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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姸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의 저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운명의저편
작품등록일 :
2015.04.20 20:43
최근연재일 :
2015.04.30 23:36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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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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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수 :
18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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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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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부 16화

안녕하세요?^-^공모전 소식을 알게되어 쓰던 소설을 한꺼번에 업로드 하느라 양이 들쭉날쭉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DUMMY

1부 16화


브레이다아크만은 넓어서 점심을 먹을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는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저 멀리서 그늘을 제공할만한 나무를 발견하고 달리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한참만에야 도착해서 바로 짐을 내렸다. 말도 사람도 허기가 질만한 시각이었다.

어제처럼 숲이 우거진 곳이 아니라 평지에 큰 나무 몇 그루와 개울가가 다였다. 단출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말을 이끌지 않아도 말들은 알아서 물을 마시고, 풀을 뜯었다.

일행들도 점심거리를 들고 그늘마다 모여 앉았는데 어쩌다보니 어제 점심을 함께했던 네 명에 게오르그와 크림슨, 그리고 밀러가 함께 앉게 되었다. 누구와 앉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다들 묵묵히 음식을 꺼냈다. 몇 입을 먹어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음식만 먹었다. 그만큼 시장했었다.

허기가 조금 가시고 나서야 시안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함께 앉은 이들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힐끔거렸다. 모습을 보아하니 정신없이 음식을 먹을 때도 힐끔거린 것 같았다.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를 한 번씩은 나눠본 사람들인데, 그 중 한명,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남자. 함께한 일행 중 최 연장자이자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밀러 경, 맞죠?”

밀러는 갑작스런 호명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먹던 음식을 바닥에 놓고서 벼락같이 벌떡 일어났다.

“넵! 소신, 근위기사단 소속 밀러입니다.”

그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시안이었다. 밀러의 얼굴은 누가 봐도 기쁨에 물들어 있었다.

“전하께오서 이리 하명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얼굴이 벌게진다.

시안은 이 반응이 정상적인지, 순간 판단이 안 서서 다른 기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엘과 보니타, 의외로 율리아스가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발디는 폭소 직전인데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누군가 쿡, 찌르면 떠나가라 웃음이 터질 분위기였다. 그리고 크림슨과 게오르그는 그의 반응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체념의 표정에 부끄러움이 섞인 묘한 표정.

밀러는 여전히 벌게진 얼굴을 하고 서서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뭐라 할까, 저런 모습이 어린 소년의 모습이거나 최소한 선이 가는 남자였다면 귀여운 맛이라도 있을 텐데, 아무리 어리게 봐줘도 30대 중후반. 거기다가 잔뜩 그을리고, 굵은 근육이 이곳저곳에 박힌 모습이니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다.

“…음, 감사해요. 일단 앉으세요.”

그는 정자세로 앉았지만 아직도 기쁨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니, 게오르그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황녀님. 여기계신 밀러 경께서는 사실 황후폐하의 무용에 대해서 아주…그러니까 경의를 표해오셨습니다. 그리고 브레이다아크만 전투에 직접 참여 하셨기에…….”

“저는!”

게오르그가 더듬더듬 밀러를 변호하는데, 갑자기 밀러가 소리를 지르듯 그의 말을 잘랐다. 모두 그 소리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밀러는 시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제가 소년 시절 후장군마마는 제 우상이셨습니다! 그분처럼 되려고 기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지난 평원에서의 전투를! 희장군마마! 대단한 무용이셨습니다! 잊지 못할 만큼 기백이 넘치고 멋진 모습이셨습니다!”

이제 발디는 숨을 참느라고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시안은 그의 벼락같은 고백(?)에 당황스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끝난 줄로만 알았던 고백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도약하는 움직임! 놀라운 속도의 발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 후장군마마에 이어 전설이 되실 겁니다!!”

게오르그와 크림슨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안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밀러의 갈색 눈을 마주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이렇게 정직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내뱉고서 답을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순수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밀러 경. 호의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니 지금까지 인사하고 싶으셔서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크림슨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묻자 밀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우상을 만나보게. 절대 먼저 말을 걸 수 없을 거네.”

“푸, 푸하하하하하하!!!”

