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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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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연재수 :
3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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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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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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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25. 퀘스트 진행

DUMMY

*


다시 책상에 앉은 제냐는 책을 펴들었다.


잠깐 여관의 화장실에 들러 입가심을 하고, 세수를 한 뒤에 말이다.


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로멜리아 가의 부흥기가 다 지나고, 쇠락기와 그 마지막 전언들을 담는 내용들이다.


산슈카 왕국 역시 흥망성쇠 중 ‘망’을 다루는 시간대였고.


산슈카 제국의 번영을 질시했던 주변국들은 준비를 단단히 해서 대국을 침략했고, 이미 내부가 썩어들어가던 산슈카는 그 침략을 견딜만한 저력이 부족했다.

외부에서 충격이 들어옴과 동시에 내부의 곪아가던 문제들이 터져나오며 나라의 무너짐을 가속화했다.


귀족들이 산슈카의 이름 아래 모이기를 거부했고, 시민들도 제 살 길을 찾았다.

민족의 자긍심이나 역사, 혹은 그들 스스로의 충절을 지키기 원하는 소수의 집단들이 한 곳에 모여 결사 항전을 했다.


도리어 독기를 품은 소수 정예가 되자 이미 제국의 대부분을 거덜낸 주변국들 역시 얻을 것이 적어졌다.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흘려야 하는 피와, 그 조그마한 부위를 얻어 그들이 누릴 안락함을 비교했을 때 전자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제국은 초토화되었고, 그 땅 위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국적을 바꾸었다.


군인들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민간인들의 피해가 무자비한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물론, 중세와 그 이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시나리오 온라인 내이다보니, 야만의 시대다운 참상이 그대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집요하고 또 의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땅이건 사람이건, 안정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결국 자국의 이익으로 귀속되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것이 될 재물을 불태우는 인간이 없었다.


그런 논리에 의해서 착실하게, 또 역사적으로는 다소 조용하게.


산슈카 제국이 멸망했고, 몇 남지 않은 국토 내의 영지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산슈카 국, 산슈카 왕국이 형성되었다.


웅크린 사자.


산슈카의 번영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하며 또 시기가 오면 뛰쳐나갔던 충성스런 로멜리아 가문은 지금의 세슈칸을 비롯해 몇 개 영지의 영주로 바뀌었고.


가문의 저력과 용사들은 지난 전투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말미 즈음을 장식하는 전쟁이 ‘중부 아들란 평야 전투’였다.


세슈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무지 지역이 그 시기에는 풀이 자라 있는 초원이었고, 국경 인근까지 진격을 해 온 연합군들을 산슈카 국의 마지막 남은 용사들이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연합군의 수 만 대군 역시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결사항전을 하는 데다가 예상 외로 뛰어난 용맹함을 보이는 산슈카의 정예 부대의 기세에 질려 떠나버리고 만다.


몇 없는 토지를 마저 얻기 위해서 잔뜩 독이 오른 짐승의 숨을 끊을 자가 연합군에 없었던 탓이다.

전쟁이라는 건 어찌 되었든 기세 싸움인 면이 컸고, 임하는 각오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뒤집히기도 한다.

이미 얻고자 했던 것들을 대강 얻은 배부른 자들과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집과 땅, 아녀자와 아이를 지켜야 하는 늑대들이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말했듯 싸움은 기세였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아파하는 무른 살을 가졌다면 자신의 덩치가 얼마나 크든 작은 이빨 하나에도 맞서지 못하고 길을 돌아서 갈 테다.


역사책인지 동화책인지 소설책인지, 장르를 잘 알 수 없는 책에 상세하게 숫자마저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평야에서의 전투는 70,000과 12,000의 싸움이었다.


로멜리아 가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존 로멜리아가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홀로 수 백 이상의 적병을 베어 넘긴 전설적인 검사였고, 당시에 그가 입고 있던 갑옷이나 칼 등은 아직까지도 산슈카 왕국의 보물 중 하나로 어딘가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뛰어난 무장이나 혹은 대신들이 많이 나왔던 로멜리아 가문.

그 연대기를 읽으면서 제냐는 ‘아티팩트’ 쪽으로 생각을 하며 문장들을 뒤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게 제 구실을 하는 물건이며, 한 가문의 중흥이 시작될 만큼 대단한 의미와 위력을 가진 물건이라면 종류가 극히 제한된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이고, 게임 속의 스토리이니 아무래도 초상 스킬과 얽혀 있는 아티팩트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강력한 인챈트로 막대한 초상력과 내장된 초상 스킬이 있는 ‘아티팩트Artifact'는 여러 아이템들 중에서 늘 가장 귀중한 취급을 받고 고레벨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탐을 내는 물건이었다.


