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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姸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의 저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운명의저편
작품등록일 :
2015.04.20 20:43
최근연재일 :
2015.04.30 23:36
연재수 :
28 회
조회수 :
2,464
추천수 :
3
글자수 :
186,423

작성
15.04.2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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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1부 12화

안녕하세요?^-^공모전 소식을 알게되어 쓰던 소설을 한꺼번에 업로드 하느라 양이 들쭉날쭉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DUMMY

1부 12화


다음 날 새벽.

일찍 눈을 뜬 시안은 어제 미리준비해둔 의복을 입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검을 매달 가죽 벨트도 채우고, 벨트에 월도를 걸었다. 이곳에서는 특이한 검신이라 가죽벨트도 특별히 제작주문을 해야만 했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자 이곳 의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긴 금발은 그대로 풀어둔 채, 선명한 금안과 핏빛 목걸이, 그리고 월도.

“언제 봐도 어색해. 익숙해질까, 이 눈.”

어슴푸레한 새벽빛 사이에서도 선명한 금안. 익숙한 흑빛 눈동자가 어느 날, 금빛 가루를 뿌린 것처럼 변하더니, 어느 날 이토록 선명한 금안으로 바뀌었다.

“어머니, 할 수 있을까요……려화의 운명을 끊어내는 일.”

핏빛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태경 숙부가 평원에서 했던 말은, 낙인처럼 머릿속에 박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너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다. 려화는 너의 운명이자, 사명이다. 너는 ‘휘영’이란 이름 이전에 려화다.]

흑빛 눈동자가 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어머니의 힘이 다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숙부의 말처럼 내 의지와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운 생각은 때때로 숨이 막힐 만큼 목을 옥죄어 왔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지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금안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헉, 헉…….”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거친 숨을 내쉬다, 서서히 안정이 되어갔다.

새벽의 어스름이 물러가고 아침 햇살 한줄기가 방안에 고개를 내밀었다. 두려움은 문득, 파도처럼 온 몸을 집어삼켰다가, 문득,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두려움이 빠져나가면 으레 깊은 허무가 온몸을 잠식했다. 풀리려는 다리를 고집스럽게 지탱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돌아갈 것이냐, 이제 ‘려화’로 살겠다고. 그 생각에 피식, 조소가 흐른다. 거울 속에서 비스듬히 웃는 얼굴과 마주했다. 목에 걸린 빨간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해낼게요, 어머니. 저쪽과 완전히 인연을 끊어내고, 저로 살게요. 첫 번째 할 일을 하러 오늘 떠나요. 지켜보고 계십니까.”

이런 허무, 떨쳐내자. 오늘은 그 인연을 끊어내기 위한 첫 걸음을 떼는 영광의 날이다. 시안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며 풀린 머리카락을 잡고 단정하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땋아 내리는 것은 보통 시녀들이 해주지만,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결이 고운 금발을 단정히 땋아 내리고 마지막에 파란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한결 당당하고, 씩씩해 보인다. 위에 걸칠 망토를 가지고 오는데, 똑똑-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루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일어나셨겠지, 했는데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뒤였다. 심지어 혼자서 머리까지 묶으신 듯 했다.

“죄송해요, 제가 늦게 들어와서…….”

“아니, 내가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저…, 그럼 식사를 가져올까요? 아침 드시고 가셔야죠.”

“그래. 평소보다는 조금 많이.”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가져올게요.”

싹싹하게 인사하더니 탁탁탁,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돌아온 루나가 건네주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시안은 모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본궁 앞뜰에 모이기로 했는데, 큰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이용하는 광장이었다. 장소로 이동하자,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안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간단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요란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일렬로 서서 배웅할 준비를 하는 귀족들의 수는 꽤 많았다.

“전하. 전하께서 직접 가시는데 이것은 정말 간단해도 너무할 만큼 간단한걸요.”

북적거리는 귀족들의 수에 불만을 표하자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르던 루나가 한마디 했다. 걸어가면서 그녀를 슥, 쳐다보자 루나는 입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그냥 일반 기사들이 원정 떠날 때도 최소한 카펫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있었어요.”

“사람이 저만큼이나 모여 있는데 간단한 것이라고?”

“그럼요. 심지어 황녀전하가 가시는 길인걸요.”

