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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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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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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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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1. 도서관 제육

DUMMY

“야.”


하고 누가 불렀다.


제냐, 킴이 아닌 김서원은 일 이초가 늦게 반응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독서실에서 고개를 처박고 책을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의 부름에 움찔한 참이었다. 딱히 그를 가리킬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학교도 아니고 그저 시내 공립 도서관 하나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던 때였으니. 드넓은 메트로폴리스 내부는 혼잡하기 그지 없었고, 카메라로 잠시 찍어둔다면 그 앵글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의 수를 차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유동하는 곳이었다.

약속도 없이 누구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


이었는데 아는 얼굴이 그를 부르는 걸 깨달았다.


김서원은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고된 일상 탓이라고 변명하기는 그렇지만. 주로 여가 시간은 혼자 보내는 때가 많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이들과도 일부러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는 쪽은 아니었으니.

그런 그의 성격에도 어딘지 매력을 느꼈는가 알 수는 없지만 들러 붙는 인연들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를 불러낸 남자 목소리의 주인은.


“요.”


서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환하게 웃으면서 상대가 다가온다. 언제 보아도 참 밝은 놈이다. 사실은 미친 놈이라고 보는 게 좋다. 무슨 일도 없으면서 아무 때나 이렇게 웃는 놈은. 머리 한구석에서 남을 골려줄 생각이나 굴리며 다가오는 악우일지도 모르고.


박민수는 그의 곁에까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손에는 오렌지 쥬스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추레한 반팔 셔츠 하나를 위에 걸쳤다. 안쪽으로는 흰 티셔츠.

대학가의 시험 기간에 도서관 근처에 가보면 볼 수 있는 흔한 찌들은 공대생같은 복장이다.

시대가 많이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양상들은 있었다.


시대가 아무리 좋아져도,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제 몸이 괴로울 정도의 고생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싫다며 온갖 표정을 다 짓고 또 욕을 해대고 입만 열면 때려칠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제 발로 학문이라는 길을 가겠다며 선택한 인간들이다.


열의가 없는 자도 있고, 타성적으로 길을 고른 자도 있고, 도중에 그만 두는 인간마저 있지만. 어쨌건 순수한 학문의 길이라는 건 그렇다. 무언가를 알아가는 즐거움. 물질적인 것 이상의 희락을 위해 그 길을 선택하고 또 시간을 들여 골방에서 썩어가는 것.


궁상맞은 짓거리처럼 보이지만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삶의 모습이었다.


찌들은 대학생의 모습에서 제냐는, 아니 김서원은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세상이라는 건 돈이 전부가 아니다. 그걸 아는 자들은 제 발로 험로를 찾고 또 비루한 환경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 안에서 진짜 가치있는 걸 발견하는 과정. 그것이 보다 삶의 본질에 가깝다.

어떤 길로 걸어가든,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그다지 쓸만한 보물은 얻어내지 못하는 여행길이었다. 삶이라는 여정은.


그런 부분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이 사내는 과연 보물을 발견할만한 노력과 삶을 바치고 있는 여행가인가. 박민수는 오만상을 다 지으며 그에게 하소연을 건넸다.


“야, 뭐하냐. 공부하냐. 미친 놈. 시험 아직 많이 남았는데 뭘 그러냐. 나는 대학원으로 갈 거라 그런지 교수님들이 왠지 빡세게 대하는 거 같다. 요새 죽겠어. 툭하면 발표 시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우수수 말을 쏟아낸다. 서원은 헛웃음을 먼저 흘렸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오렌지 쥬스캔을 자연스럽게 뺏어들었다. 책읽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으니 그도 쥬스 정도는 얻어먹어도 괜찮다.


꿀꺽 하고 삼키기까지 그다지 제지하지도 않는다. 화학적으로 만들어낸 감미료와 설탕의 단맛이 퍼진다. 어쨌거나 당분이었고, 책을 보느라 지쳤던 머리에 영양소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원이 보고 있던 건 딱히 공부와 관련이 있는 책은 아니었다. 전공과는 그다지 친하질 못했다. 친해지려고 나름대로 수를 쓰고 시간을 보내봤지만, 영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원도 그랬지만 전공 학문도 서원을 별로 반기질 않는가보다.