그 아이템에 걸려 있는 초상 스킬의 위력과 수준에 따라서 다시 등급이 나눠지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가치를 보장 받는다.


황야 지룡의 발톱 대거, 역시 열기를 띈다는 점에서 초상력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아티팩트라 분류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온전한 초상 스킬 하나의 분량이 들어갔다고 하는 아티팩트는 조금 더 복잡 다단한 술식이 내장된 것들이다.


칼날에서 열기를 띄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 열기를 제어해서 강력한 파이어 볼을 형성해낼 수 있다면 아티팩트의 일종이라고 취급받으리라.

열량을 그러모으는 것 역시 파이어 볼 스킬의 일부라고 볼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였다. 유저들이 논하는 아티팩트는 거기에 부여된 종류가 조금 더 완성된 스킬에 가까운, 그리고 만드는 데 많은 공이 드는 물건들이다.


같은 계열의 초상 스킬이라고 하더라도 스킬 등급에 따라 다르다. 일반, 희귀, 유일, 전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스킬이라 하더라도 스킬의 숙련도에 따라 위력은 천차만별이다. 1단계와 10단계는 거의 다른 스킬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위력적 차이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숙련도 최상급은 12단계로, 그랜드 마스터의 단계였다. 스킬을 익히면 가장 첫 단계는 물론 1단계로, ‘끔찍한Terrible’이라는 수식어로 표현되는 수준이었고.


일반 스킬이라 하더라도 마스터 즈음 되면 여느 상위 스킬 못지 않은 위력 보정이 있었다. 거기다 게이머 개인의 숙련도로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노하우가 상당하다면, 전체적인 전투력은 도리어 다량의 일반 스킬이 높은 숙련도로 있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결국 스킬이란 건 도구였고, 중요한 건 플레이에서 그 도구들을 게이머가 어떻게 다양하게 늘어놓고 골라 쓰느냐, 였으니.


인챈트에 들어가는 스킬 역시, NPC이든 게이머이든 사용자가 사용하는 스킬처럼 상태가 달랐다. 1단계의 파이어 볼이 들어갈 수도 있고, 12단계의 파이어 볼이 아이템에 삽입되어 기능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고등급, 고단계의 스킬이 내장된 것이 강력하다.


아티팩트에는 스킬 정보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초상력 배터리가 함께 들어가야 했는데, 그것들은 초상력- 곧 정신력 에너지를 담기 좋은 소재들로 만들어져 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세계 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물질들은 정신력 에너지를 담기에 좋다. 개중에서 더 뛰어난 것이 있었고, 아주 희소하며 남다른 효율을 자랑하는 것도 물론 있었다.


최상급의 아티팩트란 높은 수준의 제작 스킬을 가진 장인이 아이템을 만들고, 뛰어난 스킬과 인챈트 능력을 겸비한 인챈터가 스킬을 부여했고, 또 초상역학 적으로 봤을 때 가치 높은 소재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사락.


손 끝에서 느껴지는 탄탄한 종이의 질감이 있었다.


거칠하고, 변색되어 낡은 티가 났지만 오래 가는 재질로 지어진 듯 종이가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은 별로 없었다.

소재의 문제도 있었고 또 보존을 위한 특별한 초상 스킬이 걸린 물건일 지도 모른다.


제냐는 결국 그렇게 여러 상념을 하며, 또 나름의 추리를 하고 탐구를 하면서 책을 끝까지 다 보았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갔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간 부분을 오른 손가락으로 문질러 퀘스트 인터페이스 창을 켰다.


[‘로멜리아 가의 숨겨진 보물’ - 줄리앙 리스트로부터 건네 받은 책을 1회독 하시오. 1/1]


눈으로 주욱 읽어 내려가면서, 정독했다. 책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줄리앙을 비롯해 로멜리아 가의 인원들은 제냐가 데려간 병원에 들렀다가, 근처 고급 숙소에 묵고 있는 걸로 안다.

돈이 부족해 보이는 양반들은 아니었다. 몰락할 지경이라고는 하나 귀족이었고, 비상시 쓸 여유 자금 정도는 넉넉히 가진듯 했다.


별로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리고 세슈칸이라는 도시 내에서 은근한 위험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피하고 싶어도 다가오는 위험들은 있었고.


제냐가 보유하고 있던 여러 포션들을 무더기로 건네준 것이 그들의 마음의 안심이 조금은 되었을까.

AI에 불과한 NPC들이었지만, 이것이 ‘시나리오’라는 이름의 게임이었고 또 정교하게 만들어진 극이다 보니 몰입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관의 홀에서 일하던 똘망한 꼬맹이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소설을 보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의 문제였다.


