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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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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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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5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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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5. 이성적 파이어볼

DUMMY

5.


“파이어볼.”


이라고 입으로 발음하지 않아도, 스킬은 사용할 수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초상 스킬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반응한다.

그건 신기한 감각이었다. 정신 에너지를 가시화한다면, 자신의 의식에 반응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둥그런··· 외곽선을 가진 찰흙 덩이와 비슷했다.


물론 질량감도 없었고, 그 정도의 단단함도 없다. 빛으로 이루어진 듯 생긴 자유자재의 물질이 신체의 내부에서 한 발자국 거리 정도까지를 움직이는 감각이다.


의식의 컨트롤이라는 건 생각보다 조금 집중하면 간단하다. 스텟stat의 보조를 받는다면 더욱 자유롭고 빨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외에도 사용자의 실제 집중력에 따라서도 약간의 성능 변화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가장 비슷한 감각은 아마 시선의 변화일 것이다. 시선을 두는 곳에 따라 움직이는 허공을 떠다닐 수 있는 일정 분량의 물체.


그 ‘정신 에너지’라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나리오 내부의 특수한 에너지는 게임 시스템이 보조하는 감각으로 플레이어가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정신력이나 집중력, 그리고 초월 방어력이라는 초상 스킬에 영향을 끼치는 스텟이 올라가면 더욱 그러하다.


MP에 대한 지배력은 여러가지 스텟과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형성되는 힘이었다.


원래는 없는 무언가가 밀접하게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지도록, 촉각과 시청각 등을 이용해서 플레이어가 인지하고 반응하게 만들어진 것이 정신 에너지였다.


제냐는 그런 MP를 다루어 이제는 사용할 수 있게 된 파이어볼 스킬을 발휘했다.


굳이 입으로 말한 건 여흥에 가까웠다. 한번쯤 해보고 싶지 않은가. 여태까지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걸 만들 수 있고, 그것이 흔하게 미디어 매체에서 다루어졌던 초능력의 일종이라면.

남자라면 한번쯤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서 필살기를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제냐가 입으로 뱉은 순간 그의 의지력은 움직이고 있었다. 의지력, 은 MP를 컨트롤하는 정신파의 일종이고 게이머들이 가칭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MP는 제냐가 느끼기에 흰 빛을 뿜으면서 그의 주변에 연기처럼 머무르다가, 그의 의사에 따라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여든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찰흙같은 그것이 제냐가 뻗은 오른 손 앞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한참을 응집한 그것은 전체의 크기를 오히려 줄여 축구공만한 크기가 되었다. 대신, 처음에 제냐의 몸 근처를 떠돌던 것보다는(시전자인 제냐의 눈에만 보인다)훨씬 단단하고 견고해보인다.


밀도가 높아진 것이다. MP의 집합체는 허공에 그렇게 떠 있었다.


지금 제냐가 있는 곳은 마을 바깥의 필드였다. 평화의 숲 옆 도시. 그가 스타팅 포인트로 삼은 거대한 성벽 안의 대도시에서 벗어나, 토끼 따위가 가끔 보이고는 하는 숲 길 근처였다. 옆으로는 탁 트인 평야가 인상적이다.


제냐는 평야 쪽으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중에 떠 있던 흰 빛의 발광체가 그 손짓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의지력이 더욱 집중도를 발휘한다. 제냐의 집중력과 정신력은 그리 높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오르는 정도였고, 그가 가상 점수를 중점적으로 투자한 곳은 지구력과 순발력이었다. 민첩성을 보유한 채로, 넓은 필드를 활보하면서 원거리 공격을 겸한 다양한 공격 옵션을 선택하는 것이 그가 정한 전투 형식이었다.


지금 배우고 익혀보고 있는 파이어볼 역시 그런 다양한 공격 옵션 중 한 가지였다.


어느새 레벨은 9였다. 부지런하게 일상적인 임무, 퀘스트들을 마치고 초보자 존Zone의 몬스터 캐릭터들을 사냥하다 보니 경험치가 올라 도달한 수치다.


