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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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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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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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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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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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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27쪽

6. 오크Ork 사냥

DUMMY

***


서기西紀 2089년.


비련의 시나리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해였다.


2000년대가 끝나간다. 2010년으로 숫자를 바꾸는 때가 아니라, 100년대로 모습을 바꾸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십여 년은 충분히 긴 세월이었고, 옛말에 강산조차 변한다고는 하지만··· 현대 사회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2000년이 지나 89년의 세월을 버텨 낸 글로벌 사회의 심정이라는 게 있어 대변할 수 있다면 아마 분명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리라.


세기의 변화를 눈에 앞두고 있는 시점.

비련의 시나리오의 등장은 각계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와 다른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현실 구현.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전 세계 억 단위 유저에 대한 서버 공급.

동시에 상호 작용하는 캐릭터들의 모션 수를 가장 둔한 머리로 계산을 해보아도 천문학적인 숫자가 떠오르리라.


진짜 세계를 만든다는 것. 말로는 그럴싸하게 지껄이며,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겠다는 반쯤 사업가 혹은 반쯤 사기꾼들의 말이 판을 친 지도 어느덧 IT기술이 발달하고 수십 년이 훌쩍 넘은 시기였다.

정말로 그럴싸한, VR 시뮬레이터 프로그램이 나와서 오감을 거의 다 다루는 게임들이 나온 것이 205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였다.


그런에도 어딘지 모를 한계점들이 있어왔는데···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타이틀은 보기 좋게 그런 편견을 깨부수어 버렸다.


누구나 접속하면 바로 알 수 있었고, 그런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은 곧 그대로 시나리오 온라인의 인기로 전환되었다.

채 1, 2년이 지나지 않아 세계 인구의 3분의 1정도가 가입자가 되었고, 게임에 접속한다.


그러나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은 여태까지의 것들보다 조금 불친절했고, 더 어려웠다.

설명이 부족한 점 역시 그런 난이도 증가의 원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한 사업 구조로서의 게임이라기보다는, 어떤 모종의 기술 개발 과정에서 태어난 물건이며 또 서비스 자체가 실험적이라는 게 소수자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의견이라는 점에서 메이저를 따르지 않고 굳이 마이너의 것을 거론하는 게 우스워보일 수 있으나, 그 감이라는 게 은근히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게임 사社도 이런 식으로 게임을 운영하지는 않으리라. 비즈니스 모델이라기보다는 실험 모델이라는 게 적합해 보이는 방식이었다.


단 한 번의 게임 플레이 기회. 악의적인 PK행위 따위는 지양하도록 다양한 제재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 수 많은 실수들이 있었다.


서비스 초기에는 게임의 컨셉을 이해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의 원망이 치솟았으나, 정작 모습을 감춘 태Tae迨 컴퍼니는 그들이 어디로 분노를 토해내야 할 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은 깊은 화를 냈으나, 결국 그건 해결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공공재도, 혹은 삶에서 필수적인 재화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취미에 불과했다. 그뿐이었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서비스 하든 개발진의 의사에 따른 일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게임 오버를 당한 이들은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이 되는 수 뿐이었다.

만약 이 게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게임 플레이는 불가능하지만, ’실황‘을 켜고 있는 플레이어의 활동은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고로 시간이 지나고, 게임의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가고 시나리오를 만든 개발진의 의도에 따라 최종 장을 맞이하게 될 때, 남아있는 소수의 플레이어들은 세간의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게 되리라.


RPG임과 동시에 일종의 서바이벌이기도 했다. 플레이 타임이 지독하게 긴.


아마 그렇게 되었을 때, 비련의 시나리오는 다음 챕터를 발표할 테였다. 그에 관한 암시나 이스터 에그Easter egg(게임 등에서 개발진이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는 무관계한 요소를 내부에 두는 것. 이를 통해 속편이나 게임 설정 상의 비밀 따위를 암시하기도 한다)들을 발견해 정보를 모은 하드 유저들의 이야기였다.