누군가 지어 만든 인형이라 할 지라도, 그 너머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관에 공감한다면 마음은 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현실의 인간을 보더라도 싸늘한 심정을 느낄 수도 있는 게 세상이다.

늘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가치를 좇아 살아야, 간신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이었다.


1등의 등 뒤를 바라보고 달리는 주자의 한계가 언제나 2등이듯.

1등을 하기 위해선 그 너머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제냐는 퀘스트를 해나가면서 극에 몰입했다. 자신의 역할이었다.

살 곳을 찾아 도망쳐 온, 몰락한 귀족가의 후예들. 그리고 그들을 우연히 만난 세슈칸의 모험가. 선의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앞으로도 도와줄 용의가 있는 솜씨 좋은 검사.


그게 그가 들어간 상황이었고 맡은 바였다.


한 번 시작했으면 어쨌든 끝까지, 제대로 한다.


그게 인생이든 게임이든 제냐가 즐기는 법이었다. 끝은 보아야지 않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책을 다 읽었고 우려하던 대로 별다른 정보는 얻질 못했다.


다음 진행을 위해서는, 일단 줄리앙을 만나봐야 하리라.


독에 당했던 두 청년도 정신을 차렸고, 줄리앙 역시 돈을 내고 초상 스킬을 보유한 힐러에게 치료를 받아 병상에서 금방 일어난 것으로 안다.


그들이 경계를 하며 주의를 기울인다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퀘스트가 급전개 되지는 않으리라. 제냐 역시도 별 이유 없이 비극을 보는 걸 좋아하진 않았고.


그가 창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낮의 오후, 에서 시간이 조금 지났다. 여전히 해가 비쳤으나 구름이 꼈는지 약간 흐린 티가 난다.

저녁까진 시간이 남았지만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오버를 한다면 이른 저녁을 먹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줄리앙이 머무르는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내일은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다음 씬의 진행만 보고, 조금 더 플레이 해보다가 자러 가얄듯 했다.


*


“어서 오시게.”


방문을 열자 반기는 노인의 목소리가 힘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병상에서의 모습이었다.


줄리앙 리스트.


그가 그를 반겼다.


지금은 정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백발의 머리를 정갈하게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기름을 발랐는지 한 올이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다. 그 외의 차림새로 자신의 머리칼과 같이 정돈을 해두었고.

검은색을 기조로 삼고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와 행커치프가 있다. 양장의 소맷단 따위에 마감으로 금색의 선이 유려하게 자태를 뽐낸다.


넓은 호텔 방 안이었다.

지어진 지 연식이 꽤 되어보이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었는데, 그 상층부의 넓은 방 한 칸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방 내부에 다시 몇 개의 칸이 나누어져 있었고, 마치 가정집의 거실과 같이 있는 넓은 홀이 처음에 제냐를 맞이한 곳이었다.


줄리앙, 로멜리아 가의 두 아가씨, 그리고 마부 역할을 하다가 불량배 앞에선 독에 당해 쓰러졌던 두 청년.

다섯 사람이 그를 반겼다.


시간은 이른 저녁 즈음이었다. 해가 저물기까진 시간이 좀 남았다. 그럼에도 커튼을 쳐놓고 실내등으로 안을 밝히고 있었다. 검붉은 기가 살짝 도는 어두운 톤의 인테리어였다. 금색으로 약간의 화사함이나 따스함을 더하고.

짙은 색이었으나 음울함 보다는 고풍스러운 멋이 감도는 색깔의 방이다. 호텔 전체가 이런 식이었다. 부유층이나 귀족들이 머물 것 같은 숙소다.

제냐나 최태현도 이런 곳에 묵을 수는 있다.


다만 돈이 조금 쪼들리게 된다. 물약 값을 비롯해 다양하게 들어가는 소비를 대폭 줄여야 했다. 안전 지대에서 쉬며 HP와 컨디션을 회복하는 시간은 보통 로그 오프한 시간이다.

현실에서도 시간이 많이 남는 이들은 가끔 게임을 켜놓고 그 내부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정신만 연결되어 게임 내에 들어와있는 형국이었으니까, 바깥에서 제 몸을 편한 침대에 뉘여 놓고 게임에서도 숙면을 취한다면 사실상 자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자도 피로가 충분히 풀리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게임에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하는 괴짜들은 그런 짓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게임 캐릭터는 ‘안정’ 상태로 로그 오프를 하고 난 뒤, 게임 내부 시간으로 따져 흐른 시간만큼 제 몸의 컨디션을 되찾는다.

숙소에 체크 인을 하고 방 내부에서 로그아웃을 한 뒤, 숙박비를 미리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어오지 않다가 로그인을 한다면 밀린 숙박비와 함께 여관 주인의 닦달을 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평범한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숙소’는 그다지 중요한 컨텐츠가 아니었다. 현실의 꿈이 비련의 시나리오로 이어지듯 비련의 시나리오에서의 꿈은 다시 현실로 이어졌으니까.


