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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姸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의 저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운명의저편
작품등록일 :
2015.04.20 20:43
최근연재일 :
2015.04.30 23:36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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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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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수 :
18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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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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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부 4화

안녕하세요?^-^공모전 소식을 알게되어 쓰던 소설을 한꺼번에 업로드 하느라 양이 들쭉날쭉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DUMMY

1부 4화


궁이 소란스럽다. 에토노므 때문에 최근 항상 어수선했으나, 지금은 다른 의미로 소란스럽다.

“정말 전설 그대로야. 비록 침대에 누워계시지만, 정말 황금을 녹인 것 같은 머리카락에 말도 못하게 아름다우시대.”

“어디 그뿐이야? 내가 병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많던 에토노므 떼를 순식간에 해치우셨다는걸.”

“황후폐하와 폐하의 따님도 오셨대. 황녀님이 되시겠지?”

“당연한 것 아냐? 곧 깨어나시면 황녀님이 되실 거야.”

시녀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정원에 앉아있던 이오린의 하얗고 고운 손이 축축하게 물들었다.

“이오린님, 괜찮으십니까.”

직속 시녀의 목소리에 이오린은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옅은 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작고 검소한 핀으로 고정시켰다. 검소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가냘픈 소국화 같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국화처럼 청순한 느낌이 드는 우아한 여인. 투명하고 새하얀 얼굴과 하늘색 눈동자는 그런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찻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돌아왔다고.”

이미 시녀들조차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이오린은 한 번도 알려하지 않았다. 아니, 귀를 틀어막고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예, 그러셨다합니다.”

“황후 궁에 있다고.”

직속시녀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오린은 눈을 감았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같이 온 사람은 누구라 하더냐.”

“폐하의 따님이라 하십니다.”

“…그녀와 닮았다고 하느냐.”

“…그렇다 하옵니다.”

눈을 감고 숨을 멈춘다.

“…혼자 있고 싶다.”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오린은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소국화 같던 하늘색 눈동자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

곧, 이었다. 지긋지긋한 그림자에서 벗어나 드디어 유일한 황후가 될 날이 곧 이었다. 몇 달, 아니 몇 주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랬는데! 그의 아들이 적통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인데!

돌아왔다고 한다. 존재가 전설로 기억될 만큼 부재(不在)의 시간이 길었음에도 자신을 기어이 그림자로 만들더니, 결국 이런 순간에 돌아왔다.

이오린은 찻잔에 비친 얼굴을 문득 들여다보았다. 태양 같은 그녀와 비교해서 너무도 초라해 보이는 자신. 그녀는 황금을 실로 만든 듯한 금발인데, 자신은 지푸라기 같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 그녀는 태양을 박은 듯 빛나는 금빛 눈동자인데, 자신은 힘없어 보이는 옅은 하늘색 눈동자.

자신에게 오는 발걸음이 그토록 무거우시더니 지금은 황후 궁에서 살다시피 한다 하신다.

억눌린 잇새로 결국 오열이 터져 나왔다. 이오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찻잔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이안.”

감은 눈이 부드럽게 휘고 입술이 곡선을 그린다.

“이안.”

두 번째 부름에 눈꺼풀이 열리고 리오넬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는 이름이 세 개나 되는구나. 복이 넘치기도 해라.”

태어나며 받은 이름, 태휘. 운명, 사명이라는 명목 하에 그녀가 지고 있던 ‘려화’, 이곳에서 만난 그녀의 정인이 지어준 이름, 이안.

“네 이름은 너무 부르기 힘들어. 이아느 린, 어때? 줄여서 이안. ‘비추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고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이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리오넬에게 손을 뻗었다. 하얗고 가는 손을 리오넬이 잡았다.

“좀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만 벌써 몇 번이야.”

“우리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게 하지 못했어. 미안해.”

“지금부터 만들면 돼.”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고 떠나서, 정말 미안했어.”

“…이안, 그만.”

리오넬은 의자를 끌어다 이안의 옆에 앉았다. 24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난 그녀. 자신과 친우들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 덧 중년의 문턱을 넘어선 지 꽤 되었는데, 그녀는 여전히 그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미안하면, 어의의 진료를 받아. 약을 먹고. 얼른 일어나야 할 것 아냐. 네 말대로 우리 딸과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지.”

리오넬의 검은 눈동자가 진지함을 담고서 싱긋 웃었다.

이안은 그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리오넬. 나는 곧 사라질 거야.”

“…….”

