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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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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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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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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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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스파이영화의 전통을 망치지 않기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Cristie 엔지니어들이 야외극장 영사시스템을 해체한 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류지호는 폐막식에 참석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한국에 올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가족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한국도 슬슬 벤처열풍이 지펴지고 있는 것 같네....’


미국에서는 벤처캐피탈을 받기 전 단계의 투자자를 ‘엔젤로 부른다.

이 용어는 1900년대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유래됐다.

작품은 좋지만 자금 부족으로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을 때, 작품성을 알아본 후원자가 돈을 대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이를 두고 공연관계자가 ‘엔젤의 도움으로 공연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됐다.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 창업 붐이 일자 창업 초기에 자금을 대주는 투자자들의 활동을 ‘엔젤투자’라고 칭하게 됐다.

류지호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엔젤’이다.

벤처캐피탈인 GARAM Ventures 투자와 관계없이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벤처기업에 초기자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벤처창업자들은 창업해서 벤처캐피털 투자를 받기 직전까지, 소위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엔젤투자자는 그 시기에 자금을 공급해 주는 기능을 한다.

대체로 벤처기업에 대한 ‘선구안’과 ‘육성’ 능력이 있는 이들이다.

‘묻지마 투자’를 하는 일반 개인투자자와 구분되어진다.

류지호는 한국 벤처업계에서도 큰 손이다.

가온투자파트너스라는 벤처캐피탈 회사가 있긴 하지만, 투자종목은 류지호 개인이 월등하게 많았다.

얼핏 보면 ‘묻지마 투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수십 개 벤처에 투자했는데, 그래봐야 실리콘밸리 투자의 백분지 일 수준도 안된다.

한남동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류지호에게 스펙트럼DVD 사장 우남혁이 긴급하게 면담요청을 해왔다.

류지호는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집으로 불러들였다.


“정리하자면.... PC게임 수입·유통업체를 인수하고 싶다 그거죠?”

“예. 의장님!”


올 초부터 대형컴퓨터 유통업체들의 잇단 부도한파로 국내 PC게임 업체들이 신제품 출시를 꺼리는 등 부도증후군이 확산되고 있다.

우남혁 사장은 그 중에서 게임만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업체를 사들이고 싶다고 건의했다.


“유통시장이 완전 망가질 정도입니까?”

“한국IPC, 멀티그램, 아프로만의 연쇄부도 와중에 PC게임만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네스코마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올 상반기 기준으로 중견업체 4개 사의 부도 피해액은 총 3,500억 원대, 피해업체는 1,000여개사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기업 계열사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요?”

“신제품 출시를 꺼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성영상사업단의 경우 올 상반기에만 8종류의 PC게임 출시를 보류했다가 여름부터 순차적으로 내고 있긴 합니다. 금성소프트, 선경 같은 곳들도 제품출시를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내놓는 상황입니다.”

“유통이 무너져서 시장에 물건이 풀리지 않는 상황입니까?”

“현재 PC게임 유통은 대규모 물량거래보다는 주로 매장을 찾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만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소 유통업체들이 예전과 달리 현금결제를 위주로 하면서 부실거래처에 대한 채권관리에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국내 중소 게임개발사들의 PC게임을 많이 취급해 왔던 네스코가 무너지면서 영세한 국산 게임업체들의 신제품 출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시장상황 때문에 묶여있는 신제품만도 국내외 게임을 합쳐 모두 30∼40여 종류에 이를 정도다.


“올 상반기 연쇄부도로 PC게임 유통망 자체가 와해됐습니다. 구조적으로 안정된 유통망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우남혁 사장이 게임 업계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향후 게임시장에서도 DVD 수요가 폭발할 터.

영화에 이어 게임시장까지 선도적으로 치고나가려는 계산이다.


“네스코의 영업력은 어느 정도이기에....?”

“주로 용산을 중심으로 공급을 하는데 대기업 제외하고 최정상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20억이면 인수가능하겠어요?”

“네스코 제외하고 한 곳 더 인수할 수 있습니다.”

“PC게임 유통망이 와해될 지경이라면서요? 운영자금은 어떻게 하고.....”

“용산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알겠어요. 오늘 중으로 비서실에서 조치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우남혁 사장이 힘찬 발걸음으로 한남동을 떠났다.