HP와 컨디션 회복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기만 하면 된다.

이따금씩 하드한 플레이를 즐기는 매니아들은 훈련 받는 군사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 서바이벌을 하기도 한다.

그렇잖아도 목숨 한 번이 게임에서 부여한 기회의 전부인 서바이벌인데, 거기서 다시 서바이벌을 찾는다니 어지간한 인간들이었다.

‘모험가’의 기질이 강한 양반들이었고, 그런 특이한 행동을 하는 작자들은 대개 시스템에 의한 보상을 받아 다양한 특별 칭호나 희귀 스킬, 아이템들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잦다.


대부분은, 그렇게 모험을 감행하다가 정말 하나 뿐인 게임 라이프 코인Coin을 잃어버려 다시는 접속할 수 없게 되지만.


아주 옛날,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야외 콘솔 오락기에서 동전 하나만을 가지고 아슬아슬한 게임 클리어에 도전을 하던 그런 양상이었다.

대량 생산과 과소비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의외로 적절한 교훈을 주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제냐는 아드리안 로멜리아를 처다봤다.


그림같이 예쁘게 지어진 NPC가 그 커다란 눈망울을 온전히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어느 고급 목재를 가져다가 지었을 듯한 귀티 나는 침대의 위에 앉아서 말이다.

그 옆에 있는 의자에는 ‘헤슈나 로멜리아’, 성숙한 아가씨가 있었다. 침대 곁에 1인용의 등받이 목재 의자를 가져다두고 단아하게 앉아 있다. 여전한 드레스였지만, 이전에 본 것 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검은색과 에메랄드 빛이 섞여 있다. 품이 그렇게 크지 않고, 적당히 제 몸을 잘 감싸안는 스타일이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침착한 눈빛으로 제냐를 바라본다.


두 청년은 커다란 침대 양 옆으로 시립해 있었다. 한 명은 팔짱을 끼고, 다른 하나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어디 건달이라도 정리하러 온 것 같은 꼴이다. 좋게 말하면 기세가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위압적이었다. 두 청년은 자신들이 무력하게 당했으며 아가씨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후회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둘 다 몸은 멀쩡해 보였다.


하나는 짧은 머리가 삐죽이 튀어나온 백인, 제냐보다 키가 크고 푸른 눈동자였다. 머리는 갈색이다.

뒷짐을 지고 제냐의 시선에서 침대 오른 쪽에 있는 인물은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질끈 묶고 있었다. 포니 테일이었지만 귀엽지는 않다. 붉은 기가 도는 흑발에, 금빛 눈동자였다. 수염이 조금 묻어 나오고 다른 청년보다 나이가 있어 보였다. 다문 각진 턱에서 그의 다부진 성정이 유추되기도 한다.


회색 톤의 천 옷을 입고, 가죽 방호구를 걸쳤다. 허리춤 뒤켠에는 한 손검이 대각으로 매여 있었다. 뒷짐을 진 자세에서 예비 동작 없이 한 순간에 칼을 뽑아들어 앞으로 달려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세였다.


이제와서 제냐를 앞에 두고 그런 위용을 보여주어도 크게 쓸모는 없었지만.


그는 가장 앞서서 그를 맞고 있는 줄리앙을 다시 본다. 그는 홀의 가운데로 걸어 나오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제냐를 반겼다. 다섯 중에서 가장 사회 생활이 능한 부류처럼도 보인다.


방의 내부 구조는 다양한 인테리어로 지루하지 않게 가득 차 있었고, 탁자, 테이블, 응접용의 소파나 장식물들, 카펫 따위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그것이 거실이자 가장 큰 방으로 쓰이는 공간이며 양 옆으로 벽이 쳐져 있고, 반원 형의 상단으로 패인 구멍을 지나 다른 칸의 방으로 가는 모양이다.

통로가 되는 문의 윗단에는 내려서 시야를 막는 두터운 천이 있었고, 지금은 열어두었는지 둘둘 말려 위에 고정되어 있다.


노인, 줄리앙이 다시 말했다.


“제냐 공.”

“공이라니요.”


부담스러운 호칭에 제냐가 정정했다.


“제냐 킴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어르신.”


로멜리아 가의 법도도, 귀족가의 예식도 제냐는 잘 알지 못했다. 대강 영화나 소설 따위에서 본듯하게, 혹은 최대한 예의 바르고 불편하게 상대를 대하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퀘스트의 도중이었고, 죽을 위기에서 그가 구해준 이들에게 복잡하게 대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냥 그가 아는 대로의 예의 정도만 지킬 셈이다.

