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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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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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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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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20. 불타는 숲

DUMMY

*


불타는 숲.


화재는 부락 너머까지 번져나가지는 않았다. 게임 내의 시스템은 변수를 은근히 차단하는 면이 있었다. 고의적으로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지간해서는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는 어렵다.

물론 일부러 불을 놓는 방화범들의 행각까지 막으면서 게임의 리얼리티와 자유도를 해치지는 않았다. 현실의 정돈된 사회 속이라면 그럴 수 없겠지만. 게임 내에서, 얼마든지 불지르기는 전략적인 용도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자신이 당해야 하는 면이 있다. 리얼리티를 살린다는 취지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면 그 어려움 역시 캐릭터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숨을 쉬기 어렵고, 고온으로 달아오른 대기와 다양한 유독성 기체들이 폐부로 들어온다. 피부가 달아오르고 불길이 치솟는 곳에서 잠시도 버틸 수 없다.

내화성 도핑 물약이나 스킬, 아이템, 뭐 다양한 종류의 강구책이 없다면 그대로 게임 오버다.


잘못 저질렀다가 순식간에 거대한 필드가 전소되고 그 내부의 게이머들이 단체로 게임에서 퇴장당할 수도 있었다.


의도적인 P.K(Player Killing)를 배제하기 위해 어떤 개연성 없이 유저들을 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물론 운영사의 제재를 받을 수는 있다.

일반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려는 동선을 과하게 방해해서는 안되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선은 애매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확실하나. 시나리오 온라인이 제공하는 컨텐츠를 즐기기 위해 본인의 게임 플레이에 충실하다가 생기는 사고들은 ‘게임적’인 일이었다.


컨텐츠 플레이가 아닌 악의적으로 다른 이들의 여가와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기 위한 행위는 게임 내적 행위가 아닌 게임 외적의 인격적 문제로 판단하고 게임 내에서의 활동에 제재가 가해진다.


어떤 인간이 어떤 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는가, 하나의 행위를 하기 전에 게임 내에서 그 캐릭터가 어떤 역사를 만들어왔는가, 를 판단해서 악의적인 트롤링Trolling(게임의 시스템을 망치고 플레이를 방해하는 악의적인 행위. 혹은 협동 게임에서 실력이 아주 낮은 사람을 향해 원망을 토해낼 때도 쓰인다)인가 건전한 게임 플레이의 수순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행동의 역사가 있고 개연성이 있으며, 일관성이 있다면 그래도 참작될 여지가 있다. 개연성이 있게 모든 플레이와 캐릭터 육성, 퀘스트 진행을 하면서 또라이 짓을 했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길이기는 하다.

그 플레이 스타일에게 시스템이 수여하는 보상은 어마어마한 패널티와 하드 모드의 난이도이니.

그것들을 견뎌낸다면 어떤 의미로는 가장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을 틈바구니에서 잘 이용하는 게이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게임 내에서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짓거리를 한다면 그건 운영진이 행동 이전으로 게임 내 데이터를 회귀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고, 사례 역시 종종 있어왔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이 게임 플레이보단 다른 사람에게 악의적으로 행동하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구는 건 어느 온라인 게임에나 생기는 양태이다.

현실에서의 삶이 쓰레기이듯, 다른 곳에까지 그런 쓰레기를 옮기는 일이었다.


그런 경우에 초보자 존에서 맥락도 없이 P.K당한 뉴비 캐릭터들은 부활하고, 게임 내 캐릭터 살해 행위를 한 이들은 대륙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게임 내 캐릭터에게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치닫는 수위의 처벌들이다.


어쨌든 그런 불 속에서.


일렁거리는 화마의 부락 속에서 또 어스름한 달빛의 아래에서 몇 마리의 오크들이 살아서 병장기를 꼬나쥐고 움직였다. 그 내부에 한 명의 인간 전사가 있었고, 멀리서 원호하는 궁수가 부지런히 철시를 날려대고 있다.