파이어볼이 일반적으로 2레벨 정도만 되어도 안정적으로 사용 가능한 스킬이라는 점에서, 오버 스펙에 가까웠고 그의 지향점과 관계 없이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평야 쪽으로 뻗은 오른 손바닥 약 30cm 앞 부근에 희끄무레한 구체가 있었다. 그것은 점점 붉게 색깔이 바뀌어갔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불길이라기 보다는 붉은 색으로 빛나는 구체였다. 웅웅대는 작은 소리가 조금 들리는 것도 같았고, 제냐가 유심히 관찰하자 원형의 MP집합체 근처에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이런 사소한 현상까지 제어하는 시뮬레이터의 정밀성이 놀랍다.


파이어볼은 응용하기에 따라서 기본적이나 후반에서도 쓸만한 스킬이다. 모든 스킬이 사용자의 실력에 따라 그렇기는 하지만.


“훔.”


제냐는 왜인지 긴장이 되는 듯해 숨을 뱉으며 손바닥을 움직였다. 천천히, 팔을 옮기자 마치 실에 연결이 되어 달려오듯 붉은 구체가 움직였다. 조금 더 빠르게, 그가 의지력을 컨트롤하면서 손을 같이 움직이자 붉은 구체가 역시 따라온다.


손의 움직임보다 한 템포 반응이 느렸으나 그 속력 자체는 팔의 움직임과 비견되게 빨랐다.

발사형의 스킬이지만 결국 한 뼘 거리 너머까지 공격 범위를 늘일 수 있는 불의 주먹이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냐는 오른 팔을 붕붕 여기저기, 리듬체조의 리본을 다루듯이 흔들어대었고 불길이 아지랑이와 일렁임, 붉은 빛을 잔상처럼 남기며 따라붙는다. 어느 정도 속력이 되는지 잠시간 확인을 하다가, 손에 든 돌멩이를 집어 던지듯이 돌연 자세를 잡아 어깨를 틀었다.


“합!”


짧은 기합과 함께 야구 투수가 던지듯이 파이어 볼을 날렸다. 불의 구는 굳이 돌덩이를 던지듯 던지지 않아도, MP의 분배에 따라 추진력에 위력을 넣어 화살이나 총알처럼 날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응용을 한다면 추진력에 넣을 MP를 다소 아낄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암기를 날리듯이, 붕 떨쳐진 팔에서 그 끝에 달라붙었던 불의 구가 궤적 바깥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허공을 일직선으로 나는 불의 구가 한 스무 걸음 즈음 떨어진 자리에 있는 나무에 직격했다.


평범한 활엽수종으로, 이름은 모르지만 푸르른 상록수 하나의 한 가운데 직격한 파이어 볼이, 쾅! 하고 폭발음을 내며 불길을 터뜨렸다. 단순히 불이라기엔 MP가 모여 만들어진 일종의 ‘현상’이었고, 그것은 다양한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파이어 볼이라는 스킬에 담긴 시스템에 따라 공격 효과가 작용했다.


나무에 착탄한 볼이 부수어지며 불길을 바깥으로 토해냈고 나무의 한 가운데가 검게 그슬렸다. 그와 동시에 연이어 폭발이 벌어지며 후끈한 바람을 그 근처로 밀어냈고, 나무에는 2차적으로 강한 충격이 전해지며 가운데가 깊게 패이기에 이른다.


축구공만 한 크기였던 파이어볼이 터졌고, 그만한 정도 크기의 구덩이가 생겼다.


나무는 수령이 크고 제법 튼실한 거목이었어서 그것만으로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자연 훼손이었지만, 게임 내부이니 아무도 신경 쓰지는 않는다.

실제 세상에서도 이 정도로 인적도 없는 데다가 정해진 제도도 없는 무인도에서 벌인다면 아무도 신경 쓸 수도 없을 것이고.


“오호.”


제냐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원래 존재하는 사지 외에 다른 수족이 추가된 것이나 비슷하다. 그 감각은 보조 기구를 몸에 부착한 것처럼 어딘가 이질적이기도 했지만, 적응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운동 선수가 장구류를 제 몸처럼 다루어 가는 것처럼, 훈련에 따라서 그와 비슷하게 느낄 수도 있었다.


추가로 팔을 하나 더 달고 움직일 수 있다면, 만일 밸런스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그건 전투 상황에서 굉장한 이점이 된다. 더군다나 이 팔은 의지력에 따라서 신체보다 점차 빨라질 수도 있었고.

지금 그가 익힌 스킬은 파이어볼이었지만, 여러 종류를 습득하고 응용법 역시 터득해 나간다면 공격에 있어서 정말로 다양한 형태의 선택지가 나올 것이다.