플레이어와 NPC라는 관계를 떠나서, 아쉬운 것은 저쪽이다.


제냐는 어디까지나 무보수에 선의로 그들을 돕고 있었으니.

신분제 사회의 의식을 빌미삼아 강짜를 부린다면 제냐 역시 튕겨내면 그만이었다.


“···예의 바른 젊은이로군.”


줄리앙이 빙긋 웃었다. 그리곤 그를 침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응접용의 소파로 안내했다. 제냐는 그 손길에 따라 가죽 소파에 앉았다.

푹신하게 몸이 그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거칠어 보이는 질감의 외견이었는데, 실제로 살갗이 닿으며 느껴진 건 아주 맨들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이다. 어느 짐승의 가죽을 잡아 벗겨 만들기라도 한 것인지.

독특한 질감에 앉았을 때 편하고 안락했다. 그대로 잠이라도 잔다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도록 누워 있으면 허리가 좀 아플까. 그 정도가 불만의 전부였다. 제냐는 고급스런 소파에 등을 푹 묻으며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그는 맞은 편에 앉았고, 청년 중 하나.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머리를 뒤로 길게 묶은 자가 그 근처로 다가와 섰다. 줄리앙이 입을 연다.


“덕분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네.”

“예. 그 뒷 배는 밝히지 못했지만 말이죠.”


골목에서의 이야기였다. 그들을 습격한 불량배들은 끝까지 그 배후를 토해내지 않았다. 토해낼만한 사람이라고 해 보아야, 두목인가 싶었던 가장 삐까뻔쩍한 방어구를 입은 한 놈 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제냐가 속전속결로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시켜 주었기에 대답할 입이 없었다.

등판이 전체가 구워져서 상당한 격통을 느꼈을 불량배의 우두머리는 굳건했다. 신의를 지키는 것인지, 두려운 계약이라도 당해서 어디 인질이라도 묶여 있는 것인지.


제냐가 스산하도록 굴며 실토하기를 종용했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했고, 어느 치안대에 넘겨보았자 뒷 일을 생각하자니 피곤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내주었다.


명백한 악업을 쌓고 있는 NPC나 플레이어를 상대로 전쟁이나 전투를 벌여 목숨을 뺏는다고 해도 해당하는 캐릭터에게 악업 수치가 쌓이지는 않는다.

시스템이 판단하는 것이었고, 대강의 기준은 현대 법률을 비련의 시나리오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한 다음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건 대강 상식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애매한 경우에야 조금 따져 볼 여지가 있겠지만은. 누가 보아도 습격 당했고 한 쪽이 일방적으로 핍박을 하고 있었다면야.


대단한 반전 드라마가 그 짧은 상황과 씬 속에 숨겨져 있어서 제냐의 선택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로 작정한 경우는 다행히 아니었고, 보여지는 그대로의 상황이었기에 망정이다.

몬스터들이 때때로 플레이어들을 악몽 속에 집어 던지기라도 하듯 교활함을 발휘해서 게임 오버로 이끌어가듯이, 가끔 ‘비련’의 시나리오 속 퀘스트와 상황들은 게임의 제목에 왜 그런 단어가 들어갔는지 알려주고자 한다는 듯 사람 골머리를 썩히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견으로는 한 쪽이 피해자이며 다른 쪽이 가해자처럼 보이는 상황에 캐릭터가 다가가게 만들어 놓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하고 나면 실상이 정 반대였다던가 말이다.

약간의 판타지를 가미한다면 그런 상황 설정이 조금 더 용이했다.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인물이 사실은 대단히 극악한 성정을 보유하고 있고, 물리적으로도 여러 명을 상대할 수 있는 끔찍한 괴물인 경우도 있고.

악마족의 일종, 몬스터 따위가 사람으로 변장을 했다던가- 혹은 혼돈, 악 성향을 쌓아서 몬스터 진영에 가담하기로 한 인류 캐릭터라던가.

진영전과 상관 없이 그저 개인이 싸이코패스같은 성격 설정을 타고나서 교묘하게 자신의 악의를 실천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지간하면, 게임이 제공하는 다양한 상황과 퀘스트들은 일정 나이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맞닥뜨리기 쉽도록 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퀘스트에 닿아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수만가지, 비유적으로 그런 단어를 들 수 있고 실제로 세어 본다면 무한에 가까울 수많은 요소들이 활개치는 이 난수의 바다 속에서 초 인공지능은 플레이어들에게 개별적인 서비스 제공을 해내고 있는 셈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오래도록 플레이하면서 게이머들이 밝혀 내고 있는 다양한 사실들은 놀라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제냐도 게임을 하면서, 비련의 시나리오에 관련된 기사나 정보들을 더욱 친근하게 접하게 된다. 그러며 자세한 내용을 파고들 때 드는 감정은 경이로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가 만들었는 지는 몰라도 참 잘 만들었다.


