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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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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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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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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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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14. 멧돼지

DUMMY

오크Ork에는 종류가 많았다.


서양, 유럽권의 설화에 나타나는 악마의 일종이 모티브가 된 가상의 생물의 이름이었다. 20세기에 쓰여진, 이후로 정립된 수많은 판타지 세계관의 토대가 된 톨킨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한다.

J.R.R.톨킨이 만들었고, 그의 작품 내에서는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악마적 보스의 휘하에서 일하는 병사들로 나타났다.


그런 문화적 자양분이 뿌려진 이후에 자라나 판타지스런 장르물들을 만들어낸 이들에 의해서 무수하게 많이 되씹히며 사용되고 또 변형된 무언가이기도 하다.


가상의 종족으로 설정된 저 생물은 때론 이성이 없는 몬스터로 나오기도 하고, 때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류의 다른 면으로 나오기도 하며 어쨌든 판타지 창작물의 소재로서 많이 다루어졌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차용되어 설정된 '오크Ork'는 이성이 없는 괴물로서의 오크였다. 그 근원이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악마적 존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적절한 비유이긴 하다.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적대적 존재들은 대부분 괴물이었으며, 그것들은 세계관 내에서 영혼을 가지지 못한다.

이지가 없는 자연물이며, 본능적 정신과 감각 정도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고도의 지능을 가진 짐승들은 똑똑하게 굴며 테이밍 역시 가능은 하지만. 인류로서의 격을 그들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간혹 다른 형태의 인류로서 등장하는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다. 황인종이나, 흑인종과 같이 인류 중 차이점을 가졌다는 논리였다.

물론 현실의 자연계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변화와 특징들이 많았지만, '판타지 세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현실이 아닌 어떤 비유의 세상이라는 점에서 용인된다.


엘프, 블러디 레드 포레스티안. 하이 오크. 씨 피플, 윙 헤버, 드워프, 인간.

그 외에도 '역할극'이라 할 수 있는 롤플레잉 내에서 다양한 시나리오의 배우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여러 플레이어블playable 종족들이 있었다.


게임 외적으로 커뮤니티에서 유저들이 파악한 정보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종족의 가짓수만 열 세가지였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공략 자료 외의 플레이어블 종족이 몇 개가 더 있을 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마주할 지도 몰랐다. 본질적으로 비련의 시나리오에 드러나는 다양한 이종족들은 인간의 변형이었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


뭐 어쨌든, '하이 오크'라고 따로 분류되어 있는 플레이어블 종족이 아닌 일반적인 오크들은 모두 몬스터의 일종이었다.


인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플레이어블이 아닌 NPC들은 주체적으로 퀘스트를 주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퀘스트의 조건이나 상황으로서 기능할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예컨데 '오크 열 마리를 성공적으로 사냥하시오'의 조건으로서 말이다.


그 객체로서의 오크들은 피부색이나 크기 따위로 갈리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보통 오크의 형상을 '돼지'의 머리에 인간과 비슷한 이족보행의 몸뚱이를 가진 존재로 묘사하니만큼, 돼지의 종류에 따라 갈라지기도 했다.


회색빛에 아주 질긴 가죽을 가진 그레이 오크가 평화의 숲 따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종류였다.

대체로 성인 남성의 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놈들이었고, 이족보행 식으로 생긴 몬스터들이 그러하듯 아주 교활했다.


어디로부터 온 지 모를 헤진 갑옷 따위를 입고 창검을 들고 도구로 썼다.

무리를 짓기도 했고, 나름의 기초적인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 외에 '브라운 오크', 갈색 오크로 불리는 것들은 멧돼지나 비슷한 형상이었다. 짙은 갈색 가죽을 가지고 있었고, 터럭도 군데군데 붙어있는 꼴이다.

회색 오크들보다 몸집이 한 배 반은 더 컸고, 그 체구에서 나오는 강력한 근력은 초보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기도 했다.


키만 하더라도 가장 작은 것이 2m에서 2m 50cm정도가 되었고 총체적인 부피를 생각하면 수치보다 훨씬 막강한 위압감을 가진 거구였다.


그 다음, 필드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종류 중 가장 강력한 것들이 ‘레드 오크’, 붉은 오크였다. 갈색에서 친다면 훨씬 더 밝아진 톤이었으나 탁한 불길처럼 짙은 빨간색의 가죽을 가진 오크들이었다.


