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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姸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의 저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운명의저편
작품등록일 :
2015.04.20 20:43
최근연재일 :
2015.04.30 23:36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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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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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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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부 5화

안녕하세요?^-^공모전 소식을 알게되어 쓰던 소설을 한꺼번에 업로드 하느라 양이 들쭉날쭉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DUMMY

1부 5화


흔들리는 마차 안. 마차 치고는 상당히 넓은 공간에 네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한바탕 혼란이 쓸고 지나가겠군.”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비에르 후작이었다.

후작과 공작의 신분 차는 엄연해서 공적인 자리에서 후작은 항상 깍듯하게 말을 높이지만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겠지. 비록 제 2황후지만 그래도 엄연한, 여태까지는 ‘유일했던’황후가 될 날이 곧 이었는데. 명분이 사라졌지, 명분이. 사론 백작이 그토록 누이를 황후로 만들고자 애썼는데 헛것이 되었군.‘현존하는 황후가 필요하다.’며 피를 토하는 듯 하더니.”

오만 공작이 비웃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것보다 황녀전하가 돌아온 것이 더 큰 문제군요.”

율리아스가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오만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이 이상해졌지. 비록 황후나, 심지어 빈(嬪)도 아닌 그저 ‘부인’인 사론 부인의 소생일 지라도, 유일한 황자였기에 제임스 황자는 후계자처럼 대우 받았던 거야. 하지만 황녀는 정실소생인데다가 그 어머니인 황후가 후장군이라는 타이틀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제임스 황자 쪽은 큰일 났지.”

“아버지는 황녀전하의 존재를 알고 계셨습니까?”

이엘이 문득 질문하자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입을 연 것은 사비에르 후작이었다.

“원래 소수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황후폐하가 떠나시기 전, 아이를 가지셨다는 것은. 그런데 떠나시던 날이 하필이면 국무회의가 있던 날이었고, 거대한 홀 안에서 황후폐하를 마중 나왔던 황후폐하의 아버지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아버렸지. 황후폐하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나는 그 일을 믿지 않았을 텐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나 전설이라며 믿을 내용이지.”

후작과 공작이 말을 주고받다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황후폐하는 그 이전에도 평범하신 분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그야말로 종횡무진. 오죽하면 ‘금빛 후장군’이란 말이 온 대륙에 파다했겠어. 경이로울 정도의 무용이었지.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나도 그분의 무용을 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미 그 분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 맞아. 그 분과 만난 지 거의 8~9년이 되었을 무렵, 황후로 책봉되고도 2~3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말해주시더군. 황제 전하는 이미 이전에 알고 계셨었고,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었지. 다른 세계란 곳이 실존하고, 황후폐하는 그곳 사람이라는 것을.”

“사실이라 믿으시는 겁니까?”

항상 담담한 표정인 이엘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 역시 그렇구나.’였다.”

이엘과 율리아스는 후작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냉정하고, 매사 이성적인 후작의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종류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했지 않나. 전쟁터를 누비는 후장군을 보면서 이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 말을 듣는데도 의심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뭐, 설령 의심이 우리 마음에 있다 하더라도 ‘그 날’의 사건으로 의심이 모두 지워졌겠지.”

공작은 문득, 그 날을 떠올렸다.

“국무회의 중이었다. 보통의 황후는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지만, 황후폐하는 달랐다. 그 누구도 그 분을 감히 제외시킬 수 없었어. 회의가 한창이었는데, 느닷없이 황후폐하가 검을 빼들었다.”

“황제폐하조차 당황했지만, 황후폐하는 한곳만 바라보며 검을 놓지 않으셨어. 내가 그 분을 뵌 이례로 가장 긴장하셨던 모습이었지. 사람들이 하나, 둘 동요하고 있던 순간. 한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강렬한 빛이 회의장안을 가득 메웠었다. 그리고 그 빛이 사그라들고, 우리의 시력이 다시 돌아왔을 때, 회의장에 거짓말처럼 ‘그들’이 나타났다.”