한국계의 어느 천재 개발자들이 국제 기업의 후원을 받아 세운 회사라고 하는데··· 한국에 그만한 천재 집단이 있었다는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귀추를 주목하는 집단이었으나 보안이 철저해서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정체를 캐내려 하는 모든 자들 중 가장 지독한 자들만큼이나 보안 능력이 뛰어난 게 다국적 대기업이었으니까.


게다가 한 개 사社의 후원이 아니라 여러 개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프로젝트라는 걸 들었다.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세상을 향해서 이롭게 쓰려고 한다면 돈 따위는 따라 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뭐··· 짐작하듯. 작힘 가의 사자가 아닐까 우리는 생각하고 있네.”

“그 쪽으로 결론이 나신 겁니까.”

“음······.”


줄리앙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침음성을 흘렸다. 제냐는 그를 흘긋 처다봤다.

옆에 자리한 두 아가씨나 남은 청년은 별다른 말이 없다.

벙어리들은 아니었다. 말들을 하는 건 제냐가 이미 들은 바 있었으니.


“아, 그리고.”


제냐는 인벤토리 속에 있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의 시야 우측 대각 방향에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왼 손등을 오른 손으로 가볍게 두 번 두드리는 식이다. 그리고 오른 손을 가져가 목록 인터페이스에서 퀘스트 아이템, 어쩌구 저쩌구에 대하여를 꺼내들었다.


손가락에 걸리듯 3D 세계로 넘어오는 목록 속의 사진이다. 허공에 떠 있는 평면창에서 아이템이 드러났다. “오.”


뒤에 선 놈이 입을 열었다. NPC들은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능력 중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스킬로 인식한다. 공간 계열 스킬은 초상 스킬 중 하나였고, 초상 스킬을 제대로 익히고 발휘하는 자들은 NPC 중에서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스킬을 훨씬 쉽게 빨리 익힌다. NPC들은 같은 조건을 가지더라도 조금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비련의 시나리오가 실제 삶이기에 그런 구석도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명목상의 수치, 경험의 횟수만 채우면 나머지는 게임의 스킬 시스템이 보정을 해준다.

쉽게 익히지만, 응용에 있어서는 NPC들에게 지는 경향이 컸다.


플레이어들 역시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스킬’의 진수를 맛보려면 NPC들이 그러하듯 그 도구의 기능과 작동 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고작 게임을 위해서 그렇게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뭐 종종 있었다. 어떤 게임이든 진지하게 대하고는 하는 관련 분야의 종사자들, 연구자들. 거기에 버금가는 하드한 플레이어들.


또 취미로 즐긴다고 하더라도 자기 류의 한 두가지 도구 정도는 손에 익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승부욕의 플레이어들도.


고 레벨, 중수 레벨 이상이 되고 세 자리수 부근이 되면 그런 손에 익은 도구의 가짓수가 전투의 향방을 가르게 되어 있었다.

전투력 피라미드에서 말단에 위치하는 초보 시절에는 적당히 해도 좋지만, NPC들 중에서도 강자라고 불리는 이들과 엮이게 되고, 난이도가 극악하게 올라가는 던젼이나 몬스터 따위를 상대할 무렵에는 그런 기교나 노하우가 없이는 게임 플레이가 어려웠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컨트롤 게임이었다. 사용자의 컨트롤 감각이 중요하다. 실제 몸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신경으로 하는 것이었으니. 사실 현실에서 손가락을 가지고 어떤 놀이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손재주가 좋고 신경이 발달하고, 운동 신경이 좋은 사람 등은 게임 내에서도 특출난 성과를 보이기 쉬웠다.


결국 MP, 라고 되어 있는 특수 에너지 역시 손 발의 말단을 까딱이고 미세하게 조정하는 정도의 감각으로 운용하는 일이었으니.

집중력이라는 면에서는 고레벨 플레이어나 시험 성적을 좋게 받는 공부하는 학생이나 비슷한 단면이 있을지 모른다.


줄리앙은 그런 제냐의 모습을 흔들림없이 지켜봤다.


제냐가 어쩌구 저쩌구에 대하여, 로멜리아 가와 산슈카 국의 역사에 대해 그려난 장대한 양장본 책 하나를 꺼내들어 그 손에 들었다. 건네는 책을 줄리앙이 받는다.


“일단 주신 책은 다 읽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별다른 정보는 찾지 못했어요.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일단 목적은··· 전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귀물을 찾으러 오신 거라고 했지요.

그 물건의 정체나 위치에 대해서는 아마 세슈칸의 현 영주인 작힘 백작이 알고 있을 것이고···.”