그는 게임 산업의 현재와 미래, 라는 책을 빌려서 읽고 있었다. 과제를 하기 위한 시간은 필요했으나 오늘 치는 이미 끝냈다. 졸업을 위한 학점 정도만 받으면 된다.

열정이 없으면 그마저도 축축 늘어지고 가기 힘든 여정이었으나.


박민수, 는 보통 체격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특별히 어디 잘난 구석도 없고, 아주 못난 곳도 없는 외모에 안경을 끼고 어딘지 피곤해보이는 눈 밑을 가진 사내.

농구는 조금 잘하는 것 같았다. 서원보다는 못했지만.


“야- 참. 개같은 노릇이다. 우리가 죽자고 공부해서 대학 들어왔는데 여기서 더 죽자고 학문을 파야 한다니.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건 네 놈의 머리다, 라고 서원은 생각했다.


“대학교··· 가 일단 그런 데 아니냐. 고등학교 졸업하고 더 공부하겠다고 들어온 거잖아.”


그들이 있는 공립 도서관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햇살이 바깥으로 들이닥치는 높은 창문이 있다. 아래로부터 길게 뻗어서, 인력으로는 절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가 창문의 머리 부분이다. 천장 조금 아래까지.

그런 길다란 창이 줄지어서 늘어서 있어서, 그대로 햇빛이 내리 쬔다. 도서관 내부의 서책들은 오래된 것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근대에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어느 기간 이후에 만들어진 책들은 변형에 강하다. 열이나 빛, 햇빛을 비롯해 습도나 여러 환경에 노출되어도 잘 변질되지 않는다. 한 권을 사두고 그러고자 한다면 한평생 가지고 있어도 크게 손상이 없으리라.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한 것들이 있는 한반도의 위에, 만들어진 이래 변함 없이 내리쬐는 햇살이 비추면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움직이고 일을 시작한다.

도서실을 찾아 공부를 파고 책에 머리를 들이미는 예비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청명한 하늘이 잘 보이는 공립 도서관이었다. 넓이도 깨나 넓어서, 서원이 앉아 있던 길다란 책상의 앞 뒤로 까마득한 정도로 비슷한 가구가 늘어서 있다.

수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었고 지하까지 건물이 있다. 위로는 4층까지의 실내와 옥상이 있었는데, 서원이 있는 구간의 천장은 그대로 건물 최고 높이의 층고까지 뚫려 있었다.


2, 3, 4층은 길다란 창문이 햇빛을 받는 벽면의 반대 쪽에서 시작해 건물의 절반 까지를 차지한다. 아래에서 보면 마치 발코니처럼 그 위가 보이고, 위에서도 아래를 구경할 수 있는 구조였다.


건물 내부는 환풍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내에서 선선한 공기 이동이 느껴진다. 온도도 적절하고. 이토록 잘 만들어진 실내 건물은 역시 시대가 발전하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편의 중 하나다. 공부하기 좋은 곳.


전체적으로 짙은 빛깔의 나무색을 주된 분위기로 삼는 실내였다. 길고 높게 줄지어 선 책장들이나, 창문의 옆으로 보이는 벽면의 굵은 선이나, 기둥이나 바닥 그리고 천장의 색깔 말이다.

약간은 어두운 톤이나 또 그것이 침침해 보이지 않았고, 조용히 학문 정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정적인 분위기의 배색이다.


채광이 잘 되고 실내의 광량이 언제나 밝게 유지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또한 마냥 칙칙하지 않게 밝은 톤의 비슷한 색깔로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따뜻한 감각과 목질의 재현이 대체적인 컨셉인 듯하다.


사람들은 서원과 박민수 말고도 당연스레 바글바글할 정도로 있었고, 앉아있는 긴 책상에 빈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또 가벼운 차림으로 책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자신들이 읽을 책을 뽑아다 읽는다.

선 자리에서, 혹은 책장이 있는 복도 구석에 앉은 채로도.


구비되어 있는 소파를 이용하는 방문객들도 있었고··· 서원처럼 제대로 배치한 책상에 앉아 본격적인 독서나 공부를 하는 이들도 아주 많다.


민수가 이 많은 인파 중에 대체 어떻게 그를 발견했는지도 궁금스러운 지경이다. 이 놈은 생각보다 눈이 좋은 듯 싶었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게 아니라면 생각보다 서원을 더 깊이 친구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징그럽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계절 중 여름을 지나고 있는 시기였다. 다들 가벼운 차림새다. 실내는 아주 선선했고, 도시의 일부 시내 지역들- 세금이 많이 들어가고 고도화된 구역들은 실외에서도 어느 정도 대류를 조작해 기온을 낮추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있었다.