그가 움직이고 익히는 스킬과 전략이 그만의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스킬 유저가 습득해나가는 전투법의 과정이었으나 어쨌든 제냐는 처음이었으므로 오롯이 즐거웠다.


여기에서 이제 미세하게 어떤 빌드 업을 해나가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 어마어마하게 플레이 스타일이 분화될 것이다.


제냐가 생각하는 것은 다양함, 이었다. 첫번째로 중요시하는 스타일의 컨셉은 말이다. 아예 궤가 다른 전략을 구사할 수는 없겠으나, 여러 스타일의 공통분모가 되는 기술들을 익힌 뒤에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변적인 전략을 쓴다.

상대의 눈을 속이고, 허를 찌른다.


솔로 플레이solo play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전법이었다. 혼자서 다양한 적들, 혹은 다수의 적들과 싸우기 좋은.


“쓸만한데.”


제냐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평소에도 사람과 많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게임 내부에서는 그런 면이 더 도드라졌다.


혼잣말을 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마 현실이라면 그럴 일이 없었을 테지만. 비련의 시나리오에 접속한 때는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고성능의 VR게임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어서인지 모른다.

익숙치 않은 것을 겪다보니 생경함에 기분이 제어가 안 되는 것이다.


어딘지 먼 여행지에라도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고작 방 안에서 게임에 접속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다른 매체의 경우라면, 방 안에서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감각은 다소 상상력이 필요한 때가 많았다. 그러나 ‘비련의 시나리오’에 주요한 광고 문구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상상력이 가장 적게 필요한 새로운 세계의 체험.


고래로부터 있어 왔던 책, 활자에서 시작해 그림과 영상, 그리고 다각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VR시뮬레이터까지 매체는 시대를 지나며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비련의 시나리오가 아닌 다른 게임들은 VR이라곤 해도, 그 정밀성에 있어서 어딘가 이질적인 부분들이 있어 다른 매체들처럼 플레이어의 상상력이 약간씩은 필요한 법이 있었다.


그러나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와 같지 않다. 거의, 아니 아예 현실과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디테일. 실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인식하며, 다른 오감으로 느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가상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다.


아직도 그런 정밀성으로 방대한 대륙을 만들어내곤, 수 많은 유저들에게 동시에 프로그램을 서비스하는 서버까지 포함해 이해할 수 없는 기술력이었다. 단지 제냐의 감각으로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여기저기 찾아본 바에 의하면 관련한 업계에 종사하는 현직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특이함이었고 특별함이다.


주식회사 태, 라는 곳은 조금 이질적인 곳이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비련의 시나리오도 현 세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게 거의 첫 VR게임인 제냐로서는 다른 것들과의 비교점을 상세하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늘 말하듯, 그리고 느끼듯 감각은 좋았다. 제냐는 붕붕 팔을 돌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파이어볼을 익힌 뒤에는 조정의 시간이 조금쯤은 필요했다. 이제 이 다음은 움직이는 몹mob(강도, 떼거리. 게임 등에서 몬스터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단어로 쓰이곤 함)에 대고 스킬을 써 볼 때다.


“후후후···.”


혼잣말처럼, 뜬금없이 웃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시험해보는 건 즐겁고 나름대로 또 신나는 일이었다.


*


움직이는 것. 이라고 하면 종류가 다양하다. 특히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광대한 게임 맵 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게임 내에서 상호작용은 거의 자유롭다. 안 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실 세계와 같은 활동 범위를 자랑한다.

가장 근현실적인, 가장 상상력이 적게 필요한 미디어 매체라는 문구는 그야말로 사실적이다.


막말로 허공에 날아가는 비둘기 하나를 겨냥해서 스킬을 사용하건, 원거리 공격을 해서 맞추면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진 비둘기는 다른 몹처럼 아이템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혹은 도축 스킬을 이용해 직접 가공할 수 있었다.


맥락에서는 벗어나지만, 거대하며 움직이지 않는-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성벽조차 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면 플레이어가 무너뜨리는 게 가능했다.

영주의 성이나 저택, 국왕성 역시 마찬가지였고.

물론 시나리오 내부에서 주요한 상징성을 부과 받은 건물 등의 대상은 말할 수 없는 수준의 내구력 수치를 부여받기는 한다.


