 합법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인들은 영화 만드는 것 외에도 시위하는데도 무척 열심이다.

스크린쿼터에 한정됐던 충무로의 정치적 관심사가 발현되면서 크고 작은 정치·사회적 이슈에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와 충무로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든, 류지호는 여주에 칩거하며 영화 준비에 몰두했다.

여주 가온호텔에 머물며 WaW종합촬영소로 출퇴근을 반복했다.


“김 기사!”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요즘 무슨 영화 해?”

“<내 머릿속에 지우개>하고 있습니다.”

“아스트로 엔터테인먼트 꺼?”

“예.”

“사운드 스테이지는?”

“G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올 초, WaW종합촬영소는 규모가 작은 200평 대 소형 사운드 스테이지 두 동을 완공했다.

제작사들이 세트비용을 아끼겠다고 작은 평수의 스테이지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두 개 스테이지가 추가되면서 모두 9개의 사운드 스테이지를 보유하게 됐다.


“식당 밥은 먹을 만해?”

“맛있습니다.”

“불만 사항이나 피드백 줄 거 있으면 언제든지 종합촬영소에 얘기해줘.”

“예. 감독님!”

“차 대표님은 언제 온대?” “크랭크업 할 때 오시지 않을까요?”

“알겠어. 수고해.”


종합촬영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류지호와 촬영 퍼스트 어시스턴트의 대화였다.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WaW종합촬영소에서 마주치는 영화인 모두를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꽤 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류지호다.

이번 삶에서 새롭게 인연을 맺은 이들도 많았고.

이전 삶에서 껄끄러웠던 헤드 스태프들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류지호가 먼저 친절하게 다가갔다.

이번 삶에서는 딱히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인성이 좋지 않거나 표리부동한 자들은 노골적으로 걸렀다.


“거 새끼, 싸가지 없네.”


라든가.


“내가 WaW에 뭐 잘 못한 거라도 있나? 왜 저래?”


라며 류지호의 무시 혹은 냉대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헤드 스태프들은 몰랐지만, 조수들이 저간의 사정을 금방 눈치 챘다.

류지호가 냉대하는 이들 대다수가 조수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니까.

내색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류지호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됐다.

안 좋은 쪽으로.

본의 아니게 류지호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셈이랄까.


“진 감독 연출팀이었지.... 수용, 주연씨 였던가?”

“예! 박수용입니다.”

“어머나, 어떻게, 어떻게~ 홍주연이예요. 감독님!”


류지호가 이름이라도 불러줄라치면, 마치 은총을 받은 것 마냥 몸 둘 바를 몰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 후배들도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종합촬영소로 출근하며 기사든 조수든 스스럼없이 말을 걸자, 다들 류지호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WaW종합촬영소에서 작업하는 대부분은 현시점 충무로 주류영화를 작업하는 팀들이다.

개중에는 로비를 잘해 일감이 끊이지 않는 스태프도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전 세대의 못된 인품을 가진 디렉터들이 어느 정도 물갈이되었다.

젊은 세대가 부상하면서 촬영 현장에서 만큼은 몹쓸 짓들이 많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버젓이 벌어지지만 않을 뿐, 부당한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자회사 WaW 픽처스가 소문이 좋지 않은 감독이나 배우가 참여하는 영화를 제작할 경우 전하영이 해당 영화에 참여해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다.

WaW의 프로덕션 헤드인 전하영에게 찍히면 WaW가 관여하는 스무 편 가까운 영화에 참여하지 못하기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충무로에 만연한 성희롱, 횡령, 배임, 회계부정 등 적폐가 근절될 리가 없다.

여전히 출연을 미끼로 성상납을 요구한다거나, 간이영수증을 이용한 회계부정, 포스트프로덕션 업체와의 이중계약, 매니지먼트 혹은 보조출연 업체로부터의 부적절한 접대문화, 제작비 절도 행위 등.

사소한 부정부터 중범죄행위까지 충무로는 여전히 무감각했다.

2002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영상 파일이 텔레씨네 업체에서 개봉 전 유출되어 큰 망신을 당했는가 하면, 작년에도 현상소 실수로 3일치 촬영 필름을 날려버려 재촬영을 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작년에 제작되었거나 올해 제작될 예정인 D-Cinema 한국영화 7편이 급하게 WaW종합촬영소 포스트프로덕션 업체들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OriginⅡ는 몇 대나 들어와 있어?”


