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7.03 03:25
연재수 :
359 회
조회수 :
9,391
추천수 :
772
글자수 :
3,410,230

작성
23.05.22 09:16
조회
61
추천
5
글자
38쪽

13. 마라톤Marathon

DUMMY

*


발바닥에 닫는 지면의 감촉이 정갈하고 일정하다. 길바닥에 대고 하기에는 우스운 표현이었지만, 제냐는 그렇게 느낀다.


현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중세 풍경의 세계에서 이토록 긴 야외 도로를 거대한 규모로 정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은 전혀 신기할 게 없고 그저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지만. 그것을 마치 현실의 것처럼 보여주는 사실성 높은 구현은 마치 잘 만들어진 마술이나 사기에 속는 사람의 심정처럼 생경한 기분이 든다.


약간의 이질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시대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들의 존재가. 지구의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들이 없었고, 그것이 상식이었으니까.


대부분 그런 이상함에 대한 설명은 ‘초상력Supernatural Power'이라는 것으로 퉁친다. 정신 에너지와도 혼용되는 그것은 다양한 초상 기술의 근원이 되며, 이 게임 내 세계의 자연계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비한 미지의 에너지였다.

그것을 다루는 건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란 NPC들, 그리고 게이머들의 캐릭터가 가진 정신력이다. 소수의 특출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그 에너지에 반응하여 움직일 수 있었고, 더 많은 양의 밀집된 정신 에너지와 교감하면서 능력을 키우게 된다.


NPC들과 달리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레벨 1부터 정신력 계열의 스텟들을 가지고 시작한다. 일괄적으로 ’10‘에서 시작하며, 레벨 20에 다다르는 동안 능력치 10대를 벗어나기 위한 여정을 가는 게 초보자들의 일이었다.


능력치 증가는 서술했듯 훈련과 반복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현실감을 추구한 나머지 훈련을 게을리 하면 능력치 증가의 속도 역시 느려진다. 또한 캐릭터를 생성하고 처음 증가를 하기 위해 훈련이 ’습관‘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초반 성장에 다들 애를 먹고 게임에 적응하기 위해 고생을 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꾸준하고, 잦은 텀으로 한 행위를 반복할 수록 능력치는 증가하고 아마 같은 시스템으로 운용이 될 스킬 역시 레벨이 오를 것이다.

이는 캐릭터가 행위를 할 시간을 말하며, 어떤 플레이어가 비련의 시나리오 내부에서 보낼 수 있는 플레이 타임은 총량이 적어도 한정이 되어 있다.

아무리 미치광이같은 게임 골수 분자라고 하더라도 현실이 24시간이니, 최저 생존을 위한 시간을 빼고 나머지 시간보다 더 오래도록 게임 캐릭터를 조종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 제한된 자원인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서 쓰느냐, 가 결국 게임 내 캐릭터들의 수준과 빌드(Build:롤플레잉 게임 따위에서 캐릭터 육성법의 여러 갈래와 종류를 뜻한다)를 결정하는 말이 된다.

초반부와 중반부의 행위가 종반부의 스킬을 정하고 전투법을 제한하듯 능력치 역시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올릴 수 있는 총량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고, 무엇을 중점적으로 올릴 것인가가 전략적으로 계획되어야 했다.


하드한 술사 플레이어들의 경우에는 항상 발동 가능한 초상 스킬 몇 개 세트set를 만들어 두고 플레이 타임 중 내내 그것들을 사용해 MP를 소모하고 에너지를 조작하는 감을 익힌다.

순발력을 높여야 하는 흔히 말하는 부류로, 민첩직(궁사, 총사銃士, 그 외 다양한 도구를 다루는 전문직이나 장인 계통 직군들)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손아귀에 도구를 쥐고 시종일관 돌리거나 다루며 손 끝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기도 한다.


평범한 게임에 불과했고 취미 이상이 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내부의 육성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생을 닮은 구석들이 있었다.

현실의 삶 역시 평생의 시간이라는 총량이 정해져 있었고, 결국 어느 정도 재능이라는 곱하기 계수가 있다 하더라도 어떤 분야에서 투자하는 시간은 굉장히 정직한 입력 값이다.

’재능‘이라는 일견에 분석하기 어려운 변수는 만능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와 경쟁하는 동종 업계의 타인들 역시 그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또한, 어떤 지점이 되면 노력이 계단식으로 성장하며 재능으로 일정 부분 대체되는 구간마저 생긴다. 유소년 기의 끊임없는 훈련과 교육이 10대 때의 그릇이 되고, 10대 때의 경험이 20대 때의 자산이 되는 것처럼.


물론 그런 류의 육성법과는 그다지 가깝잖은, 거리가 먼 양반들도 있었다. 최고의 VRMMO(가상현실 대규모 동시 접속자 온라인)게임은 개발진이 준비한 컨텐츠의 끝을 향해 아둥바둥 달려가지 않아도, 그 중간 과정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느낄만큼 누릴 요소들이 많았다.


지금의 제냐가 오래도록 제 발로 흙먼지를 마시며 벌판을 구경하고 여행길에 올라 있는 것처럼 말이다.


띠링,


하고 적적하고 또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채우는 소리가 있었다.


[여, 뭐하십니까. 슬슬 초보자 존은 탈출하셨습니까. 마침 접속해 계시니까 보내봅니다. 아직도 피스나 그 인근이면 만나서 파티플 어떻습니까.]


