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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반영웅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1.12.15 15:36
최근연재일 :
2022.08.01 21:00
연재수 :
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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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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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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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악惡(5)

해당 작품은 가상의 작품으로. 특정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콜록.”


온 방 안에 먼지가 일었다.

석고가루와 흙먼지가 흩날린 탓에 시야 확보도 어려웠다.


“하양아 괜찮아?”

“응, 괜찮아.”


내 밑에서 하양이가 대답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아이를 감싼 모양이었다.

나는 뿌연 먼지 너머를 바라봤다.

산산조각이 난 조각상과 제자리를 잃은 기구들.

설마 문이 열리자마자 이만한 질량의 물체가 던져질 줄이야.

누군지 몰라도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콜록, 최준서. 이러려고 그거 들고 온 거였어?”


지금까지 방 안에 없던 인기척들.

먼지 너머로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쥐새끼들이 남아 있는 거 같아서.”


이번에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남성과 여성의 이인조인 듯하였다.


“남아 있다고? 이런 곳에?”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봐.”

“음······ 알았어. 확인하는 동안에 이상한 짓 하면 안 된다?”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발소리가 다가왔다.

나는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여러 기구들이 모인 뒤편과 산산조각이 난 석상의 돌무더기.

일어나기 위해서 땅에 손을 짚은 그때, 돌무더기 아래에 하얀 물체가 보였다.

눈동자 문양이 새겨진 금반지.

그 밑으로 붉은 액체가 보였다.


“하양아. 뒤쪽으로 가서 숨어 있어.”


내 말에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내 밑을 빠져나가서 방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돌조각을 움켜쥐고 숨을 죽였다.

광신도의 내부 분열인가. 아니면 제 삼의 세력인가.

목소리만 들렸던 남녀 이인조.

오는 길에 보았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있다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단을 내렸다.


“어라?”


내 인기척에 상대방이 고개를 돌렸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의 여성. 동그랗게 뜨인 회색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초면에 미안합니다.’


나는 단번에 여성을 제압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무모한 일인 건 인지하고 있지만. 대화를 시도했을 때에 부담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 손끝은 여성에게 닿지 못했다.

마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팔이 공중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건!’


낭패감을 느낀 그때,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였다.


“커헉!”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방을 가로질러서 벽에 부딪혔다.

충격에 대비할 틈도 없었다.

강한 충격이 등에 들이닥치고 폐 속 공기가 전부 빠져나갔다.

벽에 부딪혔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려던 순간에, 보이지 않는 힘이 다시 나를 압박하였다.


‘바람의 초능력자······!’


상당한 수준의 초능력자였다.

앞에서 짓누르는 압력 덕분에, 벽에 달라붙은 채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궁금증은 풀렸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압력을 버티며 간신히 눈을 떴다.

뿌연 시야 너머로 단정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성이 보였다.

남성은 태연한 걸음으로 동료인 여성과 접촉하였다.


“조심 좀 해. 네가 다치면 내가 두 배로 수고해야 하잖아.”

“흐음? 지금 걱정해 준 거야?”

“아니, 괜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야.”

“그렇게까지 걱정을 해주는 거야? 고마워서 감격스러워라.”


겉으로 보이는 나이 대는 이십 대 중반.

정체불명의 두 사람은 서슴없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얘 좀 풀어줘 봐. 정체가 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글쎄. 경찰이든 다른 놈이든 거슬리는 건 변함없는데.”

“그야 너에게는 상관없겠지. 조금 전에 내 탓을 했는데 너의 행동부터 돌아봐야 하는 거 알지?”

“지난 일 가지고 잔소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해.”

“배려 고마워.”


몸을 짓이기던 압력이 사라졌다.

곧바로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엎드린 채로 팔로 지면을 지탱하였다.

여성이 말하였다.


“얘, 뭐 좀 물어봐도 되니?”


고개를 드니, 두 사람의 모습이 거대하게 보였다.

예의를 차린 말투와 다르게 적대적인 감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긴장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폐가 쪼그라들고 숨이 가빠져 왔다.

그리고 직감했다.

복도에서 쓰러져 있던 경찰들이 이들의 만행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희들 정체가 뭐야?”


위험을 무릅쓰고 발언했다.

남성 쪽은 이 급 이상인 바람의 초능력자라 예상되는데. 이러한 힘을 가진 자들이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경찰까지 적대하고. 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거지?”


하지만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성은 다시 한 번 처음과 변함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내 말은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걸까.

여성의 검은 머리카락이 내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대답 대신에 입을 다물고 여성의 눈을 노려봤다.

긴 속눈썹 사이로 초능력자들 사이에서도 흔치않은 회색 눈동자가 엿보였다.


‘이건 그 사람과 같은······.’


정면에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빈민촌에서 만났던 늑대가면 여자, 펜리스.