장비대여실을 둘러보던 류지호의 질문에 담당 실장이 얼른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10대가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렌탈샵에 풀옵션 4대가 있고, DALLSA D-Cinemas 아시아 총판에 여섯 대가 있습니다.”

“올 하반기부터 일반 렌탈샵이나 개인에게 OriginⅡ 판매가 시작될 거야.”

“디지털 포럼에서 들었습니다. 혹시.... 감독님?”

“응?”

“Eye-MAX 카메라 가격을 낮출 계획은 없으십니까?”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왜? Eye-MAX 카메라 들여오고 싶어?”

“아닙니다. 어차피 카메라 들여와도 감독님 빼고는 쓰지도 못할 텐데요.”


Eye-MAX MK 시리즈 필름 카메라 가격은 한화로 대략 7억 원이다.

관세 및 통관료 등을 뺀 순수 카메라 가격이다.

ARICH 35mm 필름 카메라 가격의 대략 두 배다.


“나중에 필름에서 디지털로 완전히 대체되면 Eye-MAX 카메라 한 대 정도는 스튜디오에 가져다 놓을 게.”

“정말이요?”

“틈틈이 중고 영화용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고 있어. 나중에 기증할 생각이니까, 렌텔샵에 전시를 하든 따로 전시공간을 마련하든 스튜디오 운영팀과 의논해 봐.”

“예. 감독님!”

“우리 렌탈샵에는 ARICH Ⅲ부터 있지?”

“예.”

“혹시 16mm 카메라도 있나?”

“16BL은 12만원, SR시리즈는 30만원, ST는 10만원에 대여하고 있습니다. 캐논 스쿠픽은 학생의 경우 그냥 내주고 있고요.”


모두 1일 기준이다.

서울 소재 주요 렌탈샵보다 적게는 2만원, 많게는 10만 원이 저렴했다.

여주까지 방문해 16mm 카메라를 대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교통비조로 빼주는 것이다.


“라이트의 경우, 텅스텐은 1kW 이하는 1만원, 2kW 2만원, 5kW 5만원에 대여하고 있습니다. HMI는 4kW일 경우 1일 20만원에 대여하고 있습니다. 키노 플로는 10만 원에 대여하고 요소와 주피터는 학생인 경우 그냥 내주고 있습니다.”


조명기 대여료는 서울 렌탈샵과 비슷한 수준이다.

필름 카메라의 경우 촬영감독마다 선호하는 대여점(거래처)이 따로 있기 때문에, WaW종합촬영소까지 일부러 방문해서 대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문에 디지털 카메라 위주로 대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년에 레볼루션 카메라 3대 들여오는 건 알지?”

“물론이죠. 벌써 4K 카메라가 나오다니... 대단한 것 같습니다.”


4K 카메라가 있다고 해도 극장 시스템이 2K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직은 전문가들끼리 룩에 대한 실험에 만족하는 단계다.


“데이터가 없어서 당장 촬영감독들이 영화에서 사용하긴 힘들 거야. 윤 실장이 시간 날 때마다 테스트 촬영 하면서 데이터 수집해 봐.”

“옛!”


WaW종합촬영소 대여실장은 촬영 퍼스트 출신이다.

촬영부 생활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 가온그룹 영화사업부에 입사한 경우다.


“수고해.”


류지호가 장비대여실을 떠나자 직원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회식비조의 금일봉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류지호가 방문하면 그 날 저녁은 부서회식이란 공식이 생겼다.

내심 회식을 기대했던 말단 직원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퇴근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본관 건물 앞에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를 타고 이천군으로 안내되었는데, 고기집에서 벨트를 풀어놓고, 양껏 고기파티를 벌였기 때문이다.


“우찬아, 잘 했다.”

“말단 마음은 말단을 해본 사람이 잘 아니까.”


류지호가 깜빡한 것을 밀착 경호 및 수행을 하는 고우찬이 챙겼다.

이젠 류지호가 놓친 것까지 살 필 정도로 수행원으로 많이 성장했다.


“우리 조카 돌이 7월이냐 8월이냐?”

“8월.”

“나 따라다녀도 돼?”

“3교대에 대기조도 있잖아... 3일에 한 번씩은 내가 아이 본다.”

“보통은 장모님이 봐주고 계시냐?”

“자식이 누구 닮아서 기운이 아주 장사야.”