번져오는 불길이 매섭다. 움막들의 위치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때마침 숲 안에 바람이 불면서 부락 내부에서 이곳 저곳으로 번져갔다. 그래도 아마 바깥으로까지 가진 않을 테다. 시스템은 의미없고 우연한, 또 갑작스러운 대재앙을 반기지 않는다.

‘우연’에 의해서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 쪽으로 정리될 것이다.


제냐는 대거를 든 손으로, 파이어 볼을 발동시켰다. 입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파이어 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지점으로 조정하려면 다소의 시간이 걸린다. 여러 종류의 초상 스킬을 익혀서 다양한 상황과 설정값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의 캐릭터 신체라면 여유롭게 변용을 줄 수도 있었다.

‘제냐 킴’이라는 캐릭터는 아직 초상 기술에 그만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도 아니라면 김서원 자체가 감각적으로 MP를 다루는 일에 능숙함을 보여야 할텐데, 그런 종류의 재능은 없었다. 차분히 연습을 해 볼 시간도 없었고.


결국 급작스럽게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초상 스킬은, 늘 같은 자리이다. 오른 손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전방.


‘오른 손 앞’만 비슷하면 된다. 거리는 조절이 가능했고, 제냐는 그냥 대거의 자리에 불길을 일으켰다. SP, 곧 MP(정신력 에너지)로 만들어진 불꽃이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불과 제냐가 몇 걸음 앞에 오크를 두고 달려가면서 한 짓거리다.


대거의 손잡이부터 온 검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과 대거는 같은 자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SP가 겹친다. 대거에 있는 SP역시 일으켰다. 인챈트Enchant는 초상 스킬로 아이템에 SP를 부여하는 작업이었고, 이미 만들어진 무구를 한 단계 위의 성능으로 강화시키는 공정이다.

발톱 대거는 화염의 SP를 갖고 있었고, 대거에 담긴 SP를 제냐가 유용할 수는 없었지만 공명시킬 수는 있던 모양이다.


제냐는 부지불식간에 아티팩트 류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서 깨우쳤다. 아니, 아직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전투의 상황 중이었고, 되는대로 가용한 수단들을 모조리 쓰고 있을 뿐이다. 원리에 대해 인지하고 응용을 하려면 몇 번의 시도와 실전이 더 필요하리라.


어쨌든 제냐의 SP와 대거의 화염 속성 SP가 서로 시너지를 내면서 위력이 강맹해졌다. ‘파이어볼’이 일시적으로 대거의 불에 호응하며 섞였다. 기력술을 고급 경지까지 익히면 유형화된 기운은 무구의 바깥으로 새어나와 강철의 칼날보다 훨씬 단단한 칼날을 형성한다.

마치 그런 현상처럼, 대거는 제 몸집보다 큰 불길로 옷을 입었다. 카타나를 든 놈이 조금 더 빨랐다. 할버드를 든 녀석은 움직임도 공격도 반 박자 정도는 느리다.


굳이 먼 거리에 있는 카타나를 향해 갔고, 놈이 호응하듯 제냐에게 마주 다가왔다. 둘의 속도가 겹치자 금방 만났다. 카타나는 대각선 베기다. 제냐의 시선에서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휘두른다. 칼날이 살아 있었다.

오크 주제에, 갖고 있기에는 제법 명검이다.


제냐는 불꽃의 대거를 그 자리에 댔다. 무식한 짓거리였다. 어지간한 작은 체구의 사람만한 키. 그 키만한 검신을 지닌 카타나의 일격에 고작 손바닥보다 조금 더 긴 검날을 가진 대거를 가져다 댄다는 것이 말이다.

질량의 차이가 있었다. 거대한 일격은 재빠르기까지 했다. 대신 제냐는 다가가던 중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적절한 지점이었다.


