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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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백조가 무조건 희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1697년 한 네덜란드 탐험가가 호주 남부에서 우연히 검은 백조를 발견했다.
백조가 흰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검은 백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거나 이례적인 일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두고 블랙 스완(Black Swan)이라고 했다.
이 용어는 주식시장에 심각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하고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널리 쓰이는 표현은 아니다.
참고로 레바논계 미국인 나심 탈렙이 월가의 파생상품 투자자로 활동하면서 현대 금융 시스템이 시한폭탄과도 같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블랙 스완 이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2007년 저서에서 관련한 이론을 주장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 같은 블랙 스완이 한창 잘나가던 나스닥에 나타났다.
사실 나스닥의 거품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많았다.
게다가 지난 3월, 소비자물가지수가 당초 예상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인플레 억제를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월가에서 고조되고 있었다.
류지호 소유의 투자사들이 블록딜을 모두 마친 직후인 3월 중순이었다.
나스닥 주가가 갑자기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이 버블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투자자들은 잠깐의 침체기 또는 조정기라고 여겼다.
착각에 불과했다.
4월 3일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잘나가던 나스닥이 무려 7.64%의 하락을 보여주며 무너졌다.
역대 최대의 하락폭이었다.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너도 나고 갖고 있던 닷컴 주식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난 4월 10일, 나스닥은 다시 5.81% 하락했다.
관망하던 사람들까지 서둘러 닷컴 기업들의 주식을 투매하기 시작했다.
4월 14일에는 또 다시 다우 지수가 5.6% 나스닥 지수는 9.67%나 크게 하락하며 전 세계 증시의 도미노 폭락을 불렀다.
유럽과 일본,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 한국의 주식시장도 크게 흔들렸다.
미국의 증시가 폭락한 1주일 동안 허공으로 사라진 돈이 무려 2조 1,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310조원에 달했다.
“미국에서만 주가폭락이 계속되고 있다면 지금 타이밍에 조금씩 매수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주요 10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서 아직 최저점을 찍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데이브 보우먼이 침착한 어조로 지난 10일 간의 나스닥 상황을 설명했다.
급하게 미국으로 복귀한 류지호는 닷컴버블 붕괴에 따른 혼란부터 수습했다.
웨스트우드 도착 즉시 GARAM Ventures의 투자심사관을 호출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지난 4월 10일 월요일 장 개장 30분 만에 나스닥 기업들 중 100개가 넘는 기업들의 주가의 70%가 날아가 버렸다.
McIntosh의 주가가 1.5달러까지 폭락하고 시가 총액이 5조까지 폭락해 버렸다.
아마니조아닷컴의 주가도 4달러까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장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정도 주가 하락은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장 나와 GARAM Ventures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됩니까?”
데이브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대략 77억 달러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난 1년 동안 주식을 처분하고 83억 달러(약 10조 원)를 벌었다.
대략 8억 달러를 비용이나 세금납부 기타용도 등으로 빼고 그 사이에 발생한 투자수익과 기타 개인소득을 포함해 순순하게 쓸 수 있는 금액이 무려 9조 원이다.
뉴욕의 GARAM Invest는 무려 270억에 달하는 수입을 거뒀지만, 류지호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매튜 그레이엄의 지휘 하에 알아서 활용될 예정이다.
“데이브, 현재 자금 압박을 가장 많이 받는 기업이 어딥니까?”
엄청난 자금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한 곳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기업을 집어 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투자 포토폴리오를 다양하게 가져가려는 것이니까.
류지호는 적은 액수로 투자해 많은 지분을 얻을 수 있는 곳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가장 심각한 곳은 아마조니아닷컴입니다. 부도 위기까지 몰리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제 잘난 맛에 살며 주주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제프리 자이스가 류지호의 직통전화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을까.
“제발 주식을 팔지 말아주십시오.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해 당신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류지호를 상대했던 제프리 자이스다.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듯이 사정했다.
“주가가 계속해서 내려가 3.5달러까지 떨어졌는데, 반등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데이브가 보기에는 어때요?”
“아마조니아닷컴은 주주에 대해 매우 인색하지만 수익금을 재투자하는 경영전략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자금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주가 폭락을 맞이해 위기에 몰렸습니다. 계획하고 있던 투자에 대한 여유자금이 확보된다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함께 자리한 투자심사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나와 있는 물량은 어느 정도죠?”