제냐는 지극히 일상적으로 게임을 즐기며, 비련의 시나리오 전체의 이야기 흐름에는 별달리 끼어들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지만.


아마 거의 모든 RPG게임이 그렇듯, 이것 역시 레벨이 높아질수록 필요한 경험치의 양은 많아졌고, 체감하는 난이도 역시 점점 올라간다.

제냐는 경쟁이라도 하듯 숫자를 올려가며 게임 컨텐츠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랭커들의 무리에 낄 생각은 없었다.

그만한 일에는 취미도 없고, 실력도 없다.


그는 그저 평범하게 파이어 볼이나 날려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파이어 볼.”


말했듯, 스킬의 이름을 외친다고 해서 발현되는 구조는 아니었다. 물론, 그런 취향을 가진 유저들을 위한 개인 설정 시스템은 제공하고 있었다.


게임 내의 인터페이스는 다양하고 또 자유롭다. 자기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발성으로 스킬 발현 역시 가능하다.


굳이 시간과 움직임을 소모해서 스킬을 사용하는 취미를 가진 이들도 많지는 않으나 있었고.


제냐는 따로 설정을 변경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착실하게 게임에서 제공하는 ’MP 감지‘라는 감각을 사용해서 정신 에너지를 다룬다.


첫 번째 스킬을 배우면서 정신력 감지는 더욱 두드러지게 플레이어에게 다가온다. 이전까지 쓸 일이 없어서 처박아두었던 고물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선명한 감각으로 몸에 붙어있는 잘 맞는 옷처럼 말이다.


제냐는 ’평화의 숲‘의 북쪽 구역에서 조금 더 중심부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장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죽 방어구를 입고 있었고, 다만 왼쪽 어깨에는 길다란 활 하나를 걸치고 있다. 장궁 종류였고, 활의 아랫단을 땅바닥에 대어도 가슴께 근처까지 올라올 정도의 높이였다.


수풀을 헤치면서 불편한 길을 걷다가, 적절한 몹mob이 나오면 다짜고짜 스킬을 때려박는 식이었다. 파이어 볼은 기초적인 것이고, 그의 레벨에서 삼십 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다. 위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안정적으로 발현 가능한 수준으로 하면 그렇다.

그것에서 더 힘을 넣어 커다랗고, 강력한 폭발력과 열기를 부가해서 던지면 훨씬 적어질 테였고.


그가 가장 강하게 만들어서 제어할 수 있는 파이어 볼로는 10번 정도가 한계였다. 그 이상을 사용하고 싶다면 푸른 물약을 마시면 된다. 정신력 에너지, MP를 채워주는 포션Potion이다.


포션 자체는 내용물이 되는 푸른 색의 액체를 뜻했고 사실 용기는 아무것에나 담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무한정 아이템 보급이 가능한 기본 상점에서 제공하는 기본 용기를 쓰는 것이 가장 간편하기에, 포션이라고 하면 보통 일괄적인 모양새를 자랑한다.

유리처럼 보이는 둥그런 약병이다. 화학 실험에서 플라스크 따위로 쓰이는 모습이었고, 주먹 반 개 정도만한 크기의 둥그런 병에 입구가 목이 길게 달려 있다. 그 위에 돌려서 까는 뚜껑이 있었고, 그것을 까서 내용물을 마신다.


맛은 그냥 맹물 맛이었다. 체력 포션 역시 붉은 색에, 똑같은 맹물이다. 다만 마신 뒤 직후 약간의 열감과 함께 신체 작용이 느껴진다. 괜한 이펙트였고, 물약을 마셨음을 알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체력 포션은 고급품일수록 심각한 내외상에서 HP(Health Point)의 손실을 빠르게 막아주었고, 저급품으로는 치명적인 상처로 인한 손실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았고, 많은 양을 마시면 손실이 확실히 느려지고 손실량이 감소하기도 한다.