카타나 오크, 그러니까 저들의 신호로는 ‘쿨럭’이 한 걸음 더 제냐 쪽으로 다가왔다. 제냐는 느려지거나, 혹은 멈춘 상태에서 그의 일격을 맞았고 그 순간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을 할 여력이 남아 있는 때였다. 보법이 발동되었고, 제냐는 눈 깜빡할 새에 자세를 바꾸어 카타나가 휘둘러지는 방향으로 뛰었다.

제냐의 시선에서 오른 쪽이다. 하단베기라지만 어쨌든 오른 쪽으로 휘둘러지는 검격이었다.


대거를 슬쩍 가져다대었고, 그것으로 공격을 무마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 칼날만 막으며 길게 뛴다.


카타나의 궤적에서 벗어나기가 무리였기에 저지른 짓거리였다. 불길에 휩싸인 대거는 일순간 아이템으로서의 내구도 역시 강해졌다. 총체적인 내구성, 그러니까 수치상의 값은 변하지 않았지만 한 순간은 더 강한 충격에 의연하게 버티는 경도와 강도를 갖게 되었다.

일시적인 것이고 그렇다 해도 약간의 내구도 수치 하락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제냐가 카타나의 방향대로 밀려났다. 옆으로 뛰었기에 카타나의 궤적을 아예 벗어나기까지 자연스럽게 밀리다가,

그럼에도 그 길이 때문에 끝이 걸릴 듯하여 그냥 자리에 엎어진다.

대거에 가로막힌 검날은 제법 저항감을 느끼며 속력이 죽었고, 제냐는 땅바닥을 기듯 엎드러지며 칼날을 피했다.


불꽃에 휩싸였던 대거가 그냥 날아가버렸다, 마지막 순간에는.


제냐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자세였다. 김서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웅크리더니 앞으로 뛰듯이 굴렀다. 몇 바퀴를 구르자 카타나를 든 놈의 뒤였다. 둔중한 오크가 자세를 바꾸기 전에 이미 김서원은 일어나 있었다. 한 손에는 비스트 슬레이어가 여전히 들려 있다.


검신은 미약하게 녹빛을 띄고 있다. 어떤 금속의 속성인진 잘 모른다. 둔중한 검날은 파괴에 용이하다. 오크에게도 잘 먹힌다. 할버드를 든 놈은 우왕좌왕하다가 제냐에게로 곧바로 덮쳐든다. 오크의 걸음으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제냐는 MP를 소모해서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날을 강하게 만들었다. 카타나를 든 놈과 검술 승부를 해야 하나.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다시 붙었다. 팍, 하고 땅을 박차며 들어간다. 거대한 검신은 제로 거리의 박투에는 영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대거를 쓰려고 했던 거였는데, 카타나에 밀려 날아갔고 뒷자리 흙바닥에 박혀 있었다.


대거의 표면에 일어났던 불길이 다 해소되지 않아서 아직도 이글거렸다.


그것이 어찌되었든, 제냐는 비스트 슬레이어의 그립을 양손으로 잡으며, 옆으로 늘어뜨린 채 달렸다. 카타나를 든 놈이 반대 방향으로 늘어뜨리더니 가로 베기를 해온다. 제냐가 다가갔으므로 금새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갔다. 또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제냐가 양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비스트 슬레이어를, 이번엔 전력으로 카타나의 공격에 마주 대었다.


거리감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제냐는 다가가다가 한 걸음을 덜 갔다. 카타나 검신의 끝부분, 첨단과 비스트 슬레이어의 가장 힘이 잘 받는 구간이 맞부딪혔다. 먼 거리에서 힘을 내는 오크의 장신이 버겁다. 완력적으로 지지만 검극에 힘이 실리는 부분에 온 무게를 실어 버티는 제냐는 만만치 않다.