대도시 서울의 모든 장소가 그렇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최첨단이라 할만한 기술이 있는 일부였다.


시청이 있는 곳이나, 가장 번화한 관광지가 되는 시내 거리나, 뭐 그런 곳들 조금. 혹은 세금을 아주 많이 내는 부자 동네의 공공 시설 근처가 그렇다.


서원이 거주하고, 지나다니는 길목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그는 학교로 금방 통학할 수 있는 자리에 빌라를 빌려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을 때는 걸어가도 좋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거나 자전거 따위를 이용해서 가도 좋았다.

가장 급박할 때는 택시를 탄다. 에어 바이크나 에어 카로 이용되는 택시 서비스는 도심 내에서 가장 빠른 이동 수단 중 하나였다. 찻길이 막혀도 공중로는 그다지 과밀할 때가 없었다.


어느 정도 제공制空을 위해 시에서 규제하는 교통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건 개인이 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 급속한 이동을 필요로 하는 만큼은 채워주었다.

지나치게 과밀한 대도시는 오히려 더 느려지는 면이 있었다. 모든 이용자들이 제한 없이 동시에 날아오른다면 순식간에 도시의 하늘이 어두워지고 삶의 질이 지나치게 저하될 테니까.


서울 같은 대도시들 중에서도 대도시가 아니라, 다소 인구가 적고 비교적 낙후된 곳에서는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서울에서의 빠른 이동에 대한 수요를 채우기 위해 구비되어 있는 다양한 대중교통이 있기는 했다. 지하철 중에서도 특정 포인트로 빠르게 이동하는 특급차가 있었고, 가느다란 모세 혈관처럼 서울 내 요충지들을 이어놓은 지상 열차들이 또 있었다. 지상 열차들은 작고 빠르게 움직인다. 정해진 선로 위에서 별다른 속도 제한 없이 달리는 것으로 공중을 가는 에어Air 종류의 차량들에 비해 그다지 느리지 않다. 일정한 구역으로 이동하는 건 적어도 더 빠르면 빨랐지.


건물 높이를 넘지 않는 선에서 그리 길지 않은 비행을 하는 건 규제로도 딱히 막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쓰이는 개인용의 에어 카나 바이크들도 많이 있었고, 대체로 부자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길목이나 건물마다 그런 차를 준비해두고 계속해서 갈아타며 이동한다.


이 시대의 도심을 지나는 차량들은 대개 AI장치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런 식으로 저공, 순간 비행을 하는 차량들 또한 도시 정보 시스템에 들어 있는 정해진 교통 수칙을 지키며 순차적으로 움직인다.


도심에서 수동 조작으로 지상차이든 공중차이든 운전하는 것이 가능은 했지만, 굳이 모든 시간 그렇게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자동차’가 나온 지도 한 두 세대가 지난 시점이었고 그 안정성은 이미 검증이 된 지 오래였다.

가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운전을 하는 순간들이 있기야 했지만, 수동으로 핸들을 조작하고 기어를 바꾸는 순간과 또 AI의 자동 운전으로 바뀌는 그 찰나의 연결마저 흠을 찾기 어려운 고도화의 시대였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고도화 되어도 잘 고도화 되지 않는 것들도 물론 있기야 하다.


눈앞에서 투덜대는 박민수의 머리는 영 쓸만한 구석이 적었다.


그는 검은 머리칼을 헝클며 서원의 손에서 다시 오렌지 쥬스를 뺏어들었다. 그는 입에 대지도 않고 남은 걸 몽땅 마시곤 말했다.


“아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시험 공부 하기 싫다는 거잖아. 너네 과는 벌써 보냐.”

“어떻게 알았지. 이 자식.”


서원과 민수는 과가 달랐다. 고등학교 때 만난 인연도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알게 됐다. 대학 내 농구 동아리에 같이 든 것도 있었고, 각자가 노는 친구들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만나게 되었다.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해내는 입이지만 그래도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순하고 수더분한 면이 있어서 서원은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꼭 내가 들어간 수업만 보면 교수님들이 빡세단 말야··· 세상이 날 힘들게 하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그건 아마 네가 수강신청을 망쳐서 빡센 수업만 골라 듣고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뱉지는 않았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몇 번 말을 들어주었다.

