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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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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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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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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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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21. 불타는 부락

DUMMY

*


최태현이 화살을 쏴 날린다. 한 호흡에 한 발. 그는 정신없이 철시를 집었다. 전통을 자신의 발치, 나뭇가지 위에 용케 세워두었다. 넘어지지 않게 나무의 몸통에 평행하게 붙여 세운 뒤 제 다리로 앞 쪽을 막고 있었다.


태현은 앉듯이 살짝 무릎을 숙이면서 발뒤꿈치 쪽으로 손을 내린다. 전통에 튀어나온 시위의 깃이 걸린다. 철시. 곧 철로 이루어진 화살의 감촉이 느껴진다. 쏜살같은 손놀림으로 하나를 걸어 빼내고, 일어서면서 각궁의 시위에 그 엉덩이를 걸었다. 깃과 함께 살대를 손가락으로 틀어 쥐고 철시의 촉이 조준대에 오른다.


스킬이 불이라도 붙은 듯 끊임없이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쉴 새 없이 계속해서 기력을 돋구며 궁술을 발휘하는 일이 말이다. 어둠 속에서 붉은 궤적이 흐릿하게 보인다. 점선으로 이루어진 그건 띄엄띄엄, 화살이 나아갈 방향을 예측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화살촉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활대가 구부러지면 가상의 궤적 역시 달라졌다. 저 멀리에 있는 오크들의 움직임이 입체적으로 그에게 느껴진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의 숲을 바라보는 시야와, 그 위쪽의 3분의 1정도를 차지하는 오크 부락의 조감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부근의 3분의 1은, 붉은 점선의 궤적을 좇아 닿는, 착발 지점의 1인칭 근접 시야가 있었다.

오크들의 몇 걸음 앞 정도로 고정되는 원시遠視는 스킬을 사용한 공격의 결과를 보다 상세하게 가늠하게 돕는다.


현장을 딱 붙어 바라보는 제한된 1인칭 시점은 '궤적'에 영향을 받은 효과였으므로 최태현이 자세를 바꾸어 발사선이 달라지면 빠르게 이동한다.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가 그 화면에만 집중하면 어지럼증을 조금 느낄 수도 있었다.


가장 큰 시야의 부분, 가운데 지점에 드러나는 건 캐릭터가 보고 있는 육안의 시점이다, 물론.


한 발 또 한 발이 날아간다. 의도한 지점에 맞아서 오크가 다운될 때마다 최태현은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압도적인 현실감을 제공한다. 거기서 오는 손맛이란 다른 류의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이기도 하다.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 집안에서 사냥 스포츠를 즐기는 일과 비슷했다. 오크의 대가리 하나를 철시가 다가가 꿰었다. 급소가 파열된 거대한 오크 한 마리가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전투 중에 곧바로 몬스터의 시신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때로 거대한 떼거리를 상대함에 있어서, 몬스터의 시신은 그대로 지형지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가 근적해서 붙는 시야로 제냐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놀라운 수준의 움직임이다. 레인저 트리Tree(계통도, 계열)의 길을 걷고 있는 최태현이었지만 근거리에서 저 상대들을 두고 싸우라고 하면 제냐처럼 움직이는 건 힘든 일이었다.

적어도 몇 종류의 근접 전투 관련한 스킬들이 중첩되어야 가능한 움직임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배짱과 감각도 있어야 했고.


최태현이 당장 스킬을 얻어서 각 동작과 근육 부위에 보정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깔끔하게 상대의 공격들을 피해내지는 못하리라.

갈색 오크들은 플레이어 한 명, 제냐보다 전체 HP가 적기는 했지만 체적이 크고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HP가 쉽게 줄어들지도 않는다.


거대한 덩치에는 그에 맞는 공격을 해야, 그 육신이 부서지면서 데미지demage 판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제냐는 묘기를 부리듯 몸을 유연하게 굽히고, 또 구르고 하면서 MP를 소모하고 있었다. 검날에 기력을 발라 절삭력과 공격력을 높이고 있었고, 또 파이어 볼의 다른 용도를 찾았는지 불길을 근거리 전투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어 부닥치고 있었다.


난전이었으므로, 그 쪽으로 지원 사격을 하는 일은 조금 힘들었다. 최태현은 활의 명인이나 마찬가지인 조준 솜씨를 게임 내에서 갖고 있었지만 순간순간 전황과 위치가 180도로 바뀌고 있는 자리에 활을 쏘는 것은 이미 예지의 힘이 필요한 영역이었으니.


제냐와 조금 거리가 떨어진 놈들을 위주로 잡고 있었다. 화살을 쏘아내던 중 약간의 소강상태가 일어났길래, 조금 전까지 제냐와 붙어 있던 놈을 맞추어 잡았다.


할버드를 들고 있는 놈이었는데, 허벅지에 갑옷이 없는 자리를 노리고 날린 것이 제대로 적중했다. 그는 집중력을 날카롭게 갈아나갔다.


만약 제냐와 원거리 소통을 하면서 예정된 자리에 상대 몹의 급소를 둔다면 전투 중에 붙어 있는 놈들을 쏘며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전략까지 준비해두진 않았다. 대개는,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한다, 였다. 골자는 말이다.

두 명 다 그래도 깨나 강력한 플레이어들이었기에 가능한 짓거리였다.

물론 강력함이란 상대적인 말이었고, 여기서의 그 말은 ‘갈색 오크’들을 사냥하는 평균적인 플레이어들보다 그들의 전투력이 높다는 의미였다.


당장 그 위의 레드 오크들만 상대하더라도 두 명이서 한 마리를 상대로 낑낑대며 잡아야 하리라.