챙! 카칵, 하고 두 개의 검날이 서로 쓸렸다. 아슬아슬하게 맞은 카타나가 힘을 잃었다. 아래로 떨어진다. 제냐는 그 틈에 다시 파고 들었다. 칼을 대고 누르는 것만으로 단단한 물체를 벨 수는 없었다.

거리가 곧 힘이었으니, 제대로 베어내기 위해서는 준비 동작이 필요하다.


카타나의 검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그대로 사선으로 떨어진 외날검의 몸체를 미끄러지듯 타고 달려갔다. 대거가 없는 게 아쉽다. 아쉬운 대로, 비스트 슬레이어를 갈겼다. 카타나를 막으면서 다가가면 비스트 슬레이어가 아래로 떨어진 자세다. 그대로 달려간 기세를 살려 호쾌하게, 위로 쳐올렸다.

스킬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MP가 실려 기력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비스트 슬레이어는 충분한 파괴력과 절삭력을 가진 무기다.


오크는 마침 하체 부위의 방어구가 다소 부실했다. 가랑이 부분에는 다 헤진 가죽 정도만이 있었고, 하드한 갑옷 부위가 전혀 없었다. 비스트 슬레이어는 그 지점을 시작으로 뱃거죽을 지나 명치 부근까지 갈색 오크의 내면을 탐구하고 바깥으로 다시 나왔다.


호선을 그린 녹빛의 검날에 빛의 입자가 묻었고, 허공에 멈추지 않고 한 번 촥 털어냈다. 크리티컬 히트였다. 타이밍이 좋았고, 마침 갑옷 부위가 공격 방향에 알맞게 비어 있었다. 비스트 슬레이어는 짐승을 잡았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회복은 불능이었고, 얼마간 움직일 지는 모른다.

아무리 터프한 괴물이자 귀신의 일종이라고 해도, 이 오크가 몸통에 든 내부 기관을 다 쏟아내면서 살 수는 없었다. 물리적인 육신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었으니. 제냐는 그것으로 카타나 오크를 끝냈다고 느꼈다.


그 거체가 비틀거린다. 제냐는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럴 수 있다. '전투 감각'이라는 스킬은 쉬지 않고 연전을 펼치면 얻을 수 있는 기본 스킬이었다. 난전 속에서도 들어야 할 소리나 기척을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감각으로 느꼈을 때, 쓰러지는 카타나 오크 너머에서 할버드 오크가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오크의 몸체 바깥, 오른 쪽으로 시야를 돌리자 과연 감각과 일치하는 시간대에 할버드의 끄트머리가 뻗어 있다. 그대로 크게 베어내는 궤적이다. 제냐는 높이를 가늠했고, 바닥에 냉큼 엎드렸다.

몸을 둥글게 말아 흙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절을 하는 것도 같았다.


쓰러지던 카타나 오크의 옆구리를 패핵, 하고 둔중한 쇳덩이가 쳤다. 그렇잖아도 치명상을 입어 죽기 직전의 상태였던 오크는 'ㅏ'자로 참상을 입으며 절명했다. 눈빛의 선명함이 사라지고 의식을 잃는다. 빛의 입자가 엎드린 제냐의 근처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충격을 받아 옆으로 넘어간 카타나 오크의 발에 채였다. 제냐는 그대로 거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다시 굴렀다. 왼쪽 대각선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마구잡이로. 칼을 든 채로도 용케 굴러내서 일어났는데, 할버드 오크의 바로 아래였다.

제냐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제 몸을 던졌다.


다시 자세를 잡고 비스트 슬레이어를 위로 들었다. 할버드 오크는 제 몸으로 휘두른 병기의 질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복이 느렸다. 제냐가 훨씬 빠르다. 그는 파이어 볼을 형성했다. 구체조차 아니었다. 양 손으로 그립을 쥔 자리에 불길이 치솟았다.

비스트 슬레이어는 기력술에 용이하다. 인챈트 따위로 등급이 오른 대거보다도 조금 더 그렇다. 아이템에 속성이 딱히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불의 SP도 받아들일지 모른다.