공립 도서관의 내부는 환기가 되는 바람 소리나, 아주 미약한 음량으로 흘러나오는 바흐의 선율, 그리고 대부분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공부하기 적당히 좋은 곳이었다. 서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강박증적으로 조용함을 강요하는 공간은 오히려 그에게 맞지 않는다. 적당히 사람 사는 소음과 분위기가 있고, 자극이 있어야 도리어 빠르게 책과 활자에 빠져든다.

주변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과 누구 하나 걸려봐라, 하는 그 분위기가 도리어 더 부담이어서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또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해버릇 해야 집중력이라는 게 좀 느는 면도 있었고. 서원은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자기만의 훈련법이나 버릇을 늘 중얼거리며 익히는 류의 인간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사는 게 또 나름의 재미이기도 하다.


심심찮게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무엇에라도 사람이 집중하고 사고하는 편이.


민수는 서원의 어깨에 양 손을 얹고 흔들어댄다. 칭얼거리는 꼴이었지만 대부분은 들어주었다.


“아무튼 밥은 안 먹냐. 옆 골목에 맛있는 백반 집 있다. 가자.”

“이거 좀 보고.”

“얼마나 보는데.”

“글쎄, 한 30분?”

“음······.”


민수는 오른 팔을 들어 손목을 왼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투명한 비닐같은 것이 자세히 보면 그의 손목에 감겨 있었고, 정해진 지문을 가진 이가 터치를 하면 광학 패널이 반응하며 정보를 표시하는 물건이었다.

손목 시계였고, 동시에 휴대폰과 연동되는 소형 컴퓨터이다. 나름대로 가볍고 또 쓰지 않을 때는 투명한 플라스틱이나 비닐처럼 만들어 찬 줄도 모르게 대기 모드를 걸어놓을 수 있었다.


지금 시간이 정오를 넘어 PM 12:30이었다.


“어··· 있다 올게. 옆에 있는다.”

“어잉.”


민수는 반갑다는 투로 제 할말을 쏟아내고 나자 다시 옆자리로 사라졌다. 책장 쪽을 들러 책을 좀 보더니 서원이 있는 책상이 아닌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서원은 별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저 활자에 집중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이었다. 한 달 정도 된 것 같다. 공립 도서관이라지만 장서 갈이가 빠른 편이었다. 오래 되고 또 찾지 않는 책들은 지하 서고로 옮겨지거나, 거기서 더욱 찾지 않는 물건들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지방의 창고 따위로 옮겨져 보관된다. 아니면 폐기되거나.

새롭게 발간되는 책들 중에서 특별히 유해한 내용이 없고 상식 기준에 부합한다면, 그리고 양질의 퀄리티를 갖고 있다면 부지런히 개방적으로 도서관에 들여놓고 있었다.


서원이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공부를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굳이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더라도 몇 주만 기다리면 도서관에 대개는 들어와 있다. 그가 원하는 책들은.


최근에 나온 책이며 게임 산업을 다루고 있다는 건, 곧 저자가 비련의 시나리오를 내용에 싣지 않고는 책을 쓸 수 없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적어도 그 게임이 오픈 베타를 거쳤던 89년도 이후에 집필을 시작했다면.


그 정도의 유행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게임이면서 온갖 분야의 신문, 뉴스에서 소재로 다루어질 정도였으니.

이전까지의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퀄리티의 감각적인 기술력도 그랬고, 그 안에 들어간 AI 시스템의 수준이나 또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서버와 자본 역시 화제였다.


시가 총액으로 각 나라에서 순위에 드는 기업들이 섞인 기업 연합이 금력을 지원하고 있는 회사였으니, 그 단순하고 압도적인 기술력이 앞으로 각 분야에 어떻게 쓰일 지를 예측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리라.


지금은 단순히 게임에 쓰이고 있었지만 이전 시대에 몇 번의 격변이 있고 그 전조로 변화의 흐름이 천천히 밀려왔던 것처럼 비련의 시나리오 역시 뚜렷한 예시 현상일 지 모른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게임을 분석했고,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답만 내놓았다. 사업 비밀이니 당연히 그렇기야 할 테지만. 연구를 하다가 어느 골방같은 연구소의 직원들이 정말 위업과도 같은 대발견이라도 해낸 것인지.