시야를 채우는 반투명한 푸른 창이 갑자기 뜬다. 이런 식으로 메세지가 뜨는 것도, 몬스터 캐릭터가 근처에 있고 어그로가 끌려 있는 상황에서는 자동적으로 제어되는 인터페이스였다.

평소에도 물론 보기 싫다면 꺼둘 수 있는 기능이다.


반투명한 푸른 창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었고, 시야 전면을 100이라고 했을때 그 중간에서 조금 상단에 가로로 길쭉한 네모 창이 뜨는 정도였다. 크기는 약 10에서 20정도. 텍스트 창 너머의 풍경도 금방 확인은 할 수 있었다.

또 시야를 텍스트 너머로 주시하고 초점을 멀리 맞추면 텍스트 창은 자동으로 투명도가 높아지며 흐려지게 되어 있다. 다시 텍스트가 떠 있는 거리로 초점을 맞추면 뚜렷해진다.


눈 앞 약 6, 70cm 정도 지점 허공에 뜨는 박스에 정갈한 글씨체로 텍스트가 적혀 있다. 대부분의 인터페이스는 푸른 색이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변경도 불가능했다. 이상한 대목에서 고집을 부리는 설정이었으나 플레이어들이 딱히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어딘지 인위적인 푸른 색은 약간은 옅었고, 또 그것을 채우는 인터페이스 창들, 박스들은 지극히 디지털적인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게임 도중에 한 눈에 알아채기 쉬운 모습이었다.


그런 인터페이스들이 뜨고 작용을 할 때마다 게이머들은 이곳이 게임 속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주기적으로 자각한다. 어지간히 잘 만들어 놨어야지, 이런 류의 게임성을 추구해두지 않으면 정말 최면에라도 빠지듯 현실의 삶을 도피하고 이 내부에서만 살아가려는 정신 상태의 유형이 들끓을 지도 몰랐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건 연약하고 잘 다루어야 하는 것이어서, 감기에 걸리듯 데미지를 입고 쇠약해진 상황에서는 다른 이의 말에 쉽게 끌려 가기도 하고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뚜렷한 주관과 확신으로 바로 서 있을 때는 아니겠으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파들이 제각기의 정신병을 조금씩은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의 배려는 컨텐츠 제작자로서 필요한 수준이었다.


물론 반대로 지극히 강해질 수도 있었다. 육신처럼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면이 적어 정신은 사람의 믿음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게 될 수도 있었고, 어떤 시련이나 고비가 와도 버티어내는 힘을 가진 이들 또한 세상엔 여럿 있었다.


보통 그런 류를 위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본받기를 원한다. 세상에서는.


아무튼 제냐는 눈 앞에 나타난 텍스트 박스에 반응해야 했다. 최첨단 그 이상의 기술력으로 만들어내는 판타지 세계였으나, 묘한 곳에서 재래식의 향기가 풍겼다.

굳이 파발로 편지를 전하는 것처럼, 원거리 대화를 텍스트 형태로 제한을 하고 그 양마저 그다지 많다고는 못할 것으로 만들어 두다니.

한 번에 다량을 전달하지도 못하고 꼭 상대가 반응을 해야 다음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것마저 편지와 비슷했다.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눌러 적고, 또 그것을 고이 싸서 배달원에게 전달을 하고, 한참 후에 답장을 받은 뒤 다시 그 답을 적고.

사실 재래식을 향한 향수나 그 풍취는 사람들이 모두들 바라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 나름의 매력이나 합리성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거세게 반발을 다들 했을 텐데.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모여서라도 말이다.


그런다고 게임사가 꿈쩍이나 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콧대 높고 또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다. 시나리오 온라인을 만들고 서비스 하는 조직들은.


아무튼 그런 향수로 인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기도 했다. 많고 많은 시절들 중에서 하필 중세 즈음이 모티브인 점은. 완벽하게 발전하지도 못하고 지지부진한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던 역사의 중간 지점이 그토록 많은 창작물들의 배경과 소재로 다루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도 늘 학창 시절을 다루는 이야기, 청춘을 다루는 컨텐츠가 각광을 받는 것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은 모두 실패의 흔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좋은 말로 하면 열정이었다.

삶의 질감이 민낯에 선연하게 와닿았던 시기들. 뼈아픈 실패도 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 있는 시절들.


그런 시절을 대변하는 것이 컨텐츠로 양산되고는 하는 시대상들이었다.


그 시절들은 대부분 비극을 품고 있다. 무지로 인해, 그리고 저열한 비겁함이나 악인들의 득세, 온갖 분열과 혼란 속에서 죽어갔던 선조들의 이야기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역사라는 것은 토대처럼 남아서 상관이 없을것 같은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은연중에 의식 속 이야기로 남아버리고 만다.


동양 문명권의 이들은 왜인지 사극 분위기의 애달픈 가락만 나오면 괜히 뭉클한 게 있는 것처럼. 그 시대에 제대로 비호받지 못하고 쓸려나갔던 비극적인 인생들이 있음을 무의식중에 알기에 떠오르는 감정이며 공감이다.

결국 인생의 본질이 슬픔에 더 가깝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런 부족함과 비극과 실패의 흔적들은 아무 문제도 부족함도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는 현대 사회의 인종들에게 근원적인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흠.”


제냐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텍스트 박스를 클릭했다. 걷고 있는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페이스 창은 사용자의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약간 볼록하게 텍스트 창이 튀어나오며 풍선이나 어떤 물질이 그러듯 변할 것같은 외형이 되었고, 제냐가 한번 더 건드리자 이전의 문장이 지워지고 빈 창이 떴다.