이번이 아마 마지막 파이어볼일 것이다. MP가 바닥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MP와 HP의 잔여량을 보여주는 시각 인터페이스를 띄워 놓거나, 음성 알림으로 확인하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냐는 게임에서 제공하는 느낌으로 대강 아는 편이었다.


HP손실이야 보면 알고, 애매할 때만 창을 켜면 된다. MP는 게임에서 부여하는 정신 에너지 감지 기관이 의지대로 움직이는 정신 에너지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자신의 뜻대로 몸 주변, 허공을 휘도는 하얀빛의 물질의 양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 무게감 같은 것이 느껴지며 전체 MP량에 따라 기세 따위도 정해져서 얼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전투 중에 페이스를 조절하는 정도로는 정보가 충분했다.


제냐의 손바닥 위에 다시금 흰 빛이 모여든다. 그는 지금 최대치로 파이어 볼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대는 둔하고, 아마 최초의 일격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숲을 걸어오며 만났던 저 개체들은 모두 그러했다.


제냐의 앞에는 돼지의 얼굴을 하고, 이족 보행을 하고 있는 괴수가 서 있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형상이었지만. 굽은 등에 두꺼운 체격을 갖고 있다. 팔이 조금 긴 편이었고, ’돼지‘에 가까웠지만 정확히는 인간이 아닌 어떤 도깨비의 형상이다.


입이 툭 튀어나왔고, 그 사이로 굵은 어금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깥까지 나온 어금니가 턱에 닿는다.


귀는 머리 위로 나 있었고, 전체적으로 흙색이나 녹색을 섞어놓은 피부를 지녔다. 일반적인 생명체의 모습은 아니었고, ’괴물‘을 형상화 한 모습이다.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제공하는 적대적인 몬스터 캐릭터이다.


빈번하게 쓰이는 이미지의 시초는 톨킨, 이라는 어느 유명한 전 세기의 작가로부터 나왔다는 괴물이었다. 서양 중세풍 판타지 세상에 등장하고는 하는 요괴. 근원이야 어쨌든, 후대에 차용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고 세세한 설정 정도는 달랐지만 대강 대동소이한 점들이 있었다.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야만인을 그려놓은 듯한 모습이고, 흉폭하며 잔인하다. 짐승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능을 가지고 사람을 적대하여 덤벼든다는 점에서 끔찍하게 위협적인 종류였다.


다만 이곳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는, 플레이어들에게도 충실하게 판타지로서의 설정들을 부과하고 있었으므로 보다 덜 위험을 느끼며 처치할 수는 있었다.

플레이어는 정해진 설정 상에서, 괴수들을 잡을 수 있을만큼 또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으며 다양한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미라는 게 탄생한다.


위치는 역시 제냐가 먼저 발견했다. 숲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추적, 수색‘ 스킬 역시 레벨 업을 한 것 같았다. 스킬이던 뭐던 초기에는 레벨 업 하기가 쉽다.


수준이 높아지면 효과도 상승한다. 체감하는 능력의 변화다. 제냐는 어느 지점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돼지 머리의 괴수, 오크Ork의 뒤를 훌륭하게 추적해서 계속해서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는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 “뀌이익.” 하고, 그다지 아름답진 않은 거친 성대로 오크가 소리를 냈다. 평범한 돼지, 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는 몹이다. 완력도 일반적인 인간의 평균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이고. 흉포하고 집요하다. 무기를 들고 다룰 줄 알며, 눈 앞에 보이듯 갑옷을 입고 있기도 하다.


인류와 말은 통하지 않았고, 별개의 원리로 움직이는 괴물 무리였다. 판타지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니, 그와 어울리는 ’적‘다운 이형의 캐릭터들이다.


오크의 겉 면을 두르고 있는 두터운 녹갈색의 가죽은 질기고 튼튼하다. 철검으로도 쉽게 썰어낼 수 없었고, 그 안쪽에 검날을 집어넣는 일은 상당한 신체 능력이 필요하다. 접근을 해서도 그 정도라면, 원거리에서 주어야 할 타격은 더 커야 한다. 본질적으로.