“휘영, 아니…드디어 이 이름으로 불러보는 구나. 우리 딸…시아느 린. 시안을 맡기러 왔어. ”

리오넬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지고는 했다. 궁에 돌아온 이후, 그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차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상한 말 하지 마라. 지금 당장 어의를 부를 테니.”

하지만 인정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내말 좀 들어줘, 리오넬.”

“…….”

“나 좀 봐.”

다시 돌아서는 리오넬의 눈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앉아봐. 너는 내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해. 그 때의 난, 너에게 이 말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젠 아니야. 너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이해하고, 잊으면 안 돼. 왜냐하면, 너는 시안의 아버지니까.”

“…….”

“그 애의 이야기야. 네가 알고 있어야, 그 애를 이해해줄 수 있고 지킬 수 있어.”

“…….

두 사람 사이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리오넬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침상에 누운 상태지만 강인한 금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이런 순간을 수없이 준비하고 준비했을 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의연할 수 없다.

리오넬은 이안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이안은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들을 준비, 됐어?”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태휘, 려화, 이안. 세 개의 이름을 가진 그녀의 세계에는 하나의 왕가만이 존재했다. 99%의 피지배계층은 리오넬의 세계의 인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정말 극소수의 지배계층, 그 중에서도 왕가는 조금 특별했다. 왕족들은 병들지도, 늙지도 않으며,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한 힘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모든 왕족이 ‘특별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대(代)에 2~3명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곤 했다. 그 중 가장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는 존재가 태어나는 데, 그가 바로 ‘려화’다. 본디 ‘려화’는 그 쪽 세상과 신의 연결 고리를 하는 주술적 존재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의미가 변질되었다.

왕족은 ‘책임’에서 빗겨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집단이었다. 시간이 흘러 늙고 병이 들어야 마땅함에도 시간을 보낸 모든 대가를 피해간다. 속세에서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음에도 그 대가를 피해간다. 그들의 특별한 권한을 유지시켜 주는 존재가‘려화’다. 그들 대신 려화가 책임과 대가를 지고 삶으로써 왕족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려화는 나면서부터 많은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최초의 려화는 그 능력을 세상을 위해 쓸 수 있었겠지만, 려화의 의미가 퇴색되고 난 이후, 그 모든 능력은 왕족들의 책임과 업을 대신 지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왕족들의 질병과 늙음, 죄의 대가 등은 모두 려화에게 돌아오고, 려화는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깎음으로써 그 책임을 대신 진다.

려화는 나면서부터 눈에 띄는 금발을 지니고 태어나며, 려화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시기가 되면 눈동자도 금빛으로 물든다. 려화가 능력을 갖추기 이전에는 그 시대의 왕이 려화가 될 자의 생명을 쥐고 있는데, 이는 훗날 온전한 려화가 되었을 때 왕에게 충성을 맹세토록 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려화가 왕족에게 완전히 종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 려화는 강력한 생명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왕족들의 책임과 업을 자신이 대신 진다하더라도 보통은 2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다가 다음 대 려화가 태어나서 각성하게 될 즈음부터 서서히 힘을 잃다가 종국에는 불꽃처럼 생을 마감한다. 려화는 왕족들 중 누구에게서 태어나게 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왕족 사이에서 려화가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왕족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근친결혼을 해가며 핏줄을 지켜왔다. 부작용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려화’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려화의 부재 시기는 단 2번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유년시절 목숨을 담보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선대 려화들은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지 못했다. 과거, 려화가 스스로의 삶은 버린 후, 40년간 려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왕족들은 병들고 늙어갔으며 종국에는 추해졌다. 그 사건 이후 더더욱 려화에 대한 집착과 구속은 심해졌다. 2번째 시기는 이안 자신의 부재였다. 우연한 계기로 이쪽 세계에 온 후 약10년의 세월을 여기서 보냈다. 10년은 짧다면 짧은 시기였지만, 자신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던 왕족들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기였다. 이안은 당시 돌아가려 하지 않았으나, 이안의 아버지 선대왕이 그녀 뱃속의 아이가 다음 대 려화임을 직감하고, 복중(腹中)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그녀를 다시 끌고 갔던 것이다. 그동안의 려화들은 혼인하지 않았고, 출산을 하지도 않았다. 이안은 이례적으로 려화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고,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다음 대 려화가 나타났다. 시안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기 전까지 그녀는 시안의 목숨을 놓고 자신에게 회유와 협박을 하는 왕족들과 아슬아슬한 힘의 줄타기를 계속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시안의 눈이 금빛으로 물든 순간, 그녀는 이쪽 세계로 돌아왔다.