불확실한 시도는 성과를 보였다. 파이어볼의 불길이 그립을 지나 검신까지 뻗는다. 의지력을 발휘해서 불꽃을 조절했다. 융화가 되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비스트 슬레이어의 칼날에 머물고는 있었다.

시너지가 있는 방식인지는 모른다. 곱셈의 위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반적인 공격보다 조금은 더 강하겠지. 제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들었다. 보법은 제냐를 최단 거리의 공격 동선으로 이끌었다.


강하게 땅을 박차면서 마치 레슬링의 태클을 걸듯 다가간다. 검을 든 결투에서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간 어디 한 구석이 날아가게 마련이었지만, 그 정도 동작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근력과 순발력, 또 동체 시력 따위가 있다면 가능한 전법이었다.

달려드는 것처럼 빠르게 휘둘러지는 상대의 검날의 궤적을 보고 피할 수 있다면.


다행히, 상대의 공격을 피할 기회는 없었다. 할버드를 든 놈은 생각보다 조금 더 느렸다. 오크가 움직이는 것보다 넉넉잡아 한 호흡 하고 반은 빨리 제냐가 준비를 마쳤고, 남은 시간동안 그는 오크가 걸친 판금 갑옷의 부서진 자리를 찾아 검날을 꽂아 넣을 수도 있었다.


쑤욱, 하고 비스트 슬레이어가 화염과 함께 갈색 오크의 가슴팍을 가르고 들어갔다가, 금새 나왔다. 그 거죽이 열리면서 빛의 입자가 보였다. 그리고 흐르듯 떨어져 나온 뒤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키이이익!" 하고 할버드 오크가 울었다.

사정을 봐 줄 여유는 없었다. 그냥 돼지라고 하더라도 고기를 위해서는 잡아야 한다. 거기다, 돼지의 대가리를 가졌을 뿐이며 그보다 머리 두 개는 크고 쇳덩이를 휘둘러대는 괴물을 상대 중이라면 더욱 망설일 수 없다.


제냐는 오크의 왼 다리에 갑옷이 없는 걸 보고 바로 비스트 슬레이어로 주욱 긁으면서 뒤로 빠져 나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벌써 다른 놈들이 지척이었다. 제냐는 원기둥의 표면을 긁듯 검날을 대고 자르면서 돌았고, 뒤에서 다시 허벅지 뒷부분을 찔렀다.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날이 오크의 다리 앞 면으로 나왔다. 그리고 왼 손을 들었다.


구체 형태를 만들 겨를도 없이 불길이 치솟았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그냥 열량만 있으면 된다. 아주 약간의 폭발력도 있으면 좋고. 대강 형성한 그것을 오크의 상처 구멍에 쑤셔 넣듯 가져다 대었다.

불길이 제냐의 의지력에 따라 약간 전진했고,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날로 만들어진 그 틈새를 열고 들어간다. 쾅! 하고 폭음이 일면서 오크의 다리 내부에서 폭발이 있었다.


그 내부 근육이나 뼈가 상하고 날아갔다. 강력한 불꽃으로 사라지지 않은 부위의 신경들도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제냐가 보는 건 그저 어둔 밤하늘 아래, 불티처럼 흩어지는 빛의 입자들과 그 입자가 모여 만들어진 신체 내부의 단면 뿐이었지만.

어쨌든 시스템 상 있을 건 다 있고 적절한 위치에 데미지를 가했다면 그에 맞추어 기능이 떨어진다.


오크는 왼 다리를 잃었다. 제냐는 살 부위를 꿰뚫었던 비스트 슬레이어를 검날 방향으로 움켜 쥐고, 앞으로 빼냈다. 오크의 다리 반쪽을 갈라내면서 검이 나온다. 손에 걸리는 감각이 아주 묵직하고 저항감이 있었다.