시안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성큼성큼 광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안이 다가오자 그녀를 힐끔힐끔 눈치 보듯 훔쳐보던 귀족들이 길을 터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출발하는 이들은 이미 자신의 말에 짐을 모두 매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제일 늦었군요.”

“아닙니다, 황녀님. 저희가 일찍 왔습니다.”

간단하게 인사처럼 말을 건네자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특이한 오렌지색 머리에, 주황빛이 도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 색이 워낙 독특해서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크림슨 경이시죠?”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전하.”

그가 유쾌하게 씩, 웃으면서 답했다.

시종이 자신의 짐을 말에 매다는 것을 보고 있는데, 황제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황제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광장 가장 상단에 황제가 서자, 그 아래 이오린과 제임스 황자, 플레르 황녀가 섰다. 황제를 기다렸다 함께 온 듯, 동시에 입장했다. 그들이 서자 모두 깊게 상체를 숙임으로 예를 다했다. 시안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혀있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바라오. 제국의 모든 영광의 빛이 그대들의 앞에 있기를.”

간결한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시안을 비롯한 15인에게 쏟아졌다.

시안이 대표로 황제에게 답을 올린다.

“좋은 소식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짧고 단순하지만, 당당한 눈빛과 말투에서 기백이 느껴진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것을 사인으로 말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출발하기 나흘 전, 소개받은 이 명마는 그녀가 봤던 저쪽세계의 명마에 비해도 절대 기량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훌륭했다.

“풍(風).”

엄연히 이름이 있었지만, 무시하고 새 이름을 지어줬다. 말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그 이름에 잘 반응했다. 잘해보자는 의미로 갈기를 한 번 쓰다듬은 후, 휘릭 바람처럼 말위로 올랐다.

허무할 만큼 짧지만, 출발인사는 이만하면 됐다. 애당초, 이런 인사도 없이 출발하려 했던 시안이었다. 이나마도 황제가 간청해서 허락한 인사였다.

거대한 덩치의 흑색 명마에 올라타자 이제 제법 강렬하게 비추는 금빛 햇살이 그녀위로 떨어졌다. 땋아 내린 금발과 횡횡한 금안, 말 위에서도 흔들림 없는 자세.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기백이 되어 서있는 귀족들의 눈에 박힌다.

“과거로 돌아간 것 같군, 사뮤엘.”

황제보다 두 단 아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만공작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듯, 그리운 빛을 띤다. 저 모습, 젊은 시절, 그 시절을 나눴던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을 주던 모습이었던지.

“그래. 저렇게 뵈니 더욱 후장군 마마 같으시군.”

사비에르 공작의 녹색 눈동자에도 그리운 빛이 맺혔다.

“그 때, 우리에게 그분의 존재는 빛, 그 이상이었지. 그래…저 분도 그러할까.”

오만공작을 아는 이들이 들으면 경을 칠만큼, 그답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공작은 문득,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표정에서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내긴 어렵지만 자신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황제가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오만공작은 그 시선에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 즘, 원정을 떠나는 모든 이들이 말 위에 올랐다. 가장 앞에 있던 시안이 말머리를 돌려 문으로 향하자, 그녀의 뒤를 따라 2명씩 열을 지어 말을 몰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서 천천히 말을 모는 그녀 뒤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황녀전하! 조심히 꼭 돌아오세요! 방 깨끗하게 해놓고 있을게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말해놓고도 주눅이 들어 쏟아지는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는 루나가 보였다. 저러다 땅에 붙겠다 싶을 만큼 몸을 움츠리고도 눈은 자신에게 향해있다.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는 걸로 답을 대신하고 다시 앞을 봤다.

이곳에서 제정신을 차린 지 한 달도 안 된다. 어쨌든 구경하듯 몰려나온 귀족 떼들보다 저런 식의 배웅이 더 값지다.

그런 생각을 할 즘, 열린 황성정문에 도착했다. 열린 문 너머로 수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황성 아래로 3개의 성벽이 위용을 드러냈다. 황성의 문이 열리자 그에 맞춰 3성과 2성, 1성의 문이 차례로 열려 그들이 통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은 뒤를 돌아봤다. 바로 뒤에 이엘과 율리아스가 있었다. 시안이 그들에게 씩, 웃어 보이더니 다시 정면을 보며 쾌활하게 외쳤다.