“경영권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지분을 빼고 보스와 GARAM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물량도 빼고 대략 49% 정도.... 저희까지 물량을 내놨다면 전체 주식의 70%가 거래소로 쏟아졌을 겁니다.”
“다 쓸어 담으면 지분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조니아닷컴에서도 주가방어를 위해 사들이고 있긴 한데, 천천히 움직인다고 해도 지분율로 환산하면 50%를 넘길 수 있습니다.”
“굳이 아마조니아닷컴을 지배하거나 계열사로 편입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2~2,5달러 선에서 지분율 40% 선에서 물량을 확보하도록 하세요.”
“예.”
주가가 워낙 처참해서 1,700만 주를 사들이는데 5,000만 달러면 충분할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아마조니아닷컴의 경영권까지 가져올 정도가 된다.
“McIntosh는 어때요?”
“아시다시피 이렇게까지 무너질 회사가 아닌데 물러났던 전 오너인 스테픈 잡스가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터져 버려서 이사회에서도 시끌시끌한 모양입니다. 한때 1.3달러까지 떨어졌었습니다. 현재는 간신히 2달러를 회복했지만 거래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가 총액이 얼마죠?”
“37억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만 지금 분위기만 봐서는 더 떨어질 것 같습니다. 회사 임원들조차도 가지고 있던 주식들을 시장에 모두 내놓은 상태라서 아마조니아닷컴보다 더 심각한 상태입니다.”
“물량은 충분하겠군요?”
“시장에 풀린 물량을 싹쓸이 한다면 대략 18억 달러(약 2조 원) 정도로 기존 보유하고 있는 주식 포함해서 지분율 환산 51%를 너끈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미 90년대부터 McIntosh를 주목하라고 지침을 내려두었다.
한창 회사가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 지분을 꽤 많이 모아왔다.
닷컴버블이 한창일 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주식가치가 휴지조각처럼 변해버렸다.
회사 자체를 먹어치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것도 2조 1천억 원이라는 부담 없는(?)가격에.
“McIntosh에 18억 달러를 모두 쏟아 붓는 것은 그렇고, 2달러에 35% 확보하는 것으로 맞춰봅시다.”
77억 달러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막상 나스닥의 폭락한 주식들을 주워 담으려니 부족하게 느껴졌다.
사고 싶은 것도 사야할 것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류지호를 추종하는 개인투자자들도 많아서 시장에 풀려 있는 미래 유망주들을 독식하기 힘들었다.
암튼 나스닥 주가 폭락의 허리케인이 휩쓸 때 류지호와 GARAM Ventures는 77억 달러를 아낌없이 주식을 사들이는데 썼다.
McIntosh, 아마조니아닷컴, Googol 같은 IT기업뿐만 아니라, The Coke, Exco Mobil, Johnson & Seabury, Sam Mart, 파이저 같은 기업의 주식도 꽤 많이 사들였다.
또한 닷컴버블 붕괴 직전 의도적으로 지분율을 떨어뜨렸던 PS, Sancisco, BT&T 같은 기업의 주식도 다시 긁어모아서 이전의 지분율을 회복했다.
9조 1천 억 원이라는 돈은 숫자상 엄청난 금액이다.
분산 투자를 하려고 보니 많은 금액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류지호의 자산을 관리하는 비서들이 배당 잘 주는 기업의 주식을 늘릴 수 있는 기회라면서 설득했다.
그에 따라서 배당황제주와 귀족주들 역시 덩달아 사들여야 했기에 자금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여유 자금의 주식투자 관련 회의를 하고 나니 수십 통의 전화가 왔다.
류지호가 주식을 팔면 덩달아 투자자들이 연쇄적으로 주식을 팔지도 몰랐다.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류지호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사인을 시장에 주는 셈이니까.
주가가 폭락했다고 당장 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외 신뢰도가 문제다.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CEO들이 웨스트우드로 날아왔다.
류지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상장폐지를 할 테니 JHO Company에 자발적으로 편입하고 싶다는 CEO까지 있었다.
겸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테픈 잡스까지 찾아올 정도로 비상상황이다.
“며칠 사이에 대주주가 되었더군.”
까칠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만 나불거리자 마치 로봇 같았다.
“원래도 대주주 중에 한 명이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류지호는 스테픈 잡스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괴짜를 넘어 권위주의 꼰대의 전형적인 인물이기에.