결국 발디의 웃음이 터졌다. 그는 눈을 뜨지도 못한 채 폭소했고, 이엘과 율리아스, 보니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밀러를 보고 있었다.

사실 밀러 폰 데모나는 이름 없는 남작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무예실력이 출중하여 현 근위기사단 소속 기사이자 기사단 내 1 소단장이었다. 30대 중후반에 기사단 소단장이 될 정도로 기사로서 인정받고 성공한 그는 평소에 과묵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이런 모습은 누군가에겐 당황스럽고, 또 누군가에겐 충격적일만큼 웃긴 모양이었다.

발디가 미친 듯이 웃어대자 밀러는 기분이 상한 듯 그를 노려보았다. 발디는 옆에서 보니타가 툭, 칠 때까지 그는 웃음을 멈출 줄 몰랐고 간신히 멈춘 뒤엔 밀러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밀러 경,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네.”

말은 괜찮다하지만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시안은 문득 당황하는 발디를 더 놀려주고 싶어졌다.

“발디 경. 나도 기분이 나쁘군.”

“…예, 예?!”

항상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던 남색 눈의 청년은 펄쩍 뛰듯 뒤를 돌아봤다.

“아니, 내가 우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우습나?”

“흠…말이 그렇게 되는군요.”

율리아스가 슬쩍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 오해세요!”

결국 발디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쪽저쪽에 사과하고 다녔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점심이 마무리 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식기 때문에 상황이 불거질 것을 예방하려하는지 조나단과 캐시, 그리고 그들의 동료인 데이지와 비오니타가 알아서 식기를 걷어갔다. 고맙게 그들에게 식기를 넘기고 나머지 일행은 말위의 짐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시안도 짐을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풍 위로 오르려고 발판에 한쪽 발을 올렸다. 나머지 발로 대지를 박차려고 하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대로 씻어야 할 것 아냐!”

한 쪽 발을 여전히 발판에 올린 채 상체를 틀었다.

제라드였다. 시안을 등지고 서있어서 그의 남색 머리만 보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받는 자의 얼굴은 정면에서 보였는데, 캐시였다.

제라드는 자신의 식기를 손에 쥐고 캐시에게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너는 여기 묻은 찌꺼기가 보이지 않느냐! 이것도 씻은 거라고!”

그러더니 캐시 앞에 자신의 식기를 내던졌다. 툭, 캐시의 발아래 식기가 이리저리 뒹굴며 흙투성이가 되었다.

“다시 씻어 와라.”

캐시의 바랜금발이 바람에 힘없이 흩날렸다. 그의 시선이 발아래 식기에 머물고 있었다.

“제라드 경, 좀 심하지 않소.”

캐시의 옆으로 밀러가 다가오며 말했다.

“뭐가 심하다는 겁니까, 밀러 경. 제라드 경은 엄연히 잘못을 지적한 것일 뿐인데.”

이델리오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밀러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데, 제라드가 더 빨랐다.

“들었느냐, 캐시. 이델리오 경 말씀처럼 나는 네 잘못을 지적했다. 잘못을 지적했으면 겸허히 고쳐야 마땅하지. 다시 씻어 와라.”

조용한 침묵이 다시 맴돈다.

율리아스와 이엘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율리아스의 암녹색 눈동자가 시안에게 향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모양인데, 이런 분위기가 상관이 없단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중재를 바라는 것인지. 그렇게 되면 본인의 체면이 깎일 텐데, 그런 관습을 모르는 것인가. 시안의 얼굴에서 아무런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율리아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캐시를 바라보았다.

캐시는 땅을 뒹구는 식기를 노려보았다. 수치스럽고 분했다. 단지 신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다. 바닥을 뒹구는 식기가 마치 자신 같았다. 캐시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그 날선 시선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제라드였다.

“뭐야! 감히 날 노려봐?!”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날카롭게 숲을 울렸다.

발판에 한쪽 발을 걸고 상황을 지켜보던 시안은, 캐시가 제라드를 노려보는 것을 목격하고는 걸었던 다리를 내렸다. 그의 반응이, 시안의 시선을 끌었다. 금안이 캐시의 눈빛을,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라드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캐시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 뭐라고 한마디 더 소리치려는데, 이델리오가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조나단.”