“출발한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능숙하게 풍의 배를 발로 찼다. 풍은 그 신호에 맞춰 순식간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는 15필의 말이 주인을 태운 채 무서운 속도로 수도를 빠져나갔다.




수도에서 브레이다아크만까지는 말을 달려 이틀이 소요된다. 이 일대 전역이 너른 평야지대인데다가 브레이다아크만까지가 남서방향으로 직선도로라서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큰 길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시안을 필두로 한 15필의 말은 황성을 떠난 지 3시간이 넘도록 쉼 없이 달리기만 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시야에 멀리 작은 개울이 들어오자 시안은 오른쪽 손을 들었다. 그 신호에 모두 속도를 점차 줄이기 시작했고 이내 빠르게 달리던 원정대가 멈췄다.

“여기서 쉬어가죠.”

전력으로 달린 것은 아니나, 3시간 넘게 쉬지 못했던 말들에게 잠시 휴식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시안이 땅을 딛고 서자 하나, 둘 말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점심을 먹고 출발할까요?”

“그래요. 말도 열 좀 식히고.”

율리아스의 말에 시안이 동의하자 자연스럽게 점심이 결정되었다. 점심이 결정되자 시안은 풍에게 실려 있던 먹을거리 중 일부를 꺼냈다. 각자의 말에는 개인 식량과 침낭 등 필요한 물품이 실려 있었는데, 시안의 짐은 원래 다른 이들이 각자 나눠서 싣기로 했었다. 애당초 황녀가 본인 짐을 지고 다니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시안은 반대했다.

“뭐 인원이 150명쯤 돼서 시종도 있고 하면 내가 굳이 짐을 안 들지. 그런데 15명뿐인데 누구한테 나눠?”

간단하게 일축하고는 각자 짐은 각자가 알아서 하라며 자신의 짐만 챙겼다.

한번 먹을 분량이 잘 포장되어 있어서 간단하게 꺼내고는 풍의 짐을 풀었다. 음식을 들고 나무 그늘 밑으로 걸어가자 율리아스와 이엘, 발디와 보니타가 따라왔다. 정해주지는 않았으나 작은 집단으로 각자 모였다. 황녀의 신분을 고려했는지 무리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엘과 율리아스가 따라왔고, 그들을 따라 보니타와 발디가 따라왔다.

남색머리에 남색 눈동자를 가진 발디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기사치고는 왜소했다. 사교적인 성격인지 얼굴에 기본적인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보니타는 잿빛머리에 회색눈동자를 가진 3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큰 키에 걸맞은 다부진 체격으로 거구였다. 그는 발디와는 상반되게 무뚝뚝함이 얼굴가득 넘쳤다.

어쩜 한 명도 비슷한 사람 없이 각자의 개성이 넘친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안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전하! 이, 이거라도 바닥에 깔고…….”

쾌활한 표정의 발디가 갑자기 기겁하며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는 시안에게 내밀었다. 시안은 그 외투를 보다가 나무기둥에 등을 기댔다.

“고맙지만 됐어요.”

“그래도, 저기…….”

그는 말문을 흐렸다. 평범하지 않은 분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참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앉아요. 모두 서있으니 불편해요.”

그러면서 포장지를 뜯었다. 작은 나무 곽에 말리거나 절인 음식이 담겨있었다. 쫀득하게 말린 육포, 이쪽 세계 사람들이 즐겨먹는 꿀에 절인 과일 등등 잘 상하지 않고 열량을 보충할만한 음식들. 손바닥에 곽을 들고 가져온 포크로 과일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제대로 꼭꼭 씹어서 천천히 삼켰다. 음식이 빈말로도 맛있다고 하지는 못하나, 장기간 먹을 음식치고 이만하면 훌륭했다.

나무기둥에 기대어서 하나씩, 꼭꼭 씹어 먹기를 한참.

“드실 만 하십니까?”

율리아스가 묵묵히 양을 채우고 있는 시안을 보며 물었다. 그의 입맛에도 그리 맛있는 음식은 아니다. ‘맛없지 않느냐’의 우회적인 표현에 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먹다보면 물리긴 하겠네요.”