텍스트 박스 내부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는 컴퓨터 따위에서 문장을 입력할 때 나타나는 기호다. 이곳에 문장을 입력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란 뜻이다.


제냐가 입을 연다.


“지금 세슈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초보자 존은 졸업할만큼 레벨이나 스텟도 됩니다. 안 그래도 솔플에 지겨웠던 참인데 잘 됐습니다. 2인 파티로 사냥이나 좀 해보죠. 어디에요 지금?”


한 번에 용건을 전해야 하다보니 두서없이 여러 질문과 대답들이 이어졌다. 제냐의 말과 동시에 텍스트 박스에 글씨가 적혔다. 텍스트 박스의 거리에 초점을 맞추며 제냐가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텍스트가 전송되었고, 인터페이스 창이 시야에서 창문이 닫히듯 좁아지며 사라졌다.


휘이이이, 하고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모래 먼지를 실어다가 제냐의 근처에까지 와서 두고는 지나갔다. 사람들이 있을 만도 한데. 참 적적한 여행길이다.


그렇게 한 오분 여, 를 지나갔을까. 제냐는 뒤에서 소리를 감지했다.


다그닥, 다그닥. 하고 말이 뛰는 소리였다. 말발굽이 정비된 가도를 내달린다. 굳이 뒤를 처다보지는 않았다. 덜컹거리는 듯한 마차가 뒤에 매달려 있을 듯하다. 말발굽 소리의 박자를 들어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PK를 선호하는 범죄자 플레이어나 악한 성향을 지닌 NPC가 필드에서 습격을 한다고 하면, 굳이 마차를 끌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다 들리도록 기척을 내면서 뒤로부터 천천히 접근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미친듯한 속력을 내면서 멀리서부터 포위망을 좁혀 오는 마적떼의 모습으로 다가오겠지.


평야는 넓게 트인 공간이었고 플레이어는 그 공간에서 다양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농락할 수 있는 반 초인이었다. 레벨과 스테이터스가 높아지면 온전한 초인이 된다.


제냐는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서 감각을 조금 곤두세우고 ’보법‘ 스킬을 준비했으나 대부분의 경우의 수가 평이한 전개로 이어지리라고 예측했다.


다행히 높은 확률이 안정적으로 작용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두 마차가 그의 곁을 지나간다. 앞을 바라보고 걷던 제냐가 흘끗 옆을 보았다.


두다다다, 하고 달려가는 듯한 소음을 내면서 그리 고급스럽지는 않은 마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다양한 기술들이 발전한 게임 내에서 저처럼 안정감이 없는 목제 마차라면 어지간히 자린고비 스타일로 플레이를 하는 유저거나, 혹은 일반 양민층을 형성하는 NPC의 지나감일 테다.


투레질을 하면서 그리 빠르지 않은 박자로 달려가는 두 마리의 흑마는 갈색 갈기를 휘날리며 근육을 자랑했다. 마차는 한 네 명 정도가 내부에 타면 금세 자리가 찰 것 같은 작은 크기였는데, 창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작은 창 하나로 빼꼼히 고개를 든 인형이 하나 있었다. 자연스레 그쪽까지 흘긋 눈길이 가서 바라보자 제냐의 눈에는 그야말로 인형처럼 생긴 소녀가 하나 잡혔다.


고불고불한 블론드 헤어를 길게 늘어뜨리고 땡그란 눈동자를 불을 켠 듯 반짝이며 제냐를 바라보았다. 순간 파악하기로, 입고있는 행색의 옷의 재질이 그다지 고급스럽지 않은 걸 보아하니 외견과는 달리 신분은 별로 높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력도 없는 듯했고.


별 것 아닌 이벤트였다. 가도를 사용하는 것은 플레이어 뿐만이 아니다. 오늘 세슈칸으로 향하는 길목, 그리고 제냐가 걷는 지점들은 왜인지 한적했지만.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적이 아무 때고 있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마부석에는 신체 건장한 청년 하나가 고삐를 쥐고 말들을 몰고 있었다. “이랴.” 이미 앞으로 지나가버려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못한 남자가 목소리를 냈고, 그와 함께 말들이 속도를 더 내며 빠르게 지나친다.


마차 내부에 사람이 몇 더 있었던 것 같았다. 고개를 내놓은 채 시선을 마주치는 꼬맹이 탓에 파악은 못했다. 제냐는 금세 지나가는 인물들에 신경을 끄고 본인의 걸음에 집중했다.


띠링.


하고 다시 알람이 오며 텍스트 창이 그의 시야에 나타난다.


[잘 됐네요. 오면 파티나 맺죠. 아직까지 솔플만 하십니까? 중형 몬스터 이상부터는 혼자 딜이 안 나올텐데. 그 동안 새로 익힌 스킬들도 보여드리고. 저보다 못하다면 쩔도 좀 해드리겠습니다.]


텍스트 창의 메세지였다.

제냐는 그것을 읽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황무지의 햇볕이 따사롭다 못해 따가웁다. 먼지 섞인 바람과 주황빛의 시계는 변함이 없다.

그런 제냐 킴의 옆으로 마차는 좀 더 빠르게 다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의 후면이 그를 스쳤고 또 멀어진다. 마차의 바퀴그 덜컹거리며 말들이 발을 구르자 일어나는 자욱한 흙먼지에 고개를 돌리며 제냐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중얼거렸다.


텍스트 창이 전환되며 그의 음성대로 문자가 적혀나갔다.