그 키는 가장 작은 개체도 2.5m를 넘었고, 큰 것들은 3m이상의 거체를 드러내며 숲 속 따위를 활보한다.

혹은 사막에도 부락을 만들어 지내고 다양한 짐승이나 몬스터, 인류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족속들이었다.


위로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중량감이 풍부하게 커지는 변화였고, 그 어금니는 마치 송곳처럼 튀어나와 턱 아래까지 날카로움을 자랑했다. 그 짙은 가죽의 색깔과 같은 동공을 오크들은 가지고 있었고, 붉은 오크는 마치 미친 사람이나 짐승의 그것처럼 빨간 눈동자를 가졌다.

깊이 패인 짐승의 주름과 어지간한 날로는 상처도 잘 나지 않는 붉은 외피.

그 위에 노략질을 해서 얻은 듯 짝이 맞지 않는 갑옷 따위를 걸치고 쇠나 나무, 혹은 바위 몽둥이 따위를 휘둘렀다.

그만한 거체에 어울리는 무기가 많지 않았기에, 조금 더 무기나 방어구의 질은 조악하고 떨어지는 편이었다.


대개 집단 생활을 하곤 하는 오크들은 교활한 편이었고, 초보 플레이어가 잘못 사냥을 한다면 도리어 그 무리에 둘러 싸여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게임 오버를 당하는 봉변이 있을 수 있었다.

어지간한 공포 영화보다 더한 스릴일 것이었다. 게임에 몰입하고 그 공포감을 느껴보려 한다면 말이다.


지나친 스릴을 자제하기 위해서 시스템 적으로 탈출 제도가 있기는 했다. 혐오스런 그래픽을 데포르메 시킨다거나, 혹은 게임 오버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로그 아웃을 하는 시스템 말이다.

전자의 것은 연령대가 어린 플레이어들이 자주 사용하는 모드mod였고, 후자는 스스로 게임 오버를 선택하는 것으로 전투 중에 사용한다면 게임 오버로 간주되어 다시는 게임에 접속할 수 없었다.


제냐는 후자의 선택지를 제 손으로 실행할 생각은 전혀 없기는 했다. 공포스러워봐야, 조금 둔한 통각을 비롯해 게임임을 인식하고 난다면 그저 입체감 있는 스릴러 영화일 뿐이었다.

본질적으로 수용하는 영상물 따위의 정보들이 사람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일은 아니었다. 사람의 선택은 그 자신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태도로 늘 영화나, 대중 매체에서의 작품들을 보아왔던 그이다.


비련의 시나리오가 오감을 구현하는 대단한 게임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건 게임이었고, 그는 제냐 킴으로 플레이하지만 그건 김서원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그에겐 없었다. 이 게임 내의 세계 역시.


세계가 거짓이라면 그로부터 파생되는 공포감感 혹은 공포 역시 거짓말이다. 간단한 논리였다. 공포 영화를 볼 때 저것이 얼마나 조잡한 트릭으로 이루어지고 만들어진 영상물인가를 파악하는 시점을 들이댄다면 그것이 표현하는 공포의 연출 역시 어느 정도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붉은 오크는 필드 내에 서식지가 플레이어들, 그리고 대륙에서 살아가듯 움직이는 NPC들에게 잘 알려진 몬스터였다. 회색 오크나 갈색 오크 역시 마찬가지였고. 만약 그러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찾아가 사냥을 시도할 수 있었다. 개체수 역시 붉은 오크가 상대적으로 가장 적기는 하지만 플레이어 여럿이 동시에 퀘스트를 진행하는 상황에도 별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충분한 수가 있었고 리젠(Regeneration, n부활. 게임 내에서 몬스터 따위가 죽으면, 일정 시간 후 게임 내 개체수 유지를 위해 새로운 개체로 추가되는 것)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 개의 부락을 전멸시키고 수십이 넘는 붉은 오크를 쳐죽인다고 하더라도 게임 시간으로 하룻밤을 지난다면 아마 다시 생겨날 것이다.

이것이 비련의 시나리오의 ‘게임성’ 부분이었는데, 가끔 특별한 퀘스트나 스토리가 엮여 있을 땐 그 시나리오의 연출과 현실성을 위해 리젠이 늦어질 수도 있었다.