“맞네.”


줄리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든 책을 쓰다듬었다. 그 책의 겉면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고 본 건 착각일까. 순식간에 지나간 표정이었다.

죽은 주인을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집사, 줄리앙 리스트는 충성심이나 책임감이라 부를 것이 높은 노인이었다. ‘신의’라는 말로 포함되어 표현된다.


제냐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물건의 정체는 아직 알지 못하네만. 그래도 가주께서 말씀하신 일이니 허튼 것은 아니리라 확신하네. 용도도 모양도 위력도 모르지만 상당히 귀한 것으로,

우리는 작힘가가 그 보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우리를 배척하고 있다고 추정하네.

우습지도 않은 암살자들을 보낸 일도 그들이 배후일 거란 말이지.

멀리 로멜리아 영지로부터 세슈칸까지 여행길이었네만··· 그런 직접적인 변을 당한 건 세슈칸 내부에서가 처음이었네."

"그렇습니까···."


제냐가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사실은 눈에 띄는 일이었다. 정말로 로멜리아 가를 견제하려고 한다면 세슈칸에 닿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가장 깔끔할 것이다.

여러가지, 정보망이 활성화되지 않은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초상 스킬들의 존재는 충분히 첩보전이 가능케 만든다.

단순히 로멜리아 가솔들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랬는가.


로멜리아 가가 애초에 이렇게 궁지에 몰린 시작이 주변 영주들의 배신과 위협 때문이라고 하는데, 작힘 가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마차가 영지를 출발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식을 전해듣고 행동을 결정했을 수도 있지.

로멜리아 가를 적대하지만 영지 주변의 적대적인 귀족들과는 가는 길이 다른 놈들일 수도 있었다.


본 적도 없는 작힘 백작과 그 가신들이었지만 이미 '놈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로멜리아 가의 편에 서기로 결정을 했으니.


사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난이도의 퀘스트이기는 했다. 귀족가가 얽혀 있고, 그들의 총력이 드러날 수 있는 수준의 임무는.

제냐는 일반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강력했지만 아직 진짜 초인들에 비하면 애송이에 가까웠다.

오크나 다이어 울프, 곰들을 토벌하는 괴력의 소유자였지만 귀족가의 충성스런 기사들이 나선다면 그 앞에서도 같은 위용을 발휘할 수 없으리라.


그런 엘리트 정병들의 시작이 아마 제냐나 최태현과 같은 초인의 반열일 것이다.

개중에서 뛰어나고 손에 꼽는 자들은 아직 제냐가 닿지 못하는 수준의 강함을 가졌다.

단순히 기사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초상 스킬을 보유하고 사용하는 '술사'들 역시 그럴 테고.


그러나 뭐, 하는 만큼 하면 되지 않겠나. 정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게임 오버에 가까워지면 비상 탈출이라도 하면 될 테다. 제냐가 알기에 몇 번까지는 사용해먹을 수 있는 꼼수였다.


비쥬얼 그래픽을 유아용 모드로 바꿔버리고 일정 반경 이상이 전부 미취학 아동용 데포르메 비쥬얼로도 감당이 안될만한 장면으로 가득찬다면 플레이어는 비상 탈출이 가능했다.


그 외에도 느낌이 이상하면 먼저 도망이라도 치면 됐고. 느낄 새도 없이 죽음이 찾아온다면 뭐.


죽으면 될 테지.


라고 제냐는, 김서원은 생각했다.

고작 게임 오버에 불과하다. 잘 즐기던 취미 하나가 끝나는 건 아쉬울 수 있었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또 잘 안 될 수도 있다면 잘 될 수도 있었고.


퀘스트 정보 인터페이스에 그가 진행하고 있는 로멜리아 가의 숨겨진 보물은 고유 마을급 퀘스트이다.

게다가 한 가지 의뢰와 상황으로 끝나는 종류가 아닌 연이어서 동급의 퀘스트가 길게 진행되는 장기 퀘스트, 시리즈 형태의 물건.


고유 마을급 퀘스트의 모음으로 구성된 퀘스트라면 그 이상의 의뢰로 봐야 할 테다. 규모가 커져서 지역간으로 갈 지, 혹은 마을간 규모에서 전설로 갈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전설이라면 유사한 퀘스트가 따로 없는 시나리오 온라인 내의 단일 퀘스트 중에서도 남다른 특별함이 들어있음을 시사하는 수식어였다.

퀘스트의 보상 역시 그만큼 대단할 테고.


보상이 크다는 말은 리스크 역시 크다는 이야기였다. 제냐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되새겼다. 한번 사는 인생을 형상화한 것 같은 시나리오 온라인의 세계는 목숨이 하나 뿐이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조건이고 고생하는 세계라면, 몇 번 쯤은 목적을 위해 달려볼 필요도 있다.