“제수씨랑 장모님이 고생이겠다.”

“와이프 보고 있으면 애가 애를 키우는 것 같아.”


고우찬이 웃겨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이형이랑 다연이랑 두 사람 사이에 뭐 있지?”

“두 사람... 아사모사해.”


썸타는 사이로 발전한 모양이다.


“자기들은 아닌 척 하는데, 티가 너무 나서 모른 척 해줄 수가 없다.”

“드라마 찍다가 눈 맞았대?”


다솜미디어 버라이어티 채널이 자체 제작한 드라마 <응급실>에서 최준영은 연출로 공다연은 배우로 참여했다.

작년 가을 첫 방영된 시즌1은 시청률 2.7%라는 초대박을 터트렸다.

신데렐라 스토리도 없고, 신파도 없이 영화적인 화면과 전문직 세계를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문에서 젊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병원 응급실을 주무대로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한 번 쯤 겪어 봤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매 회마다 하나씩 넣었다.

20~30대를 주시청층이 공감할 소소한 이야기들이 화제를 모았다.

심지어 간호사들의 폐습인 ‘태움‘까지 언급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백퍼센트 사전제작 드라마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고, 케이블TV 최초의 자체 드라마이자, 본격적인 시즌제 드라마의 포문을 열어젖힌 나름 기념비적 작품이다.


“촬영하면서 둘이 엄청 티격태격했다고 하는데, 정들라고 그랬던 모양이야.”

“다연이 성격이 어디 가겠냐?”

“준영이형 말로는 다연이가 큰 힘이 되었대.”

“그 반대겠지.”

“준영이형이 말은 못하고, 얼마나 부담이 컸겠냐. 제작비도 그렇고. 스타 하나 없이 거의 무명배우들에, 사전제작에, 드라마가 대박을 쳐봐야 케이블 방영이라서 광고 따기도 힘들고. 암튼 두 사람이 촬영 끝나고 자주 술도 마시고 그랬나봐.”

“네가 보기엔 어때? 두 사람 잘 어울려?”

“어울리고 자시고, 그냥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다. 준영이형 나이도 있고. 다연이도 저러다 노처녀로 늙는 건 아닌지.....”

“이제 삼십대 중반인데 노총각, 노처녀냐?”

“암튼, 너도 그냥 모른 척 해 봐.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끼냐? 안 껴.”


류지호가 묘한 시선으로 고우찬을 쳐다봤다.

녀석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여주에 있을 거야?”

“콘티 끝날 때까지.”

“언론의 관심도 시들해졌는데, 슬슬 서울로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며칠은 더 있다 한남동으로 가지 싶다.”


류지호는 로케이션 헌팅을 나갈 때만 여주를 벗어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종합촬영소의 오피스나 여주호텔에 처박혀 콘티에 매달렸다.

윤기수 촬영감독은 콘티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입장을 고수했다.

콘티는 감독의 영역, 촬영은 DP의 영역이라면서.

콘티를 할 줄 모르는 감독은 감독도 아니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가 윤기수 감독이다.

줄콘티든 스토리보드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프리프로덕션에서 확정된 콘티가 실제 촬영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 ✻


류지호는 프로덕션 디자인 회의를 매우 심도 깊게 하는 편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촬영감독, 미술팀과 매우 긴밀하게 토론과 협의를 한다.

뉴욕대 영화과 출신이자, 미국 시민권자인 윤기수 촬영감독은 명백히 미국식이다.

촬영현장에서는 특정 커피 브랜드와 특정 햄버거가 꼭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계약 부분에서도 줄기차게 주급을 요구하고 있다.

오버차지 부분도 철저하게 따졌다.

한국에서는 대략 일 년에 1편 꼴로 작업하고 남은 기간은 뉴욕으로 돌아가 광고와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다.

올해는 그럴 수 없게 됐다.

디지털로 촬영하는 <우리 형아>와 류지호의 <민중의 적> 후속편 두 작품을 작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디지털로 작업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어.”


<민중의 적> 후속편은 필름 카메라로 찍기로 했다.


“쨍하지 않고 질감이 전편에 걸쳐서 풍부하길 바라니까. 영화가 비정하고 삐딱하잖아. 디지털이 아무리 DI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톤 앤 매너가 차갑지 않고, 정서적 밀도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필름으로 가려고.”

“시나리오에서는 그런 걸 보지 못했는데....?”