어떤 NPC인류의 부탁으로 오크 무리를 해치워야 그들의 사연이 해결이 되는 경우라면, 해당하는 몬스터들은 사라진 뒤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오랜 시간이 리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었다.


제냐는 지금 그런 퀘스트를 위해서 걸어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배경은, 자주 그렇듯 숲 속이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는 대륙에는 온갖 지형과 기후가 있었다. 열사의 사막, 광야, 그리고 바다처럼 거대한 크기의 구덩이에 담수가 담긴 호수나, 혹은 지중해. 대륙의 변두리로 나간다면 끝도 없이 펼쳐진 대해의 물결 역시 마주할 수 있었고 북쪽 끝으로 간다면 혹한의 땅 역시 존재한다.


험준한 산맥과 지구의 그랜드 캐니언을 본따 만든 듯한 복잡한 대협곡 역시 있었고, 천국을 묘사하는 듯 아름답게 꾸며진 초원과 동산도 있었다.


그런 다양한 기후와 지형 중에서 제냐가 겪은 건 아직 많지 않다. ‘숲’은 아직 개발이 덜 이루어진 대륙 ‘콘란드Konland'에서 가장 흔하게 플레이어들이 겪을 수 있는 필드의 유형이었다. 숲이나, 산 말이다.


또한 짐승과 함께 그런 숲의 심처에 숨은 몬스터들이야말로 초 중반 플레이 구간의 유저들이 가장 활발하게 사냥하는 놈들의 종류였고.


피스 시市 근처의 숲은 아니었다. 평화의 숲 옆 도시, 라고 이름이 붙을만큼 유명한 평화의 숲은 게임을 금방 시작하는 유저들의 경험치를 위한 아주 중요한 맵이었으나 더 이상 제냐가 잡을만한 놈은 없었다.


20대 중반의 레벨이었지만 스텟만 따진다면 후반, 혹은 30대 정도의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스킬도 가짓수가 제법 되었고 중요한 건 그 스킬들이 연계가 훌륭한 종류라는 말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경험을 값진 것으로 취급한다. 어느 정도의 노동과 경험을 스스로 찾아서 겪는다면, 게임의 시스템은 그 행위 하나하나에 보상을 걸어 스킬이나 경험치로 되돌려준다.


즉,


굳이 일부러 이상하고 어려운 방식을 써서 혼자만의 플레이를 고수하는 이들은 유니크 스킬을 얻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 사서 고생을 하는 이들에게 있는 혜택이다.


물론 그런 길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언제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것이 법칙이니까. 더 많은 시간과 고된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은 약간의 특별함을 요구했다. 혼자서 적은 데미지 수치로 체력이 높은 몹을 잡는다거나, 하는 그런 방식은 바위에 물방울로 구멍을 내듯한 지루한 시간을 견딜만큼의 인내심이 있어야 했다.

또한 그런 지루한 방식이 작동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센스가 필요했고. 어려운 동작과 위업을 해내면 그 이후에 스킬이 따라 붙게끔 되어 있지만 최초의 한 번은 스스로 완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이 다소 둔탁한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저분한 성공이라 할 지라도, 한 번은 해내야 한다.

장인의 길을 유도하는 지도 몰랐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플레이어들에게. 혹은 그런 길을 갈 수 있도록 연습을 시켜주는 것일지도 몰랐고.


김서원은 마침 그런 성격을 가진 인간이었다. 혼자만의 경험을 해보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굳이 골라서 사서 고생을 해보는 일도 좋아했다. 그것이 무슨 해악으로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종류가 아니라면 말이다.

시간 낭비나 헤매임은 오히려 삶에서 기쁜 것일지도 모른다.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어쨌건, 제냐는 게임에서 사서 고생을 했고, 또 기꺼이 해냈다. 플레이의 초반에 해냈던 그런 방식은 사실 이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고수‘라고 불리는 인종들이 해대던 방식이기도 하다.

공략법이라는 게 아직 정립이 되지 않고 커뮤니티에 별다른 정보가 퍼지지 않았을 때 공략법을 만들어냈던 이들은 별에 별 루트로 자신의 캐릭터를 육성했다.


그 맵을 뚫어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성은 시나리오 온라인 내부에서 그대로 무언가의 보상으로 환산되었다.