“리오넬. 시안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자 나는 이곳으로 왔어. 나는 전대 려화이기에 곧 죽을 거야. 그들은 어떻게든 시안을 려화로 만들고자 할 거야. 하지만 시안은 절대 려화가 되어서는 안 돼. 내가 이쪽 세계에 있는 10년 동안,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어. 시안은 돌아가면 ‘려화’로의 삶을 싫어도 살 수 밖에 없어. 그러니 돌아가서는 안 돼.”

긴 말을 잇기가 힘에 겨웠는지 이안은 잠시 숨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오넬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안은 혼혈이야. 그래서 그 애는 려화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에너지를 타고 태어났어. 그 애가 려화가 되면 너무도 짧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다 죽게 될 거야.”

“…시안이 려화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막을게.”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시안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무리 짧아도 신경 쓰지 않아. ‘려화’의 존재를 유지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내가 가진 힘으로 브레이다아크만에서 ‘통로’를 완전히 폐쇄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여기로 오려고 안간힘을 쓸 거야. 내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그들이 이미 이쪽에 ‘끄나풀’을 심어뒀어. …그 끈까지 내가 찾기엔 남은 시간과 힘이 없어.”

이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토록 저주스러운 운명이 딸의 발목까지 잡는구나. 속사포처럼 쏟아내다 감정이 북 받친다.

“…그 애까지 려화로 만들 수는 없다, 리오넬.…시안까지 그럴 수는 없어. 왜, 왜, 나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어째서…….”

숨죽인 오열에 리오넬은 그 동안 이안이 짊어지고 있던 삶이 어떠했을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였다.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앓아 왔을 한.

리오넬은 이안의 젖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이안. 너는 그 외로운 곳에서 그 긴 시간을 홀로 버텼구나. 미안해. 내가 나누지 못해서.”

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이안이 젖은 눈으로 리오넬을 본다. 이 얼굴을, 다정한 눈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이기적이지만, 죽기 전에 그를 본 것만으로 그 시간은 충분히 보상되었다.

“리오넬.”

둘의 시선에 허공에서 만났다.

이안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진짜 자신의 세계에서는 지어본 적이 없는 웃음. 그녀 인생의 진짜는 리오넬을 만난 이후부터다.

“나는 너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무슨 말?”

“고마워.”

“…….”

“네 덕분에 나는 시안을 만났고, 진짜 내 삶을 찾았어. 그리고 너에게 짐까지 얹고 가.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안.”

“응.”

“고마운 것은 나야. 과거, 내가 누구 덕분에 이 제국을 지킬 수 있었는지 잊었어? 그리고, 이렇게 찾아와 줬잖아. 걸어서도, 달려서도 나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에서 너는 시안을 데리고 와줬잖아. 그러니 내가 고맙지.”

미소를 짓다 문득 숨이 찬지 표정이 사라진다.

리오넬은 다시 한 번 어의를 부르자고 설득했지만, 이안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시안은 아직 이지?”

평원에서 의식을 잃은 후 벌써 일주일 째, 시안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안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줄 것이 남았는데.

“참, 유리…아니, 오만 공작과 사비에르 후작의 아들들은 언제 오는 거야.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한데. ”

과거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던 소중한 이들은 리오넬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온다고 했었어. 두 공자들이 각각 기사단을 맡아 전방에 가있어서 잠시 자리비우기가 쉽지 않았어. 널 보러 어제 도착했다더군. 오늘 온다고 했으니, 곧 이야.”

그 때였다.

“오만 공작님과 사비에르 후작님. 오만 기사단장님과 사비에르 기사단장님께서 오셨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온 모양인데?”

“그러게. 나 좀 앉혀줘.”

이안은 리오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머리를 한 번 매만지고 되었다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리오넬이 들어옴을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네 명의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50대 초반에 들어섰음에도 흰머리 하나 없이 검은 머리에,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큰 체구의 오만 공작이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준수한 얼굴에는 연륜까지 더해져 아주 근사한 기품이 흐른다.

그 뒤로 20대 중반에 들어선 장신의 남자가 들어섰다.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얼굴에, 단단하게 단련된 체구는 그를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둘 뒤로 옅은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비에르 후작이 들어섰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조각 같은 외모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뒤로 장신의 미남이 모습을 보였다. 옅은 금발에 언뜻 검게도 보이는 녹색의 눈동자, 남자임에도 각이 없이 부드러운 얼굴은 아버지 못지않게 잘생겼다.