“사실 조금 걱정했었습니다. 앉아서 드셔야 할 테고, 음식도 이럴게 분명한데 괜찮으실지.”

“안 오는 것이 나았다면 가겠다고 안했을 거예요.”

“앞으로 불편한 것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황녀전하.”

율리아스가 다소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지만 시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먹기만 하던 이엘이 고개를 들어 시안을 봤다.

사람이란, 자신이 보는 대로 믿기 마련이다. 그녀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어도. 이엘의 눈에 그녀는 도저히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후드를 눌러쓰고는 있지만, 도자기인형같이 매끄러운 얼굴이, 고생을 모르는 하얗고 긴 손이 그녀가 어디까지나 궁에나 어울리는 황녀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먹고 있지만 위화감이 든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말도 안할 그였지만,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지금이야 괜찮은 척 하시겠지만, 나중에 가면 정말 안 괜찮으실 겁니다.”

호오, 이것 봐라. 시안의 기준에도 다소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에게 문득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호오, 그래서 이엘 경 표정이 이렇게 얼음장 같은 거예요?”

묵묵히 음식만 보던 이엘이 고개를 들어 시안을 봤다. 금빛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시안의 얼굴에 누가 봐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물론, 이엘이 장난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제 표정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말투에 오히려 같이 앉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보통의 여성들은 이런 반응에 눈물을 흩날려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시안이 보통의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 맹점이지만. 시안은 눈물은커녕 그의 말투는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황녀’란 존재는 어떤 존재죠?”

이엘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질문을 했다.

율리아스는 이엘이 말없이 다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의미로 묻는 것인지요?”

“누구 말대로 나는 부재기간이 워낙 길어 이곳에 온지 이제 한 달이 채 안되었어요. 이곳의 관념이랄까 그런 것도 아직 모르고 거기에 ‘정통방식의 예절’도 모르죠. 그래서 내가 이곳의 ‘황녀’라는 관념과 얼마나 동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이 없어요. 물론 사람들이 깜작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면 ‘아, 내가 또 이상한행동을 했구나.’정도의 짐작은 하지만.”

율리아스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현명할지 고민했다.

그가 쉽게 답을 못하고 있는데 시안이 경쾌하게 혼자 답을 했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 보였는지 율리아스, 자신을 보며 말한다.

“이쪽 세계 ‘황녀’가 어떠해야 한다는 상관없어요. 난 어찌되었든 내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이고, 나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그 뿐. 그러니까,”

시안이 이엘에게 팔을 뻗더니 톡톡, 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엘이 깜짝 놀라자, 시안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짐이 되지는 않으니 ‘아, 황녀까지 모시는구나’안 해도 된다고. 알겠니?”

율리아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킥킥, 웃자 시안이 그를 쳐다봤다. 폭소를 참고 있는 표정이자 시안도 피식 웃었다. 결국 율리아스가 폭소했고 웃음은 전염되어 발디와 보니타도 작게 웃었다. 이엘만 뚱한 얼굴로 남은 육포를 입으로 구겨 넣었다.

말이 오고가지는 않았으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채 식사가 마무리 되었다. 하나씩 꼭꼭 씹어 먹고 나니, 의외로 굉장히 배가 불렀다. 시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이미 정리가 끝났던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님, 단장님, 율리아스님. 네 분 모두 식기를 주세요. 닦아오겠습니다.”

발디가 시안과 이엘, 율리아스를 차례로 보며 말했다. 보니타까지 호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네 명의 식기를 모두 닦아오겠다고 손을 내민다.

“단장님?”

시안은 특이한 호칭에 의문을 표했다. 시안의 의문에 발디가 이엘을 정중히 가리키며 답했다.

“소속을 소개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오만기사단 소속기사예요. 여기계신 이엘님이 기사단장이십니다.”

“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이 모였군요. 그럼 보니타 경은 소속이 사비에르 기사단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호오, 뭔가 보니타경과 이엘경이 어울리는데 의외네요.”

“하하하, 그럼 저는 율리아스님과 어울립니까?”

발디가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주십시오, 제가 닦아오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대답이 의외의 곳에서 날아왔다.

“우리 식기를 닦아줄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은발에 벽안의 기사. 이델리오가 빙긋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발디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는데 이델리오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크게 말했다.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어서 황녀전하의 식기부터 받아들어야지.”