활을 쏘는 궁사라면 특별한 스킬과, 특별한 활, 특별한 화살이 필요하다. 제냐는 아직 궁사 계열의 스킬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못했고, 싸워야 한다면 아마 근접 박투가 될 확률이 높았다. 피가 끓어오르고 신경이 달아오르는 스릴이었지만, 지금 그가 선택하는 건 간단한 방법이었다.


멀리서 화구火球를 맞추는 것으로 충분했다. 손바닥에 만들어진 흰 공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보다도 열기를 더해, 시뻘건 색이었다. 괜스레 용암처럼도 보였고, 일반적인 불길보다도 뜨거워보인다. 보다 고온의 불길은 아예 적색에서 벗어나 흰 빛이나 푸른 색을 띈다고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럴싸함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럴싸함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면이 있었고. 이런 식의 스킬 이펙트나, 타격감 등 게임성을 자랑해야 하는 부분들에 있어서 말이다.


제냐가 위력적으로 MP를 모았다. 그가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MP의 양은 약 90에서 100이었다. 그의 전체 MP량이 1027이었고.

보통 전체 MP의 10분의 1정도가 한 번에 투입할 수 있는 MP량이라고도 한다. 특별하게 의지력을 강화시킨 경우, 특수 스킬을 갖고 있다거나- 게임에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을 그러모은 경우에는 그 이상도 될 수 있을 테다.


그렇게 모인 100여 포인트의 정신 에너지는 불의 온도, 빛의 세기, 형태, 추진력, 폭발력 등 다양한 요소의 설정값에 분배된다. 제냐는 기본 형태로 파이어볼을 형성하고 있었고, 공들여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고도의 초상 기술을 익힌 술사들, 고레벨 유저들의 경우에는 파이어볼을 시전하고 제멋대로 설정값을 바꾸고 변형시켜서, 거대한 불꽃의 용이 날아가 상대를 덮치는 것처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냥 고위 초상 기술을 사용하는 게 훨씬 보정이 많이 들어가 MP를 아낄 수는 있겠지만. 그만한 응용력과 MP 지배력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제냐의 손 위에서 타오르는 불의 구는 적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시야 사각의 자리에서 형태를 빚는다. 이미 한 차례 압축을 했음에도 크기가 축구공만 했다. 이전에 토끼를 잡을 때보다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서 그렇다.


“취룩.”


오크는 성대를 가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긁어대며 소리를 토해냈다. 일반적인 움직임은 짐승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요란하다. 다만 숲에서 저것들을 해할 수 있는 천적이 한정적이다 보니 여태까지의 다른 짐승들보다 더 튀는 구석이 있었다.


숲은 나무가 많아서 투사체를 날리기 적합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울창하게 형성된 숲에도 나름의 길이 있고 또 틈새는 있다. 제냐는 숲을 헤매이는 오크의 대가리를 노리며, 천천히 몸을 슬쩍 가리고 있던 나무에서 기울여 벗어나면서 파이어 볼을 형성한 손을 겨누었다.


팔이 포신이고, 그 앞에 매달리듯 고정되어 있는 붉은 구가 포탄이다. 일직선 거리로 방해되는 것이 없구나, 싶은 순간 그가 MP를 운용했다. 떨이지지 않을 것처럼 미동도 없이 붙어있던 물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발사되어 튀어나갔다.


그 속도는 상당히 재빠르다. 화살에도 비견이 될 정도였다. 순식간에 날아간 화염구, 는 그 형상을 바람의 저항에 맞추어 일그러뜨리는 듯 얇게 변하더니 그대로 오크의 옆머리에 부딪혔다.


콰앙-!


하고, 거센 소리와 함께 열풍이 후욱 불었다.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그렇다. 매케한 연기가 폭음과 함께 피어올랐다. 착탄시에 파이어 볼은 오크의 머리에 점성을 가지고 달라붙듯 그 형체를 변화시키며 착탄 부위를 감쌌고, 그리고 순식간에 붉은 빛이 광량을 더하다가 연이어 폭발을 일으켰다.