“세슈칸의 영주이자 작힘 가의 현 가주인 작힘 백작은 뛰어난 사내야.”

“예.”


줄리앙의 말에 제냐가 기계적으로 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들을 수 밖에. 그가 귀를 기울인다.


“전 로멜리아 남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리고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네. 작힘 가문은 로멜리아 가문과 드물게 교류를 유지하던 대귀족 중 하나였어.

로멜리아가 예전의 위세와 전혀 다르게, 소귀족으로 전락한 이후에 산슈카의 주요 귀족들은 다들 등을 돌렸네만··· 가끔은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

영지를 방문한 적도 있고, 가주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아가씨들을 데리고 함께 이곳에 여행을 온 적도 몇 번 있었지.

초행길이 아니라는 점이, 갑작스러운 여행에도 다들 잘 따라온 이유이기도 하네.”

“예에······.”


노인의 말은 이것저것 들어두어서 나쁠 것 없었다. 어찌 되었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가 많다. 지식이나 경험, 거기서 빚어져 나오는 지혜의 흔적은 돈을 주고서라도 배워야 하는 종류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에게 줄리앙 리스트가 퀘스트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를 전달했다.


“직접 본 작힘 백작은 남자다운 사내였지. 덩치가 조금 크고, 사내다운 체격이었네. 무술에 능한 자이며 검술의 달인이라고 하지.

다만···.”

“다만?”


제냐가 물었다.


“호쾌하고 시원스런 구석이 많고, 우리 전 남작님께 늘 깍듯이 대했네. 대귀족답지 않게, 오랜 전통을 지닌 로멜리아 가를 존중하면서 대등한 귀족으로 대했지.

친절을 많이 베풀기도 했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늘 찝찝한 구석이 있던 자였어.”

“찝찝함이라고요.”

“그렇지. 찝찝함. 굳이 우리에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대귀족인데도 말이야. 늘 로멜리아 가를 방문하고 연을 맺으면서 먼저 연락을 해왔네. 우리와는 좋은 관계를 맺어봤자 그들이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정말로 신의와 역사를 존중하는 면에서, 산슈카의 정기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보기엔 동기가 조금 빈약했네. 작힘 백작은······”


줄리앙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이 말을 잇는 사이, 두 영애의 곁에 서 있던 짧은 머리칼의 친구가 수통과 컵을 근처 탁자에서 가져와 내려놓았다.

줄리앙이 수통의 물을 제 앞에 놓인 컵에 따라 잠시 목을 축였다.

흰 수염이 묻은 턱이 그러고 다시 움직여 그 위가 말을 뱉었다.


“내가 보기에 그다지 ‘정신’에 관심이 없는 자였거든.”

“정신이라고요.”

“그래, 정신. 산슈카의 정신. 중부 대륙에서 가장 고국古國인 자국의 역사를 존중한다거나, 애국심이 뛰어나다거나. 산슈카의 명맥을 이어오는 오랜 전통과 집단을 지키고자 한다거나.

별로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어 보였네. 그런 일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별다른 목적 의식도 없이 그런 대귀족이 로멜리아 가에 계속해서 연을 맺으려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

가신된 자의 입으로 감히 이런 말을 내뱉기가 저어되지만··· 로멜리아 남작 가는 정말로 얻을 것이 없거든. 그 자의 입장에서는 말일세. 요랜 역사를 증명하는 가보들이 있다지만 골동품에 지나지 않아. 진실로 위력적인 것들은 가문의 쇠락기에 전부 어딘가로 팔려가거나, 사라졌지.


돈도, 사람도, 영토도 세슈칸과 인접한 몇 개 도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작힘 백작에 비한다면 보잘 것이 없네.

로멜리아 가의 재산이나 땅을 탐내는 무리들은 그 근처의 저열한 소귀족들의 경우이고.

작힘 가는 이야기가 다르지.


그래서,”


후룹.


줄리앙이 다시금 목을 축였다.


“도리어 전 남작님께서 말씀하신 그 숨겨진 가보의 존재에 대해서 점점 확신하게 된다네. 현실적으로 강력한 위력을 지닌 고위 아티팩트나, 어떤 증표 따위가 있어서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그렇게 구는 걸테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찾아오자 손을 쓰고 있는 것이고.

가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남은······”


줄리앙이 침대 부근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빛내고 있는 두 아가씨가 그를 마주 보았다. 줄리앙은 빙긋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maria-orlova-XpSxazz9p2Y-unsplash.jpg


작가의말

엄.

형사이야기도 써야 하고...

뭐 쓸 건 많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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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 메리골드 23.07.07 39 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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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2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8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7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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