천재, 혁신 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져서 그렇지 실제로는 엄청나게 권위적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혁신이란 이름의 신화와 함께 반권위적인 인물로 이미지 메이킹이 됐다.
그런 일화 중에 유명한 것이 장애인주차구역 문제다.
본인은 권위주의적인 CEO가 아니라면서 자신의 전용주차장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는 건물과 가깝다는 이유로 장애인주차구역에 자신의 차를 주차한다.
회사와 이사회에서 전용주차장 만들어서 쓰라고 해도 거부한다.
장애인주차구역에 주차하는 것은 안 된다고 지적하자 CEO가 그 정도 권리도 없냐면서 화를 내는 인간이다.
심지어 자신은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몸에서 냄새가 날 리 없다면서 안 씻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들이 냄새난다고 씻으라고 충고해도 자신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다.
비상식적인 행동과 사고방식까지 천재니까 괴짜니까... 두둔하고 싶지 않은 것이 류지호의 솔직한 심정이다.
“당신의 오기를 믿어보려고요.”
“무슨 오기?”
“헨리의 PS를 넘어서는 최고의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서요? 해 보세요.”
로봇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다.
류지호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오해 할 것 같아 말하는데, 나와 GARAM은 McIntosh를 합병할 계획도 생각도 없어요. 나는 McIntosh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투자한 거니까.”
원래는 이런 말에 대부분이 감동한다.
“그런 얄팍한 말솜씨로 사람들을 설득했다니 나로서는 믿어지지가 않는 군. 역시 파커가 내세운 인형일 뿐이었나?”
“마리오네트라고 생각하든 말든 나는 당신의 경영권을 넘볼 생각 없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미래를 열어보세요.”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는 상황에 내 기분이 무척 더럽군.”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신경 쓰길 바랍니다.”
“주제넘은 충고야.”
“네네. 어련하려구요. 암튼 나는 당신의 비전과 야망을 지지합니다. 나는 McIntosh의 주식을 더 모으면 모았지 절대 팔지 않을 것이고 이사회에 내 사람을 들여보내서 파벌 싸움 따위를 할 생각도 없어요. 배당금도 주면 좋고 안 줘도 불만 없고. 마지막으로 신주를 발행한다면 무조건 살 테니까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리지 마시라고 충고하고 싶네요.”
류지호는 스테픈 잡스와 활동 분야도 삶의 방식도 달랐다.
굳이 친구가 될 생각도 없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집요하고 괴팍하다는 것이다.
그런 돌아이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황재정의 표현에 의하면 류지호 역시 돌아이다.
류지호 본인은 스테픈 잡스 같은 이들과 인성으로 비교당하는 것이 끔찍했지만.
그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결코 평범한 타입은 아니다.
✻ ✻ ✻
매출액 260억 원에 순이익 12억 원, 자본금 90억 원의 중소기업 규모 IT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1998년 8월 코스닥에 상장했다.
상장 전에 이미 세 차례 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배로 늘린 뒤 200% 무상증자를 실시한 상태다.
1999년 10월 1,890원이던 주가는 11월 3만원, 12월 12만원으로 급등하고, 2000년 3월 초에는 282,000원이 되었다.
6개월 동안 무려 150배 올랐다.
수년간 연속 적자를 내다가 간신히 한 번 흑자를 낸 회사의 주가가 오성전자보다 높았다.
2년 사이에 시가총액 5조원짜리 기업이 되었다.
'무료 인터넷 전화'에 혹한 투자자들은 탐욕적으로 매수해서 주가를 올려서 그렇다.
가온투자파트너스는 이 회사에 투자했다가 3,700억 원의 이익을 보고 주식을 처분했다.
그리고 2001년 다이얼패드가 법정관리 되면서 주가가 대폭락하게 된다.
미국에서 휘몰아친 검은 폭풍이 한국도 예외 없이 상륙했다.
4월 17일 개장 10분 만에 증시가 전날보다 90포인트나 폭락하면서 20분간 거래가 일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너도 나도 팔자로 돌아섰고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손을 털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황제주라고 불리던 선경텔레콤 주가는 액면 분할 여파도 있었지만, 닷컴버블 붕괴로 인해 9만원으로 내려앉았다.
대표적인 우량주 오성전자도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주가가 7만원으로 내려앉았다.
그나마 이들 코스피 종목들은 코스닥보다는 나은 편이다.