제라드를 좋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조나단은 갑자기 이델리오가 자신을 부르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델리오는 빙긋이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 말이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 지친모양이야.”

“…….”

“네 말은 상태가 꽤 괜찮아 보이는군.”

“…….”

“그래서 말인데…….”

이델리오가 말위의 짐을 툭툭, 친다.

“이것 좀 나대신 들고 가 주겠나?”

싸한 침묵이 다시 한 번 맴돌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엘조차 미간을 찌푸릴 만큼.

같은 전우사이에 짐을 서로 나눠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이, 그의 눈빛, 말투, 몸짓,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런 싸한 침묵이 내린 것이다.

조나단이 움직이려하지 않자 이델리오가 한 번 더 말했다.

“조나단.”

손가락으로 자신의 짐을 가리킨다.

“이것, 가져가라고.”

차가운 침묵 속에 결국, 조나단의 검은 눈동자가, 쥐어진 주먹이 흔들렸다.

시안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조나단의 분노는 이델리오에게는 무척 기분 나쁜 일이었다. 사실, 평민인 그를 이런 식으로 모욕 주는 것보다 아무런 말도 못하는 황녀의 체면을 깎는 일에 더 열중인 채였다. 그런데 조나단과 캐시가 갑자기 버티고 나서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감히!”

율리아스는 이젠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더는, 황녀가 나서지 않아도 한 마디 해야겠다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너는 분위기를 흐리는구나.”

가벼운 톤의 목소리가 싸늘한 침묵을 비집고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사건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목소리의 근원을 쳐다보았다. 제라드와 이델리오도 등 뒤에서 난 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안은 팔짱을 낀 채 이델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 분위기, 말투. 가볍고 평온하다. 그래서였을까, 이델리오는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황녀전하, 그렇습니다. 지금 조나단이 분위기를…….”

“아니. 네가 분위기를 흐린다고 했다.”

이델리오의 말을 싹둑 자른다. 이델리오가 뭐라고 덧붙이기 전에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명을 내렸다.

“돌아가라. 네 졸병을 데리고 돌아가.”

“…….”

“너희는 필요가 없다.”

아무런 말없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했다. 돌아가라니?!

“황녀전하!!”

이델리오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반면 시안은 평온했다. 왜 부르냐는 듯한 얼굴로 이델리오를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라니요!”

다소 멀리 떨어져 있던 시안이 그제야 서서히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데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가, 눈빛이 서서히 변한다. 이델리오와 제라드로부터 다섯 보를 남기고 선다. 금안이 횡횡한 빛을 띤다.

이델리오는 그 기백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평온했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너의 이해는 필요 없다. 명을 따라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전하!”

제라드가 큰 소리로 항명했다.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그를 봤다.

정면으로 금안과 마주한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인정은 의미가 없지. 다시 말한다, 돌아가라.”

“왜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이델리오가 항의하자 시안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신분에 엄청난 무게를 두는 자칼 가(家)의 천박한 장남.”

“……!”

“네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너는, 내 말에 어떠한 이의도 달면 안 되지.”

“…….”

이델리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그는 어떤 말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시안은 한마디를 더 던진다.

“너와 저자를 추천한자가 누구냐.”

“…그,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너를 추천하셨나.”

“…….”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해서 주춤거리는 그들에게 시안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쿠론 기사단 소속이라 했던가. 그럼 쿠론 후작이 추천했겠군.”

“…….”

“그는 보는 눈이 없군.”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아와 박힌다.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둘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시안은 몸을 돌렸다.

한 발, 앞으로 내딛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이델리오와 제라드 뒤로 조나단과 캐시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은 그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좋은 걸 가르쳐줄까. 높은 신분을 가진 자에게 예를 다하는 것은 좋으나, 명예를 잃을 정도의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

그 말에 조나단은 순간 이성을 잃고 발끈했다.

“허면! 어찌하라는 것입니까! 기사가 되었음에도 평민이란 태생은 꼬리표가 되어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황녀전하께오서는 모르십니다!!”