같은 오크 계열 내에서도 분리된 종의 차이와, 강력함이 다르다는 건, 수치적인 것도 있지만 AI가 자체적으로 부여하는 종족 한계에 관련된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갈색 오크들 중에서 여러가지 스킬을 익히고 개체적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는 놈들이 나올 확률이 어느 정도로 고정되어 있다. 그것을 만약 레벨 30이라고 친다면 거기서 +10정도 가기가 아주 힘들 것이다.


레드 오크들을 예컨데 5, 60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조금만 더 가도 이미 갈색 오크는 까마득한 자리다.

그리고 갈색 오크들보다 레드 오크들이 조금 더 쉽게 스킬을 익히고, 명민하게 군다. 스킬을 익혀낼 확률이 조금 더 높으며 그것을 보다 발전된 형태로 가다듬어 사용할 확률 역시 높은 것이다.

오성悟性이라는, 어느 무협지에 나올 법한 능력을 가상의 스텟으로 삼는다면 해당하는 수치가 보다 위인 셈이었다.


하드 웨어는 물론이고 소프트 웨어적으로도 보다 강력해서, 그 정도 레벨에 걸맞은 전투력이 형성되는 셈이었다.


몬스터는 AI가 부여한대로 그저 문명 파괴의 집행자로서 행동할 뿐이었지만, 그 단발적인 전투와 플레이어들을 괴롭히는 일만큼은 머리를 쓰는 놈들이었다.


다만 이전에 기술했듯 그 머리를 쓰는 것에도 분명 제약들은 존재했다. ‘무술’같은 고등 스킬들을 익히지는 못한다. 그들이 얻는 것은 ‘강타’나 ‘연격’과 같은 액티브 스킬 부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패시브 스킬의 복합적 사용과 연계로 그 진가를 발휘해내는 것은 인류측, 곧 플레이어들, 곧 지성체들의 힘이었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몹들은 패시브 스킬을 적은 확률로 얻게 되더라도 그 발전형까진 익히지 못하고, 아주 단순한 효과로 그 효능을 활용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최태현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이 잡고 있는 부락 내의 오크들도 개중 액티브 스킬을 가진 놈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스킬은 행동에 강제성을 띄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면 강제보다는 유도가 정확할 것이다.

같은 공격을 하더라도 정해진 자세와 궤적으로 행했을 때 추가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면 누구라도 선택이 편향되기 마련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전투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 정해지게 되는데, 약간 특이한 방식- 곧 개성이 있고 일정한 스타일을 보이는 오크들이 더러 있었다. 팔놀림이 조금 빠른 놈, 한 방 한 방이 다른 개체보다 유달리 강력한 놈.

배때기에 굳은 살이 박히고 지방과 근육이 들어차서 맨 가죽임에도 조금 더 방어력이 높은 놈 등.


갈색 오크 정도만 되어도 초보자들 수준에서는 깨나 까다로운 놈들이다. 철제 무기를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전투’다운 양상을 보이는 놈들이니까.

물론 인간의 전투술을 익혔다고 더 강하다는 논리는 아니었다. 두 앞 발과 이빨만 가지고도 대륙을 오시할만큼 거대한 괴물 늑대같은 놈도 있는 판국에.


다만 같은 종류라면, 같은 크기에 힘과 스킬을 가진 오크라면 무기를 다루고 힘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편이 더 강력한 쪽이라는 건 당연지사였다.


최태현은 벌써 몇 개 째인지 지겨울 정도로 활을 쟀다.


오크의 눈깔. 붉은 선이 가 맞는다. 약간의 예상도를 그려내는 것이었으므로, 아주 근시적인 미래에 대한 계산이 들어가 있는 궤적이었다. 관성에 따라 어느 정도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물질에게, 화살의 비행 속도를 집어넣어 봤을 때 저게 맞겠느냐, 싶은 이치를 따져서 그에게 보여주고 있는 스킬의 원리다.


그런 스킬의 예상치에 대한 감각 역시 중요했다. 주어진 스킬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분석해서 제 손에 맞게 사용하는 건 고급 플레이어, 일류 게이머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고작 게이머에서 일류가 되어봤자 무얼 하겠는가,


할 수 있겠다만.


어느 분야든 일류가 되어봄직한 건 당연한 말이었다. 어떤 곳에든 정력과 시간을 갈아넣어 일류가 되어보면 다른 분야에서의 일도 어느 정도 견적이 나오게 된다.


그것이 범죄따위의, 애초에 합당하지 않은 일만 아니라면야.


그런 점에서, 자신의 취미 여가 시간을 마음껏 비련의 시나리오에 갈아넣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갈아넣는다는 말은, 그 취미에 사용하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고


곧 현재를 살고있다는 얘기였다.


많은 정보들이 난립하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얼핏 어려워보이는 첨단 사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정열은 고대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상징이, 지금 이렇게 게임으로 구현된 원시의 전투 현장일지도 모른다.


그 옛날에 어떤 사냥꾼이 자신의 밥을 벌어먹고 가족들을 위해 화살을 시위에 걸고 거리를 잰 뒤 눈을 맞추어 발사했듯이,


최태현 역시 그러했다.


한 쪽 다른 감은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뜬 눈 한쪽의 시야는 세 개로 구분되어 그가 원하는 화면에 집중해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여러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을 하나로 버무려 최태현이 결론을 내렸다. ‘여기다’라는 결론 말이다. 이 지점에서 손 끝의 긴장을 풀고,


깃을 놓아주면 화살은 자유로운 비행을 시작한다.


‘기’력을 머금은, SP를 독보다도 더 진하게 처바른 철로 만든 화살이 날았다.