“울고 짜고 하는 신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리고 인물의 감정 클로즈업을 서로 교차해서 보여주는 걸 절제하는 편이야. 나는 영화 속 인물이 관객에게 눈물을 강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특히 연기 못하는 여배우가 감정 표현 한답시고 툭하면 울어재끼지.”


윤기수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진저리를 쳤다.


“하하하. 라원이는 안 그럴 거야.”

“잘하더라. 그 친구.”


윤기수는 시각적 면보다는 드라마가 잘 보이는 그림이 좋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시각적 탄탄함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잘 보이는 화면이란 표현이 텔레비전 드라마 같다는 다소 낮춰보는 의미로도 쓰이니까.

즉 영화 화면과 때깔이 ‘연속극 같다‘라는 말을 촬영감독이 들었다면 못 찍었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어릴 때 왜 한국영화의 룩은 다 똑같냐는 불만이 많았어. 어떻게 된 게 한국영화 촬영기사들은 모두가 85필터를 쓰고, 밤 장면에서는 만날 HMI 조명의 푸른 느낌만 보이고. 감독이 다르고 촬영감독이 다 다른데 영화는 다 똑같아 보이는지....”


윤기수가 단언했다.


“룩이 없었던 시대였지.”


류지호가 웃으며 충무로를 두둔했다.


“있기는 했어. 유 기사 같은 양반들 영화나 김기영 감독님 영화들. 환경, 여건 모두 따라 와주지 못했지 예전에는. 제작자들이 개념이 없었으니까. 내가 영화를 찍게 되면, 그렇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 Eye-MAX 카메라를 가지고 한국에서 작업한 것도 그런 오기였지. 한국영화 촬영 분야에서 극한까지 가보자. 관성적으로 작업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해 보자.”


당시에 류지호는 충무로 포스트프로덕션 업체들을 엄청나게 압박했다.

엔지니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작은 현상소도 눈 감고 하는 걸 한국의 메이저 현상소가 못하는 걸 창피하게 여겨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복수의 꽃>을 16주 안에 끝낸 건 정말 미친 사건이라고 생각해.”

“포스트에서 포스트 업체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뭐 덕분에 참여한 업체들 기술 노하우가 업그레이드되는 소득도 있었고.”


필름 스캔, CG, DI, 키네코까지. 일련의 Eye-MAX 영화 후반 프로세스에서 적잖은 성과가 있었다.


“윤 감독도 디지털 작업을 해봐서 알겠지만, D-Cinema가 일반화 되면 많은 촬영감독들이 룩을 60~70%만 잡고 후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될 것 같아. 또 디지털 영화 초창기에는 현장에서 불안하니까 촬영도 과감하게 못하고 그럴 거고. 그러다 보면 DI에서도 과감성이 떨어지겠지.”

“그래서 데이터 축적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아. 정말 많은 테스트 촬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

“연출하는 감독 입장에서 과감성이 떨어지는 디지털 원본 소스를 편집실에서 몇 개월 동안 보게 되잖아. 그러다 보면 DI에서 만들어낸 색감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해. 자연히 DI에서도 과감하게 색을 구현할 수 없게 되지.”


실제 류지호가 이전 삶에서 경험했던 바였다.

여전히 딜레마고.


“최근 디지털에 대한 고민과 탐구 때문에 너무 투명하고 순수한 색만 표현하다 보니 오히려 필름룩이 환기됐다고나 할까. 아직 디지털이 필름을 쫒아가려면 멀었는데, 두 사이의 표현력에서 혼동이 생기더라고.”

“내게 세잔 화집을 보낸 것과 관련 있어?”

 “이번 영화 룩을 고민하면서 떠올린 것이 인상파 그림들이야. 폴 세잔의 화집을 보다 보면 이상한 잡색들이 많이 있더라고. 인물화에 녹색을 쓰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필름을 스캔한 화면에서 구현되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음.”


윤기수가 류지호의 설명을 잠시 곱씹었다.

자신도 디지털 작업을 해보면서 어떤 지점에서 필름 룩을 모방하는 한편 다른 룩을 찾기 위해 룩업테이블에서 색을 막 꼬아보기도 했다.

아직 DI에서 진짜 영화라고 느껴지는 지점을 발견해내지는 못했다.