율리아스가 되물었다.

“빛과 함께 나타났다, 그 말이 진짜란 말입니까?”

“그래. 세간에 떠도는 황후폐하와 관련된 전설 중에는 과장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사실에 기인한다. 빛과 함께 나타났다, 말 그대로였어.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그 자리에서 이성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황제폐하와 황후폐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사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 존재…황후폐하의 아버지가 있었다.”

소름끼치게 깊은 검은 눈동자. 공작과 후작은 그를 아마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처음 보는 기묘한 복장의 사람들 중, 가장 인상적이던 한 사람. 누가 봐도 한 눈에 그가 범부(凡夫)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생김은 많아봐야 30대 정도로 보였으나, 그는 생긴 것이 아니라 ‘존재’그 자체로 보였다. 그저 ‘지배자’라는 말만이 그에게 허용될 것 같은 엄청난 위압감. 감히 그 누구도 그에게 ‘당장 이 자리에서 나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발, 앞으로 나오더니 그가 황후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었구나, 내 딸아. 데리러 왔단다.]

나온 말은 모두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황후폐하는 완강히 거부했었다. 할 수 있으면 데려가 보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그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이전에는 뵌 적이 없을 정도였지. 기류만으로도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결국 함께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함께 돌아갔다기보다는, 끌려갔다는 표현이 옳지.”

“말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 말은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었지. 심지어 황후폐하마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셨을 정도였다.”

[아이를 품었구나. 그 아이도 려화로구나.]

나타난 그는 이 쪽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황제를 향해서 예를 갖추지도, 주눅 들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황후를 모셔갈 수 없다고 황제가 분노해서 외쳤을 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황후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 모를 한 마디만 남겼다.

[그 아이는 확실히 려화다. 여기 남고자 한다면, 뒤의 답은 려화인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 말을 알아들은 이는 오직 황후와 나타난 무리들뿐이었다.

황제와 대신들이 거의 절규하듯 말렸지만, 황후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그들과 사라졌다.

그로부터 24년. 존재자체가 전설이 될 만큼 긴 부재의 시간동안에도 황제는 황후의 자리를 비워두었고, 황후궁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단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듯, 24년 만에 다시 황후가 돌아왔다. 그녀와 똑같이 닮은 금발에, 금안을 가진 황녀를 데리고.

“상황이 어떻게 될까, 사뮤엘.”

공작이 친우의 녹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사비에르 후작은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셨다. 장정 여럿을 순식간에 제압하던 금빛. 묶지도 않은 긴 금발을 바람처럼 휘날리며 긴 검을 휘두르던 금빛 황녀.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는 듯 단단한 등을 보이고 있었을 때, 단신이었지만 큰 보호막같이 느껴졌다. 부끄럽게도.

과거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던 후장군이 동시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누군가에게는 비극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토노므’일은 좋게 처리 되지 않을까 한다는 것 정도지. 그리고,”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 나는 그저, 후장군. 사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분을 다시 뵌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 느낌이야.”

그 말에 공작의 눈도 부드럽게 변했다. 그가 마차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그 분을 다시는 뵐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지. 그랬었지.”

이엘과 율리아스는 상념에 빠져드는 아버지들을 다시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정말이지 특이한 일들만 가득했다.




부드러운 빛이 느껴졌다.

스르르 눈꺼풀이 열리고 옐로우 다아이몬드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해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누워있었을까. 무의식 저 밑바닥까지 침잠되었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다 휘영은 벌떡 일어났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검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방 안에 검을 둘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그 평원에서 숙부가 자신에게 갑작스레 달려드는 부분에서 기억이 끊겼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기는 어딜까, 어머니는, 어머니는…….

휘영은 초조한 듯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문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닫힌 문고리를 와락 열자, 마침 방으로 들어오려 했는지 문 앞에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여자가 서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황해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문 밖의 여자였다.

“깨, 깨어나셨어요?”