거죽도 살도, 오크는 거체를 유지하는 만큼 질기고 단단했다. MP를 슬레이어의 검날에 바르지 않았다면 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냐는 MP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빈혈기가 돌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금 더 낭비하면 아마 올 것도 같다. 그의 MP가 2000을 넘었는데, 대략 4분의 1 정도 남으면 이렇게 된다. 제냐는 생각하면서 움직였고 또 주변에 대한 시야를 유지했다.


앞 선 세 마리를 잡는 동안 뒤에 있던 놈들이 다가왔다. 한 놈이 그의 뒤에서 철퇴를 들고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제냐는 할버드 오크의 마무리를 하진 않았지만, 일단 냅다 달렸다. 어쩔 수 없다. 자신보다 거대하며 HP량도 많은 상대를 잡을 때는 히트 앤 런 전략이 유효했다.

갈색 오크 한 마리 한 마리는 제냐보다도 체력 포인트의 양이 적었지만, 십 수 마리의 HP를 모두 합친다면 순식간에 준보스 급 대형 개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초보자 존을 벗어나 본격적인 필드에서 중형 개체 이상은 10,000단위였다. HP가. 황야 지룡은 중형이었으나 뉴비들이 선택하는 저 레벨 도시의 근처 필드에 출몰하는 몬스터였다.

물론 그 비슷한 것들이 다른 필드에 있을 때는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룡'이라 이름 붙은 계열의 몬스터도 종류가 다양하다. 게다가 '황야 지룡'이라고 이름이 같거나 혹은 비슷한 놈들도 전혀 다르게 생긴 게 있었다.


초보자들이 상대하는 중형 몬스터 황야 지룡은, 정확히 '평화의 숲 근처 황야'에 서식하는 황야 지룡이었다. 다른 도시에 가서 임무를 받았다가, 그저 이름이 같다고 찾아가보니 아예 다르게 생기고 크기마저 아득히 다른 경우도 있었다.

퀘스트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보 수집이 필수이다. 게임 내에서 발품을 팔아 얻는 방법도 있었고, 바깥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따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정리된 공략본 따위를 보는 게 물론 가장 빠르고 편리하다.


게임 내부에서는 플레이어의 역량에 따라 얻기 힘든 고급 정보들을 얻을 수는 있었다. 남다른 행동거지로 NPC들의 호감을 특별히 많이 사던가, 혹은 명예 점수가 높아 콘란드 대륙의 시민들로부터 '적극적' 이상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다면 가능한 방법이었다.

물론 NPC들에게 굳이 직접 탐문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필드에 나가 관찰을 하고 발견을 하는 방법도 있다. 세계관 내에서 사상적으로 유해한 행위, 극악한 짓거리 따위가 아니라면 자유도는 현실에 거의 근접했다.


그것을 다루고 있는 초인공지능, 시스템 AI가 혁신적인 성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게임 스타일이었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창의성을 발휘한다면 정말 오만가지의 수단과 방법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갈색먼지 숲의 오크 부락을 처치하는 퀘스트 역시 그렇다.


제냐와 개멋진나 최는 경험치를 올리고, 사냥 컨텐츠를 즐길 겸 스스로 전투에 돌입했지만 면밀한 준비 뒤에 함정을 판다거나, 독이나 화재 등 인력으로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을 사용해 오크들을 몰살시켜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준비해 만든 결과라면 충분히 토벌로 인정받는다.


오크를 때려 잡고 있었는데, 그럴 일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혹시 자연적인 게임 내 시스템에 의해 벼락이 떨어져 그 개체가 죽어버린다면. 캐릭터의 전투 양상이 지속 가능한 상태였고, 또 절반에 근접한 HP를 깎아냈다고 한다면 사냥한 것으로 취급된다.

온전하게 혼자 잡은 것보다 경험치도 적고 전리품도 줄겠지만. '사냥을 했냐 아니냐'의 판단에 있어서는 한 것으로 친다.