소리를 질러놓고 앗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불경이라며 경을 쳐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시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하나 묻지. 여기선 신분이 높은 사람의 명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아야 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 잘 생각해라. 네 신분의 굴레를 정하는데 네 스스로의 마음은 없었는지. 스스로 예절의 선을 정해라. 네 명예는 네 몫이지 다른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캐시와 조나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 태양이 부서지는 금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선명한 금안이 꿰뚫는듯하다. 어떠한 비웃음도, 무시도 없는 눈빛. 캐시와 조나단은 고개를 숙였다. 한 섞인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시안은 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출발합시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재빠르게 풍 위로 올랐고, 그것을 신호로 모두가 말위에 올랐다. 캐시와 조나단도 출발하자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말위로 올랐다.

멍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던 이델리오는 그녀가 진짜 말을 출발시키려 하자 이를 악물고 달려 그 앞을 막아섰다. 제라드도 이델리오를 따라 옆에 섰다.

시안은 싸늘하게 그들을 내려다봤다. 선명한 금안은 오싹한 느낌마저 준다.

이델리오가 차가운 눈빛을 애써 받아냈다.

“이대로 불명예스럽게 귀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죽이고 가십시오, 전하!”

그 말에 일행 모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안은 망설임 없이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돌아가라는 명에 죽음이 너의 대답이라면 스스로 죽어라. 너의 죽음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시안의 앞에서 비킬 줄을 몰랐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시안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의외로 이엘이 한 마디 했다.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이고 가십시오, 전하!”

이델리오의 벽안이 원망과 분노로 뒤엉켜 시안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델리오 경!”

율리아스가 경멸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신분의식에 가득 찬자인줄 알았더니, 명예조차 모르는 멍청이였다.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두 사람의 호통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데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연한 믿음과 의지가 눈빛에 가득했다. 거기다가 평민 따위 때문에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비키지 않겠다고.”

“…….”

“귀환하라는 명은 따를 수 없고.”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스스로 죽을 용기도, 돌아갈 용기도 없구나.”

“…….”

“무인이더냐.”

어조에 비아냥도, 조롱도 없었다. 차갑고 담담한 그 한 마디가 모든 명예와 자존감을 짓밟았다.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제라드와 이델리오는 이미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만큼 스스로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명예를 감내하느니 차라리 진짜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 뭔가가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했다.

시안은 천천히 왼쪽 허리에 걸린 월도로 손을 뻗었다. 슥, 하는 소리와 함께 달처럼 휜 월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월도를 들자, 평온하기만 했던 시안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검을 꺼내드는 모습에 놀랄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지와 기백, 스산한 살기가 모두를 집어삼켰다. 가장 최전방에서 갖은 전투를 치루는 이엘과 율리아스마저 숨이 막혔다. 최고 기량의 장수를 마주 했을 때조차 이토록 압도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뒤에서도 이정도니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금안이, 마치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연상케했다. 눈빛이, 얼굴이 살기로 가득했다. 진짜, 죽일 마음이다.

“목을 세우고 앉아 죽음을 받들라. 죽음으로 명예를 지키겠다니 그리해주마.”

제라드의 두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기사였고, 전투에 참여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목격했었으나, 이토록 죽음을 목전에 둔 적은 없었다. 해서, 죽음이란 무게가 이토록 무겁고 두려운지 몰랐었다.

이델리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황녀는 자신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런 두려운 확신이 들었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으나 진심으로 죽을 마음은 없었다. 그저 죽음을 운운했을 뿐이었는데. 죽음의 공포가 온 몸과 마음을 집어삼켰다.

시안은 풍을 옆으로 몰아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거리를 만들었다. 이델리오의 목으로 월도가 향했다. 죽일 것이라는 강한 살의는 있으되 죽음에 대한 어떤 흥분이나, 죄책감의 감정은 없었다. 냉정한 사신의 얼굴을 한 채로 천천히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검이 최 정점을 찍었다. 말린다면 지금 이 순간뿐이건만, 그 누구도 감히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정점을 찍은 검이 드디어 움직인다. 살짝 뒤로 젖혔다가 반동을 이용해서 내리꽂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사, 사, 살려주십시오!”