날개를 달고 끝도 없이 날아다니던 수십 개의 IT기업들이 상장 폐지가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부도가 나 버린 기업들도 허다했다.
가온그룹 계열 신탁투자회사들은 코스닥과 우량주식을 처분하고 마련해 두었던 2조 원 상당의 자금을 풀어 오성전자를 비롯한 우량주들과 상장 폐지 위기에 몰려서 시장에 엄청나게 물량이 풀린 포털사이트 NEXT의 주식을 사들였다.
포털사이트 글라이더의 모회사 GHN 지분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온투자파트너스는 다양한 종목에서 주식을 사들였다.
시장에 풀린 주식을 싹쓸이해서 잠시 주가가 안정되기도 했다.
그로인해 약간의 주가 반등을 이룬 기업은 한숨을 돌릴 수가 있게 됐다.
대주주가 된 류지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온그룹 본사로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반적인 주식시장은 아비규환이었다.
한국에서 닷컴버블 붕괴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한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투자자와 벤처 사업가의 이야기가 연일 뉴스를 도배하게 된다.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류지호에게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공포가 만연한 상황에서 기름을 붓는 언행은 삼가야 했다.
“과일 몇 개가 썩었지만, 과수원 전체가 오염되진 않았습니다. 나는 벤처시장의 과열을 냉정하게 봐야한다고 여러 차례 충고했습니다. 거품이 꺼져야 거품인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와 보니 거품이 낀 것도 맞고 인프라가 갖춰지지도 않았음에도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것도 맞았습니다. 실리콘밸리 일각의 도덕적 해이와 범법행위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IT산업발전이 멈춰있거나 침체하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폭락이 언제 얼마만큼 어떠한 방식으로 하든지 결국엔 회복을 하고 이익을 안겨준다.
즉 시장에서 오래 버티면 결국엔 승자가 될 수 있다.
닷컴 버블 붕괴는 끝이 아니다.
주식시장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다.
9·11까지 겹치면서 미국 증시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류지호는 정확하게 언제 쯤 고점을 회복하는지 알지 못한다.
레만브로스 사태가 터지기 전에 어느 정도 회복하긴 할 것 같다는 것 정도.
문제는 2008년에 또 다시 금융위기가 터지며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파산하고 그 여파로 세계 경제 위기를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미국 나스닥의 실질적인 고점 회복은 무려 13년이 걸리게 된다.
즉 이번에 사들인 주식들을 13년 동안 보유하고 있으면 다시 한 번 재산을 수십 배 불릴 수가 있다는 의미다.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손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명 ‘존버’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기간 다른 투자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으니까.
류지호는 개의치 않았다.
배당을 잘 주는 기업들로 더욱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짜 놨기에.
✻ ✻ ✻
기껏해야 괜찮은 흥행 감독이었던 강은석과 양성규, 아무리 잘 봐줘도 군소 영화사프로듀서에 지나지 않았던 차성재, 오성가의 직계 손녀이자 백설그룹이 DreamFactory와 합작을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희경 부회장.
이들은 90년대를 거쳐 충무로 파워맨들이 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이 몸집을 불려온 과정을 돌아보면 현재 위치가 단순한 행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양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벤처금융권 투자유치, 벤처기업과의 연합, 그룹 차원에서의 대규모 투자 등.
어떻게 몸집을 불렸는지 상관없이 한국 영화 산업을 선도하는 이들이다.
한국영화계를 움직이는 거물들이 인사동에서 모임을 가졌다.
차성재가 박건호를 대표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형님이 밥 한 번 먹자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간 우리가 격조했지요. 차 대표는 지난 전주영화제에서 보고 한달 만인 것 같습니다.”
이희경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 매번 존댓말을 하시니까 거리를 두시는 것 같아 속상해요.”
“허허. 누구에게나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거북해요?”
“조금이요.”
강은석이 끼어들었다.
“부회장님, 그러려니 해요. 이 형님은 옛날 배급업자할 때부터 그랬으니까.”
인사가 끝나자마자 양성규 감독이 대뜸 박건호에게 물었다.
“매니지먼트 CHAN과 ARAM까지... 실질적으로 가온그룹 계열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화사, 독립 프로덕션, 음반사, 기획사 등등. 미디어 관련 기업은 많지요. 양 감독도 알겠지만 바닥은 철저한 분업 아닙니까. 한 개 기업이 전부 다 주무르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희경이 양성규 대신 입을 열었다.