다른 이들은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단순히 게임으로서 그것을 대하는 플레이어들은 그저 즐거움에 환호성을 뱉었지만.


서원 역시 단순한 게이머 쪽에 가까웠다. 이런저런 사회 자료들을 찾아보는 건 그저 취미에 불과했고. 사실 시나리오 온라인을 즐기는 일 자체도 취미의 테두리지만.


그다지 머리 싸매며 할 일까지는 모두 아니라는 뜻이다. 열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까지의 VR시뮬레이터들은, 그리고 프로그램들은 어딘가 결함이 있는 물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오감’으로 표현되는 데이터 상의 다양한 감각 계수들은 자연계의 것과 비교를 한다면 장애를 가진 것들이었고, 둔하고 저급이다.

다만 그것들 역시 이전 시대에 비해 분명한 진보를 거둔 기술력의 총화임은 분명했다. 어디까지나 ‘현실’과 또 그것에 견줄 수 있을만한 감각 체현 기술을 만들어낸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거의 현실에 흡사한, 완벽하다고 감히 평할 수 있을만한 오감을 구현한다.

이는 분명 악의적으로 시스템이 사용된다면, 사람의 신체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고문을 가할 수 있다는 말까지도 된다.

강력한 기술은 그만큼 강한 과학 윤리를 가져야만 한다.

감각 체현 기술이 발달한 이래 이것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가장 엄격한 금기로 치부되어 왔으나, 일면에서 그것이 기술력의 한계로 불가피하게 지켜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여태까지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게임성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고, 또 운영진들 역시 어떤 실수를 보이지 않으며 관련해 어떤 사고도 기록된 바가 없었다.

거대한 양의 데이터 자료를 다루고 동시에 지구 인구의 일정 수 이상을 감당하게 될 듯한 초 대규모 거작 게임의 운영이 앞으로도 어떤 사고 없이 이루어지기를 필자는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어느 지독한 온라인 게임 매니아이자, 동시에 게임 산업 분야와 관련된 과학계 종사자의 글이었다.

나름대로 매끄러운 구성으로 책이 이어져 있어 서원이 보기에도 술술 읽히고 쓸만했다. 이런 쪽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재미나 내용이다. 조만간 어느 서점의 베스트 셀러 란에 올라올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비련의 시나리오는 거작巨作이다. 실체가 없는 데이터로 이루어진 정보 집합이 이만한 볼륨감을 사람들에게 실제로 주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한 비교 대상이 없는 수준의 볼륨과 퀄리티라는 것이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다. 비련의 시나리오와 같은 게임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 공간의 제약이라는 건 없다시피 할 지도 몰랐다.


물론 완벽한 해소는 물질 세계에서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그 단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정보 통신 기술이 발전을 거듭한 이래 통신 등, 여러 부분에서 공간의 제약이 사라졌지만 이 정도의 감각 구현과 소통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가상 현실이었지만, 단순하 정보 교류의 차원이라면 실시간 노 딜레이로 못할 것이 없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늘 중요한 이 세계, 또 고도화되며 손에 잡히지 않는 정보의 가격이 높은 위치를 달리는 현대 사회에서 그건 중요한 점이었다.


결국 통신 기계, 라고 하더라도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 부품들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부품들의 원료는 물질 세계에서 비롯되고.

대규모 인원과 데이터를 다루는 시나리오 온라인의 서버가 자본과 공간, 기계 등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물론 어느 장소에서의 감당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건 본질적으로 기술 혁명이 몇 번을 더 일어난다거나, 자원을 획기적으로 절약할 수 있게 된다거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혹은 인류가 지구가 아닌 다른 자원 행성을 개척한다던가.


화성을 간다느니 어디를 간다느니 별에 별 난리를 쳐댔던 세기 초부터의 일들이 있었지만 현대까지 아직 인류는 다른 별을 제대로 정복하지 못했다.

달에 월면 기지를 어느 정도 세운 것 외에는.

기계와 기술 발달로 관측 장비는 효율적이며 또 화려해져서, 먼 우주를 바라볼 수 있고 또 태양계 내의 다른 행성들로 무인 장비를 보낼 수야 있었지만 험악한 우주의 자연 환경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 기술력은 갖추지 못했다.