남들과 다른 그 특이성과 자신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던 우연의 결과들에 대해, 고수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은 딱히 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내놓는 정보들은 그런 행위로 인해 얻은 부과적인 결과물들이고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정보들은 굳이 공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특이한 인간들은 있었지만, 개중에서도 고된 경험을 하는 지루한 구간을 이겨낼만한 재주가 있거나 인내력이 있는 자들은 소수였다.

그런 자들은 레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얻곤 하는데, 제냐는 그런 쪽이었고


같이 숲 길을 걷고 있는 개멋진나 최는 그냥 공략법 대로의 육성법을 거쳐서 적절한 전투력을 얻은 편이었다.


그가 말했다.


“제냐 킴 님.”

“왜 그러시죠.”


숲 길을 사이 좋게 걸어가고 있는 두 사내의 발걸음이 제법 빠르다. 지겹도록 숲 안에서 사냥을 하고 숙식을 해야 하는 초보자 존을 통과한 이들은 대개 ’숲 걸음‘이라는 스킬을 얻게 된다. 복잡한 지형 구조에서 입체적인 맵을 이해하고 조금 더 빠르고 가볍게 이동하는 스킬이었다.

굳이 숲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온갖 파편이 떨어져서 폐허가 되어버린 유적지같은 데에서도 유용하다. 숲을 연상시킬만한 난해함이 있는 지형에서 대개 작동한다.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스킬이 있으면 조금 더 능숙하고 또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열량과 스테미나를 소모하게 되는데, 숲 걸음이 있다면 나무 뿌리를 피하고 나뭇가지에 고개를 숙여 가며 번거롭게 걷는 와중에도 체력 소모가 조금 덜하게 된다.


둘이 걷고 있는 시간은 오후였다. 게임 내에서의 시간은 변동적이다. 그것이 딱히 변하지는 않지만, 거대한 대륙을 모티브로 하는 세계관은 자신이 있는 위치에 따라서 시간이 변하게 되어 있었다.

중부 지역에 속하는 세슈칸 근처가 그들이 있는 곳이었고, 그곳은 아직 시작지였던 피스와 시차가 있지는 않았다.


리얼 타임과의 차이는 꽤 난다. 5시간 정도가 빨랐고, 지금은 게임 시간으로 점심이 지난 한낮이다. 여기서 중부 지역과 비교 대상이 되는 ’리얼 타임Real-Time'은 김서원이 있는 한국의 시간이었다.

개멋진나 최 역시 한국인이었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현실의 시간으로 따지면 둘은 저녁을 먹고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할 즈음에 만난 셈이었다. 숲 위에서 빛나고 있는 햇빛은 아주 쨍쨍했지만.


“뭔 짓거리를 하셨길래 그렇게 강하신 겁니까.”


개멋진나 최, 현실의 이름으로 최태현이 물었다. 그는 회색빛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였다.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미남자들이 그러하듯이, 곱게 기른 장발이 등허리까지 늘어진다. 보통 그런 튀는 스타일을 하고 어울리는 일이 어려웠는데, 최 씨는 나름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뚜렷한 편이라서 위화감이 적은 편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여전히 다양한 경갑옷 위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아래에도 움직임에 크게 방해가 없는 가벼운 천 재질의 옷들이었고. 팔목이나 발목 등 소매는 끈 같은 것으로 매듭을 지어 묶어 자락이 휘날리지 않게 고정해 두었다.

소매를 묶은 검은 끈은 몇 바퀴나 손발목을 돌려 감은 것으로 아주 튼튼한 재질에 잘 끊어지지도 않는다. 여차할 때는 나름의 방호용으로도 써먹을 수 있었고, 잘 끊어지지 않는 끈이라는 건 또 다용도로 쓰기 좋은 도구였다.


최 씨의 클래스(Class, RPG게임 등에서 직업군을 뜻하기도 함)는 굳이 따진다면 레인저라고 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정해진 클래스 명 따위는 없었으나 플레이어들이 플레이를 하면서 어느 정도 공식화된 이름들은 있다.

게임사 등에서 정해준 이름은 아니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다양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세계관에서 NPC들이 하는 말이나, 플레이어들이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붙여진 것들이다.


레인저는 흔히 국경같은 일정한 경계 지역을 돌아 다니면서 독립적으로 임무도 수행할 수 있는 수비대, 수색대원들을 뜻했다.

그런 이들의 직업적인 고유 능력과 비슷한 스킬과 전투 양상을 보이는 직업군이 레인저였다.