["ㅋ(키읔이라고 읽어서 적는다). 알겠습니다. 제가 좀 더 세면 쩔도 해드리죠. 클래스는 여전히 도끼 근접 전사이신겁니까? 황야 지룡까지는 무슨 형인지 몰라도 혼자 잡을 순 있던데요."]


마차가 덜그덕거리면서 그 엉덩이를 제냐에게 보이며 점차 작아졌다. 그의 걸음에 비한다면 아주 빨랐다. 어쨌거나 말이 모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두 마리의 흑마는 이제 그 희미한 옆모습이나 다리의 움직임만 보일 뿐이다.

먼지도 차차 가라앉는다. 고요한 황야의 가도를 터벅이는데 다시 텍스트의 회신이 왔다.


[크캬카칵(메시지 창을 띄우고 웃으면 의성어가 적힌다). 쩌는데요. 자신감 보게. 황야 지룡이요? 그걸 혼자 잡았다고? 뭘 하고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한 마리랑 술래잡기 하면서 하루종일 걸릴텐데? 아니 뭐... 알겠습니다. 와서 얼굴 보시죠. 세슈칸 27번가 '푸른 단발 소녀'라는 목조 여관집에 있겠습니다. 연락주세요.]


세슈칸은 대도시였다. 평화의 숲 옆 도시Peace보다도 조금 크다. 피스 역시 어지간한 대도시였으나, 세슈칸은 이곳 저곳으로 뻗어나가는 다양한 지방의 길목에 위치하기도 했다. 여러 지방이란 게임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구간의 레벨링(레벨을 높이는 일, 시나리오 온라인에서 주로 괴물 사냥)이 가능한 사냥터로의 길목이었다.


중급자라고 불리는, 3-40의 레벨을 지나간 플레이어들부터 그 이상의 고레벨 플레이어들까지 혼재해 있었다.

곧 피스에서는 비련의 시나리오의 진가를 보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대규모 온라인 게임의 즐거움이라는 건 결국 수 많은 인파와 함께 즐기는 게임 플레이의 묘미와 분위기였는데, 피스보다는 세슈칸이 그런 것들을 느끼기에 적당하다.


서로 상관하지 않고 기초 레벨 올리기에 급급한 뉴비들과 돌아서 그곳에 정착한 고레벨 플레이어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접점 따위가 전혀 없었고, 그곳에서 제냐처럼 홀로 돌아다니는 이라면 정말 말 몇 마디 섞을 새도 없는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하고 일반적으로 터져 나오는 NPC들의 퀘스트와 각종 이벤트들, 파티 플레이를 요구하는 중형급 이상의 몬스터들의 토벌.

중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일구어 놓은 각자의 컨텐츠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슬슬 정말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의 플레이를 맛보는 지점이라고 해도 좋았다. NPC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수 있겠으나, 유저들의 시점으로는 충분히 보다 번화지인 곳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극한의 자율성과 자유도를 추구하는 게임이었고, 플레이어 캐릭터들의 행동은 그대로 게임 개발사가 설정해 놓은 게임 내부, NPC들의 역사에 편재되어간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메인 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시나리오의 물줄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을 때 흘러가는 자연스럽고 또 정해진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이 플레이어들의 행동으로 인해 조금씩 개편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라는 게임의 컨텐츠는 말이다.


플레이어의 행동은 추가적인 컨텐츠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고, 원래 있던 오브젝트를 파괴하고 없앨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퀘스트들이 동시에 사라지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그런 수많은 난수에 의한 작태를 끊임없이 계산하고 버그가 없이, 개발진들이 미리 정해둔 거대한 주제를 염두에 두며 이끌어나가는 것이 비련의 시나리오를 운영하는 초인공지능의 역할이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거대한 게임, 데이터들의 난변수를 종합하고 유지보수하는 일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개발진들의 손과 머리는 어디까지나 전체 방향을 설정하고 주요한 지점들을 확정짓는 일이었다.

세부적인 일손은 인공지능이 알아서 돌리게 된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개발한 태Tae라는 회사의 천재들은 결국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들이었다.


이전 어느 기술자들과 과학자들도 개발해내지 못한 성능의 초인공지능 머신을 말이다.


그 능력과 기계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세계 유수의 거대 기업들의 지원을 받으며 실행시킨 성능 실험 프로젝트가,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라는 물건이었고.


물론 세간에 알려져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태는 물론이고 그들이 만든 기술과 그 운용 역시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그저, 어느 괴물같은 천재 집단이 이딴 말도 안되는 성능의 프로그램을 완성시켰구나 여기며 감탄하고 즐길 뿐이었다.


이미 약소하지만, 제냐 킴이라는 캐릭터가 시나리오 온라인에 생성되어 플레이 했던 몇 가지 행동과 선택들에 의해서 전체에 어떤 영향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몇 개의 퀘스트가 사라졌거나, 변형되었거나, 생성되었을 지도.


단순히 그가 있었던 피스 시에서의 일 말고 그 주변까지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


견고하게 짜여진 퍼즐형 구조는 작은 돌 하나만 밀어 옮겨도 밀려난 부속이 다른 것들의 위치를 바꿀 테니까.


어쨌든 그런 점에서 세슈칸은 다양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커다란 퍼즐판이었다.

퀘스트 도중에 퀘스트를 이루고 있는 부속품이 밀려나 도중에 변형될 수도 있었고 말이다. NPC와 다양한 오브젝트를 사이에 둔 유저 간의 상호 작용은 시나리오 내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치열하고 치밀한 롤 플레잉 게임. 역할극의 본래 의미가 그런 것이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설정과 사건을 두고 한 쪽의 플레이어는 예컨데 ’공격‘을 맡을 수 있고, 다른 쪽은 ’수비‘를 맡아서 거대한 시나리오 온라인 내에 소규모 게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단순하게 어떤 요인의 호위 임무를 맡은 플레이어와 요인의 암살과 습격 임무를 맡은 이들끼리 마주치는 경우라거나, 말이다.


