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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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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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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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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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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4. 긴장성 파이어볼

DUMMY

*


“그래서 그리하여, 우리는 여태까지 만들어 온 역사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교수의 강의가 한창이었다. 강의실은 그렇게 크지 않다. 약 30명 정도가 들어올 수 있는 크기. 규모 있는 건물 내부에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강의실도 여럿이 있었고, 강당과 같은 곳에는 수백 명도 감당이 가능하다.


남자가 앉아 있는 곳에는 정사각형의 배열로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자리를 빼곡히 사람들이 채운 채였다. 각양각색의 나이대, 성별과 스타일을 지닌 이들이었다. 덩치가 커다란 장정이 있는가하면 10살을 조금 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도 그 발을 땅바닥에 채 디디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다.


남자는 그런 이들 가운데, 강의실 뒤 편에 앉아 있었다.


교수가 앞에서는 열정적인 강의를 진행하고···.


남자, 제냐 킴은 가볍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선이 아득하다.


강의를 듣고 있는 그는 게임 내부였다. VR게임 내부에서까지 강의를 듣고 있다니.


그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일종의 퀘스트 때문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기술 등을 익히기 위해서 약간의 간접 경험을 요구했다. 그 능력을 익힐만한 행동에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제냐는 기초적인 초상 스킬 하나를 익히기 위해서 이렇듯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쳐가는 습득 방식이기도 했다.


게임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스킬을 익히기 위해서라지만, 그 스킬이 현실에는 없는 초월적인 것이라면야.


게임의 제작진은 그 괴리감을 많은 양의 노동과 플레이 타임, 번거로움으로 대체했다. 어떻게 하든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충분한 양의 고생을 주어서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그저 쉬울 수만은 없다, 는 게 게임을 만들고 있는 제작진의 사상과 모토이기도 했고.


강의실 내부는 깔끔한 편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는 중세 즈음을 생각했을 때, 오류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초상 스킬을 이용한 장치가 있는지, 매일 쓸고 닦는 헌신적인 일꾼들의 손길이라도 묻어있는지, 먼지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강의실에 들어와 앉은 약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의 신발 따위에서 떨어지는 흙먼지가 아니라면 말이다.


현대적이다, 라고 해야할까. 단출한 가구 배치에 복잡한 색도 없이 눈이 편안한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전체가 칠해져 있었다.


칠판, 은 녹빛으로 빛난다. 그 위에서 교수는 분필을 이용해서 부지런히 필기를 하다가, 책을 들어 교재의 내용을 읊다가, 를 반복했다.


깜박 잠이 들거나 아예 정신을 놓아버려서도 안된다. 교수로서 기능하는 AI는 고기능이었고, 정밀한 탐지가 가능하다.

일정 정도 이하로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우선적으로 호명하여 수업에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니까, 문제 풀이 같은 것 말이다.


"거기 두 번째 파란 자켓. 나와서 1번 한 번 풀어보게."

"억."


살집이 꽤 있는 남자 플레이어였다. 교실 공간 내부에는 NPC들과 플레이어가 섞여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세계관 내에서 플레이어가 있든 없든 계속해서 돌아가는 대학 강의 내에, 플레이어가 끼어드는 형식이다.


다분히 인간적이고 비계산적인 반응을 보이며 남자가 일어선다. 블론드 헤어를 하고 있는 백인 플레이어다. 어차피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는 만능 통역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에 작은 혼잣말마저 '공용어'로 번역된다.


공용어로 변이된 언어 정보는 접속자의 국가 코드에 따라 해당 나라의 언어로 자동 번역되어 읽히거나 들리게 되어 있었고.

물론 언어는 설정에 들어가 임의로 바꿀 수 있었다.


통역 프로그램의 수준이 아주 높은 정도로 발달되어 있는 시대였지만, 개인이 그것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조금 저급품의 프로그램이나 기계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직접 언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소통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외국어 공부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학습 분야였고, 공부를 위해 VR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도, 그런 쪽으로만 게임을 이용하는 이용자들도 더러 있었고.

단순한 게임보다는 조금 더 폭 넓은 이용이 되고 있는 게 실정이었다.


"어억··· 그니까···."