넓은 지역과 범위를 날랜 기동성으로 오가며, 근거리와 원거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타격전을 벌이고 적을 제압하는 신출귀몰한 클래스.

게릴라 전에 특화된 자들로 순발력과 근력이 골고루 필요하고 다양한 무기와 도구들을 다룬다.

결국 제냐가 추구하는 게임 내의 전투 방식과도 많이 닮은 클래스였다. 제냐도 레인저의 일종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잡다한 옵션들이 있었지만.


일단 최태현, 개멋진나 최는 순수한 초상 스킬을 주 공격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다. 순수한 초상 스킬은, ‘마법’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었고, 곧 제냐가 사용하는 파이어 볼과 같은 스킬들을 말했다.

물리 계열의 스탯을 찍고 스킬을 사용하는 이들도 정신력 스탯을 사용해 초상 스킬을 발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리적 도구의 공격력을 증가시켜주는 방식의 스킬이었다.


최태현은 레인저로서 활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그 외에 다양한 투척류 암기들을 써먹기도 했고. 거리가 멀다면 화살을 쏘아 갈겼고, 중근거리에선 암기를 던졌다. 첫만남에 제냐 킴의 팔뚝에 도끼를 날려 박히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근거리에서는 폭이 좁은 소검小劍을 사용해 상대의 공격을 흘리며 틈을 보았다. 도끼 역시 던지지 않고 휘두르는 용도로도 충분히 능숙하게 다루기는 했다.

그 물건을 던져서 원하는 위치에 맞출 정도의 손재주와 익숙함이라면 당연히 가까이서 휘두르는 것 역시 꽤 한다는 의미였다.


궁술, 박투술, 단검술, 부斧술(도끼술), 투척술 등을 다양하게 익혀서 물리 계열의 스킬과 근력으로 상대를 부수는 게 그의 전투 방식이었다.


레인저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는 단발식, 혹은 잘해야 두 세 번의 연발식 총을 쓰는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최태현은 궁술까지만 배웠다.

중세 정도의 시대를 모티브로 하는 게임 내에서 총은 지나친 오버 파워였으므로, 다양한 초상력 근거의 공학이 발달한 세계지만 기관총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다만 두 세 번의 총탄을 연사하는 것까지는 가능했는데, 아주 값이 비싸고 구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초보자들이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거기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스킬들이 붙어야 중간 레벨 이후의 플레이에서 체력이 높은 몬스터들을 상대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진입 장벽이 높은 클래스라고 할 수 있었다.


총을 다루는 레인저, 총사銃士는 말이다.


단가가 높고 소모품이 많이 드는 도구를 주로 쓰는 클래스를 하려면 결국 돈이 많이 들게 마련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또 고레벨일 필요가 있었다.


최 씨는 현재까지는 궁술만 부지런히 익히고 있다.


그런 최 씨였으나 스텟은 제냐에 비해 뒤쳐졌다. 가장 높은 순발력이 27이었고, 나머지가 20초, 중반 정도. 정신 계열의 스텟들은 전부 10대 초중반을 기록한다. 그 또한 나름대로 순발력을 20대 후반까지 끌어올린 것이 시간을 투자해서 만들어 낸 성과였는데, 제냐는 물리 계열의 스텟들이 모두 20대 후반이니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만나기 전에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라면 그의 패배이다.


게임 내부에서 전투라는 건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으로 단순 스텟이 결과를 좌우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10번 싸워서 7번 정도의 결과를 가져갈 정도는 된다. 제냐가 정말 어지간히 전투에 재능이 없지 않고서는.

그 외에 스킬과 아이템 등 변수가 많기는 하지만, 최 씨가 하는 것들을 제냐라고 못할 일은 없었다. 대개가 동등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면 결국 눈에 보이는 수치가 높은 쪽이 이기기 쉽다. 그건 사실이었다.


클래스 적인 상성이 있기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제냐와 최 군은 비슷한 전투 스타일을 가졌다. 단순하게 수준이 높은 쪽이 이긴다는 말이었다.


“어···. 글쎄요. 몰라요. 별 거 안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 따위 스텟이에요. 20대 후반은 보통 30렙Lev(el)넘어서 도달하는 거 압니까? 저도 순발력 하나 찍느라고 일부러 훈련을 겁나 돌았는데?”

“음··· 뻘짓 많이 하긴 했죠.”

“뻘짓이라··· 무서울 정도로 했나 보군요.”