류지호는 비서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 게임업계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유통부문뿐만 아니라, 개발사들이 줄줄이 넘어지고 있다.


“김 실장, ‘지무신대전 네크론‘이란 게임 좀 구해 봐요.”

“국산 게임입니까?”

“아니다. 아예 미리내게임즈라는 개발사에서 출시한 게임 전부 구해오세요.”


의전사무 업무라고 쓰고 잡무를 주로 도맡아서 하고 있는 오영환이 용산으로 달려가 ‘그날이 오면’ 시리즈를 비롯해 최근 출시한 ‘지무신대전 네크론‘까지 7개 타이틀 12개 PC게임을 모조리 구입해 왔다.

그 사이 가온 의장비서실에서는 미리내게임즈에 대해 조사했다.


“뭐 이런 게임을 만들면서 한국 대표 게임사래.....”


가장 최신 게임타이틀 ‘지무신대전 네크론‘은 한국 최초의 3D SRPG게임을 표방했다.

RPG 요소는 거의 없고 전략 시뮬레이션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따를 정도로 전술 개념이 없으며 저해상도의 질 떨어지는 그래픽, 게임 진행이 불가능한 수준의 버그 투성이, 플레이 의욕을 뚝뚝 떨어트리는 불편한 인터페이스, 만들다 만 것 같은 스토리 진행 등 안 좋은 건 모두 갖춘 졸작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PC게임 개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시리즈로 게임시장을 주도했습니다. ‘지무신대전 네크론’은 회사 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개발하다 보니 10명도 채 안 되는 개발진으로 9개월 만에 제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게임의 유통을 맡았던 ‘코가’라는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대금을 회수하지 못한 ‘미리내게임즈’마저 연쇄 부도가 나는 사태에 이르게 한 치명적인 게임이다.

게임 완성도는 실망스러웠지만, 나름 판매량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게임유통사들의 연쇄부도와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이 게임을 마지막으로 미리내게임즈라는 회사는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류지호가 관심을 가지게 됐다.


“기술력과 개발력은 썩 괜찮다는 평가입니다. 게임 QA, 베타테스팅 같은 걸 도입한 것이나 한국 게임업체에서 보기 드문 조직과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코가가 부도나서 물린 대금이 얼마랍니까?”

“회사 존립을 위협할 만한 액수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온투자파트너스 유 대표에게 미리내게임즈 살려 놓으라고 하세요.”

“단순히 숨만 붙여놓는 수준입니까?”

“개발력이 있다면서요?”

“웹진과 게이머 평가가 대체로 그렇습니다.”

“21세기가 오기 전까지 정상화시키길 원해요. 가온투자파트너스가 직접 회사를 리뉴얼 하라고 하세요.”

“예.”


김우영 비서실장이 다른 보고서를 하나 류지호를 내밀었다.


“JHO 의장비서실에서 온 보고입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마침 한국 게임업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차에 Snowstorm Entertainment의 이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Helve Corporation이라는 게임개발사가 Snowstorm이 인수한 시에라와 게임 배급 계약을 체결했다.

바로 시작과 함께 쇠지렛대를 용감하게 휘둘러야 하는 게임 ‘하프라이프’다.


“IP를 시에라에 줬다고.....?”


류지호는 게임 소프트웨어 유통망인 ‘Valve‘는 알아도 그것을 서비스했던 개발사의 이력은 잘 몰랐다.

당연히 히트작인 ‘하프라이프’의 지적재산권(IP)을 시에라에 넘길 줄은 몰랐다.

‘하프라이프’ IP가 결국 Snowstorm에 귀속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배틀넷을 ‘Valve‘처럼 확장하는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하프라이프’ 지적재산권을 매개로 해서 Helve Corporation를 인수·합병할 수도 있다.


“꿩 먹고 알 먹기가 되는 건가?”


피식.


류지호가 실없이 웃었다.

욕심이 끝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있어요?”

“LA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이요?”

“<Remo : The Destroyer>의 스크립트 작업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류지호가 몸을 일으켜 한껏 기지개를 켰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맷은 뭐해요?”

“당분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랍니다.”

“브랫은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한 달 정도 더 체류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달씩이나....?”

“농장도 둘러본다고 합니다.”

“무슨 농장.....?”