시안은 그 말에 기사들을 쭉 둘러봤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공간에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데,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었다.

황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큰 키에 다소 얇은 몸.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 이름이 조나단이었던가. 또 한사람은 짚단 같은 바랜 금발에 남색 눈동자. 조나단보다 작은 키에, 기사치고 가는 몸. 주근깨가 조금 있는 얼굴. 이름은 캐시였다.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어서 표정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언뜻,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이런 건 미리미리 알아서 하는 거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이델리오가 걸어오는 두 사람에게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걸어왔다. 그들은 시안, 자신에게로 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이델리오의 앞을 지나치려했다. 그를 지나쳐야 자신에게 오니까.

“자, 여기, 이것도 가져가야지.”

이델리오가 슥, 자신의 식기를 내밀었다. 시안의 금안이 가늘게 변했다. 조나단과 캐시는 그의 식기를 쏘는 듯한 눈으로 내려 봤다. 싸늘한 침묵이 흐른다.

“이델리오 경.”

율리아스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제야 이델리오는 과장되게 앗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시안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말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용서하십시오.”

조나단과 캐시가 그를 지나쳐 시안 바로 앞에 섰다. 이미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시안과 그 두 사람에게 향해있었다.

“식기를 닦아드리겠습니다, 황녀전하.”

시안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분위기도,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됐다. 내 것은 내가 알아서 하지.”

말투도 평온했다. 시안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두 사람을 지나치고, 이델리오도 지나쳤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개울가로 향한다. 직접 식기를 닦으려는 모양이었다.

시안이 지나치고 조금 멀어지자 이델리오의 벽안이 가늘게 휘었다. 그는 모두가 들을 만큼 적당히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황녀전하는 직접 닦으시는 것이 좋으신 모양이군. 하나는 줄었네. 뭐하고 있나? 어서 가져가라니까.”

“여기, 내 것도 있네.”

이델리오 옆으로 남색 머리카락에 얼굴이 새하얀 남자가 다가오더니 맞장구를 친다. 제라드 폰 노다스. 조나단과 캐시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자 제라드가 다시 한 번 식기를 내민다. 남색 눈동자가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만하지.”

이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델리오와 제라드는 그가 저지하는 것이 의외인 듯한 얼굴이었다. 이엘은 자신의 식기를 들고 걸어오더니 그들 옆에 잠깐 섰다.

“괜한 일을 벌이는군.”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율리아스도 그 뒤를 따라 싸늘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나쳤다.

결국 이델리오와 제라드도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 하더니 모두가 듣게 중얼거린다.

“아, 이런 일은 평민이 하는 것이 제격이지만, 어쩔 수 없군.”

어색한 기류가 일행을 감쌌다. 이죽거리는 두 사람. 아무 말도 못하는 두 사람. 일행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동정이. 다양한 감정이 각자의 얼굴에 나타나있었다.

시안역시 간단하게 식기를 씻고, 풍의 옆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만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모른척하기로 한 것일까. 시안이 말없이 풍의 등자에 올랐다.

“출발하죠. 갈 길이 머니.”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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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부 19화 15.04.20 49 0 17쪽
18 1부 18화 15.04.20 101 0 19쪽
17 1부 17화 15.04.20 92 0 12쪽
16 1부 16화 15.04.20 101 0 22쪽
15 1부 15화 15.04.20 45 0 11쪽
14 1부 14화 15.04.20 77 0 11쪽
13 1부 13화 15.04.20 115 0 13쪽
» 1부 12화 15.04.20 46 0 22쪽
11 1부 11화 15.04.20 165 0 15쪽
10 1부 10화 15.04.20 86 0 12쪽
9 1부 9화 15.04.20 128 0 16쪽
8 1부 8화 15.04.20 46 0 17쪽
7 1부 7화 : 시작 15.04.20 86 0 13쪽
6 1부 6화 15.04.20 77 0 14쪽
5 1부 5화 15.04.20 48 0 19쪽
4 1부 4화 15.04.20 93 0 21쪽
3 1부 3화 +2 15.04.20 54 2 11쪽
2 1부 2화 : 서막 +2 15.04.20 107 1 14쪽
1 1부 1화 : 프롤로그 15.04.20 312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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