발화자의 감정에 맞추어 미묘한 어감까지 번역을 해낸다. 제냐의 귀엔 서양인의 것이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는 네이티브 코리안의 난처함이 묻은 말이 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제법 품질이 좋아 보이는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세련되게 마감이 되었고 은근한 광택이 있고, 싸구려같지 않게 두툼한 중량감이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옷들을 디자인할 때, 현대의 패션의 논리를 조금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치적으로 성능이 좋은 방어구, 옷들은 패션적으로 보아도 어딘지 고급스러운 분위기들이 있다. 눈으로 직접 보면 알 수 있는 사소한 디테일과 느낌에 따라 생각해본다면 대강 맞다.


저런 경우에는 자본이 있어서 다른 이들로부터 일찍이 아이템을 받았거나, 혹은 그 자신이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인데 뒤늦게 초상 스킬을 배우기 위해 초보자 코스를 밟고 있는 경우이리라.


다만 초상 스킬에 관한 이론은 정말로 무지한인듯, 그는 짙은 녹빛의 칠판 앞에 서서 교수의 눈빛을 받으며 쩔쩔 매고 있었다.


교수는 마찬가지로 백인이었고, 골격이 큰 체형에 키도 크고 훤칠하다. 모델같은 생김새에, 길게 기른 갈색 머리를 뒤로 묶어서 가지런하게 내리고 있었다.

남성이었고, 외모 지상주의에 빠진 여성이라면 첫 눈에 반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아 보이는 외모였다.


30대 중반 정도의 인상이었는데, 서구인의 나이를 맞추는 재주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틀릴 수 있었다. 제냐의 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앞에 선 투실한 볼과 뱃살의 남자는 그보다는 훨씬 젊다. 20대 초, 중반 정도일까.


1번 문제를 제냐가 처다 봤다. 그 역시 모르겠다. 이럴 때는 대강 교재를 뒤적거리면서, 집중하는 척만 해도 스킬은 얻을 수 있었다.

요는 '그럴싸한 분량의 고생'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의 개발 스텝들도 미쳐서, 실제 초상 스킬의 원리를 물리학적으로 개발하고 익히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까다롭게 해봐야 결국에 끝에 가서는 논리적인 거짓말이 될 뿐이었고.


적절한 수준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얻을 수 있는 스킬에 남자는 너무 방심을 한 모양이다.


칠판에는 복잡한 수식이 어지러져 있었고, 알파벳과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초상 스킬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형 문자의 무늬가 몇개 들어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 역시 적극 활용하며, 부가적인 설명은 일반적인 문장으로 풀어둔다.


그러니까··· 교재를 열심히 뒤적거려 문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간신히 알아 들었다. 제냐는.

'1레벨의 스킬 유저가 10포인트의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서 2레벨의 초상 스킬, 불덩이를 시전했다. 전방으로 발사된 불덩이의 위력 비율과 거리를 계산하시오.'


"음······."


제냐 역시 알 수 없었다. 수업은 게으르게 들었다. 전혀 감도 오지 않는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의 시간을 조금 빼앗고 있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한 백인 남성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았다. 교수의 시선은 단호했고, 이 상황을 적당한 교훈의 말과 함께 넘어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중압감에 약한 스타일인 모양이다. 유리 멘탈. 그는 여기저기로 시선을 주면서 고갯짓을 어지럽게 하더니, 급기야 손을 뻗었다.


"으어어······."


그의 손에서 빨간 빛이 생겨났다. 정신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모양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상에서 스킬을 쓰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운용한다면, 어쨌건 현상은 비슷하게 일어난다.

그런 점이 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대단한 것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수치적으로도 정확하게 잡아내기 힘든 아날로그적인 실수의 영역을 표현한다는 것이.


프로그래밍과는 상관 없는 전공이었지만, 간단한 머리로 생각을 해보아도 정해진 현상만 도출하는 다른 시뮬레이터들에 비해 말도 안되는 용량이 필요한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저 새끼 저거 위험한 거 아냐?"


제냐의 근처에 앉은 다른 플레이어가 소근거리는 것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초상 스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일단 직관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꼴이기도 하고···.


"으어어··· 10p··· 10p로 불덩이를···."