절박한 목소리가 이델리오 바로 옆에서 들렸다.

제라드였다. 제라드는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저, 전하! 제발…제발 살려주십시오.”

“…….”

“살려주십시오…….”

하늘을 향했던 검이 서서히 내려왔다.

“허, 허억…!”

이델리오는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안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긴장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시안, 그녀뿐이었다.

“죽여 달라고 했던 것은 너희였다.”

“그, 그것은…….”

“죽음은 핑계였나?”

“그것이…….”

“제 목숨을 핑계거리 따위로 전락시켰나.”

“…….”

대답이 없다. 공백을 답으로 들은 시안의 눈빛에 한심함이 가득 차올랐다.

“아까 물었었지. 너희가 왜 필요가 없느냐고.”

“…….”

“지금 대답하지. 내가 필요한 것은 무인이다.”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그 다음 말이 두려워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날아드는 대답에 자비는 없었다.

“너희는 무인이 아니다.”

월도를 거뒀다. 더는 그들에게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후드를 쓰고는 풍을 몰았다.

이델리오는 얼떨결에 옆으로 비켜섰다.

시안이 움직이자 일행도 서둘러 말을 몰았다.

넋이 나간 얼굴로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스쳐가는 일행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서 말을 몰던 게오르그까지 지나치자, 이델리오는 불현 듯 달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풍의 속력을 올리려고 하는 시안을 이델리오가 다시 막아섰다.

“이델리오 경! 끝까지!”

밀러가 뒤에서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이델리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시안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절박하게 말했다.

“따라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명을 거두시고 저를 데려가주시겠습니까.”

“여러 번 말하게 하는군. 필요가 없대도.”

“기사가 아닌 다른 존재로라도 쓸모가 있으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데려가주십시오, 황녀전하!”

결연하고 절박한 외침에 모두가 놀랐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든? 무엇을 할 수 있기에?”

“…황녀전하의 짐을 들던, 음식 배식을 하던 어떤 것이든 하겠습니다.”

가만히 이델리오의 벽안을 바라보던 시안은 그 말에 더 대꾸하지 않고 풍을 몰았다. 그를 지나치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던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군.”

멀어지는 황녀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이델리오가 절규하듯 외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전하!”

시안이 멈춰 섰다. 풍 위에서 상체만 뒤를 돌아본다.

“제가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하거든, 그 때 다시 귀환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 때는 귀환하겠습니다.”

시안의 금안이 꿰뚫듯 이델리오의 벽안을 직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좋다.”

허락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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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부 28화 15.04.30 54 0 19쪽
27 1부 27화 15.04.30 87 0 13쪽
26 1부 26화 15.04.30 55 0 9쪽
25 1부 25화 15.04.27 93 0 17쪽
24 1부 24화 15.04.25 85 0 12쪽
23 1부 23화 15.04.25 102 0 10쪽
22 1부 22화 15.04.24 30 0 16쪽
21 1부 21화 15.04.24 78 0 15쪽
20 1부 20화 15.04.21 49 0 16쪽
19 1부 19화 15.04.20 48 0 17쪽
18 1부 18화 15.04.20 101 0 19쪽
17 1부 17화 15.04.20 92 0 12쪽
» 1부 16화 15.04.20 101 0 22쪽
15 1부 15화 15.04.20 44 0 11쪽
14 1부 14화 15.04.20 77 0 11쪽
13 1부 13화 15.04.20 114 0 13쪽
12 1부 12화 15.04.20 45 0 22쪽
11 1부 11화 15.04.20 164 0 15쪽
10 1부 10화 15.04.20 85 0 12쪽
9 1부 9화 15.04.20 127 0 16쪽
8 1부 8화 15.04.20 46 0 17쪽
7 1부 7화 : 시작 15.04.20 85 0 13쪽
6 1부 6화 15.04.20 76 0 14쪽
5 1부 5화 15.04.20 48 0 19쪽
4 1부 4화 15.04.20 93 0 21쪽
3 1부 3화 +2 15.04.20 54 2 11쪽
2 1부 2화 : 서막 +2 15.04.20 107 1 14쪽
1 1부 1화 : 프롤로그 15.04.20 311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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