“재미있겠구만.”


제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등에는 비스트 슬레이어가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허리 춤에는 크로스 보우가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게 뒤쪽으로 잘 매어져 있다.


차림새는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가 으레 그러하듯, 펑퍼짐한 황토색 로브 따위를 대충 걸쳤다. 무구들은 로브의 바깥에 벨트나 노끈을 이용해 고정해두었다.


한동안 마차가 지나가고 나서는 플레이어도, NPC도 지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 내의 대륙이었으나 지나치게 방대한 원 맵One-map은 이렇게 한적한 구간들이 종종 있었다.


제냐는 떠가는 구름이나, 날아가는 새나, 황야였다 평야였다, 바뀌는 경치를 구경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걷기도 하고 보법이나 뛰기 스킬을 연마하기도 하면서.

체력이 점차 붙어가는 초인적인 캐릭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슈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얼 타임으로 따지면 이틀 정도가 걸렸고, 접속해서 실제 걸은 시간을 따진다면 반나절은 걸린 듯했다.


마지막에는 거진 마라토너처럼 뛰기만 했고, 그러고 나니 지구력, 근력, 순발력이 골고루 조금씩 올라 있었다. 뛰기의 변형인 ’마라톤-장거리 달리기‘ 스킬이 생겨나기도 했다.


***


발바닥에 딛는 감촉은 선명하다.


제냐는 뛰는 걸 좋아했다.


운동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농구도 괜찮고. 축구는 별로 못했지만. 아무래도 하체 부실같은 느낌이 조금 있었다.

뭐, 변명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적당한 리듬감으로 흔들리는 상체의 운동이나 팔다리의 조화, 그리고 내뻗으며 나아가는 몸의 감각같은 것 말이다.

바람이 도와준다면, 조금 더 좋은 경치나 촉감을 누리면서 갈 수 있었다.


하체를 움직이며 오래도록 뛰고 있다보면 잡다한 생각들이 사라지게 된다. 턱끝까지, 숨이 벅차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때 즈음 거기서 더 뛰어야 했다.

호흡은 안정되고, 감정마저 토해져 나오는 것 같다.

땀과 함께 머릿속에 있었던 복잡하고 쓸 데 없는 생각들이 말이다.


다만 초인적이라는 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캐릭터의 기능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제냐 킴이 아니라 김서원의 것이었다면 이미 옛저녁에 지쳐서 나가떨어졌겠지만.


김서원의 경험으로는 어느 정도 가쁜 숨이 올라오고 호흡기나 들썩이는 어깨 부근이 제어가 안 될만큼 이미 뛰었건만. 그럼에도 제냐 킴의 호흡은 그렇게 불안해지지 않았다.

적당한 리듬감은 견고하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스킬로써 있는 ’보법‘의 영향일 지도 몰랐다.


뛰기, 나 이후에 생겼던 장거리 달리기, 마라톤 스킬의 보조일 지도 몰랐고.


어쨌거나 제냐 킴은 절대적이라고 느껴지는 리듬감의 지배 속에서 계속해서 달렸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걷는 거리를 알 수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적당한 게임 인터페이스와 불친절한 게임성으로 인한 현실감의 밸런스를 잘 맞추는 프로그램이다.

대륙 전도 따위를 실시간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목표로 설정한 지역의 방향과 내가 출발한 곳의 위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용자가 의도한다면 최초에 시작지에서 얼만큼 이동했는 지를 알 수 있다.


이 시작지는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맵‘ 기능으로 목표지를 설정할 때 보통 초기화된다. 초기화하지 않고 주욱 이어가며 계속 재는 자들도 있었다.

재설정도 그다지 어렵지 않고 이어가는 일도 별로 어려운 기능은 아니었다. 다른 인터페이스가 그렇듯, 캐릭터의 신체 어딘가를 가볍게 두드리거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조작이 가능하다.


대략적인 수치로 확인도 가능했고, CM나 MM의 단위로도 볼 수 있었다.


캐릭터는 다른 신체 능력이 그러하듯 정확한 감각 기관들을 갖고 있었지만 전투 시에 이 거리계를 이용해서 공방에서의 거리감을 잡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어깨선이 위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며 뛰고 있는 제냐의 부지런한 몸이 있었다.


그는 황야의 가도를 달린다.


보법, 뛰기, 마라톤 스킬이 복합적으로 작용되고 있었다.


보법이라는 건 복싱에서의 풋워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먼 거리까지 뛰어가는 이동에도 적용이 되지만 사실 주로 사용하는 건 전투 시의 거리 재기와 방향 잡기이다. 상대의 공격에 재빠르게 대응하고 몸을 움직여 회피하고, 상대의 빈틈으로 파고들어 공격할 수 있도록.

장거리를 뛰는 지구력보다는 순발력 위주의 기술이다.


다만 그런 순발력도 종류는 다르나 결국 근육의 작용이고, 큰 테두리 안에서 본다면 체력의 일부이니 여하간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했다.

적어도 뛸 때의 올바른 자세 교정 정도에는 도움을 주고 있다.