추진체는 없었으나 얼핏보면 그에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날아간 초자연적인 게임 내의 공격이


오크 한 마리의 심장 부위를 맞추었다.


얇은 철판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뚫고 말이다.


최태현은 현장, 현실감, 실전 뭐 그런 것들 속에서 고도의 집중을 해나가며 자신의 스킬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진 못했다.


아마 이 전투가 지나가고 수치와 스펙을 본 다음에 알게 되리라.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태현의 콧잔등에 작은 날벌레가 앉았다가,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곧이어 날아가버렸다.


어둔 밤이다. 달이 휘영청 밝아온다.


바깥의 시간은 몇 시일까. 한국 시간으로 지금 그들이 있는 게임 시간보다 다섯 시간이 빠를 것이다. 밤이 점점 깊어져 가는데, 한국도 이미 해가 저문 이후일 것 같았다.


여름 날의 해는 늦게 저무니까, 아직일 지도 모르고.


최태현은 MP가 동날 때까지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 날렸다.


심장에 화살이 박힌 놈은 터프하게도 살아 움직였다. 심장 끝을 긁었지만 철판도 있었고, 흉부의 살집과 근육이 워낙 비대해서 꿰뚫지 못한 탓이다.

실제로 내장 기관으로서의 심장에 무언가가 닿았음에도 움직이는 꼴이 과연 생물이 맞나··· 싶기도 하지만 야성을 지닌 오크들의 기세란 그런 것이었다.


한 발로 안 된다면, 여러 발을 쏘아주면 될 일이다.


화살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꺼내 놓은 전통의 화살이 다 비어가지만 인벤토리 안에는 아직도 몇 개의 화살 다발들이 남아 있었다.


곧 그가 꺼내놓은 것을 다 털었고, 인벤토리를 열어 전통을 갈았다.


*


최태현은 원거리에서 훌륭하게 사격을 해주었다. 부담이 줄었다. 제냐로서는 제 앞에서 다가오고 있는 놈들, 두 마리만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한 마리는 철퇴를 들고 있었고, 키가 크고 길쭉한 돼지 새끼였다.


다른 한 놈은 반대로 키가 좀 작고, 다만 근육과 살집이 가득 차 있어서 두터운 질량감이 드는 놈이다. 갑옷도 어디서 주워서 기워 입었는지 철갑옷과 가죽 갑옷을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여서 입고 있다.


무기로는 쌍도끼를 들고 있었다.


두 놈 다 그렇게 까다로운 부류는 아니었다. 철퇴 역시 한 번 공격을 날리고 나면, 저것이 능숙한 철퇴술 계열 스킬을 익혔을 리가 없으니 지연이 길 테다. 쌍도끼는 위협적이지만 도끼 투척의 명수일 리가 없는 오크의 손에 들려 있다면 거리만 벌리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무기였고.


대형에, 오크의 강력한 근력으로 이리저리 휘두를 수 있는 장병 위주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류였다.


제냐는 다 마신 푸른 물약의 유리, 로 만들어진 듯한 병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아주 튼튼하고 잘 깨지지 않는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포션 병은 흙바닥 위를 튕겨 튀었다.


불규칙적인 바운스로 제멋대로의 궤적을 그것처럼, 제냐 역시 달려야만 했다.

여러 명의 상대와 정면에서 맞서야 하는 불리한 전투에서는 그것이 중요했다. 한 대씩 맞아주다간 스쳐가는 충격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너덜너덜해진다.


상대 무리의 예상을 모두 깨버릴 정도로 빠르거나 계산 밖의 동선으로 튀어서 피해야만 한다.

난전에 돌입하기 전에 '자신은 럭비공이다, 혹은 아무렇게나 내던진 저 비대칭적인 굴곡의 물약병이다'라고 생각한다.


거리를 잰다.


급하게 벌린 거리를 아직 다 채우지 않았다. 상대가 말이다. 제냐는 불타는 숲 속의 부락을 배경으로 삼아 다시 달렸다.


손에는 여전히 비스트 슬레이어, 대거가 들려 있었다. 물약을 마시느라 잠시 홀더에 끼웠던 것을 빼들어 고쳐잡은 뒤다.


제냐의 속도는 빠르다. 눈으로 쫓지 못할 정도라고, 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튀긴 공만큼은 얼추 비견이 될만큼 빨랐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구기종목도, 사람이 공보다 빠른 종류는 없었다. 특수하게 일부러 만들어진 종목이 아니라면야 그럴 것이다.

지금의 제냐는 축구라고 친다면 얼추 쏘아진 공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근거리에서 그런 갑작스러운 가속을 본다면, 마치 땅을 접어 달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왜,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축지법.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다종의 스킬 트리가 만들어내는 복합 효과였으나. 어쨌든 제냐는 달렸고,

아마 이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는다면 그는 많은 스킬을 먹을 가능성이 있었다. 단박에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요구 조건들 중 일부는 채울 테였다.

시나리오 온라인이 제공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 이상의 몰입으로 견디어 내고 이겨낸다면 시스템은 그만한 보상을 늘 하게 마련이다.


개멋진나, 와 제냐는 다소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싸웠다.

보통은 금력金力을 이용해서 폭발력있는 소모형 아이템들을 대거 사용하던가, 사람을 불러와서 잡는 일을 단 둘이서 일일이 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최태현의 궁술은 정말 제법이었다. 원거리에서 몇 마리의 오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었으니.

전장에서 만난다면 가장 믿음직한 원호군이다. 제냐는 마음놓고 달릴 수 있었다.