“단검 하나 들고 황야 지룡 마라톤 사냥같은 거 하고 나면 물리 스텟이 골고루 계속 오르긴 하덥니다.”

“뭔······.”


숲 어귀를 걸으면서 두 사람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화창한 날씨에 적절한 바람이 섞여 있었다. 잎사귀를 지나치고 나뭇결을 간질이는 바람이 그들의 살갗 역시 긁고 갔다. 중부 지역, 그들이 있는 곳은 한낮이었고 또 선선한 날씨였다. 온갖 다양한 현실적 법칙을 구현하고 있는 만큼 계절의 변화도 뚜렷하다. 체감하는 기후는 봄 정도였다.


“황야 지룡을 잡았다는 게 진짜였습니까. 그것도 이상한데 거기다 단검으로 잡았다고요?”

“예. 가능한만큼 했죠. 단검만으로도 잡아보고. 활만으로도 해보고. 근거리에서 도刀 하나 꼬나들고 맞상대도 해보고. 파이어볼만으로 잡는 게 가장 빡셌습니다. 아무래도 초상 스킬들은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거리 잡는 게.”

“호오오.”


개멋진나 최가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흥미롭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바깥으로 튀어나와 마치 발목이 걸리라고 만들어진 덫처럼 생긴 나무 뿌리 하나를 올라 밟으면서 그가 말했다.


“그래서 오래 걸렸군요. 저번에 텍스트Text 보냈을 때도 한참 있다가 세슈칸에 오더니. 그 때도 혹시 뭐 했습니까?”


둘이 만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두 번째 만남 말이다. 첫 번째는 다소 공교로운 착각과 실수가 우연히 겹쳐져 일어난 일이었고, 두 번째는 상식적이고 양식적이었다. 도시 광장에서 시간을 정해 만났다.

그간의 일들에 대해 서로 대조를 한다거나 회포를 푸는 것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둘 다 게임 내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들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빠르게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단은 목표였다.


파티 플레이를 위해 개멋진나 최가 미리 잡아 놓고 기다리던 퀘스트를 같이 가서 발동시키고 수주받았다. NPC의 입장에서 어떤 상업적인 계약을 맺는 것은 아니었으나 플레이어들의 시선에서는 마치 그런 것과 비슷했다.

NPC는 유동적인 인간처럼 굴지만, 결국 어떤 조건 하에서 같은 결과값을 내놓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들이 인간을 모방한 자유의사를 난수에 의해서 표현한다고 해도 일정한 양식은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가 끼어들거나, 혹은 그 작은 행동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서 폭풍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은 정해진 보상을 플레이어에게 줄 것이다.

명문화된 퀘스트 창을 시스템 인터페이스로 보고 결과를 읽는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계약이나 크게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실제 계약이라는 것도 불가피한 재난 따위가 일어나면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 그런 적은 확률의 일이 아니라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맺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일정한 발생 조건을 미리 파악했다면 유저들은 거의 거래의 개념으로 퀘스트는 받아들이고, 하청업자가 되어서 그 일들을 해주었다. 과정과 보상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세슈칸에서 흔하게 받을 수 있는 난이도의 퀘스트를 받았다.


퀘스트는 일반Ordinary, 희귀Rare, 고유Unique가 있었다. 세 단어는 퀘스트의 희귀도를 나타내고, 당신이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가 게임AI의 연산에 따라 얼마나 개성적인 지를 판단하는 척도였다.


고도의 AI를 지닌 게임 내 NPC와 각종 오브젝트들은 유저의 행동에 따라 다른 반응들을 보이게 된다. AI는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또 일어났던 퀘스트의 행로와 또 예측 연산으로 가졌던 데이터에 비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측정해 각 퀘스트를 구별했고 일반에서 고유 급으로 갈수록 보상 역시 희귀해지는 시스템이었다.


희귀한 것이 반드시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럴 확률은 좀 더 높았다. 흔하고 가치가 있는 것보단 희귀하며 동시에 가치가 있는 것이 훨씬 비쌀 테니까. 물론 아이템 등급으로도 유니크한 물건이면서 유저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도 있었다.

어린아이NPC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낙서장 따위를 받는 일도 실제로 있다. 감동적인 서사의 클라이막스에 으레 등장하는 결말이었는데, 플레이어들은 보통 흔쾌히 받는다.