교수 역시 표정이 찌푸려졌다. 눈 앞의 인간이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인상이다. 블론드 헤어의 투실이, 청년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대강 이해한 문제를 실제 검증으로 풀어보려 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소심한 유형의 인간의 트라우마가 이렇게 위험하다.


금세 그의 손이 강의실 옆, 열려 있는 커다란 창 쪽을 향했다.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전열식 온풍기가 열의 강도를 알려주기 위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과 비슷한가 모습이다.

조금 다른 점은 그건 안정 장치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고, 저건 답도 없이 열에너지가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에너지를 그러 모아서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불'을 형상화했다. 이제 저걸 스킬 시스템의 보조를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발휘하려면 정식으로 스킬을 얻는 절차가 필요하다.


간혹, 제냐가 어느 커뮤니티에서 찾아 듣기로 진정한 고수들은 스킬 시스템의 보조보다 직접 발현 방식을 더 많이 이용해 초상 스킬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완벽하게 보조를 받지 않는 건 아니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제어를 해서 스킬 별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완벽하게 숙달된 고레벨 플레이어의 이야기였고, 지금 저런 상황에서는 스킬 시스템의 보조가 필요한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방향성도, 위력도 정밀하게 제어되지 않는 초상 스킬은 그 방향이 거꾸로 날아와서 사용자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경우도 많다.


타겟을 오인해서 조금 빗맞는 정도는 차라리 잘 된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이봐. 잠깐 멈출 수 있나?"


NPC교수의 태도는 약간 늦된 구석이 있었다. 이 작자가 이지를 잃고 진심으로 초상 스킬을 멋대로 발휘해서 폭주하려는 지 이해하는게 늦은 모양이었다.

시나리오 내부에서 NPC들은 플레이어들의 돌발 행동에 조금 관대한 처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법에 비유하자면, 무죄 추정의 원칙을 가장 극한으로 늘 적용시켜 준다고 해야 할까.


완벽하게 자유로운 롤플레잉이라고 하지만, 너무 깐깐하게 굴다보면 그 시나리오 롤플레잉만으로도 숨이 조여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발진이 제안하는 것 외의 요소들로 지나치게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그들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거 모르겠···."


블론드 헤어의 뚱뚱이는 약간 정신을 차린 기색이었지만 주입한 정신 에너지는 이미 게임 내에서 물리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저거 터진다. 제냐가 보기에도 그랬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씨···."


사람들이 수근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저 정도로 단숨에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여기는 마을 내이기도 하고. 불필요한 소란을 만들어서 좋을 건 없었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처리가 가능하다면, 누군가 나서겠지만 그 정도의 고레벨 유저는 이 자리에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저런 현상을 막으려면 반대 현상을 스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배우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가 그 초상 스킬의 기초를 배우러 오는 장소였으니.


"제어가 안 되는 모양이로군."


교수가 나서려는 듯했다. 이 자리에서 안정적으로 초상 스킬을 쓸 수 있는 건 저 양반 뿐이었다. 얼음이나 물 따위를 허공에서 만들어내어 시 뿌린다면 일단 불이 식으리라.


"교수님, 저거 터집니다!"


앞 자리에 앉은 어느 플레이어가 재촉했다. 얇상하게 생긴 동양계 여자였다. 타는 듯이 붉은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려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말이 NPC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던지는 말 같았다. 실제로 NPC들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완벽히 정해진 것 없는 경로로까지 갈 수도 있다.


정해진 인구수. 하나의 캐릭터는, 하나의 게임 내 생명을 갖는다. NPC는 게임 오버되어 끝나면 그대로 시나리오에서 탈락이었다.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디지털 자료로 이루어진 그들의 마지막에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펑펑 울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과도한 어른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을지 몰랐고.


"음."


교수는, 그러니까 NPC는 뒤로 묶은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움직였다. 생각보다 훨씬 물리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퍽!


교수가 순식간에 움직여서 교단의 옆에 선 블론드 헤어의 뚱뚱이에게 다가갔다. 한 순간이었다. 눈으로 모든 동작을 좇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였다. 제냐는 일순 경이로움을 느꼈다. 영화에서나 보듯한 초인적인 움직임이었다. 게임 내부에서 저런 플레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그러니까, 잘 만들어진 영화 세계 내부에 들어온 것 같은 감각이었다.