“한국영화에서 많이 쓰는 85필터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밤 장면에서 블루 톤이 노골적으로 돌지 않았으면 하고. 밤 장면에 모두 그린 필터를 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래. 아! 비 장면에서도 블루가 돌지 않았으면 하고. 블루는... 어딘지 이번 영화에서 너무 노골적이야. 서사가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로 쉽기 때문에 미장센과 룩만큼은 미학적이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영화에서 망원렌즈를 잘 안 쓴 것 같던데....?”

“최근 Eye-MAX와 디지털 영화를 찍어서 그랬지 뭐. 이번 영화도 심도가 좀 깊었으면 좋겠어. 공간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거든.”

 “한국영화를 보면 너무 클로즈업이 많고 공간이 잘 보이질 않는 것 같긴 해.”


미장센보다는 배우의 연기에 기대는 경향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들어 그것을 통해 정서적 감흥이 일어날 때 판타지가 만들어진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동네 골목길에서의 키스씬을 보여줄 때 낙엽이 흩날리는 효과를 넣는 것만으로 마치 동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처럼.

미장센은 서사와 절대 동떨어질 수가 없다.


 “클로즈업이 많아진 게 꼭 그것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시스템 문제도 있다고 봐. 공진형, 박진우 감독님은 공간도 잘 보여주잖아.”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이미 촬영감독은 정확한 룩을 잡아놓는다.

여러 테스트를 통해서 콘트라스트와 컬러 같은 것을 미리 결정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 DI에서 컬러를 자유자재로 가져갈 수 있게 된다.

 룩을 디테일하게까지 잡을 필요가 점차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러프하게 설정하고 들어가게 된다.

 색온도라든가 컬러라든가 콘트라스트 같은 것을 DI 과정에서 잡을 수 있기에.

 필름 작업의 경우, 현상 과정에서 푸싱을 하거나 풀링을 하고, 다양한 컬러의 필터를 쓰고, 콘트라스트를 미리 잡아야 했다.

 디지털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조절 가능해지기 때문에 찍으면서 조금씩 바꾸기도 하면서 촬영이 진행된다.

 이를테면 필름 작업에서는 룩의 거의 90%를 결정하고 촬영에 임한다면 디지털로 전화되면서 60~70%만 미리 정하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할까. 대신 조명의 컬러 밸런스는 꼭 잡아놓아야 한다.

참고로 촬영하는 과정에서 노출 부족으로 적정 노출보다 어둡게 나온 장면을 현상에서 적정 노출로 만들어 주는 것을 푸시(push), 반대로 노출 과다 된 장면을 적정으로 바꾸어주는 것을 풀링(pulling)이라고 한다.


“화면비는 2.35:1로?”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아나몰픽 렌즈를 독일에서 공수해 와도 돼?”


류지호가 원하면 뭐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내 영화에서 써보고 싶은 장비나 시도는 마음껏 해. 종합촬영소 대여실에 주문하면 테스트 촬영 전에 구해다 놓을 거야.”

“알겠어.”


<민중의 적>의 순제작비는 43억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류지호는 1만 원에 계약하고 순이익의 29%를 분배받기로 했다.

주인공 설형기 배우는 2억, 정수호와 송라원이 각각 1억 원의 개런티를 받았다.

이 당시 충무로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남자 배우의 경우 3억~4억 사이를 받고 있다.

평균 제작비는 45억(마케팅비 포함)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참고로 <민중의 적> 후속편의 손익분기점은 대략 전국 170만 명이다.


“필름 프린트와 디지털 패키지 두 가지 방식으로 뽑겠지?”

“응.”


한국의 디지털 상영관은 모두 37개다.

G.O.M Cinemas가 절반이 넘게 보유하고 있고, BGV, 광성시네마 순이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스크린 수가 600개가 채 되지 않았다.

D-Cinema 표준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확장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진 않았다.


“현상은 실버 리텐션으로?”

“그럴 생각이야. 왜?”

“번거롭다고 싫어하는 감독도 있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버 리텐션(silver retention) 기법이라는 최신 필름 현상을 시도한 촬영감독이 윤기수다.

이 기법에는 실버 리텐션(silver retention), 블리치 바이 패스(bleach by pass)/스킵 블리치(skip bleach), ENR(Ernesto N Rico) 현상 등이 있다.

실버 리텐션은 말 그대로 은입자를 남긴다는 개념의 필름 현상 기법이다.