“한국에도 기업형 농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몇 군데 있다고 합니다. 투자대상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됐어요. 파커가 투자하는 걸 따라가려면 우리 사업도 지장을 받아요.”

“예.”

“이틀 후 출국하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류지호는 한남동에서 가족과 하루를 보냈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강화도에 들러 외가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떠났으면 김포공항으로 가려고 했어.”

“뭐 때문에.....?”


가온웨딩의 심재우가 강화도로 찾아왔다.


“의논 겸 허락을 받을 게 있어서.”

“뭔데요?”

“누리여행사라고 알아?”


작년까지만 해도 대대적인 광고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단숨에 여행업계 상위권에 진입한 여행사다.


“그런데요?”

“이 회사 내부가 좀 복잡하긴 한데... 얼마 안 가서 고꾸라질 것 같아.”

“여행사 인수하시게요?”

“누리여행사가 광고도 빵빵하게 해왔고 나름 브랜드 네임이 있어. 경영진 물갈이 좀 하고 내부 단도리 좀 하면 괜찮을 것 같아. 무엇보다 누리여행사가 가진 랜드사가 탐이 나서 그래.”


랜드사는 여행사의 현지 하청업체 또는 해외 현지여행사 개념이다.


“결혼에 쓰는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잖아요. 해외신혼여행이 감소할 텐데.....”

“웨딩 사업부문을 완전히 수직계열화 하고 싶어.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웨딩스튜디오와 예식홀 임대만으로는 성장 한계가 있거든.”

“예식홀 프랜차이즈를 공격적으로 확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판단을 하셨네요?”

“경제위기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잖아.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이라도 오게 되면..... 결국 패키지 상품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데, 동남아를 중심으로 저렴한 패키지를 만들어 볼까 궁리 중이다.”

“가온웨딩 단독으로 가능해요?”

“응. 네가 허락하면 그쪽과 접촉해 보려고.”

“해보세요. 대신 정상화 정도로 멈춰야지 공격적 확장은 안 되는 거 아시죠?”

“알다마다.”


참고로 누리여행사는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는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IMF의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회사 대표마저 해외 도피를 해서 업계의 지탄을 받았다.

이후 몇몇 주주들이 회사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경영권을 둘러싼 소송 등이 이어지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사 대표자가 변경되는 등 계속해서 내부 갈등을 보이다 공중분해 됐던 비운의 여행사 중 하나였다.

여행업계에서 ‘누리‘라는 브랜드가치가 나름 탄탄했고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는 IMF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어려움이기 때문에 자금력이 탄탄하고 유관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는 가온웨딩이 인수하게 된다면 정상화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평가했다.


‘빅딜이 쉽게 성사되는 게 아니니까.’


아직까지는 자잘한 거래들이 맛보기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주)가온은 다온로펌과 함께 외환위기의 파고가 가장 높을 때를 대비해 다양한 인수합병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계획의 절반만 실현된다고 해도 (주)가온은 단숨에 기업집단 즉 대기업으로 발돋움 할 수가 있다.


✻ ✻ ✻


LA 벨에어로 돌아온 류지호를 배런 렌프로가 맞이했다.


“네가 이 시간에 왜....?”

“오늘 주말이거든!”


슥슥.


류지호가 앙탈을 부리는 배런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하지 마! 난 어린애가 아니야!”


지하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주자 틈날 때마다 찾아와 기타 연주를 하고 있는 배런 렌프로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류순호라는 좋은 기타 선생까지 있다.

그 어떤 놀이터보다 재밌는 공간이 류지호의 집 지하다.

사실 여자애들을 불러 함께 수영장에서 놀고 싶다.

이놈에 집주인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쳇.. 고자같으니라고!”

“혼잣말은 속으로 해.”


질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욕정을 불태우는 것보다 류순호에게 기타를 배우고 함께 합주를 하며 노는 것이 건전한 생활이다.

단 하나 우려스러운 것은 또래 친구가 거의 없다는 점 뿐.

류지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마스터! 집으로 돌아왔군요?”


뚱뚱한 50대 흑인 여성이 류지호에게 달려왔다.

가사도우미들의 책임자다.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린 적 없는 밝은 성격에 전형적인 흑인 아줌마다.

책임감도 강하다.

한인타운에서 한국음식을 손수 사다 식탁에 올릴 정도로 자상한 여인이다.

약간 수다스럽지만, 그것도 도우미들 사이에서나 그렇다.