그러나 결코 무한이 아니었으며, 유저가 그러고자 한다면 개발진이 세팅Setting 해 놓은 초기 맵 설정을 초토화 한 뒤에 새로운 배경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론적으로 플레이어가 게임 내 세계에서 무한에 가까운 파괴력을 얻는다면 모든 세계의 건물과 캐릭터를 없애서 사실상 시나리오의 결말을 보아도 개발진은 막을 의지가 없었다.


물론, 그러한 일이 가능할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다.

단순한 파괴력을 갖는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NPC들의 저력은 개발진이 자랑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풍부한 것이었으니.


세계 멸망은 커녕 당장은 최종 보스 캐릭터로 설정을 해 둔 몹mob이나 잡을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정상적인 예상 범위 내에서 개발진들이 상상한 시나리오의 종료 지점일 테이고.


제냐는,


최종 보스라고 하면 으레 상상되는 거대한 용은 아니나 노루나 토끼 정도를 잡아보기 위해서 평화의 숲 외곽지로 다시 들어섰다.


그가 레벨을 9까지 올리도록 부지런하게 들어가 사냥을 했던 위치 즈음이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자리에서 그는 침착하게 짐승들의 흔적을 좇았다.

이런 행위를 개발진이 요구하는 '일정 이상의 고생'을 통해 반복하면 스킬이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맥락에 맞는 수준의 고생.


어느 정도 집중도를 가지고 짐승의 발자국, 그것이 밟고 간 나뭇가지나 낙엽, 배설물 따위나 짐승의 길처럼 보이는 길목을 발견하려 애쓰는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 그러하듯, 시선을 아래로 두고 면밀히 살핀다. 그런 식으로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그리고 가끔 실제로 짐승의 뒤를 추적해 발견하기까지 한다면 스테이터스 창window에는 기록되지 않는 무형의 경험치가 축적된다.


개발진이 세팅해둔 경험치 값을 넘게 되면, 이제 게임 플레이를 통해 스킬을 얻는 것이다.


나름의 재능이라도 있던 건지 금세 그는 짐승 몹들의 뒤를 쫓았고 스킬을 얻은 후였다. 스킬은 캐릭터 행동에 보정을 더하고 행위의 능력을 높인다.

정말 사냥꾼이러도 된 것처럼 쉽게 짐승들이 남겨둔 발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시각적으로 약간은 붉게, 해당하는 위치가 멀리서도 물들어보이며 쫓고자 하는 짐승의 체취나 배설물 따위를 발견하는 것 역시 능숙하게 한다.


캐릭터를 통해 시뮬레이터는 플레이어에게 감각을 제공한다.


제냐는 스킬 보정에 따라 숲 어귀를 더듬으며 지나가다 토끼의 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짐승이었으나 그 체중을 실어 돌아다니는데, 일정한 궤적을 형성하는 나뭇잎이나 가지, 얕게 파헤쳐진 흙 따위가 있었다.

면밀하게 짐승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따라가도 예민한 감각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지만 스킬이 실제 몹이 지나간 자리를 도드라지게 보이게 만들어 도왔다.


제냐의 눈에는 한 마리의 토끼 몹이 지나간 길이 붉은 점선이 띄엄띄엄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완벽한 선은 아니었고 나름 주의를 기울여야 따라갈만큼 드문드문 이어진 점선이었다. 아직 추적, 수색 스킬의 레벨이 낮아서 그렇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극악한 점 중 하나였는데, 스킬 레벨에 대한 경험치는 플레이어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레벨은 경험치 바Bar가 있어서 한 눈에 알기 쉽게 진척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성과의 진척을 확인할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현실적인 일이었다.

아니, 현실보다 조금 더 과정이 나빴다.


현실에서 어떤 기술을 연마한다면 체감하는 수준 향상이 있었으나 스킬에 따른 성장 지점은 철저하게 계단식이라 그 변화점을 짐작하기가 더 어려웠다.


아예 속 편하게, 실제 세계에서 전문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생각비하고 도라도 닦는 것처럼 과정을 즐기는 게 가장 효율이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제냐는 그런 류의 일에 차라리 적성이 있는 편이기는 했다. 갖은 공략 정보들을 그러모은 뒤에 게임 내부 시스템을 파악하고 동선을 짜는 일에는 서툴렀다.