그러나 얼마 HP를 깎지도 못했고 마저 깎을 가능성조차 희박한, 사냥자의 상태가 죽어가는 꼴이라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사냥한 것으로 치지는 않았다.


쿵!


하고 제냐가 벗어난 자리를 한참이나 뒤늦게 오크의 철퇴가 가격했다. 흙바닥을 패이게 만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삽이 없어도 저 짓거리만 반복한다면 깊은 구덩이도 팔 수 있겠다.


팔다리가 긴 놈이었다. 키가 2미터 50에 달할 정도로 컸는데 체구가 투실한 편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마르고 긴 놈이다. 그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움직이는데, 이동 속도는 빠르지만 세세한 동작은 조금 굼뜨고 세밀한 정확성이 부족했다.

저런 오크가 전투력이 급등하려면 '무술' 계열의 스킬이 필요했다. 오크가 그런 고난이도 동작 전반에 보정을 얻는 스킬을 얻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지만.


이지가 없고 향상심이 없는 괴물들이 스킬의 보정에 의해서 '연마'된다면 인류측, 플레이어측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다.


몬스터를 잡고 사역할 수 있는 혼돈, 악 성향의 희귀하고 특이한 클래스가 마음을 먹고 오크의 행동을 강제해서 익히게 만든다면 혹시 또 모른다.

그럴만한 품을 들였을 때 과연 오크 한 마리의 성장치가 들인 시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높을 지는 다른 문제였다.


제냐는 아예 자리에서 거리를 벌리려다가, 그가 있는 쪽에서 왼 쪽 멀리에 박혀 있는 발톱 대거를 발견했다. 기왕 줄행랑을 치는 것, 그 쪽으로 달음박질 쳤다. 금세 닿아 대거를 챙겼고 몇 개의 움막을 지나쳤다.


오크들의 태세를 살핀다. 그에게 다가온 놈이 한 마리. 그 뒤에 이어서 오는 게 또 하나.


저 멀리 최태현이 죽인 놈들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떨어진 자리에 두 마리가 살아 있었다.


할버드 오크를 뺀다면 네 마리 남았다.


쉬익,


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제냐의 시야에 철시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콱!


소리를 내며 그게 다리가 망가진 할버드 오크의 남은 다리에 박혔다. 종아리는 판금 갑옷이 남아 있었고, 허벅지가 없었는데 용케 맞추었다. 한 발 더 날아든다. 이번에도 그 옆을 쑤셨다. 기력이 담긴 철시가 깊이 박혀들어 그 끄트머리가 반대편 다리에서 나올 지경이다. 제냐가 멀뚱히 서 있는 사이 연사로 날린 건지 철시가 계속 날아들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렇잖아도, 원호가 간절했는데.


제냐는 비스트 슬레이어와 대거를 교차시키며 X자로 들었다. 양 손에서 파이어 볼을 일으킨다. 빈혈기가 조금 돌았다.


"......."


그 자리에서 대거를 허벅지의 홀더에 집어 넣고 급하게 IV라고 중얼거렸다. 인벤토리에서 푸른 물약 하나를 꺼내들어 까 목구멍으로 내용물을 넘겼다.


철시의 원호로 오크들이 잠시간 정신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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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 세슈칸에서. 23.07.05 38 4 31쪽
22 21. 불타는 부락 23.07.03 36 4 41쪽
» 20. 불타는 숲 23.06.12 41 4 24쪽
20 19. 보법 23.06.10 43 4 23쪽
19 18. 범영웅凡英雄 23.06.10 42 4 31쪽
18 17. '취륵'은 그렇게 죽었다. 23.06.09 48 4 62쪽
17 16. 파티 플레이 23.05.29 43 4 43쪽
16 15. 멧돼지 사냥 23.05.28 52 4 34쪽
15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2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8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7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8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7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3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8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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