“샤니스, 잘 지냈어요?”


류지호가 뚱뚱한 샤니스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가사도우미들의 책임자 샤니스 프레밍(Shanice Fleming)은 사우스센트럴 1호 청소년센터에서 인연을 맺었다.

외동딸이 UCLA에 입학하면서 류지호의 저택 입주 가사도우미가 됐다.


“재스(민)는 학교에 적응 잘하고 있대요?”

“기숙사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해.”

“곤란한 일 생기면 말릭과 의논하세요.”

“고마워. 모든 게 다.”

“내게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요. 샤니스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거죠.”

“뭘 준비할까? 식사? 차? 주스? 와인? 위스키?”

“샤워할 동안 아이스커피 부탁해요.”

“알겠어!”


류지호가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이스커피 한 잔과 쿠키가 준비되어 있다.

그 옆에는 밀봉된 서류봉투가 놓여있다.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류지호가 시원한 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후, 서류봉투의 밀봉을 뜯었다.

할리우드 형식으로 재본 된 종이뭉치 표지에 적혀있는 글자.


<Remo : The Destroyer>.

Written By Sean Black.


류지호의 첫 번째 할리우드 상업영화 시나리오다.


두근두근.


주책없이 가슴이 뛰었다.

과거로 돌아와 많은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느낌이 너무나 다르게 다가왔다.

5,000만 달러 예산 영화.

최소 1,500개 이상 스크린에서 첫 주를 시작하는 대작.

할리우드 시스템을 철저하게 따라야 하는 제약.

수백 명의 배우 및 스태프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데뷔.

류지호가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다.


“일단 진정하자. 릴렉스....”


평정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류지호는 많은 경험을 통해 깨우쳤다.

괜히 들떠서 작업을 서두르다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긍정적이지만 가볍게 않은.

매사 침착하고 진중함을 잃지 않게.


“후우웁.”


류지호는 일단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후우웁. 후아.


성난 심장을 진정시켰다.


“.....”


오라이언에서 모리스 메타보이를 영입할 때부터 기획했던 영화다.

JHO Pictures 최초의 프랜차이즈 시리즈가 될 수도 있다.

<Remo : The Destroyer>가 박스오피스 폭탄을 터트린다고 해서 회사가 망할 리 없다.

감독으로서의 류지호는 입장이 다르다.


‘아마 온 영화매체에서 집중포화를 때리겠지.’


션 블랙이 할리우드 A급 작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리셀웨폰>, <롱 키스 굿나잇>, <마지막 액션 영웅> 등의 고예산 영화 각본을 썼다.

문장의 기교나 이야기의 깊이를 따지자면 션 블랙보다 잘난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 할리우드다.

그럼에도 션 블랙을 첫 상업영화 작가로 불러온 것은 장르영화의 캐릭터를 다루는 능력이나, 할리우드 스타일의 각본을 제법 쓸 줄 알기 때문이다.

비록 연달아 두 편의 영화 흥행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 두 영화의 실패가 온전히 그의 각본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쨌든 그는 돈 버는 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작가다.

그렇다고 무작정 재미만 추구하고 깊이 없는 삼류 작품을 써 갈기지도 않는다.

적당한 현실 풍자를 작품 안에 심을 줄 안다.

나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줄도 아는 작가다.


‘지금까지 자기만족 영화를 찍었다면, 이 영화부터는 진짜 대중영화를 찍어야 하는 거야.’


들떠 있던 마음이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편으로 가지고 있는 영화적 기교들을 돌이켜 봤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본인이 찍었던 상업영화들의 과오를 되짚어 봤다.

그런 후에 이번 삶의 영화적 목표를 새겨봤다.

류지호의 호흡이 조금씩 깊어졌다.

그와 함께 눈빛이 심연처럼 깊어졌다.

마침내 류지호의 눈이 페이지에 고정되었다.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한 템포를 유지했다.


사락사락.


고요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 페이지를 읽고 난 후 책장을 넘기고.

또 한 페이지를 읽고 난 후 책장이 넘어가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


으드득.


류지호가 목을 가볍게 꺾으며 긴장을 풀었다.

이내 다시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읽기 시작하자, 때로 웃음도 삐죽 튀어나오고 신음도 흘러나왔다.