애초에 게임 자체에 서투르다.

젊은이답잖은. 그런 인생 경험과 성향이 제냐를 대변하는 주요한 말 중 하나였다.

그런 그였기에 드물게 이렇게, 최신이라 할만한 것에 접하는 경험이 중요한지도 몰랐고.


"토깽이 새끼."


숲 속의 소리는 의외로 풍부하다. 바람이 불면 그것이 부딪히는 온갓 것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인간처럼 반응을 한다. 나무 잎사귀, 풀, 버려지듯 떨어진 마른 가지, 돌과 흙더미. 그 위에 살아가는 벌레나 작은 동물들.

고요한듯 보여도 정신을 집중하면 오케스트라, 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자연은 그러하다.


제냐는 토끼의 흔적을 더듬어 슬금슬금 전진했다. 바스락거리며 발에 밟히는 낙엽과 흙의 촉감이 기분 좋은 정도였다.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런 경험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물론 잘 만들어진 도심 속 수목 공원이나 산을 찾아도 되기는 하다만. 혼자 살아가는 대학생, 자취인은 그런 곳에 갈 계획을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연배가 있으신 어른과 산다던가, 교류라도 있다면 또 모른다. 마음 먹고 찾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자연은 상당히 드문 편이다.


제냐는 과정을 즐기면서 걸었다. 이 VR게임은 제법 재미있었다. 집중할만도 했고.


시선을 낮추고, 고개를 내리깐 채 자세도 조금 낮다. 후각과 청각, 촉각마저 집중해서 사용하며 진짜 사냥꾼이 된 것처럼 걸어간다.


그렇게 하다보면 가늠은 되지 않아도 경험치마저 더 오를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라는 이름대로, 롤플레잉에 더 깊이 몰입해서 개발진이 원하는 만큼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말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터벅, 터벅.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여러 잔여물들에 집중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한다. 게임 내의 짐승들은 현실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둔하고 멍청한 감이 있다. 실제 짐승에 비해, 플레이어와 전투를 벌이는 일이 잦아야 하므로 초식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람에게 좀 더 사납게 덤벼드는 것이다.


잘 도망가지 않으며 겁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자극이나 어그로를 끌지 않기 위해 실제 사냥처럼 조심스레 구는 건 유효한 게임 상의 전략이었다.


지금은 토끼나 사슴이었지만 그것이 오거Ogre(서양 중세 설화에 나오는 식인 괴물)즈음 되면 보다 본격적인 과정이 된다.


오거 역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재미를 위해 게임에 투입한 요소였으며 다른 생물처럼 그것의 습성과 생태를 개발진이 준비해두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와 완력을 지닌, 신종의 거대 맹수를 사냥하는 것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플레이어들은 현실에서 겪기 힘든 스릴과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실제로, 그러한 거대 괴수를 사냥하는 어느 중세 시대의 괴물 사냥꾼이 된 듯한 느낌마저 준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런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


게임 내 시간은 한낮이었고, 숲 어귀라 햇볕이 쏟아지듯 그 사이를 비춘다. 삼림의 중심부로 가면 지나치게 울창한 나무들 탓에 시야가 가리고, 인위적으로 빛이 적어 어두운 구간 또한 있다고 하지만 이곳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밤이 되면 ‘야행성’이라는 성질을 가진 부류의 몹들은 조금 더 흉폭해지며 전투력에 추가 보정을 받게 된다. 오거 따위의, 도깨비나 귀신 등 사악한 종류의 것들 역시 대부분 야행성을 지닌 몹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인류가 전부였고, 시나리오에 따라 특이한 성질의 종족으로 도중에 변신을 할 수는 있었다. 아예 종족이 달라지는 부류다.


제냐로서는 인터넷 정보로서만 아는 내용이었지만 그런 변신의 때엔 이전까지 플레이어가 쌓아온 스텟과 스킬 등 대부분의 것을 잃어버리고 거의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는 셈이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진이 만들어 둔 것을 보면, 상당한 유인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수 종족에 따라 이후 얻게 되는 희귀 스킬이 있다던가, 전투력 등에 보정을 받는다던가.


아무튼 지금 제냐로서는 신경 쓸 거리는 아니었고, 그는 한 오 분 정도 그렇게 숲 어귀를 돌며 짐승의 흔적을 추적했다.