“JHO가 그렇잖아요. 제조업부터 미디어까지 다 하죠. 지금까지 한국에서 미디어 시장이 분리되어서 성장한 것은 규모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에요. 결코 불가능해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란 말이죠.”
말이 길어지자, 차성재가 장내를 정리했다.
“일단 식사하고 대화 나눕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행이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희경이 박건호 곁에 찰싹 붙어 열심히 입을 놀렸다.
“대표님은 지방배급판을 모두 꿰고 계시겠네요?”
“옛날에 같이 배급하던 동료들은 모두 업계를 떠나고 없어요. 지금까지 남아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극장을 가지고 있는 업주들 정도죠.”
“WaW가 초창기 직배망을 짤 때 그 분들 도움을 많이 받으셨겠어요.”
하하하.
순간 차성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강은석 역시 피식 입가에 웃음기를 묻혔다.
“....왜 요?”
“WaW가 지방으로 진출할 때 저 형님 여러 번 매 맞았어요. 지방배급업자들한테 모욕도 많이 당하셨을 겁니다. 형님 안 그랬어요?”
“매를 맞은 적이 없어요. 맞을 뻔한 적은 있어도...”
“으하하하. 그게 그거 아니요.”
사교성이 좋은 차성재로 인해 분위기는 꽤나 화기애애했다.
“형님이 지방극장하고 임대 계약하러 간다고 소문나면 업자들이 죄다 극장 앞에서 못 들어가게 막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뭘.”
“그 사람들도 먹고살 길이 막힐까봐 나름 치열했지요. 그런 면에서 박 회장님은 지방에 극장도 몇 개 가지고 계셨고, 밑으로 아우들이 많아서 조금 편했을 겁니다. 우리야 맨땅에서 시작해서 초창기에는 조금 힘들었죠.”
식사 내내 80~90년대 한국영화계를 추억했다.
이희경은 지루한 기색 없이 역전의 용사들의 대화를 들었다.
“식사도 다 했는데 이제 왜 보자고 했는지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요.”
박건호가 호로록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요 몇 년 한국영화계가 겉으로는 많은 성장을 하고 있지요? 모두가 실제 체감하고 있을 겁니다. 대기업이 철수하면서 제작비를 어디서 마련하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거야 우리 같은 영세 제작자들이나 그렇지. 형님은 다르지 않수?”
“그 부분은 겸손한 척 하지 않도록 하지요. 헌데 영화계 내적으로는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어요. 스크린쿼터 페지다 그랜드벨 어워즈다 영진위 사태다.... 우리 영화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자꾸 밖으로 나가서 충무로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요.”
차성재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언젠가 터질 일이었지 뭐. 곪고 곪은 고름이 이제야 터진 거요.”
“사람들이 그럽디다. 영화판 밥그릇 싸움은 관심도 없으니까 그 시간에 좀 좋은 영화나 만들라고.”
차성재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악습과 잘못된 관행을 더더욱 알려야지요. 언론이나 일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이 잘못된 정보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희경과 양성규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강은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불만은 드러냈다.
“그러한 비판의 화살을 영화계 내부로 돌려봅시다. 눈앞의 것만 보고 가면 매번 위기와 불안의 굴레를 벗지 못해요. 조직만 놓고 말하자면 제작가협회는 좀 반성해야 된다고 봅니다. 힘도 있고 많은 활동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곳인데,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사무실이 없어 유 대표가 차 트렁크에 현판을 싣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려요. 산업적인 핵심 조직이 돼야 하는데, 스스로 건사조차 못하니 그 꼴이 뭔가 싶어 안타깝지요.”
“회원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지지 않잖아요. 나 혼자 영화 잘 찍고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겁니다. 제작자뿐만 아니라 감독도 마찬가지에요. 힘을 모아야지.”
차성재가 은근슬쩍 강은석과 양성제를 끌어들였다.
듣기에 따라 자기 영화와 회사만 신경 쓰고 충무로 현안에 대해 나몰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책이 담긴 말이다.
- 작가의말
주인공 역시 중국 비즈니스 리스크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업은 몰라도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있어서는 치고 빠지기 전략을 구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도 그렇지만 주인공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소설 속 두 국가의 엔터테인먼트 갈라파고스화가 강화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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