첫째로 강렬한 열로 피해를 입고 폭발력으로 보다 광범위한 타격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동물의 몸뚱이에 이런 비슷한 짓을 벌였다가는 끔찍한 꼴이 나겠지만, 비련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어린아이들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몬스터들이 실감이 넘치고 무섭기는 하지만, 굳이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안전한 플레이어 필드에서만 놀 수도 있었다. 전투 상황이 되더라도, 피나 상처는 드러나지 않고 설정한 색깔의 빛의 입자로 대신 표현이 될 뿐이다.


그리고 상처를 표현하는 빛의 입자가, 오크의 두부頭部에서 넘치도록 쏟아졌다.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떨어져 나온 것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오크는 완벽하게 죽지는 않았다.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아직은 의식이 있는 눈빛이었다. 머리의 한 부분이 거의 흰 빛으로 물들어있다. 현실의 동물이나 몸뚱이가 아니라 디지털 세계의 데이터 값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키이이이익!”


오크는 드물게 성대를 긁어대며 하이 톤의 소리를 냈다. 거의가 굵고 거친 목소리였던 것과는 대비된다. 오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흥분한 상태, 광화 상태이다. 야성을 가진 몬스터들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면서까지 적을 없애기 위해 달려든다.

오크는 그런 상태였다. 그것이 괴로움에 머리를 흔들어대며 잠시 정신을 못차렸지만, 곧이어 혼란 속에서도 제냐를 발견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몹mob이 타격을 입은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의 AI들은 정밀하고, 뛰어나며, 견고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가끔 NPC들 중에서는 실제 사람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종류도 있었다.


오크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몬스터들은 상대하다보면 가끔 섬칫함을 느낄 정도의 집요한 잔머리를 갖고 있기도 했다.


대가리에 화구를 맞은 오크는 제냐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치명적인 기습을 당해서 신체 반응이 정상이 아니다. 천천히 걸음을 떼며 손에 든 녹이슨 쇠도끼를 덜렁거린다. 이미 머리의 반이 흰 빛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제냐는 서서히 다가오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거대한 덩치는 맞추기 좋은 표적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아까 그것이 마지막 파이어 볼이었다. “IV." 제냐가 입으로 중얼거렸다. 반투명한 네모난 창이 허공에 떠오른다. 인벤토리 창의 리스트가 시야를 잠깐 가린다. 그러나 익숙한 손동작으로 제냐는 원래 그래야 한다는 듯, 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놀려서 어느 부분을 터치하고 곧바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허공에 생겨난 푸른 빛의 반투명한 창으로부터, 손으로 집어 무언가를 꺼내는 모션을 취하자 마치 어딘가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화살이다. 어지간한 화살통보다, 익숙해진다면 인벤토리 창에서 바로 꺼내는 게 깨나 괜찮은 방법이었다.

새로 꺼낼 때마다 입으로 중얼거리는 건 불편한 일이었지만. 나중에 설정에서 열람 방식을 바꿀 수도 있었다.


제냐는 화살 서너 개를 집어서 꺼냈다. 그리고,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나무에 콱, 하고 박아넣었다. 그가 쓰는 화살은 단단한 종류였다. 평화의 숲에서 심부로 들어가, 맹수나 괴수, 혹은 오크같은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화살보다 조금 더 강력한 게 필요하다.


화살의 대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일반적인 목재보다 조금 단단하고 묵직해보이는 성질이었다. 그 끝의 화살촉 역시 날카롭고 크다. 일반적인 화살촉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홈이 패여 있어서, 빼내기도 쉽지 않고 내부를 진탕으로 만드는 위력의 물건이었다.


이런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장력이 강한 큰 활이 필요하다.


제냐는 이번에는 석궁이 아니라, 등에 지고 있던 장궁을 순식간에 빼내어 쏠 준비를 했다. 나무에 박아넣은 화살 하나를 뽑아들어 금세 시위에 메겼다. 물 흐르듯 깔끔한 동작이었다. 오크가 그 느린 움직임으로 반 걸음을 걷기 전에 장전이 끝났고 화살촉이 오크의 가슴께를 노렸다.