그 서사 자체에 대한 즐거움도 있겠지만, 가치 없어 보이는 그 낙서장으로 인해 연계되는 유니크 퀘스트가 있다면 다른 보상들을 얻을 확률도 있어서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세부적인 구분이 동시에 존재했는데, 마을간 시나리오, 지역간 시나리오, 대륙급 시나리오, 메인 스토리Main story로 나뉘어졌다.


마을간, 혹은 마을급이라 불리는 퀘스트들 중에서도 일반 마을급, 희귀 마을급, 고유 마을급이 있었고 지역간, 대륙급, 메인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세계관의 넓이에 한계가 있다 보니 대륙급이나 메인 스토리 정도로 넘어간다면 대개가 희귀 급이기는 하다.

어지간히 뻔한 선택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같은 조건에서 발생하는 퀘스트라고 하더라도,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의 행동이 AI가 연산한 가장 흔하고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만을 골라 간다면 퀘스트의 희귀도는 떨어지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수행 중에도 올라가게 되고.


규모와 희귀도 두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마을간, 혹은 마을급은 가장 흔한 퀘스트들이었다. 마을이나 도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퀘스트들로 비련의 시나리오 전체 세계관에 그렇게 큰 영향력이 없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들이었고 얽히고 섥힌 정보의 갈래들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을 파생할 지는 몰랐지만, 일단은 그러했다.


어느 마을 주민의 개인적 사정에 의한 퀘스트이거나, 단발적인 것들. 도시 내부에서 플레이어들의 플레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본 퀘스트들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그 위에 ‘비련의 시나리오’에 영향을 얼마나 끼치느냐, 로 판가름되는 규모의 단계는 지역간으로 넘어간다. ‘지역’은 비련의 시나리오의 맵인 거대 대륙 콘란드의 일부 지방을 의미했다. 여러 개의 도시나, 혹은 한 지역에 모여 있는 왕국 정도의 규모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들이었다.


왕국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일이라거나, 혹은 도시와 도시 간의 물건 배달이라거나, 혹은 그 정도 넓은 지방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막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들 따위였다.

어느 정도 레벨과 플레이 시간이 쌓인 유저들은 대개 지역간 시나리오를 수행하게 된다. 주로 말이다.


당연히 마을간 시나리오보다는 상위 규모의 것들이 하나하나의 플레이 시간이 길었고, 유저의 행동이 상충되지 않는 선에서는 얼마든지 몇 개 이상을 동시 진행 할 수도 있었다.

적대적인 관계로 전쟁 중에 있는 한 쪽 왕국의 편을 들면서, 동시에 다른 편의 왕국 승전을 위한 퀘스트를 진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가능은 하다. 두 가지 동시에 받을 수는 있지만 클리어 조건 상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런 경우는 일단 받아놓고 고민하며 한 가지를 진행하는 식이거나, 혹은 두 왕국을 오가며 첩자 행위를 하는 다른 특수 퀘스트의 시발점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대륙급은 말 그대로 콘란드 대륙 전체의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스케일을 의미했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경험하고 있는 퀘스트의 양도 적을 뿐더러, 그 진척도 또한 느릴 테다. 게다가 희귀 이상을 거의 무조건 보장하게 되는(규모가 커지면 퀘스트가 길어진다. 기나긴 선택지의 반복은 대개 차별성이 생기게 마련이었다)거대 퀘스트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고 해도 섣불리 풀지는 않을 것이다.


고작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경쟁 심리 정도는 당연히 있었고, MMORPG임과 동시에 서바이벌 게임의 형식인 비련의 시나리오는 고레벨 끼리의 그 경쟁 의식이 조금 더 날카롭기도 했다.

개인의 클리어가 타인의 승리를 방해하는 조건은 전혀 아니었지만, 한 치의 어긋남으로 발을 헛디디고 게임 오버를 당한다면 그대로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다는 설정에 따른 긴장감은 아무래도 고레벨로 갈수록 더해지게 마련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개인의 플레이와 타인의 플레이가 별로 접점이 없는 방식이었다. 만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서로의 스토리를 엮어 가면서 시나리오로서의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만약 솔로 플레잉으로 끝을 보겠다고 해도 아무런 강제성이 없었다.