휘영은 일단 그녀의 옷차림과 생김새에 안도했다. 다행히 끌려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경황이 없어서 그렇지 둘러보니 저쪽 세계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건물 내부에서 가득 풍기고 있었다. 휘영은 여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질문을 했다.

“어머니. 아니, 나처럼 금발에 금안의 젊은 여자. 혹시 아나?”

“아, 황후폐하 말씀이시죠. 깨어계십니다.”

그 말에 휘영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나를 좀 데려다다오.”

“예, 따라오십시오.”

여자가 앞서자 휘영이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방은 의외로 바로 옆이었다. 여자가 문 앞에서더니 문을 정중하게 두 번 두들겼다.

“황녀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문 저쪽에서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기쁨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라!”

여자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더니 한 발 뒤로 나왔다.

휘영은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투명한 커튼사이로 강렬한 빛이 한 층 부드럽게 방안을 밝히고 있다. 환한 빛이 가득한 방 안에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이 휘영을 향해서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오련.”

휘영은 어머니를 향해 거의 뛰다시피 다가왔다. 한 눈에도 기력이 쇠해가는 모습. 그녀는 어머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상체를 껴안았다.

이안은 자신에게 폭 안기는 딸의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애틋하다, 그 단어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일 것이다. 사랑스럽고, 또 걱정스럽고, 이렇게 장성했음에도, 이 몸속에 얼마나 단단하고 강인한, 기개 높은 영혼이 들어있는지 잘 알면서도…….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없어요. 저는 괜찮은데, 어머니는…….”

휘영이 몸을 떼고 이안의 얼굴을 살핀다.

“기력이 쇠하시는 거죠. 그렇죠. 그 때 거기서, 너무 많은 힘을 한꺼번에 쓰신 거예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딸의 말에 이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순리일 뿐, 이것은 내가 책임질 업이야.”

“…….”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랴. 내 기력이 쇠하는 것이 결코 너의 탓이 아님을?”

“…….”

딸의 얼굴이 더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 이안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전대 려화의 힘이 쇠할 때, 나는 그 분의 힘을 계승했어. 지금 힘이 쇠하는 것은 계승받은 힘이 사라지는 것일 뿐, 너와는 관계가 없단다.”

“…….”

“나에게서 려화라는 운명의 끈을 끊어놓지 못한 책임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내가 기력이 쇠하는 것은 나의 책임과 업일 뿐, 너와는 관계가 없다.”

“려화인 자는 200년은 산다했습니다.”

이안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존재를 자책하는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너로 인해 내 기력이 쇠한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구나.”

“…아무리 어머니 말씀대로 납득하려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너의 어머니다.”

“…….”

“너를 태어나게 한 사람은 나란다. 나는 네가 내 뱃속에 있을 때 이미 네가 려화계승자 임을 알고 있었단다.”

이안은 아직까지 이 이야기는 딸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휘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낳았다. 네가 태어나면 내 힘이 생각보다 조금 빨리 쇠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단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저 생을 살다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이 없어. 너를 낳고, 너와 시간을 보낸 그 시간이 진짜 의미있는 시간이지. 다시 돌아가서 선택하라 해도 나는 너를 택할 것이다. 백번, 천 번을 되돌아가도 내 선택은 같단다.”

“…….”

“그럼, 다시 묻자꾸나. 내 삶이 너의 책임이더냐.”

“…….”

이안은 딸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일 뿐이야. 그거 아니? 부모란, 자식에게 추억이 되면 되는 존재란다. 나는 너에게 추억이 되고 싶다. 좋은 추억. 나를 생각했을 때, 네가 혹여 마음이 아프다면 나는 너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 없을 거란다. 그러니 더 이상, 이상한 생각 말거라.”

“어머니…….”

“대답을 해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구나. 이상한 생각, 하지 말거라.”

“…네.”