갈색 머리의 교수는 영화에서처럼-실제로는 별료 효과가 없다고 하지만-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학생의 뒷목 급소 부분을 강하게 쳤다. 특별한 스킬이라도 걸려 있는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강렬한 힘이었던 건지, 혹은 게임 내의 이질적인 작용인 건지. '억······' 교실 내에서 갑자기 파이어볼을 형성하려던 청년은 그대로 시야가 블랙 아웃되며 힘이 풀렸다. 술을 진탕 먹고나서 의식이 사라지는 것처럼. 혹은 급성 심근계 질환의 증상처럼, 그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의식을 잃으면 정신 에너지는 다루지 못한다. 그리고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저 놈의 정신 에너지라는 건,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나름의 에너지처럼 성질도 띄고 있다. 한 번 집약되어 물리력을 가진 에너지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완전히 터지기 직전에 멈추었던 건지,


쿵! 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남자의 오른 손은 여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바닥의 장심을 중심으로 온열기처럼 뻘겋게 달아오른 둥근 적광은 교단의 나무 바닥을 짚었고,


치이익······. 하고 나무를 조용히 태워 먹었다.


사람들은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아니 문제 풀러 나갔다가 저게 뭔···. 하지만 제냐는 내심 이해할 수도 있었다. 가끔 소심한 인간들은 저럴 수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 엉뚱하고 기괴한 인간들이 가끔 있게 마련이었고··· 스트레스에 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사태가 의외로 금방 진정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것이 터진다고 죽지야(게임 오버) 않겠지만··· 고도로 발전된 시나리오 내부의 세계와 롤플레잉은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진전될 지 모른다. 폭발이 화재 사고로 번지고··· 건물이 홀라당 타고··· 지역 신문 따위에 기사가 실리고··· 한동안 플레이어들이 이 루트를 통해서 기초 초상 스킬을 배우는 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조금 더 실감 넘치는 공포감을 연기하는 NPC들은 더욱 크게 안도의 기색을 내비쳤다.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아주 튼튼한 몸을 설정상 갖게 된다. 초기에 접속하면 갖는 몸은 어느 동양 무협지에서 말하는 무재武才가 뛰어난 신체였다. 유연성, 회복력, 체력, 근력, 모두 일반적인 수준에서 아주 건강하고 튼튼하다. 거기서 조금만 더 레벨 업을 하고 전투 경험을 쌓더라도 게임 바깥, 실재 세상에서 상상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에 내성을 갖게 된다.


개중에 조금 더 훈련을 쌓고, 나중에 이 스킬을 배우러 온 자들이라면 이미 일반인이라고 도저히 보기 힘들 수준의 신체적 능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과 달리··· NPC들은 일반적인 주민이었고 사람이었기에 마치 게임이 아닌 실제 세상의 이들이 사소한 사건에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화재 사건이 났다면 별다른 특이 능력이 없는 이들은 크게 다치거나 죽음(게임 오버)을 맞이했을 지도 모르는 법이고. 교수는 그런 아찔함을 담아서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땀 따위는 전혀 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딘가 과장스러운 구석이 있는 AI(인공지능)의 NPC였다.


"큰일날 뻔 했군."


치이이익···. 교단에 엎어진 수강생은 그대로, 한 1분 정도 더 나무 바닥을 그을리고 태워먹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이들 중 어느 플레이어가 나가 뚱뚱한 금발 청년을 들쳐 엎고 적당한 강의실 구석에 뉘여 놓기 전까지 그러고 있었다. 교수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어느새 지휘봉처럼 생긴 막대 하나를 들고 툭툭 교탁을 치며 말했다.


"그래도 문제 풀이는 하고 넘어가야겠지. 1번 문제의 답이네, 여러분. '불덩이'는 교재에 2레벨의 스킬이라고 나와 있다. 2레벨 정도 수준의 스텟 포인트··· 정신력과 집중력 등의 개발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30p 정도의 정신 에너지가 모이면 안정적으로 화구 형태가 형성되고, 지향성을 갖고 수 십 m를 날아가겠지.