이안은 들어오는 조합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피라는 것은 참 무섭구나. 소개시켜주지 않아도 누가 서로의 핏줄인지 이렇게 잘 보이니.”

상대방에게 앉으라는 말을 건네기 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엄연히 실례되는 말이었지만, 방 안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황후폐하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그나마 우리는 늙어서 누가 아비인지는 구분이라도 가는데 말이죠.”

그렇게 맞받아치는 이쪽도 있는데 실례랄 것도 없다. 과거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이런 분위기는 익숙한 것이었고, 젊은 두 사람은 감히 실례를 운운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웃으며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

“어서 와요. 먼데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황후폐하, 늦었습니다. 침상에 누워계시는 모습이 영 낯섭니다. 이런 모습 뵌 적이 없었는데…….”

사비에르 공작이 인사를 하다가 말을 흐린다.

“그래요,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으니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나십시오.”

이안은 두 사람의 말에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새로운 얼굴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상대의 얼굴을 이렇듯 빤히 바라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크게 기분 나쁘지는 않은 것은 상대의 신분도 신분이지만, 그 눈길에서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엘, 율리아스.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너희가 두 돌이 될 무렵까지 종종 너희랑 놀곤 했었는데…아주 작은 도령들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컸구나. 너희가 너무도 궁금하고, 한 번 보고 싶어서 내가 계속 닦달을 했단다. 먼데서 오느라 수고했다.”

이엘 사라 폰 오만, 율리아스 폰 사비에르. 20대 중반에 들어선 두 청년은 눈앞의 황후가 보이는 순수한 호의와 애정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 순수한 호의와 애정이 싫지 않고, 감사하여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모두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지. 무용들이 대단하다고.”

“두 사람이 각각 전방을 맡아줘서 든든히 지내고 있지.”

황제 부부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칭찬을 건넸다.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혼인들을 했니? 두 분은 이만한 나이에 아이를 가졌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 녀석들에게 따져주십시오. 당최 혼인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문을 위해서라고 아무리 회유와 협박을 해봐도 도통 듣질 않으니. 아니, 그렇다고 여자를 밤마다 방으로 들여보내는 것도 싫다하고.”

“유리, 직선적인 건 좋으나 아들 얼굴 좀 봐가며 말해요.”

오만 공작은 자신을 매우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아들을 빤히 보다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여기서 말해봐라. 도대체 왜 약혼도 싫다는 것이냐?!”

“…….”

“말했지만, 너의 그 ‘언젠간 생기겠죠.’는 너처럼 시골 변두리 전방에서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 매일 무도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너는 절대로 그런 방식으로는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

“너 설마 여자가 싫은 것은 아니지?”

“…….”

“남자가 좋은 게냐?!”

말없이 아버지를 거의 노려보다 싶은 눈으로 바라보던 이엘은 결국 마지막 말에서는 차마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은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한 나라의 공작이, 그것도 황제부부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는 무리가 있을 만큼 천박한 말들의 향연이었지만, 이 사람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사람들만이 모인 관계로 아무도 그의 말투나 내용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지도 모른다.

“유리, 정말 그대가 변한 것이라고는 얼굴뿐이로군.”

이안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하자 오만 공작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이안이 사뮤엘 부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율리아스도 아직 혼인 전인거니?”

“예, 황후폐하. 아직 입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정중하다.

“너도 아직 혼인에 뜻이 없었던 것이냐?”

율리아스는 그 말에 미소로 답했다.

사비에르 후작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황녀전하도 아직 혼인 전이십니까? 올해로 24이 되시지요?”

“정말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아이들은 아직 아무도 혼인을 안했군요. 시안도 아직 혼인 전이에요. 저쪽은 생각보다 혼인을 늦게 하는 경향도 있는데다가 시안은 혼인은커녕 정인조차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럼 황후폐하, 이제 정말 돌아오신 겁니까?”

그 말에 이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래서 모두가 침묵했다.

침묵을 깬 것은 이안이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의 방향이 이엘과 율리아스를 향하고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내가 손 한번 잡아 봐도 되겠니.”

이엘과 율리아스는 내밀어진 손을 한 번 보다가 내밀어진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커다란 손을 잡은 이안은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발랄하게 말했다.

“정말 정말 훌륭하게 컸구나. 아주 아주 작은 꼬마 손이었는데 말이지. 내가 너희 또래로 보이게 아주 젊지만, 실제로 너희 아버지들보다 나이가 많단다. 못 믿겠지만 내가 정말 그래.”

한바탕 큰 웃음이 방 안을 휩쓸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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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부 2화 : 서막 +2 15.04.20 107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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