그녀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이 눈앞의 여성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얘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내가 잠시 한눈을 판 그때였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어 보이는데.”

“응? 무슨 뜻이야?”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은 남성 쪽으로 넘어갔다.


“옷 뒤쪽을 봐. 버젓이 눈알을 새겨 놨어.”

“이것 때문이라는 거야? 잠시 빌렸을 가능성은 없어? 영화에서 보면 알몸으로 있다가 악당의 옷을 빼앗고 탈출! ······이라는 거 있잖아.”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지금까지 탈출에 성공한 전례는 없어.”

“흐음, 그러면 이 아이도 광신도의 잔당이라는 거네?”

“그렇겠지.”

“저런···. 귀여운 아이인데 가여워라.”


여성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직 어린데 미안해.”


내가 여성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 대화에서 내려진 결론을 깨달은 순간, 몸이 낚시 바늘에 낚인 것처럼 공중으로 끌려갔다.


“잠깐만 너희가 원하······”

“비명은 얼마든지 질러도 돼.”


틀렸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도 공중에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이내 남성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힘이 사방에서 온몸을 옥죄었다.


“큭. 크윽······.”


조금 전까지 당했던 초능력과 강도 자체가 달랐다.

나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짓눌리고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폐까지 압박하는 압력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이것도 버텨봐.”

“컥, 커헉.”


눈앞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코에서 혈액이 흐르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입에서 울컥하고 혈액이 쏟아졌다.

이 순간에도 반격은커녕 벗어날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의식이 혼미해졌다.

악으로 버티고 있던 목의 힘도 한계에 다다랐다.


“땅꼬마를 놔줘!”


둔탁한 소리에 이어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몸을 옥죄던 힘이 사라졌다.

나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 몸이 고통스럽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손끝으로 긁어내며 단전의 힘을 끌어올렸다.


“하양아···!”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양이는 남성의 손에 뒷목을 붙잡혀 있었다.


“얘는 또 뭐야?”

“글쎄? 귀여운 아이?”

“너에게 물어본 내가······. 직접 물어보지 뭐.”


여성에 비해 남성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남성은 하양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강제로 고개를 들렸다.

하양이는 무서워하면서도 눈물을 참고 있었다.

이내 아이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나를 보는 아이는 아픔을 참으며 말하였다.


“땅꼬마, 도망쳐······.”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고 갈리는 더더욱 없었다.


“당장 그 손 치워!”


나는 돌덩이 두 개를 던졌다.

남성 쪽으로 던진 돌덩이가 공중에 멈췄다. 여성 쪽으로 던진 돌덩이도 허무하게 비껴나갔다.

내가 달려드는 동안에도 여성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손가락질 하며 동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아직도 살아 있는데?”

“그게······”


방심한 상대를 공격하는 게 비겁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여성을 사로잡아서 교섭의 재료로 이용해야 했다.

나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수술용 칼을 꺼내들었다.

가차없이 여성의 어깨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역시나······.’


쓴 웃음이 나왔다.

이러한 행동 자체가 무의미함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여성의 목으로부터 일 센티미터 차이도 나지 않는 거리에서 칼날은 멈추었다.

남성의 초능력에는 빈틈이 없었다.


“이상해.”

“으윽!”


나는 신음을 흘리며 수술용 칼을 떨어트렸다.

수많은 밧줄이 손을 옥죄는 거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나를 앞에 두고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걸레처럼 쥐어짤 생각인데 반발력이 강하단 말이지.”

“흐음? 네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야?”

“글쎄. 너나 사장님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처음 겪는 일이라······.”


남성은 하양이를 내팽겨 쳤다.

그러고 내 코앞까지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목 뒤로 잡아당겼다.


“똑바로 봐. 단숨에 죽여줄 수 있지만 봐주는 거니까.”


두 눈을 마주하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끔찍한 인형이라도 다루듯이 머리를 잡아당기니. 힘으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때? 뭔가 있어?”


여성의 목소리에 남성은 입 꼬리를 올렸다.

비틀린 웃음을 보니, 가슴 한 구석에서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한 가지 알아낸 건 있어.”

“그래? 그게 뭔데?”

“이 친구 눈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


푹.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한쪽 시야가 차단되고 남자의 얼굴이 반쪽만 보였다.

뺨을 타고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액체가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감각이 왼쪽 눈에 느껴졌다.


“아···.”


남성의 행동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굴을 파는 지렁이처럼 손가락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이거 신기하네. 내부에서 반발하고 있어.”

“아······아아악!”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뜨겁고 차갑고 괴롭고 아팠다.

한쪽 눈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와, 다른 쪽 시야까지 장악했다.


“땅꼬마를 놔줘!”

“오지 마!”


나는 목에 힘을 주고 외쳤다.

하지만 하양이는 멈추지 않았다.


“귀찮게 굴지 마.”


남성의 손이 아이에게 향했다.