1레벨이라면 정신력과 집중력이 턱 없이 모자라고··· 전체 정신 에너지가 적다면, 에너지의 특성 상 응집력 역시 떨어지게 된다. 많은 양의 MP(Mental Point)를 보유한 초상 스킬 유저는 MP의 응용력에서도 앞서게 되지. 전체 MP량이 적고, 집중력이 부족하다면 동일한 스킬의 1회 사용에도 더 많은 MP가 사용되게 된다.

손실분의 MP만큼 10p는 온전하게 스킬의 위력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교재에 적힌 수치로 본다면 위력과 안정성은 3분의 1보다 더욱 아래일 것이며···"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제 손을 들어보였다. 길죽한 손가락을 펴며 허공에 마치 보이지 않는 공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형을 그려 보인다.

그러나 그러길 잠시, 곧 약간의 빛이 그의 손 주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수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짧은 시간만에 집중해서, 정신 에너지를 움직인 것이다.

발광하는 백열 전구처럼 허공에 둥그런 빛의 구가 생겨난다. 약간의 붉은 기가 서서히 감돌았다.


아까 뚱뚱했던 학생이 보여준, 파이어볼이었다. 다만 훨씬 안정적이며 교수는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그의 의사에 따라서 파이어볼은 제자리에 유지될 수 있었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아주 작은 크기의 볼링공, 정도의 크기였다. 하얀 빛의 대부분이 적색으로 물들며 실제 존재하는 공처럼 그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면 그 표면이 미세한 불길로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이리라. 집약된 불덩이. 교수는 그것을 조정했다. 불의 공은 서서히 크기가 작아졌고, 이내 야구공만한 크기가 되었다.


크기가 작아지면서 안정적이었던 형체도 일그러졌다. 실제 불꽃과 비슷하게, 그린듯이 뚜렷했던 윤곽선이 일렁이며 불꽃이 흔들렸다. 교수가 말했다.


"크기도 작고 형체도 불안하며, 실제 응집력 역시 한없이 낮을 거다. 이 상태로는 위력의 대부분을 추진력으로 전환해서 발사해봤자, 고작해야···"


그가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팔을 털어내듯이 옆으로 휙, 하고 휘둘렀다. 교단의 옆은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다. 바로 옆, 그러니까 강의실에 가장 앞쪽 창문은 열려서 평화로운 도시의 거리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바람이 때마침 새어 들어온다.


털어낸 물기가 날아가듯 그의 손 위에 앉아 있던 불덩이는 별다른 접착력 없이 휙, 하고 떨어져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교단에서 창까지, 고작해야 수 m 정도의 거리도 채 완주를 해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가 되겠지. 애초에 파이어볼의 일반적인 유효 거리는 50m를 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그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지 않나? 그러니까, 초상 스킬에 필요한 적성과 능력이 부족하다면··· 쓸데없이 MP를 소모하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차라리, 자네들이 어딘가의 현장에서 전투 상황이 벌어졌고, 어떤 괴수 따위와 맞딱뜨려 데미지damage를 주어야 한다면··· 방금의 것을 만든 뒤 다가가서 직접 손바닥을 대는 것이 낫겠지. 그게 더 유효한 공격 수단이 될 테다."


교수의 말에 제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잘 만들어진 게임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여차하면, 차라리 창의력을 발휘해서 무언가 사용하는게 낫다. 1의 요소를 반드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버그가 적은 게임이었고, 사용자가 상상하는 대부분의 조건에 따른 결과값은 시뮬레이터의 상정 범위 내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구현된다.


"대충 실제 모습을 봤으니 근사치가 떠오르겠지? 유의하면서 한 번씩 더 풀어보도록. 그러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서···."


교수가 그렇게 마무리하고 환기를 시키며 다시 지루한 수업의 연속으로 말을 이어갔다. 플레이어들은 아까의 소란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라는듯, 별 긴장감 없이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아니 정확히는, 집중하는 척에 열심이었다. NPC들은 프로그래밍된 가상 인격에 따라 저마다의 행동들을 보이고 있었다.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는 자도 있었고,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제냐의 오른쪽 옆자리 구석에 앉은 사내는 집중하는 표정으로 교재에 혼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교수의 얼굴을 그린 듯한 초상화에 콧물을 그려 넣고 있는 NPC 남자를 보면서 제냐는 이 게임의 정밀성과 자유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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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2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7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6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8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6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2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7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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