 스킵 블리치나 블리치 바이 패스는 현상 시에 일반적으로 블리치(bleach : 표백)와 정착(fix) 과정을 거쳐 제거되는 은입자 전부 또는 일부를 현상 단계에서 필름에 남겨두는 것이다.

 이처럼 표백 단계를 완전히 건너뛰기 때문에 콘트라스트를 증가시키거나 쉐도우를 더 진하게 해서 풍부해진 블랙을 얻을 수 있으며 이미지의 채도가 감소되어 나타난다.

 스킵 블리치는 단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데, 오리지널 네가필름에서 이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네거티브로부터 만들어지는 프린트 상에서는 좀 더 밝고, 약간 날아간 듯한 하이라이트가 나타나며, 콘트라스트와 입자가 증가한다.

상영 프린트 필름에서 사용했을 경우에는 주로 쉐도우 부분에서 나타난다.

좀 더 어둡고 풍부한 블랙, 콘트라스트의 증가, 적은 디테일, 채도가 낮아진 밋밋한 색상 등이 그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에는 네거필름에서 실버 리텐션 현상을 하지 않고 포지티브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의 경우 한번 현상을 잘못했을 때 재정적인 여파가 천문학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네가필름에서 위험한 시도를 안 한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네가티브 필름 단계에서 현상을 한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Se7ven>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고, ENR 현상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사용한 바가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경우, 군복 셔츠와 헬멧 가장자리 부분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는 효과를 얻었고, 금속 표면이나 물의 반사 같은 부분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실버 리텐션 현상은 광고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ENR 현상은 스킵 블리치보다 더 풍부한 블랙을 얻지만, 콘트라스트는 낮아지고 잔류하는 은의 차이로 다양한 채도를 갖는 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 또 컬러 프린트 단계에서만 적용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현상과 블리치 단계를 거쳐 정착 단계로 가기 전 흑백 현상액으로 재현상하기에 은입자 부분을 남아있게 하거든. 미국에서 본 어떤 촬영감독은 은입자를 제로까지 없앤 후 현상을 해 마치 컬러 필름이 흑백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더군.”


류지호도 잘 안다.

이미 <The Killing Road>에서 실버 리텐션 현상을 했었다.

이전 삶에서도 한 때 한국영화에서 대유행을 했었기에 모를 수가 없고.

어쨌든 은입자의 잔존 퍼센티지는 촬영감독에 의해 결정되고, 영화의 스타일에 맞게 입자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참! 너는 리차드슨 DP와 한번 해 봤지?”

“<The Killing Road>에서 원 스탑 언더로 촬영하더라고.”


-1 스탑(Stop)은 카메라에 빛이 1/2만큼 줄어든다는 뜻이다.

ENR 현상 시 +1 스탑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촬영했다.


"블리치 바이 패스 현상보다 ENR이 좋을 것 같아. 한국에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농도를 제어하는 방식으로, 그림자는 깊어지고 채도는 높아져 어두운 부분은 더 어둡게, 하이라이트는 더 밝게...?"

"밝기는 그대로 둔 채 블랙이 더 깊어지게 나오면 좋겠어. 아무래도 밤 장면이 많으니까."

"일단 테스트 촬영을 해보고, CG컷과 DI까지 봐야 할 것 같아."

"충분히 테스트 해 봐."


일차적으로 촬영과 관련된 큰 포맷은 결정이 되었다.

톤 앤 매너와 구체적인 영상 표현 콘셉트는 미술감독과 함께 논의작업을 거쳐야 한다.

<민중의 적> 후속편에 참여하는 연출, 촬영, 미술, 조명 파트는 여러 레퍼런스들을 공유한 상태다.

류지호는 폴 세잔의 화집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 그림을 제시했고, 프로덕션 디자이너 윤민구는 다양한 스케치와 아트웍을 보내왔다.

촬영감독 역시 류지호에게 영화 한 편과 뮤직비디오를 추천했다.


“다음 주에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함께 헌팅 다녀오자. 괜찮지?”

“픽스 헌팅?”

“아마도.”

“3일 전에는 알려줘.”

“그럴게.”


윤기수는 확정헌팅 아니면 아예 꿈쩍도 안 하는 스타일이다.

원래 이런 것이 맞는 것이지만, 충무로에서는 유난 떤다고 뒷말이 무성했다.


‘이러니 쓸데없이 겉멋이라고 오해받지.’


류지호가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충무로 사람들이 볼 때 류지호는 할리우드 겉멋 그 자체였으니까.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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