’뛰기‘ 스킬은 다른 기본 스킬들과 마찬가지의 물건이었고, 캐릭터가 조금 더 재능이 넘치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단순한 동작에 걸리는 보정과 스킬이었으나 이런 류를 갈고 닦아 레벨을 높여 놓으면, 그건 결국 일류 이상의 운동선수가 고련으로 얻는 완벽한 자세와 감각을 보정으로 받게 된다.

이런 사소한 게임 내의 보정을 여러 개 중첩으로 가지게 된다면, 그는 결국 운동선수 그 이상의 초인적인 힘을 보이는 캐릭터의 몸을 완벽한 운동신경으로 제어할 수 있게끔 발전하는 것이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운동 선수들에게 유리한 면이 조금 있었다. 현실에서 뛰어난 운동 신경을 보유한 자라면, 게임 내에서도 유사하게 움직이는 그 물리법칙 내의 운동성을 더 빠르게 파악하곤 한다.

그런 이들은 더 쉽게 많은 스킬을 익히게 되고, 초반부에서는 더 많은 경험치를 획득하며 기초 스킬의 레벨 업도 역시 더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중반부 이상을 넘어가면 게임의 난이도를 위해서인지, 어지간해서는 쉽게 올릴 수 없게 설정되어 있다.


스킬과 관련없이 플레이어가 현실에서 갖고 있는 감각이 둔화되는 건 아니었지만, 스킬 레벨이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정직하리만치 부과되어 있는 ’노동량‘을 맞추어야만 경험치가 다 차는 것이다.


거기다 스킬 레벨의 종반부로 가면, 기본적인 스킬이라 할 지라도 현실에서의 운동 선수 그 이상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기본적으로 초인의 움직임을 상정한 동작과 자세 보정들이기에 현실에서 아무리 운동 신경이 좋다고 하더라도, ’게임적‘인 적용에 어느 정도 한계와 차이 정도는 있는 것이다.


관성을 이해하고 빠르게 달리다 멈추는 동작을 잘 하는 운동 선수가 있다고 할 때, 아무리 그래도 그가 음속으로 날았다가 순식간에 멈출 때의 인간의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지는 잘 연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제대로 힘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불가능하지만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싶은 과장성을 게임의 스킬들은 보정으로 표현한다.


검을 아무리 과장스러운 자세로 크게 휘둘러도 인간의 검술로 광범위한 거리를 일참에 베어내는 게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 결과값에 맞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위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큰 궤도로 검을 휘두른다던가, 하는 뭐 그런 보정들이다.


그 스킬들을 짜서 내어 놓는 건 결국 하나의 AI이기에, 마치 한 명의 감독이 여러 재료를 써서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여러 보정들이 합쳐지면 하나의 완성된 초인의 전투가 나타난다.

실제로는 별다른 운동 재능이 없는 이라도 충분히 게임을 깊이감 있게 즐길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이다.


“후, 후.”


웃는 것은 아니었다.


제냐 킴은 일정한 리듬감으로 숨을 뱉어냈다.


콧김과 입에서 이산화탄소가 같이 뱉어져 나왔다.


의도적으로 어느 정도 숨을 쉬고 있었다.


황야의 가도 위에서의 질주다. 말도, 자동차도 없이 그저 두 발로 달음박질 하는 꼴이었지만 초라한 느낌은 없었다. 도리어 바람을 더 잘 느낄 수 있기에 선명한 경험으로 와닿는다.

황야였다가, 목초지가 펼쳐진 평야였다가, 다시 황야 지대로 들어온 그의 세슈칸 가는 길 마라톤이다.

사위는 약간 어둑한 톤으로 배경이 칠해져 있었는데, 시간이 깨나 지난 탓이다.


어느새 오후의 낮이었던 하늘에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는 중이다.


어둑하게 또 짙게 내려앉은 늦저녁의 황혼이 주변을 장식했다.


제냐는 그 경험이 선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또는 열정없이 살아가다 보면 간혹 현실에서도 이런 분명한 감각을 느끼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듯 살고,


제대로 힘을 주어 인생의 방점을 찍지 않아 그럴싸한 쉼표조차 없이 물에 물탄듯 흘러가는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그렇다.

육신의 짐인지 마음의 짐인지 모를 것들을 등에 이고 굼벵이처럼 살아가던 삶.


게임에서 이런 선연한 감각과 현실성을 체감한다는 게 우스운 아이러니였지만.


게임을 플레이 하는 이 시간에도 ‘제냐 킴’은 그 너머의 김서원으로서 실존하고 있다.


김서원이 있기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제냐 킴도 있고, 그의 사고가 또한 뚜렷하게 게임 그래픽과 오감 체현 프로그램 너머의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눈을 가려 게임 속을 헤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실을 살며 현실의 김서원이 플레이 하는 한 순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는 현실성과 약간의 씁쓰레한 서글픔도 모두 지독하게 현실의 것이고 또 진짜였다.


게임을 하고,

놀이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현실에서 누군가 로그아웃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놀이를 한다고 모두 가벼운 삶을 사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현실의 짐에 대한 반대 작용으로 억지로 게임을 하면서, 혹은 웃긴 코미디 따위를 보면서 인위적으로라도 웃고 또 가벼운 마음을 가져보려는 게 으레 있는 일이다.


요란한 삶을 살았던 이는 조용한 음악을 찾을 것이고, 지나치게 조용하고 평이한 삶만을 타의로 살아온 이는 요란한 음악을 찾을 테다.


웃을 일이 자연스럽게는 많이 없었던 인생을 사는 자는 코미디나, 가벼운 게임 따위를 찾을 것이고.