세 번째 읽을 때는 류지호의 손에 펜이 쥐어졌다.


“<REMO>의 리뉴얼이 제임스 본드와 잭 라이언 사이에 위치했으면 좋겠어.”


류지호는 션 블랙에게 실패한 오리지널 영화에서처럼 멍청하게 힘만 센 바보 캐릭터는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잭 라이언처럼 매우 지적이며 분석적일 필요는 없지만, 스파이 혹은 첩보원답게 기본적인 지능은 가져야 해.”


세계관도 진짜 피가 튀는 세상으로 바꾸자고 했다.

리얼 액션은 리얼 월드의 리얼 플롯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에도 지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그런 야망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야.”

“상업영화에 인문학을 넣으려고?”

“아직은 나와 관객 모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

“007은 아주 낙관적이고 동화적인 세계야. 관객은 그걸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고.”

“나도 그렇게 찍을 거야. 다만 냉전체제도 사라졌고, 점점 고도 정보화 시대로 향하고 있는 20세기 말에 과연 구태의연한 스파이 조직이 필요하냐는, 그런 질문을 해 볼 순 있지 않을까? 그 물음에 대해 영화 속 정보조직 사람들이 어떤 답을 할 것인가가 궁금하기도 하고.”

“답은 뻔한 것 아니겠어?”


션 블랙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뭐가 어쨌든 스파이는 필요해. 어떤 첩보위성이나 컴퓨터를 해킹하는 전문가도 직접 사지로 뛰어 들어가 얻어오는 정보보다 못할 테니까.”


<롱키스 굿 나잇>를 쓰면서 스파이 업계의 자문을 받았을 터.

션 블랙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션도 알겠지만, 현실의 스파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분석가들이야. 과거 냉전시대에는 현장 요원들이 은밀한 곳에서 서로 살인을 저질렀겠지만. 이젠 정보조직간 총격전을 벌이거나 미인계를 쓰거나 목숨을 걸고 적진에 몰래 잠입하는 일은 사라졌다고 봐. 지난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을 생각해봐. CNN이 전쟁을 생중계하는 세상이야. 냉전시대 통용되었던 스파이들의 비밀스러운 행보들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고민하는 제임스 본드를 원하는 거야?”

“그 반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레모 윌리엄스가 대적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름 사연이 있을까 혹은 살인이 정당한가 고민하는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레모 윌리엄스 역시 악당이 총을 쏜 다음 농담을 던지겠지. ‘또 쏴봐. 다음 총알도 쉽게 피해주지‘ 하는 것 같은.”

“총알 피하는 모습을 자주 사용하고 싶지 않다며?“

“난 레모 윌리엄스가 완성되지 않은 무술가이며 첩보원이었으면 좋겠어. 션은 <리셀웨폰>의 마틴 릭스를 창조했잖아. <롱 키스 굿나잇>에서는 사만다 케인이라는 주부와 찰리 발티모어라는 무시무시한 킬러를 동시에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었고.”

“레모 윌리엄스는 그들보다 훨씬 강력한데?”

“그래서 첨단무기와 장비는 가급적 동원하지 않았으면 해. 제임스 본드처럼 적진에 잠입해 들어갔지만, 판타지영웅처럼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드는 캐릭터.”

“그건 존 맥클레인 아닌가?”

“그는 수동적이잖아. 냉소적이고. 레모 윌리엄스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남자라니까. 그리고 케네디의 유훈을 잇는다는 것과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신념도 있고. 억지로 떠밀려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첩보원이란 직업에 대한 신념이 있지. 단지 고도화되었거나 신화적인 적에 홀로 맞서 싸우기 때문에 고되고 힘든 것뿐이고.”


조직에서 버림받은 것도(본 시리즈).

조직이 와해된 것도(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아니다.

홀로 고군분투하지만, 레모 윌리엄스는 결국 미국의 가치를 수호하는 영웅이다.


“무식하게 자살폭탄을 시도하는 생각 없는 테러범이 아닌 21세기형 지능 범죄와 머리 좋은 악당의 악행을 막아야 하지. 나의 주인공은.”

“션이 잘 할 수 있는 걸 해. 고전적 첩보원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고민은 내가 찾아볼 테니까.”


류지호는 <본> 시리즈나 고민하는 007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다.

스파이물이 가미된 세련된 액션 영화.