순식간에 먼저 앞으로 튀어나온 철퇴 오크의 근처에 다다랐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진 않았다. 철퇴를 든 놈이 그를 노려서 팔을 휘두르기 쉬운 궤적으로 들어갔다.


오크의 시선에서 본다면 왼쪽으로 파고드는데, 대놓고 그의 몸을 노출시키며 가고 있었고 또 휘두르기 좋은 궤적과 타이밍으로 가고 있었다.

당연히 노림수이다.


철퇴 오크는 복잡한 생각까지 할 수 있는 놈은 아니었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치는 것만으로도 제 능력의 한계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들이 들고 휘두르는 무기의 묘용이란 그런 것이다. 그걸 잘 해내는 놈이 무리에서 아마 대장을 맡는 것일 테고.


철퇴가 제냐가 딱 예상한 속도와 위치로 날았다. 제냐는 이미 휘둘러진 그것의 궤적이 바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갈색 오크는 이미 팔을 높이 쳐들어, 그 어깨의 힘이 들어가며 움직였다. 제냐는 그 시점에 이미 변속했다. 타격 지점까지 오던 그였으나 직전에 속도를 조금 줄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한 번에 폭발력있게 쏘아나가기 위해서였다.


철퇴 오크의 바로 앞에 닿기 전, 약 2, 3m 지점에 도달하기 몇 미터 전부터 슬렁슬렁 들어갔다. 제냐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계산한 위치에 닿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폭발적인 각력이 폭발적인 대시를 만들어냈다.

오크는 타이밍을 잃었고, 그보다는 자신이 던진 철퇴의 일격을 회수할 생각도 없었다.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수단도 없다.


오크의 왼쪽 옆구리를 지나쳐 접어 들어간 제냐는 갈색 오크의 뒤를 먹었다. 온 힘을 실어 공격을 하고 있는 오크의 등근육이 보인다. 근육이 보인다는 말은, 맨가죽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철퇴를 휘두른 놈의 등판이 별다른 갑옷 없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척추 라인이 보인다. 살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을 듯도 싶었는데,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오크들은 그 뼈대도 강력하고 또 커다란지 잘 보인다. 베어야 하는 제냐의 입장에서는 아주 다행이다.


제냐는, 두 팔에 든 두 칼을 그대로 두 개 다 역수로 쥐고서 찔러 넣었다. 젓가락 두 개를 이용해 스테이크를 찍어내듯이, 그대로 이족보행 괴물 돼지의 후면을 갈아냈다.


칼날이 그 골육을 부쉈다.


기력이 실린 두 날은 화염의 기운마저 어려 있었고, 참상과 열상이 동시에 만들어지며 빛의 입자가 그 후방에서 쏟아졌다. 철퇴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꿈틀댔다. 그것이 이성을 잃으며 눈이 붉어진다.


뒤를 돌며 제냐를 처다보려 했으나 제냐 역시 그대로 방향을 따라갔다. 등판에 박힌 두 자루의 역수검을 유지한 채다. 손잡이를 잡고 기승용의 물건에 올라탄듯이 굴었다. 로데오를 하듯 두 자루의 검날과 오크의 몸집의 연결을 유지하며 그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했다.


몇 초 더 그렇게 한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순발력과 감각이었다. 제냐는 최대한 크게 궤적을 도려내며 칼을 회수했다. 철퇴를 든 놈은 오크들 중에서는 조금 길다랗고 마른 놈이었는데, 그 길다란 몸에 그와 마찬가지로 긴 상흔이 났다.


상흔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생김과 동시에 흰 빛의 가루가 쏟아졌으니.


제냐는 다시 거리를 벌렸다. 뒤로 벌리고 있는데, 그 사이에 두 자루의 쌍도끼를 든 놈이 다가옴이 느껴졌다.


전투에서 뒤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아주아주 중요하다. 제냐는 기본적인 수준의 감지는 가능했다. 본격적인 기력 감지는 불가능했으나, 초보자 티를 벗어나는 사냥들을 해내면서 전투 감각의 효과를 내는 스킬들 정도는 얻어놓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촉각과 청각 따위를 이용해서 훨씬 예민하게 깨닫고 곧바로 반응하는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나 미세한 진동으로 느껴지는 소리만으로 가상의 사각지대를 머릿속에 그려내고,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각지대 속의 적을 보는 것이다.


최태현의 시야가 분할되며 여러 가지 장면들이 보이는 것과도 비슷했다.


투실한 놈이다. 여기저기 갑주들을 잘도 껴입고 있다. 둔중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그의 바로 몇 걸음 뒤였고, 쌍도끼 하나를 휘두르려고 그 균형을 무너뜨리며 오른 팔을 크게 들어 올리는 예비 동작이 보였다.

거리감각이 그다지 좋은 놈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대로 휘두르면 아마 허공을 맞을 것 같은데. 일찍 팔을 들어올린 듯하다.


제냐는 일단 뒤를 보고 있으니, 앞으로 뛰었다. 그의 좌측 앞에 아까의 철퇴 오크를 두고 오른 쪽 대각 방향으로 튄다.


그가 사라진 자리 그 언저리 즈음에 쌍도끼 중 우수右手의 것이 휘둘러졌다. 가만히 있더라도 허공을 베었을 지 모른다.


제냐는 아직 완전히 다운되지 않은 철퇴 오크를 경계하면서 뛰쳐나갔고, 그대로 빙글 돌며 두 마리를 다 시야에 넣었다.


그가 신경써야 할 건 어느새 그 눈 앞의 두 놈 뿐이었다.