토끼의 속도는 빠른 편이었으나 매 순간 전력질주를 하지 않았고, 흔적을 찾은 뒤 금방 그 본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 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한 마리가 있었다. 푸른 귀 토끼. 질리도록 사냥을 한 몹이다. 평범한 토끼처럼 보이지만 염색이라도 한듯 시퍼런 귀가 특징이고, 정말 토끼답지 않게 사람에게 전력으로 몸통 박치기를 해대는 괴랄한 짐승이다.


제냐는 나무 둥치에 몸을 조금쯤 가리고 있었다. 반신 정도를 나무에 가리고 숨조차 작게 쉬며 기척을 죽인다.

물론, 이런 류의 기척 죽이기도 반복하다 보면 ‘은신’ 스킬로 형성될 것이다. 반복적이고 사전에 단어가 나와 있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아마 스킬로 구현이 가능했다.


시야의 사각을 지나 상체를 조금 기울여 토끼를 살폈다. 아직 제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킬의 시전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는 오른쪽 손을 조심스레, 나무 기둥에 숨겨 뒤쪽으로 뻗었다. 위로 들어올린 손바닥에 서서히, 발광체가 형성된다.


적절한 MP가 모여들면 스킬의 발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초고급의 초상 스킬이라면 시전에도 한참이나 걸린다고 하지만. 기초 스킬에 그런 일이 있을 리는 없고.


1, 2초만에 안정적으로 흰 빛을 띄는 구가 형성된다. 축구공만한 크기이다. 제냐는 나무 기둥에 가까이 대어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의식적으로 형상을 조절하기도 했다. 조금 더 줄이고, 불필요한 발광을 없앤다.


같은 류로, 구형을 띄워놓고 온도를 낮춘 뒤 빛만 내뿜는다면 그게 ‘라이트 볼Light ball'이었다. 어둠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발광 마법.

파이어 볼을 배웠으니, 응용해서 사용할 수는 있었다. 스킬 보조가 없으니 MP도 더 많이 잡아먹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위력도 낮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현상을 정밀한 컨트롤러로 계수를 조정하듯 바꿀 수 있었다. 제냐는 의식적으로 파이어볼의 ’빛‘을 적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하얀 빛이 이글거리는 불꽃과 같은 붉은 색으로 변한다.


축구공만했던 것이 그 반절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대신 견고한 응집력은 더 강해 보인다. 제냐는 스킬이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토끼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지간히 둔한 녀석이었다.

초식 동물의 본능으로써 도망가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달려들기 좋아하는 녀석. 토끼처럼 생겼지만 흉폭하다. 그 박치기에 급소라도 맞으면 꽤 아프고.


제냐는 착탄지를 머리 속으로 한 번 훑어 그려보고는, 서서히 상체를 뒤로 하고 팔을 옮겨 손바닥을 토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글거리는 파이어 볼이 그 앞에 떠 있다. ’하나, 둘, 셋. 발사.‘


그가 속으로 셈을 하며 시전을 마무리했고, 파이어 볼이 보기 좋게 앞으로 날아갔다.


쉬익,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제냐는 총을 겨누듯 손바닥을 겨누고 가만히 있다가 의지력으로 MP를 컨트롤했을 뿐이지만, 스킬의 보정은 그가 원하는 현상을 위한 계수들을 적절히 맞추어주었고 힘을 더해주었다.

정말로 총이 날아가듯, 아니 그보다는 느리지만 그래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처럼 재빠르게 쏘아진 파이어 볼이 정확한 구형이 찌그러져 보이도록 잽싸게 움직였다.


정확히 직선 거리, 아래 방향에 있는 토끼를 향했고


“끼익!”


토끼가 저런 비명을 질렀던가, 싶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푸른 귀 토끼가 시선을 돌리자 파이어 볼은 바로 그 짐승의 눈 앞에 있었다.


쾅!


하는 폭음이 들린다. 제냐가 있는 곳까지 약간의 열풍이 부는 것 같았다. 기름을 뿌리고 탈 것을 둔 뒤 그 위에 횃불이라도 집어 던진 듯이, 갑자기 온도가 오르며 후끈한 기운이 주변에 뻗었다.


순식간에 파이어볼에 명중한 것들이 타들어가면서 공기를 밀어내고 순식간에 탄화했다.


“끼이이···.”