먼저, 한 발.


”훕.“


제냐가 가볍게 숨을 뱉고는 참았고, 반 호흡 정도의 시간동안 무호흡을 유지하다 화살을 메긴 손을 놓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대가 구부러졌다가, 펼쳐지고 시위가 앞으로 퉁긴다. 그와 동시에 색이 검고 단단해서 철목鐵木이라고 불리는 재질로 만들어진 화살이 날아갔다.


현재 제냐의 전투력으로 철목 화살만을 사용해 오크를 잡는 건 무리였고, 파이어 볼로 치명타를 먼저 입힌 뒤 사후 처리에 가까운 방식이었다.


콱! 하고 철제 화살촉이 오크의 목줄기를 찢으며 내부를 파고들었다. 두꺼운 목이라지만 움찔거리며 걸어오는 대상에게 하기 쉽지 않은 조준이었다. 물론, 제냐가 현실에서 궁도의 달인인 것은 아니었고 게임 내에서 궁술 스킬로 조준 실력에 보정을 받는 덕분이었다.


오크는 그러고도 움직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만들면서 상당히 터프하게 설정을 해두었다. 게임 내부에 전투가 가능한 몹들은 설령 토끼나 사슴처럼, 흔하게 생겼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보는 녀석들보다는 질기고 강했다. 아마 현실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토끼나, 가장 강한 사슴을 모델로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제냐는 쉬지 않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쏜다. 퉁, 하고 시위가 앞으로 날아가 붙는다. 걸렸던 철목시矢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유연하게, 오크의 몸체에 박혀 들어갔다.


다시 한 번, 퉁. 처음에 인벤토리에서 뽑아서 나무에 박아두었던 철목시 4개 중 세 개를 쏘았을 때, 마지막 것이 오크의 남아 있는 머리에 명중하며 걸어오던 괴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붉게 타오르던 안광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몸체에서 흘러 나오고 곧 허공으로 사라지는 빛의 입자의 양이 증가했다. 오크는 ’끼이익······.‘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신음처럼 흘리더니, 곧 힘이 다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둔중한 무게감이 있는 육체가 흙바닥을 울리며 넘어졌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오크의 사체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가슴팍이나 전면에 박혔던 철목시가 걸리적거리면서, 그대로 땅에 박지 않고 조금쯤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 화살촉이 오크의 몸체를 뚫고 뒷면으로까지 뻗어나왔다.


불편한 자세로 기울어서 땅에 기댄 오크의 사체. 제냐는 터벅거리며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보통 이런 식의, 이족 보행형의 몬스터들은 도축이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외형이 사람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행위가 지나친 선정성과 유해한 상상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족 보행이라고 하더라도, 아예 사람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 몹들은 가능했다. 오크같은 일부 종들에 대한 제한이다.


제냐는 근처의 나무 둥치에 기대어 잠시 앉았다. 털썩, 하고 주저앉아 흙바닥의 먼지가 바지에 묻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 청결을 신경쓰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디지털 정보에 불과하지만, 먼지가 묻거나 옷에 물기가 생겨 축축한 감각까지 정밀하게 재현을 하니까. 제냐는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아무 상관 않고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편인 인간이었고.


”후우우.“


제냐는 자리에 앉아 인벤토리 창을 켰다. IV라는 약어를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아까 보았던 푸른 창이 켜진다. 반투명한 창에 스크롤이 있고 위 아래로 조절하면서 전체 리스트를 훑을 수 있었다. 개중에서 파란 물약을 한번 터치해 부풀어오른 양각 무늬처럼 만들었고, 다시 한 번 건드리며 손가락으로 잡는 시늉을 하자 리스트에 그려져 있던 작은 그림이 곧 현실화되며 3D로 튀어나왔다.