최태현은 원거리에서 화살로 많은 오크들한테 충분한 데미지를 주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두 마리마저 상대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 철시의 살대가 꽂혀 있는 두 놈이 지금 제냐가 싸우고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자세히 가늠하지 않고 그 꼴만 보더라도 HP의 상당량을 이미 깎아 먹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최태현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제냐만 제대로 하면 사냥은 금방 성공적으로 끝날 듯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철퇴 놈은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거체였으나 그 거체에 어울리는 큰 상흔을 내어주었으니, 시간만 끌면 알아서 다운될 놈이다.

그 직전에 여력이 조금 남아서 한 두 방 정도 반항을 한다면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데미지가 없이 살아 있는 오크는 눈 앞의 쌍도끼 하나 뿐이다.


쌍도끼의 눈이 붉다. 이미 야성 수치를 한껏 끌어올려 달아오른 듯한 모양새다. 제 부락의 동료들이 모두 다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크 부락을 하나의 집단, 하나의 보스 몬스터라고 친다면 거의 막바지에 달한 것이니. 저 오크 한 마리가 시작부터 그런 광화 모드의 조짐을 보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철판 갑옷으로 투구나, 상체 전면, 양 팔의 대부분, 그리고 다리의 대부분을 가린 놈이었다. 칠 만한 곳이 별로 보이지 않아 까다롭다.


쌍도끼를 든 놈이 한 번 크게 휘청였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회복하는 그 시간이 빠르다. 팔다리가 앞선 놈보다, 그리고 평균보다 짧아 보이는데 생각보다 밸런스가 좋았다.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귀찮은 난전이 될 지도 모르겠다. 박빙의 승부, 뭐 그런 것 말이다.


제냐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그런 건곤일척의 승부를 좋아했지만 굳이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크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그렇지 피할 수 있다면 쉽게 잡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게임도 마찬가지이고, 대부분의 목표 또한 그렇다.


제냐는 효율을 추구했다. 쌍도끼를 든 놈은 발이 느렸다.


그는 대거를 허벅지에 있는 홀더에 잠깐 찼다.


뒤로 뛸 준비를 한다. 그리고 푸른 물약 하나를 IV라고 급히 중얼거리며 꺼내 마신다.


그가 물약을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놈은 달려들지 않았다. 그르르, 거리면서 성대를 떨어 울리고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제냐가 몇 모금만에 물약병 하나를 비우고 그것을 집어 던졌다.


MP가 차오를 듯한 기세가 느껴진다. 묘한 충만감이다. 그가 오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앞에서 열량이 느껴지더니, 이내 신비한 화구가 생성된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게임 세상 내의 일이다. 정신력 에너지로 불꽃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다양한 기현상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의 일일 뿐이다.


화염덩어리가 이글거린다. 그것이 자신한테 위협이 된다는 걸 깨달은 건지, 쌍도끼를 든 놈이 크어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냐는 뒤로 뛰었다.


급격하게 움직이면서 캐스팅Casting을 계속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 형성되어 크기가 커져가던 화구가 그 거대화를 멈춘다. 제냐는 재빠르게 달아났다. 부락 내의 불타버린, 부서진 움막 몇 개를 지나치면서 갔고, 쌍도끼를 든 놈의 시야를 한 순간 벗어날 정도로 움직인다.


몇 초 정도 벌었다고 느꼈다. 제냐는 다시 캐스팅했다. 화구가 커진다. 야구공만한 것이 점차, 그의 손바닥 너비를 훨씬 넘었고, 축구공만한 크기를 향해 간다. 그워어! 마지막 남은 생존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다 스러진 움막의 폐허 너머로 들렸다. 코앞인데 둔하고 광폭화한 오크가 그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오크는 듣지 못했다.


다만 그 코는 살아 있었는지 혼자 쌍도끼를 들고 씩씩거리다가, 이내 제냐가 있는 방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움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놈이지만 제냐를 향해 똑바로 다가간다.


제냐는 그것을 느꼈고 다시 달아났다.


한 두 번, 그 짓거리를 반복하며 제냐가 화구를 제 머리통만한 크기로 키웠다.


쌍도끼 오크보다 순발력이 명백하게 우세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리만 남았으니까,


리스크 관리가 완벽하게 가능하고 우세할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제냐는 한 십 여 미터 정도 거리를 벌린 뒤, 잠깐 지친 것처럼 호흡이 오르고 느려진 오크를 겨냥해 손을 내밀었다.


오른 손바닥 앞에 생겨난 머리통보다 큰 시뻘건 화구. 그 표면은 일렁거리며 거친 불꽃이었다. 작은 태양의 모형과도 같은 그것이


발사,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대로 발동되었다.


의지력은 캐릭터의 정신파, 신경파 따위를 읽어서 가동하는 힘이다. 그것 역시 실질적으로 스텟이 있어서 정신력 계열 스텟들이 올라갔을 때 조금씩 증가하게 되어 있다.

한 종류가 아니라, 초상 스킬을 자주 사용해서 의지력 자체가 복합적으로 조금씩 올라가는 방법 역시 있다.


근접 전투를 자주 반복할수록 물리 스텟이 올라갈 확률이 높고 가파르게 상승한다. 초상 스킬 위주의 전투나 행위를 반복할수록 정신력 계열이 마찬가지로 상승한다.


캐릭터의 행동은 스킬과 스텟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계속해서 시스템적인 보상을 받게 되어있으므로, 캐릭터의 플레이 스타일이 한 가지 계열의 행위에 편중된다면 그대로 가속도가 붙듯 한 가지에 몰입하게끔 유도된다.


그래서 듀얼 계열이 희소해진다.


물론,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의 초AI는 시스템 내의 모든 행위를 계산에 넣는다.