아주 어설프고, 미세한 울음 소리가 들렸다.


제냐는 자신의 귀가 좋다고 생각했다. 실제의 귀는 아니었지만. 어쩄건 게임 내부의 캐릭터는 청각이 밝다. 다양한 면에 있어서 일반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정도로 설정을 해 둔 모양이다.


심지어, 토끼는 살아 있었다. 푸른 귀 토끼는 일반적인 토끼는 아니었다.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아주 큰 것은 팔뚝만한 크기로도 자라고, 공격성도 있다. 초식을 하는 동물이라고 믿기지 않는 설정값이었지만, 뭐 게임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생명력이었다. 소형 폭탄이 제 몸을 맞추고 터진 거나 마찬가지인데 살아남아 있다니.


토끼가 있던 바닥 부근에 자욱하게 피어났던 연기가 흩어졌다. 대신 토끼는 더 이상 움직이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몸을 뉘이고 신음만 간신히 흘릴 뿐이다.


착탄 부위, 라고 생각되는 토끼의 몸뚱이 한 면이 전부 빛나고 있었다. 랜턴을 켠 것처럼 환하거나 지향성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 부위가 반딧불이처럼 빛으로 싸여있었고, 흰 빛이 마치 입자인 것처럼 부스러기를 그 주변으로 흩날린다.


토끼의 몸이 마치 서서히 사라지듯이 상처 부위에서 빛의 가루가 바람에 날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도검류로도 빗맞추었을 때나 혹은 둔기류를 썼을 땐 일격을 버티는 녀석이었다. 야생동물의 터프함인가. 잠시 생각하며 제냐는 토끼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풀벌레 소리는 이제 잘 들리지 않는다. 강렬했던 폭음 때문에 귀가 큰 소리에 익숙해졌다. 이질적인 분위기를 느낀 미세한 벌레나 이 토끼나 비슷한 약소 동물 몹mob들은 거리를 벌렸을 지도 모른다.


땅바닥에 옆으로 누워 빛나는 부위가 점점 커져가는 토끼를 바라보면서, 제냐는 옆구리에 찬 숏소드를 꺼내들어, 그대로 아래로 향했다. “흡.” 그대로 수직 방향으로 찍어서, 몹에 마지막 참격을 주었다.


콱! 하고 지면에까지 박히는 숏소드.


손이 약간 저릿하다. 흙 너머 바로 얕은 자리에 바위라도 있던 모양이다. 이런 현상들이 비련의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하고, 또 어렵게 하는 지점들이었다. 그야말로 현실과 같다. 몹을 잡는다는 직관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 할 때 플레이어들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무궁무진하다.

막말로 온갖 무구와 장비로 준비를 마친 뒤 최고의 일격을 위해 달려가던 기사가 발 한 번 삐끗해서 자리에서 넘어질 수도 있었다.

현실의 신체 능력이 플레이에 반영이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운동을 잘 하는 습관이나 신경 반응, 노하우 따위는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세계였다.


토끼의 대가리를 넘어 지면에 박힌 숏소드를 서서히 당겨 빼내었다. 투둑, 하고 흙먼지와 자갈 따위가 떨어진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본격적인 가상현실 게임이지만 선정성을 지양하고 있었으므로 과도한 공격의 결과는 얼버무리려 한다. 토끼의 사체는 부서지기 전 빛으로 변해서 입자화했다. 몸뚱이가 사라져가던 것이 머리가 먼저 사라졌고, 곧이어 전체가 바람에 흩날리듯 자리에서 없어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년 단위의 세월이 지나 사라지는 동물의 사체 분해 과정을 보는 것도 같다. 물론 그런 다큐멘터리나 학술 자료처럼 잔인할 수 있는 실제 장면들은 없다.

칼이 토끼의 머리통에 닿고, 그 피부가 갈라지며 내용물들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마치 찰흙이나 장난감이 부수어지듯 데미지를 견디지 못한 부분들은 전부 하얀 빛에만 휩싸이고 단순하게 분리될 뿐이다.


일종의 모자이크였고, 그런 부분에서만 현실성을 쏙 빼놓았다.


지나친 자극에 노출되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으니까. 제냐로서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개발진의 제작 의도는 말이다.


도축 스킬도 없이, 계속해서 오버킬을 하면 순식간에 몹의 사체는 게임 내에서 사라지게 된다. 자리에는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만이 남는데, 이것 또한 그다지 현실적이진 않다.