어떤 행동과 그 기저에 깔린 정서의 본질은 정반대일 때가 많았다.


사람은 누구나 균형을 맞추기 원한다.


늘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편향된 경험을 하는 이들은 반대의 것을 얻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감을 원하니까.


그런 면에서 제냐가 게임을 하는 것도, 비슷한 논리에서 설명되는 이야기일 수 있다.


무료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런 취미를 가지는 것이다.

제냐의 정신이나 감각은 시뮬레이터의 작용으로 게임 내를 활보하고 있지만 김서원의 몸은 여전히 원룸 방 안 침구형 기계 내부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얼척없는 취미일 지 몰랐지만.


감각이나 정신도 역시 삶에 있어서 아주 큰 작용을 하는 건 분명하다.


"헉, 헉."


숨이 조금 차올랐다.


제냐는 끊임없이 달렸다. 갈 길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더 달릴 길이 있었다. 비록 게임 내에서였지만 운동하는 감각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았다.


초인적인 신체도 계속해서 과부하를 걸어대니 조금쯤 반응이 오고 있었다. 10을 장정의 체력이라고 했을 때, 20은 그 두 배였다.

말로 하는 것이 두 배이지, 세세하게 살펴본다면 그 이상의 잠력을 품는 수치이다. 신체 각 부위에 있는 다양한 근육들 중에는 파워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곳도 있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힘의 증가치가 적은 부위도 있을 테다.

그런 부분들까지 모조리 두 배가 되고 또 스킬 시스템의 보조로 운동 신경까지 일류의 것을 모방한다면 실제 수행 기능은 두 배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제냐의 물리계 스텟들은 20을 넘었다.


이렇게 운동을 하는 와중에 스텟이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그것이 적용이 되지는 않지만(증가 스텟이 실제 캐릭터에 적용되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전투 외의)중간중간 스텟 창을 열어보았는데 약간씩 숫자가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스텟이 오를 정도의 강도라면 캐릭터가 상당히 고되다고 느낄 수준이라는 말이었다.

각종 통감에 대해서는 둔한 시나리오 온라인 내의 캐릭터 신체이지만 그렇게 한계점에 대해서 파악하는 법이 또 있었다.


노을과 함께 타들어가듯 적색으로 물들어버린 황야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어두워졌다.


노을 다음의 어둔 그림자가 장막처럼 평야를 덮어간다. 세세한 감각이 실제 황무지를 뛰어 다니는 것처럼 텁텁한 공기나 그에 섞인 모래 먼지의 질감들을 표현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다.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면 사소한 감각들은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 운동의 원리였다. 집중력의 원리였고.


시나리오 온라인은 실제 사람의 감각과 정신에 연동하는 것이기에 그런 작용들마저 구현을 해낸다.


육체적인 트레이닝 역시 정신에 따른 근육반사로 약간의 효과는 이룰 수 있었고, 정신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시나리오 온라인은 아주 쓸만한 녀석이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가끔 해볼만은 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간을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 비련의 시나리오는 중독성이 조금 적은 게임이기도 했다. 가만히 느껴보면 무서울 정도의 현실성은 싫든 좋든 몸과 함께 두고 온 현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선연한 감각과 갖가지 게임성들, 드라마틱한 판타지 세상의 연출들은 오히려 묘한 이질감을 형성하면서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것이다.

여기는 네 본향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코에 들어오는 바람. 내뱉어지는 숨과 입가의 마른 땀과 소금기. 흘러내리는 이마 부근의 땀이나 맞바람의 세기에 따른 차가움.

노면 상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죽신의 밑창 촉감.

해가 지면서 주위의 기온이 내려가고, 기후에 따라서 하늘의 모양이 바뀌는 것. 때때로 비가 오기도 하고, 해가 쨍쟁하기도 한 것.


그런 묘한 이질감이 든다. 그것은 지독하게 현실적이었으나 비현실적이었다. 김서원이 여기서, 이렇게 마라톤을 할 수 있을리가 있지 않은가.

무려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뛰어댄다는 건. 그것도 천천한 속도나 페이스로 이어지는 뜀이 아니었다.


김서원이었다면 분명 질주에 가까운 속력이었다.


등에 멘 비스트 슬레이어나, 가죽 옷과 그 위에 걸친 갑옷의 거슬림. 온 몸에서 둔중하게 느껴지는 여러가지 모험용 장구류들의 무게감과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나는 소음들.


그는 중세 시대의 초인적인 모험가가 아니었고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운동은 좋아했지만 선수 급의 플레이를 해본 적은 조금도 없었고. 그의 현실은 그저 대학교 과제를 일일이 맞추어 제출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또 다시 등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또 먼 곳에 사는 지인이나 친구, 가족과 가끔 연락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세상에 갑작스럽게 괴물이 등장하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과거에 사멸했던 공룡이 갑자기 나타날 일도 없었다. 쥬라직 파크의 내용처럼.

정확히 말하면 현대의 과학 기술력은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생명 윤리적인 이유로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몰랐고.


말도 없이 그리 오래 뛰었다.


사위가 별과 달빛 말고는 깜깜해진 뒤에도 한참이나. 다행히 캐릭터는 밤 눈 역시 밝았다.

현실에 비유하자면 오지에서의 극한 상황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정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는 캐릭터의 사정 상, 그런 기능들이 모자라서는 안될 테였다.


일부러 하드 모드를 즐기기 위한 유저들이 아니라면, 평균적으로는 평범 이상의 건강함이 플레이어 캐릭터의 최소한의 요구 조건일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계속해서 있다 보면, '밤 눈'같은 스킬 또한 생긴다.