그 말인즉슨 듀얼 계열의 특이한 플레이 스타일 역시 한 개의 스타일과 계통도의 한 갈래로 인정해서 그것에 특화된 스킬 따위를 제공한다.

관련한 아이템들 역시 존재하기도 하고.


그러나 강력한만큼, 많은 재주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두 가지 능력을 한 전장에서 발휘하며 체계적으로 쓰려면 개인이 머리를 더 써야 한다. 그리고 전투 중에 자신이 감각하는 시간과 동작하는 순간을 더 잘게 쪼개서 한 시도 버리지 않고 움직이며 또 다음 동작을 위한 예비와 준비로 사용해야 했다.


자신만의 더 촘촘하고 지독한, 고유한 계획과 스타일을 완성시켜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

한 인간이 두 일을 해내려면 결국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다.


모든 이도류가 그러하다. 다른 이들이 하나에 집중할 때, 두 가지를 하면서 모두 성과를 내려면. 그리고 그 시너지로 1에 집중했을 때보다 총합적 결과에서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A와 B계통을 ‘1’만큼 익힌 사람한테는 지지만, 0.7까지는 무조건 익힐 수 있다면, 그리고 다른 이들이 A에 1을 집중하느라 B는 0.5밖에 해내지 못한다는 법칙이 있다면.

그러면 이도류인 이들은 B가 0.5인 A플레이어에겐 B의 전장에서 승리를 하고, 반대인 B플레이어에겐 약점인 A로 싸우는 전략을 짜서 승리하면 된다. 그러면 총체적인 시간과 노력, 재능은 같은 1.5-1.4언저리에서 끝나지만 그 스위치switch(체육 시합 따위에서 공수나 멤버를 전환하는 전략)가 완벽하다면 누구를 상대로도 이겨볼만한 플레이어가 되는 법이다.


두 종류의 칼을 들어놓고 그것이 유연하게 바뀌며 공조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를 방해한다면, 듀얼 클래스를 익히는 방식은 그저 초라한 잡캐(雜캐릭터Character, 잡종 따위의 의미로 게임에서 육성 전략에 실패한 캐릭터를 낮잡아 부르는 말)를 만드는 일에 그치고 말 테다.


두 가지 일을 번갈아 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도리어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낼 수 있는가. 그것이 듀얼Dual 계열을 자신의 스타일로 삼은 게이머들에게 부과되는 테스트이다.


제냐는 남들보다 조금 더 복잡하며 헷갈릴만한 일을 하는 데 있어 나름의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바깥, 곧 현실에서 삶을 살며 잡기를 익히는 데 능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이 두 종류 스타일에 대해서 그럴 뿐이었다.

늘상 잡다한 공상을 즐기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성격이긴 했다, 늘. 공부를 하면서도 어느새인가 다른 길로 새서 결국 여러 분야나 과목을 익히기는 한다.


한 가지 거대한 테두리 내의 다양한 작업 분화에 대해 재능이 있는 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공부를 하는 건, 도서관 한 구석에 앉아서 여러가지 교과서를 번갈아 보면 될 뿐인 일이었으니까. 분명 다른 일이고 여러가지 종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같았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는 일.


게임 내의 작업도 그는 그렇게 느끼는 지 모른다.


파이어 볼이 날았다.


어둠을 갈라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지나쳐서, 화염구가 오크의 대가리에 맞는다.


그것은 유동체, 개중에서 질퍽한 액체처럼 변형되었다.


밀가루 반죽이 어느 고체에 부딪힌 듯 오크의 대가리 형상에 따라 움푹 들어갔고, 그 바깥 부분들이 튀어나가 대가리 전체를 감싼다.


그건 농밀한 화염으로 이루어진 불의 구였고, 곧 지옥의 온도가 오크를 태웠다. 키이이이! 그에 걸맞은 비명이 성대를 긁어 울린다.

게임이라는 사실이 없다면, 현실에서 듣는다면 소름이 끼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느 도축장 따위에 가서 소, 돼지의 단말마만 경험해도 사람이 진이 다 빠지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 지나친 자극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의 신경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소리나, 자극적인 비쥬얼들이 곧이 곧대로 뇌에 각인되지는 않게끔 한다. 휘발성의 기억처럼, 혹은 정신없는 와중에 흘려듣거나 보는 영상처럼. 그렇게 주의가 흐트러졌을 때 사람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일시적으로 유도해 어딘가 멀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광경처럼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통각에 대해서 둔하게끔 하는 신경적 보호 시스템이 있는 것과 같았다. 정서적으로 별 문제가 없고 무리가 없는 일들, 일상생활에서도 볼 법한 풍경이나 혹은 아름다운 자연의 장관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없다.

좋은 기억은 오래.

지독한 기억은 기억에서 흘러가버리게끔.


게임 내의 시스템은 유저들을 그렇게 인도했다.


초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갈색 오크 개체, ‘쿠르륵’의 신경계가 타들어가듯 격렬한 신호를 뇌로 전달했다.

아찔한 열감과 함께 뇌리가 고통으로 가득찼다. 시야가 흐리며 붉은 불길 사이로 흐릿한 시선이 적을 쫓는다.

이미 화염은 물리적으로 오크의 신경 계통을 태우고 있었다. 시각 역시 불길이 눈으로 들어가며 사라졌어야 하지만, 강인한 짐승의 신체는 얼마간 버틴다.


쿠르륵이 쌍도끼를 들었다.


적의 냄새, 가 났던 곳은 깨나 멀다.


그것이 달렸다. 최후의 달리기라도 되는 양 미친듯이.


머리에는 불길이 타오르지만 기세는 죽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냄새로 상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두터운 몸이 그 팔다리를 흔들면서 빠르게 뛰었다.