게임의 작법들을 따라가는 부분들은 딱히 가리지 않고 따르고 있었고, 오히려 이것이 게임 내의 가상 세계라는 걸 알려주려 하는 듯한 모양이다.


토끼가 있던 자리는 폭발이 있었던 흔적, 흙이고 뭐고 탄 듯한 검은 자국과 패인 구덩이, 숏소드로 찍은 얇은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아이템이다.


정사각형 모양의 박스였다. 푸른 색으로 표현되며 명백하게 이질적이다. 갑작스레 디지털 세상에 대한 대변이라도 하는 듯한 컨셉. 모니터 너머로 보는 3D 애니메이션에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는 저런 식의 완벽한 직선의 정사각형이 존재하는 일이 많지 않으니. 지독하게 인위적이라는 뜻이다. 숲이나 자연 경관에 덩그러니 있기에는.


음영도 보이지 않고 그것만 따로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약간 어두운 톤의 푸른 상자. 그것은 주먹만한 크기였고, 두 개가 토끼가 있었던 자리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아이템 박스‘는 전리품이 귀속되기 이전의 형태이다. 이것은 몹의 퇴치를 돕고 전리품을 얻을 권한이 있는 자가 건드렸을 때 해당 플레이어의 인벤토리로 옮겨진다.

인벤토리에 들어갈만큼의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면 플레이어의 곁에서 현물화化한다.


일반적으로는 몹의 사체가 있던 자리에 형성되어 바닥에 떨어지고, 만일 공중에서 몹이 죽는다면 바닥이 있는 곳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간혹 바다나, 낭떠러지처럼 손실의 위험이 있는 필드에서는 공중에 떠서 플레이어의 근처에서 존재감을 발한다.


다만 아이템 박스가 저절로 움직이는 법은 없었으므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소의 노력이 필요했다. 원거리 공격으로 애매한 장소에 있는 몹을 죽이고, 아이템 박스가 다가가기 어려운 절벽의 한 가운데 끼어있거나 하다면.

그럴 때는 플레이어가 던지는 투사체나, 투사체의 역할을 하는 초상 기술 역시 ’건드리는 것‘으로 간주한다.


제냐는 어느새 오래도록 신어 눈에 익어버린 갈색 가죽 장화의 앞 코로 아이템 박스를 툭, 툭 건드렸다.


구태여 IV라고 발음하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단찮은 물건일 테다. 토끼를 잡아서 나오는 건 질리도록 보고 또 보았으니까 알고 있는 물건들이다.


“비루하구만.”


’비루먹고 싶다.‘ ······. 농담이었다. 일본어로 맥주beer를 비루라고 발음한다. 술은 마시지도 않는다. 제냐는 속으로 헛소리를 이어갔다.


이 게임은 품이 많이 드는 종류다. 해야 할 것도 많고. 수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게임, 그것도 RPG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간해서는 쉽게 진척을 낼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개발진들은 게임의 속도를 조절하게 마련이었고······ 그 완성도나 솜씨에 따라서 게임의 수준이 갈리게 된다.


현재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탑 랭커Top Ranker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평가는, 이 게임은 최고라는 말이었다.

현실의 시간으로 쳐도 깨나 상당한 분량의 시간을 투자해서 하나의 취미를 즐기는 것이었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만큼의 풍부한 컨텐츠 구성을 보장하고 있다고.

어떻게 만들어 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잘 짜여진 소설책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제냐는 그 시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그의 레벨은 고작 9였지만. 그가 알기로 현재 플레이어 레벨이 가장 높은 이의 수준이 377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이 오감을 사용해서 느끼는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책이 종장을 보여줄 테였다.

그 과정을 찬찬히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제냐는.


“끙.”


고작해야 작은 토끼를 하나 잡은 것 뿐이었지만. 조금 더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파이어 볼의 게임 내 효과 묘사는 인상적이었고, 그 사용법도 마음에 들었다.

의사에 따라서 더 다양하게 써먹어 볼 수 있을 듯하다.


제냐는 조금 더, 숲을 뒤져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스킬을 익힌 김에, 여태껏 들어가보지 못했던 중심부 쪽으로 아주 약간 걸음을 더 옮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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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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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8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7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6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7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6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2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7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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