제냐는 계속해서 마라톤을 하다가, 한 시간 여 뒤에 주변이 조금 더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굳이 스킬 창을 켜서 확인해보지는 않았으나 어두운 가운데 시력을 집중하며 길을 따라 달리면서 야간 시야를 위한 스킬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부엉이의 눈'인가 뭐 그딴 이름이었던 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틀릴 수도 있었다.

별다른 특이 조건이 없다면 가장 빠르고 또 쉽게 얻는 야시경 스킬이었고 마스터 이상이 된다면 정말 부엉이처럼 선명한 야간 시야를 얻는다고 들었다.


"우아아아아!"


제냐는 밤의, 인적도 없는 평야를 달리다가 문득 소리를 질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때때로 이상한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없거나, 혹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굳이 하지 않을 뿐이다.


거세된 열정은 다양한 행동을 막게 마련이었고. 너무 오래 놔두어서 다 식어버린 열정의 쇠는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아서 젊은이를 괴롭게 한다.


김서원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마땅히 소리 지를 곳을 찾기도 뭐했기에, 그냥 제냐 킴으로서 지른 것이었다.

메아리도 없는 평야에서 소리를 지르고, 숨을 내쉬고,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한참 달렸다.


***

juli-kosolapova-Us_dv71f1bc-unsplash.jpg


작가의말


그럴싸하게 영어로 소제목을 붙여놨지만

뭐 그럴듯한 전개는 아직 없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37 ju*****
    작성일
    24.03.11 17:06
    No. 1

    호흡도 모든 신체 움직임도 위빠사나 수련처럼 자신의 상태를 세심하고 면밀하게 알아채고 또 주변을 쉴 사이없이 관찰하며 가장 적합한 균형상태를 찾아 조화를 이루면 자연적으로 성장해가는 진정한 처절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힘겨운 상태를 반추케 합니다
    니체가 마부의 무자비한 채찍을 맞으며 일어나지 못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달려가 끌어 안고 통곡을 한뒤 이후 십여년동안 죽을때까지 정신이상으로 지낸거처럼 ‘비련의 온라인’ 캐릭터들도이세계에서 못다한 숙명을 위로받으려 어지러운 환상속에서 한 번 밖에 못 사는 새인생을 차근차근 음미하는듯 합니다.
    이처럼 섬세하게 담담히 안내받는 작품은 전설입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살생금지
    작성일
    24.03.12 00:39
    No. 2

    굉장히 어려운 말씀을... 해주셔서 두 세번 읽어보아야 했습니다 ㄷ ㄷ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7 ju*****
    작성일
    24.03.12 15:40
    No. 3

    허접한 글로 괜한 심려를...
    이렇게 두 세번 음미하며 몰입하는 작품은 거의 드뭅니다.
    정신집중해서 느낌을 따라 가려니 진도가 나지 않지만 정독 정주행 합니다.
    건필 하십시요.
    님의 다른 작품들도 하나하나^^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살생금지
    작성일
    24.03.12 19:29
    No. 4

    감사합니다~ 그런 의도로 쓴 게 맞았습니다 ㄷ ㄷ ㅎㅎㅎㅎ 그대로 봐주시는 분이 계셨군용... ㄷ ㄷ ㅎㅎㅎ 네넵!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29. 돌아가는 23.07.13 38 4 26쪽
29 28. 여기 있습니다. 23.07.13 38 4 27쪽
28 27. 악수 +2 23.07.10 37 4 39쪽
27 26. 솜씨 확인 23.07.09 38 4 33쪽
26 25. 퀘스트 진행 23.07.09 38 4 36쪽
25 24. 메리골드 23.07.07 39 4 28쪽
24 23. 로멜리아Romellia 23.07.05 35 4 44쪽
23 22. 세슈칸에서. 23.07.05 38 4 31쪽
22 21. 불타는 부락 23.07.03 35 4 41쪽
21 20. 불타는 숲 23.06.12 40 4 24쪽
20 19. 보법 23.06.10 42 4 23쪽
19 18. 범영웅凡英雄 23.06.10 42 4 31쪽
18 17. '취륵'은 그렇게 죽었다. 23.06.09 47 4 62쪽
17 16. 파티 플레이 23.05.29 42 4 43쪽
16 15. 멧돼지 사냥 23.05.28 52 4 34쪽
15 14. 멧돼지 23.05.26 55 4 33쪽
» 13. 마라톤Marathon +4 23.05.22 62 5 38쪽
13 12. 세슈칸Seshukan 가는 길 +2 23.05.04 66 5 29쪽
12 11. 도서관 제육 23.05.03 59 5 25쪽
11 10. 황야 지룡 23.04.30 62 5 44쪽
10 9. 붉은 날개 23.04.29 77 5 31쪽
9 8. 흰줄무늬 검은 고양이 코미어 23.04.29 87 5 29쪽
8 7. 물약 상점의 필리Philly 씨 23.04.27 96 6 30쪽
7 6. 오크Ork 사냥 23.04.16 106 6 27쪽
6 5. 이성적 파이어볼 +2 23.04.15 149 6 33쪽
5 4. 긴장성 파이어볼 +2 23.04.12 157 6 22쪽
4 3. 로그 오프Log off 23.04.12 186 7 15쪽
3 2. 개멋진나 최 23.03.12 249 7 31쪽
2 1. 파란 귀 토끼 23.03.11 452 9 30쪽
1 0. Prologue. +1 23.03.11 517 1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