그마만큼 한계를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 비련의 시나리오는 또 이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암시일 지도 몰랐다.


서원은 제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 것 아닌 사고와 제 인생에 대해서 좀 골몰히 고민을 하다가, 자리서 일어났다. 밥이나 먹어야겠다.


공립 도서관은 의자를 좀 끌든, 어느 정도 일상적인 목소리로 대화를 좀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규칙과 사람들이었다.


서원이 앉아 있는 책상들의 나열 옆으로, 벽면 쪽으로 주욱 시선을 돌리면 창문이 나 있는 벽면 아래에 출입구가 있고, 그 근처에 긴 안내 데스크가 있어 직원들이 업무를 본다.


공공 시설들은 제법 규모가 큰 편이었다. 서울 또한 넓은 도시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계속 증축을 하고 그 범위를 넓혀 왔다. 어느 시점부터는 이전의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계획 도시로 한 번 정리를 한 적도 있었다.

조선 시대, 한양 즈음에서 시작해 지금의 서울을 보자면 거진 한반도 내의 일개 국가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크기였다. 인구 삼천 만 명의 도시.


이전에 ‘경기도’라 불리던 인근 위성 도시들을 모두 잡아 삼킨 형세였다. 이전 위성 도시의 역할을 하던 곳들은 통일이 되며 생겨난 위쪽의 공간으로 조금 밀려나 자리를 잡았다.


20세기 초중반 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중반부터 일어났던 간척 사업으로 한반도의 외곽선도 약간 변했다. 인천 쪽의 복잡한 해안선이 조금 정리가 되어버렸다. 인공으로 섬을 만드는 계획은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으나, 늘어난 서부 토지 쪽으로 인천도 그 중심지가 이동했으며 보다 커졌다.


고양, 성남, 부천, 의정부, 남양주 등의 부지가 지금은 전부 서울시로 편입이 된 상태였고, 서원이 살고 있는 곳 또한 예전의 성남시 부근이었다.


통일 이전에도 자본과 개발이 계속해서 쌓여가던 ‘남한’ 지방은 북쪽 보다는 빨리 거대 도시화가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서울과 각 지방을 잇는 메갈로폴리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교통 역시 편리하게 이어져 있다.


북쪽은 그러한 거대 도시의 나열과 비교하자면 조금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진국이라는 위명에 걸맞는 정도의 도시화는 균일하게 이루어진 상태였다.


남한에 비해 조금 도시간 연결이 빈약하고 보다 작은 도시들이 점점이 이어져 있다.


땅값도 싸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특별히 아랫 지방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에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서원도 졸업을 하고 난 뒤에는 지방으로 내려가보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었다.


자택 근무가 가능한 프리랜서나, 그런 종류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먹고 살기에 편리한 시설들이야 한국 내 어디에든 갖춰져 있었고.


어쨌든 그렇게 부지를 확장한 서울 내의 공공시설은 장엄한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서원은 높은 천장을 잠시 바라보고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 시선을 둘러 찾자 앞 쪽 책상에 앉은 민수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아까 민수가 그랬던 것처럼, 별 말 없이 걸어가 등께를 툭 쳤다.


“억.”


이상한 소리를 다 낸다. 서원이 말했다.


“밥 먹자. 어디야?”


민수가 읽고 있던 책을 덮는다. ‘유체역학’.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서적이었다. 서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터운 전공 서적을 내려 놓은 민수는 책장으로 쫄레쫄레 걸어 가 넣어 두고는 다시 돌아왔다.


“나가서 금방이야. 거기 제육이 개맛있지.”


제육이라. 언제든 괜찮은 메뉴였다. 서원은 친구와 함께 쭐레쭐레 걸어 가 식사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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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 세슈칸에서. 23.07.05 38 4 31쪽
22 21. 불타는 부락 23.07.03 35 4 41쪽
21 20. 불타는 숲 23.06.12 40 4 24쪽
20 19. 보법 23.06.10 42 4 23쪽
19 18. 범영웅凡英雄 23.06.10 42 4 31쪽
18 17. '취륵'은 그렇게 죽었다. 23.06.09 47 4 62쪽
17 16. 파티 플레이 23.05.29 42 4 43쪽
16 15. 멧돼지 사냥 23.05.28 52 4 34쪽
15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1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7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6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7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6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2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7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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