어느 일국의 존망을 걸고 편이 나뉘어진 전쟁터에서 플레이어들이 서로 만난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 플레이어를 죽이거나 퀘스트를 깨야만 게임의 끝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가 된다면 유저들 중에서는 서바이버로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 테였고, 스토리의 끝이라는 것도 자유도가 높은만큼 제약이 없는 방향성을 보여주었으니. 한 개의 퀘스트 시나리오가 사라진다고 게임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알지 못하지만, 게임을 관장하고 있는 AI는 초지능을 가진 성능의 물건이었고 현실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였다.

고작 게임 내 플레이어의 행동 변수를 예측하지 못해서 시나리오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예측 밖의 행동이 나왔다면, 그저 그에 맞게 마치 인간처럼 대응하며 새로운 결말로 이끌 뿐이었다.


대륙급, 의 퀘스트들은 정보가 많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일국 수준이 아니라 어느 지역의 열국들이 통째로 휘말린 스토리가 될 것이다. 그 열국의 영향력이 다른 지역의 정세에도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종래에 대륙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퀘스트들.

게임 내의 세계관에서 ‘혁신’이라고 할 만한, 인류사의 기록을 바꿀만한 그런 일들.


그리고 메인 스토리라는 건 그런 대륙급의 스토리들이 플레이어에 의해 심화됐을 때를 말할 테였다. 대륙적인 인류사의 존망을 걸고 움직이는 거대한 퀘스트 시나리오.

예컨데, 몬스터들을 장악하고 인류 멸절을 시도하는 ‘마왕’의 등장이나 그런 마왕의 절멸을 위해 움직이는 ‘인류의 수호자’의 등장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제작 계열의 스킬을 익히는 이가 충분한 명예 점수와 재화를 얻어 대규모의 개발을 통해 기술적 혁신을 일으킨다면, 그것 또한 대륙급이나 그 이상의 퀘스트의 단초와 참여가 될 수도 있었다.


“오면서······. 뭐 별 거 안했습니다. 그냥 마라톤. 두 발로.”

“엑.”


청년, 최태현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제냐를 보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야말로 ‘더럽게’ 넓은 시나리오 온라인의 맵을 이동하기 위해서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있다.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게임 내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대부분은 도시간 이동 이상이 되면 그런 것들을 사용한다.

흔한 것들로 마차니, 말이니. 온갖 종류의 기승 동물들과 다양한 이동기 스킬들을 말이다. 그 거리를 직접 걷는 건 실제 그만한 시간을 달리기에 쓰는 것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굳이 여가 시간에 게임에 접속해서 그런 일을 하는 인간들이 많지는 않았다.


스킬 개발을 위해서 하는 인간들이 있기는 했지만, 최태현의 근처에는 없었다. 그는 괴짜를 바라보듯한 눈으로 제냐를 보았다.


“스킬은 많이 먹었습니까?”


다양한 특이 행동들을 통해서 얻어내는 스킬들은 보통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새로운 스킬을 얻어냈냐는 말이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스킬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다양한 행동들을 해보는 걸 ‘스킬 딕skill dig'이라고 한다. 드릴이나 삽으로 구멍을 파듯이, 드러나지 않은 데이터베이스라는 거대한 범위를 직접 행동으로 파들어가는 짓이다.


그런 것들만 전문적으로 하는 양반들도 있었고, 대개의 라이트light유저들은 그런 디깅 유저들의 연구 결과를 수용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식이었다. 어느 정도는 한다지만 시작 지점에서부터 그렇게 빡세게 하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레벨이 올라가고 나름대로 폭넓은 개인 활동이 가능해지는 중반 레벨 이상에서 흔해지는 양상이지.


“네, 뭐 그냥. 달리기 좀 늘고. ‘마라톤’이라고 따로 있더라고요. 그거 먹고 또··· 부엉이의 눈인가 생긴 것 같던데요.”

“그런 식으로 하드 모드 플레이를 하니까 스텟이 높나 보군요. 보아하니까 시작한 이래로 줄곧 그렇게 한 모양인데요. 그게 아니면 20후반을 거의 다 찍은 물리 스텟들이 설명이 안 되니.”

“그렇죠 뭐.”


둘은 소소한 잡담을 나누면서 능숙하게 숲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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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범영웅凡英雄 23.06.10 42 4 31쪽
18 17. '취륵'은 그렇게 죽었다. 23.06.09 47 4 62쪽
17 16. 파티 플레이 23.05.29 42 4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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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1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5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8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7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6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8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7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6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8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2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7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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