발바닥 아래의 흙이 패인다. 강력한 대시Dash에 자갈 따위가 튀긴다. 퍽, 퍽. 소리를 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뛴다. 냄새가 가깝다.

시야는 그새 거의 사라졌다. HP가 상당량 줄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상당’량에 불과했으며, 수치로 봤을 때 반절 이상이 남았지만 맞은 부위가 좋지 않았다. 얼굴에 몰린 감각계에 부상이 심하다. 전투 능력은 HP의 하락보다 훨씬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 번의 방심이 목이 날아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실전(게임이지만, AI인 오크를 의인화하자면)에서 감각의 마비는 치명적이었다. 그저 좋은 샌드백, 커다랗고 움직이는 표적지에 불과한 꼴이 된다.

그 때 전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상대도 자신과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끌어당기는 것. 세밀한 감각이 필요 없는 진흙탕 난전, 제로 거리의 난타전으로 초대하는 방법이다.


전진밖에 남지 않은 놈이 희미한 후각의 잔향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갔다. 어두침침한 오크의 시야다. 그 검은 광경 속에 색으로 친다면 누르스름한 연기 한 줄기가 빛나며 얇게 이어지는 것 같으리라.


그 줄을 따라가면 제냐가 있다. 제냐가 더 빠르다.


하지만 제냐 역시 마주 달려들었다.


상대가 어느 정도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HP도 빠지고 상태도 안좋아진 갈색 오크 한 마리는 별다른 부상이 없는 제냐를 결코 맞상대해서 이길 수 없었다.

갈색 오크 한 마리라면, 사실 제냐가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칼만 들고 붙어도 이길만한 대상이었다.


여러 마리이기 때문에 이토록 빙빙 돌아왔을 뿐이다.


제냐 킴도 마지막 정도는 화끈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왜인지 모를, 시나리오의 부속에 불과한 오크의 움직임에 감정 이입이라도 되었는지 모른다.

비열하고 교활하며, 혼돈스럽기 짝이 없고 인류를 적으로 여겨 먹어 치우는 괴물 새끼들이었지만.

굳이 그럴싸한 역할을 부여해주자면 ‘전사’의 그것과 닮아 있을 것이다.


제냐 역시 전사의 일종이었다.


그 현실의 몸뚱이는 허여멀건, 실내등 아래에서 공부만 파고 있는 대학생에 불과했지만.


어떤 현대인도 야성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성정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스포츠였고, 약간 강도 있는 레저였으며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서의 전투였다.


한 쪽의 불길이 타오르듯 전의가 끓자 제냐 역시 마주 끓었다. 자연스러웠다.


제냐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숨을 가라앉히고 다가오는 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눈을 잃은 전사와 두 눈 버젓이 뜨고 카운터 어택Counter attack을 노리는 전사. 어느 쪽이 유리한 지는 말할 의미도 없다.


쌍도끼를 든 놈의 왼 팔이 올라갔다. 아주 올라간 건 아니었다. 슬쩍. 냄새로 파악하는 건지, 대충 거리는 잡고 있는 것 같다. 타이밍에 맞춰 휘두르려고 간을 보는 듯하다.


그 정도의 감각과 머리씀만 하더라도 오크 치고는 놀라운 수준이다. 제냐는 기다린다. 도끼와 비스트 슬레이어의 거리는 비슷하다. 오크가 훨씬 거구이고, 도끼 역시 그에 맞추어 거대한 놈이라 그렇다.

팔다리가 짧고 투실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2m가 넘는 거체였다. 달려드는 기세로 친다면 상당한 원거리 타격이다. 근접전에서는.


한 발, 두 발. 더 다가온다. 서너 걸음쯤 앞에 있었다. 제냐는 오크를 노려봤다. 말이 달려드는 것 같다. 중갑옷을 껴입은 자이언트 피그Pig. 시야를 매우는 거체의 돌진은 기병 앞에 선 보병의 심정을 약간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찌를만한 곳이, 정면에서 노림직한 큰 부위는 얼굴 뿐이다. 잔열이 남았다. 연기가 달려드는 와중에도 그 면상에서 계속 피어오른다. 빛의 입자가 얼굴에서 쏟아진다.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빛의 입자가 표면을 가렸을 뿐 그 내부는 멀쩡하다는 의미이다.


하나, 둘. 제냐가 속으로 숫자를 셌다. 무게 중심을 살짝 들며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게 몸을 살짝 띄웠다. 양 발의 끝과 뒤꿈치는 땅에 대고 있다. 발바닥을 오므리며 준비한다. 탈력감을 유지하고 허리 부근에 힘을 주고,


오크가 도끼를 들어 휘둘렀다. 대각선. 오크의 좌수가 올랐다 허공을 쓸어내린다. 부웅, 하는 파공성. 두려울 정도지만, 맞지 않으면 두려움 뿐이다. 아무 상처도 없이 지나가는 일격이다. 제냐의 시선에서는 우측에서 좌측 하부로 내려오는 궤적이다. 그냥 뒤로 뛰었다. 오크는 한 걸음, 그리고 한 도끼가 더 남았다. 몸이 기울 정도로 휘둘렀다가, 오크가 놀랍게도 한 바퀴 돌았다.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해서 앞으로 내딛은 발을 축 삼아, 턴을 했다. 춤을 추듯한 동작인데 그 육중한 몸이 용케도 흔들림없이 해냈다. 오른 손에 든 도끼가 그 회전력을 담아 날아온다. 한 바퀴 날아돌아, 우수의 도끼는 뒤돌아베기의 자세였다. 무술의 단초라고 볼 수 있었다. 우연이든, 오류든, 돌연변이든 뭐든.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와 베려 하는 무딘 도끼 날에 제냐 역시 살짝 당황을 했다. 예상 밖의 움직임이다. 다만 오크는 제냐보다 훨씬 크고 팔이 높다. 뒤돌아베기의 각도를 아래로 세세하게 조정하지는 못했다. 제냐의 위치에선, 머리나 어깨 즈음에 걸릴 법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아래로 기운 팔과 도끼의 연장선이라 더 높다.