007 제임스 본드보다 화끈하고, 이단 헌트보다 조금 더 똑똑한.

레모 윌리엄스가 21세기형 상업영화 첩보원이 되길 기대했다.

물론 ‘미국 만세‘는 가급적 피할 생각이다.


‘쓰리쿠션으로 돌려 까면 또 몰라도....’


류지호가 실없이 킥킥 웃고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일단 리뷰를 써서 션과 잭에게 보내고.... 속도를 올려볼까?’


파바바바박!


류지호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문서의 여백이 빠르게 채워졌다.


‘그래도 올해 안에 시나리오가 나와서 다행이야. 프로듀서들이 오케이하면 해를 넘기기 전에 캐스팅을 할 수도 있겠어.’


류지호의 손가락이 엔터키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이것으로 오늘의 업무는 끝!”


류지호는 작업실 데스크톱의 전원을 껐다.

미니바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루프톱으로 올라갔다.

조금은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류지호에게는 부채바람보다 덜 시원했다.

까만 하늘, 그리고 저 멀리 LA시내 야경이 류지호의 시선에 담겼다.

캘리포니아의 가을이 깊어갈수록 <Remo : The Destroyer>의 시나리오도 섬세하게 다듬어졌다.


[D-Cinema로 할리우드에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지호 류가 이번에도 예상 밖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젊고 야심만만한 감독은 트라이-스텔라에서 <007 시리즈>를 재현하고 싶은 모양이다. 지난 86년 야심차게 제작되었던 <Remo : The Destroyer>의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박스오피스에서 재미를 보지 못해 프랜차이즈 시리즈화가 백지화 되었던 것을 끄집어 냈다. 지호 류는 새로운 작가진과 새로운 출연진으로 리뉴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편이 평단으로부터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음에도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부디 새로운 멤버들이 새로운 감독과 협력해서 스파이 영화의 전통을 망치지 않길 바래본다.]

- [단독] The Hollywood Reporter 찰스 로이드 팩 기자.


작가의말

습작에 없었던 업체가 또 등장했습니다. 미리내소프트웨어와 온누리여행사입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토탈 엔터테인먼트 부문도 보강이 될 것 같습니다. 더 큰 거래들이 몇 건 있습니다. 습작 때 많은 분들이 한국 사업규모를 작게 보시는 것 같아서(JHO와 비교해서 그렇긴 합니다만) 한국 기업도 글로벌 순위에 들 수 있을 정도로 키울 생각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도 더 찍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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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영화의 전통을 망치지 않기를..... +11 22.11.15 4,350 153 24쪽
334 우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6 22.11.14 4,384 144 26쪽
333 Big Shot. (5) +5 22.11.12 4,373 142 22쪽
332 Big Shot. (4) +6 22.11.12 4,155 135 26쪽
331 Big Shot. (3) +7 22.11.11 4,419 140 25쪽
330 Big Shot. (2) +16 22.11.10 4,418 14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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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3) +9 22.11.08 4,299 142 22쪽
327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2) +2 22.11.08 4,082 134 22쪽
326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1) +9 22.11.07 4,370 139 21쪽
325 사회생활은 인맥이야...! +9 22.11.05 4,502 138 26쪽
324 선택과 집중. (4) +9 22.11.04 4,479 139 22쪽
323 선택과 집중. (3) +10 22.11.03 4,377 149 22쪽
322 선택과 집중. (2) +7 22.11.02 4,743 148 24쪽
321 선택과 집중. (1) +5 22.11.01 4,609 14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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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3) +10 22.10.29 4,582 147 27쪽
318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2) +8 22.10.29 4,316 132 22쪽
317 아무 것도 안 해도 잘만 돌아간다. (1) +9 22.10.28 4,575 154 27쪽
316 Celebrity. (2) +8 22.10.27 4,541 149 28쪽
315 Celebrity. (1) +10 22.10.26 4,618 145 27쪽
314 지적인 액션영화는 망할 걸? +4 22.10.25 4,654 156 26쪽
313 엄마는 여한이 없어..... +11 22.10.24 4,586 145 29쪽
312 세계 최초의 D-Cinema! +5 22.10.22 4,525 155 25쪽
311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4) +4 22.10.21 4,473 144 24쪽
310 환경이 아닌 인식의 문제. (3) +11 22.10.20 4,382 16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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