“그리고 명심해라. 네 스스로 려화임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이 생각도 정확하게 끊어 내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 스스로 운명의 딜레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안이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흑요석처럼 검은빛의 눈동자였지만, 이제는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 색이 달라졌음에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자신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딸의 눈이 금빛이든, 검은빛이든, 그저 딸일 뿐이니까.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문으로 향하고, 시녀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이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딸의 팔을 톡톡, 쳤다.

“휘영아. 이제 드디어 네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왔구나. 네 아버지가 오신모양이다.”

휘영은 어머니가 그토록 환하게, 마치 소녀처럼 웃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스스로를 자책하며 무너져 내리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뫼셔라.”

허(許)하는 말에 문이 열리고, 황제-리오넬이 들어섰다.

휘영은 정말 기쁜 듯 웃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아버지, 리오넬에게 눈을 돌렸다. 평원에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사람이 아버지이겠구나, 했지만 그 때의 느낌과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휘영, 그녀도 결코 작은 키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키는 6척 반(대략 190)은 되는 듯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에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는 부드럽게 휘었고,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에는 따뜻한 빛이 흘러넘친다.

리오넬은 딸이 깨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환한 빛이 무색할 만큼 눈앞의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 찬란했다. 다가오면서 리오넬은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딸을 제대로 마중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는 잠이 든 얼굴만 보아왔었다. 이렇게 깨어있는 모습을 보자니,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기쁨이 몰려들었다.

성큼성큼 침대 앞에 리오넬이 서자 이안이 입을 열었다.

“휘영아, 아니. 시아느 린 폰 발데르. 네 진짜 이름으로 살아갈 시간이 왔단다. 말했었지, ‘빛나는 자’라는 뜻의 너의 이름을 네 아버지와 내가 지었다고. 우리는 줄여서 ‘시안’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단다.”

휘영, 아니 시안은 담담한 얼굴로 다시 어머니를 봤다.

아주 오랜 예전부터 그녀는 자신과 둘만 있을 때 종종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이름도, 왜 여기서는 부를 수 없는지도. 어머니는 자신의 정신적 성숙도에 따라 이해하기 쉽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는 종종 ‘시안’이라고 부르곤 했었기 때문에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인사드려라, 시안. 너의 아버지이시다.”

시안은 정말 기쁜 듯 웃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아버지, 리오넬에게 눈을 돌렸다.

리오넬이 시안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이안과 장성한 시안이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10년, 20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때까지 소식 한 자락 알 길이 없자, 서서히 과연 이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불안한 의심에 뒷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시안.”

따뜻한 목소리에, 내밀어진 손. 시안은 빛을 등지고 있는 아버지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네 아버지는 아주 커다란 키에, 항상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신 분이란다. 검고 깊은 눈동자, 너처럼 이런 눈동자란다. 너를 만나면 그 눈이 따뜻하게 웃어줄 거란다. 너를 아마 너무너무 보고 싶어 하고 있을 거야.]

어머니의 말에 시안도 수없이 이런 순간을 그렸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아버지를 마주하니 그런 상상은 그저 상상에 불과했다. 처음 마주하는 아버지이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울컥울컥 심장을 친다. 눈물이 고이려는 것을 애써 누르며 한 발, 한 발 다가가서 결국 너른 아버지 품에 안겼다. 머리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러고 싶었다.

리오넬은 안긴 딸의 등을 두 팔에 안았다. 이 아이가 크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애석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자신과 딸을 지켜보는 이안의 얼굴을 보자,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이제 나 대신 네가 우리 딸을 지켜줘.]

리오넬이 시안을 더 꼭 끌어안았다.

그럼, 지키고말고. 어떻게 다시 돌아온 딸인데, 어떤 아인데.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라도, 내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지켜야지.

“보고 싶었다, 시안. 어서오너라, 너의 집에. 너의 나라에.”

리오넬이 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시아느 린 폰 발데르. 빛나는 자라는 뜻의 시아느 린. 이 이름을 얼마나 부르고 싶었는지 아느냐. 고맙다, 이렇게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와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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