왼 손에 들렸던 도끼는 힘을 잃었고 공격에 쓰이지 않는다.


순간의 순간에 제냐 킴은 한 걸음 성큼, 들어갔고


오크의 허리 부근에 아래로 축 늘어진 왼쪽 손 도끼를 발로 퍽, 찬다.


물론 허리를 접고 고개를 숙이며 아래로 파고든 것이다. 거치적거리는 다른 쪽의 도끼를 밀어내며 그 겨드랑이 즈음으로 들어간다. 제냐는 기형적인,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해냈다. 탄력과 유연성, 근력이 모두 필요한 무용 동작의 하나같기도 하다. 대거를 역수로 쥐었다. 그대로 올려치듯 오크의 겨드랑이에 가져다 댄다. 찍으려 했지만, 오크도 움직인다.


그대로 크게 들었던 오른팔 겨드랑이를 깊게 베었다. 키익, 하고 잔 신음을 내뱉는 것 같았다. 제냐도 정신이 없다.


한 바퀴 도는 오크의 궤적에서 반 발짝 떨어져야 했다. 옆으로 빠져 나왔다. 볼품없이 나온다. 제냐도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뛰어서 바닥에 닿았고, 그대로 구르듯 멀어졌다. 오크는 회심의 일격이 실패했고 도리어 자상을 입었다. 그 부위 역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일어난다. 독 역시 발려 있었기에 움직임도 둔해지리라.


소모전이 된다면, 제냐가 유리했다. 무수한 황야 지룡을 잡아낸 방식이었다. 지룡의 발톱 대거로 지룡을 잡아왔고, 관련된 칭호마저 얻어낼 정도였다.


그에 비한다면 갈색 오크는 격이 조금 떨어지는 상대다. 이족 보행형 괴물이 내뿜는 투지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만. 의지 높은 인간의 전사가 연상이 될 정도로.


빙글, 손 안에서 대거가 굴렀다. 손잡이를 쥐고 한 손으로 몇 바퀴든 돌릴 수 있었다. 손에 완전히 익은 무기다. 카아아악!


오크가 발악을 했고, 그 불타버린 얼굴은 빛으로 덮여 있다. 그것이 방향을 찾았다. 제냐는 몇 번 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르륵’이 자신 쪽을 바라보자 가차 없이 바로 한 발을 앞으로 디뎠다.


팔은 어깨까지 써서 붕, 큰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다. 앞으로 쏘아낸 대거가 직선으로 날았다. ‘투척’ 역시 그가 갖고 있는 스킬이었다. 원래 대거류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더 잦은 사용법이리라.


붉게 이글거리는 듯한 검날이 곧게 던져져 오크의 미간, 즈음으로 보이는 곳에 박혔다. 빛으로 덮여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골과 내부의 장기를 파괴했다. 골수까지 깊이 들어가 쇠와 열, 독이 헤집는다.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오크는 그대로 절명했다. HP가 얼마나 남아 있었든 상관없이, 별다른 특이성이 없는 몹은 뇌가 없이는 활동할 수 없다. 여타의 짐승들이 그렇듯. 상식선에서 그 끈질긴 강력함이 발휘되는 것이다.


단말마도 없이, 거친 기세로 콧김을 뿜는듯, 헐떡거리는 어깨로 전투를 이어가려던 놈이 끝났다.


쿠르륵이 다운되었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쿵!


시원한 소리가 났다. 전사의 마지막이다.


제냐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목관절을 풀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타닥거리며 허물어지는 부락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인다. 구조물들은 듬성듬성 있으며, 부락이라는 티만 날 정도로 지어진 시설물들이다. 그것들이 전부 화마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오크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싸우는 소리도 없다.


최태현은 명사수였고, 강력한 기력술을 사용한다. 초보자, 혹은 중급자에 한 발 걸친 그 언저리 수준에서 그는 상위권의 강자였다.


오크들은 모두 죽었다.


[갈색먼지 숲 남부 1섹터에서 갈색 오크 부락을 없애시오. 갈색 오크 부락 구조물 10/10, 갈색 오크 27/27]


제냐가 인터페이스를 눌러 퀘스트 창을 열었다.


어느새 끝나 있었다.


화려하게 캠프 파이어를 한 것처럼 불티가 날리고 연기가 하늘 위로 오른다. 어둔 밤 부락 하나가 끝을 맞았다.


“쩝.”


전투를 끝낸 제냐가 입맛을 다셨다.


오늘의 게임은 길었다. 정신밖에 쓴 것이 없지만 피로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최태현을 불러 아이템 박스를 같이 정리하고, 돌아가야 하리라.


집중한만큼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이건 그런 게임이었으니까.


현실에서도, 무언가를 노력하면 그만큼 얻게 마련이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었으므로, 요구되는 경험치량이 압도적이며 현실의 무게와 절망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 단 열매를 맛보지도 못한다만.


즐겁게 즐겁게.

뭐든 그렇게 해야 했다. 제냐는 대거와 비스트 슬레이어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불꽃 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 캐릭터의 피부에 닿아 느껴진다.


*

akhil-lincoln-sO94qN81FYI-unsplash.jpg


작가의말

음 뭐.


2권 분량이 끝났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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