둥그런 플라스크 병에 담겨 있는 푸른 액체이다. 제냐는 익숙하게 잠겨 있는 뚜껑을 돌려 깠다. 그대로 벌컥벌컥, 입구를 입에 박아 넣고 마신다. 별 맛은 없다. 무미. 맹물의 감각이다.


꿀꺽대며 마시는 중에, 곧바로 액체가 들어가자마자 MP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기본 물약이었고, 이것으로 5개 쯤은 마셔야 완벽하게 전체 MP량이 회복된다.


제냐는 플라스크 병을 하나 마시고는, 옆 자리에 던져버렸다. 아이템 별로 설정되어 있는 값들이 있었는데, 내용물이 없는 ’빈 기본 물약병‘은 버려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연 소멸하게 되어 있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양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이것으로 인해 지나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든 설정 같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내리 물약을 마셔대었다. 3개 쯤 까서 마시고 있을 때 오크의 사체가 사라졌다. 도축 불가 옵션이 걸린 오크의 사체였으나 약간의 현실감을 위해, 죽은 자리에 얼마간 남아있고는 했다.


오크의 사체가 빛의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리듯 자리에서 사라지자, 주저 앉은 충격으로 조금 들어간 흙바닥에는 약간 커다란 박스가 하나 생겨났다.


오크의 사체에 박혀 있던 철목시들도 덩그러니,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박스의 크기는 토끼나 사슴을 잡아서 나오는 것보다 조금 더 컸다. 아이템의 종류에 따라 박스의 외형은 변하기도 한다. 보통은, 클수록 가치 있는 것들이 있을 확률이 높다.

아이템의 크기 자체도 소형부터 초대형까지 등급 분류가 있었는데, 크기에 따라서도 달라졌고.


제냐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인벤토리 창에서 물약을 하나 더 꺼내들었고, 오른 손에는 금방 다 마신 물약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잠시 보더니 휙, 어깨도 제대로 쓰지 않고 물약병을 던졌다.


날아간 플라스크 병이 포물선을 그리다 박스의 귀퉁이를 맞고 빗겨갔다.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박스는 쉭, 하고 그 자리에 원래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제냐는 인벤토리의 리스트를 아래로 내리며 새로 생겨난 이름이 무엇인가 찾아보았다.


[비스트 슬레이어beast slyer]


제법 그럴싸한 이름과 함께, 작은 사진이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녹색빛을 표면에 띄고 있는 중간 크기의 검이었다. 이름과 함께 적힌 작은 설명을 띄워 보자, 상세한 정보가 있다. 검신의 길이가 75cm. 손잡이의 길이가 17cm. 무게가 4kg.

무슨 헬스 트레이닝용 덤벨같은 무게였다. 한 손으로 제대로 쥐고 휘두르기에는 벅찰 수 있는 무게감.


그러나 검신이 제법 두께감이 있고 조금 넓기도 하고, 특수한 기운이 내재되어 있어 ’야성‘ 속성을 지닌 짐승형, 야수형, 괴수형 몹들에게 추가 데미지가 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오호.“


비련의 시나리오에서 아이템 등급은 1부터 19까지 있었다. 희귀도에 따른 분류였고, 보통 희귀도가 높은 것들이 성능적으로 강력한 경우가 많았다. 희귀도와 꼭 비례하지 않는 성능과 효과를 가진 것들도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을 따져 유저들이 만들어 둔 시나리오 내 아이템 일람또한 있었지만 제냐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 나름의 이름과 개성을 가진 무구, 장비류는 희귀도도 높고 성능도 뛰어난 편의 아이템이었다. 오크를 백마리 정도 잡으면 한 개 정도 이런 게 나올까 말까하다.


제냐는 뜻밖의 수확을 보며 즐거워했다. RPG는 역시 이런 재미가 가끔 있어주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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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6. 파티 플레이 23.05.29 43 4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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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14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2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3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8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7 6 30쪽
» 6. 오크Ork 사냥 23.04.16 107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8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7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3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8 1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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