그러고 짧게 손가락을 튕겼다.

초능력으로 바람이 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트럭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양이의 몸이 날아갔다.

아이의 몸은 바닥에 부딪히고 다섯 번을 굴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온전치 못한 한쪽 시야를 통해서 아이의 모습이 뇌리에 꽂혔다.

그 모습을 본 직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자, 뇌까지 가보려 하니까 조금만 참아 보도록 해.”


남성의 손가락이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괴롭히는 걸까.


“이거 참.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하···”

“망할 새끼가.”


나는 눈알을 파고들던 손목을 붙잡았다.

대화의 여지가 있을까했지만. 놈들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놈들이었다.


“지금······ 움직인 거야?”


남성은 당황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들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나는 눈을 뚫었던 남성의 손을 뽑아냈다.

실명되지 않은 다른 쪽 시야로, 피에 젖은 그의 손이 보였다.

그리도 다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 식었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죽인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 단어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여 버리겠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남성이 거리낌 없이 행한 지독한 행위.

아이에게 저런 취급을 한 행위.

전부, 그대로 되돌려주고 말겠다.


“최서준! 오른쪽 팔 조심해!”

“일일이 설명하지 마!”


내 팔의 궤도를 읽은 남성이 왼쪽 옆구리를 보호했다.

나는 주먹이 막힐 것을 인지한 직후. 양팔로 왼쪽 몸통을 붙잡아 무게를 실었다.


“커헉!”


몸을 주축 삼아 오른쪽 갈비뼈에 무릎을 먹였다.

남성의 몸이 나가떨어지고 내 몸은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아직, 나와 하양이가 받은 것을 청산하기에는 멀고도 멀었다.


“너는 나만 건드려야 했어.”


나는 그에게 달려가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나는 연신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숨이 가빠 오르고, 손의 돌출된 뼈가 욱신거렸다.

복도에서 보았던 경찰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커피 점에서 보았던, 긴장하고 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경찰들.

그들 또한 조금 전처럼 함부로 대해졌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청산 할 때까지 몇 번이고 휘둘러 주겠다.


“하아. 하아······.”


하지만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손의 살점이 터져서 뼈가 돌출되었다.

나는 주먹을 휘두르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초능력이란, 신분 변화의 기회이기도하지만 또 다른 차별의 시작.

세상의 불합리함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제 끝난 거지?”


남성의 손짓 한 번에 몸이 튕겨져 나왔다.

낙법을 취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미안하다. 이렇게 싸워본 적이 오랜만이라서 감탄 좀 했어.”


남성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하반신에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확인하니 두 다리에 날카로운 고철이 박혀있었다.


“그 상태로는 못 움직일 거야.”


남성은 태연하게 목 근육을 풀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타박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과 하면 쉽게 죽여줄 수도 있는데?”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보았다.

입에 고인 혈액을 뱉어내고, 다리에 박힌 고철을 뽑아냈다.

하지만 역시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리를 깊게 파고든 상처 탓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제기랄······.’


결국 닿을 수 없는 벽이었던 걸까.

이 싸움에 승산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무력하게 있어봤자 있는 건, 그 좋을 대로인 죽음뿐이었다.


“싸이코.”


돌연, 남성은 말하였다.

선의라도 베푼 것 같은 재수 없는 말투였다.


“내 빌런명을 알지는 모르지만 수고했어.”


빌런.

범죄자 중에서도 통제 불가능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명.

경찰들도 포기한 악질 범죄자들의 총칭이었다.


“네놈들이 왜!”

“정리는 깔끔한 게 좋겠지.”


싸이코는 내 말을 끊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러고 손가락을 움직여 원을 그려 보였다.

하양이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 안에 들어갔다.

내가 그 행위의 목적을 깨달은 순간, 투지가 있던 자리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소중한 아이구나?”


싸이코는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틀어서 아이의 얼굴을 보여줬다.

이마에 흘러내린 피와, 힘이 풀린 아이의 동공.

그 모습을 마주하자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어왔다.


“하지마···.”


감당 할 수 없는 감정에 집어 삼켜질 거 같았다.


“당장 그만 둬!”


나는 목이 갈라지도록 외쳤다.

하양이는 더 이상 그들의 행동에 방해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수술용 칼을 주워들었다.


“미안. 꽤 아끼는 아이인 거 같지만 나에게는 아니라서.”


싸이코는 무감정하게 말하였다.

그 말이 사실임을 중명하듯.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툭.

싸이코가 손을 놓자 하양이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갈라진 목에서 나온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셔갔다.


“아아··· 아아아!!!”


나는 이성을 잃고 고성을 질렀다.

성대가 찢어져서 피의 맛이 났다.

어떻게든 망가진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쥔 돌덩이에 힘을 주고 남성을 향해 걸어갔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하지만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남성은 내 모습을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고작 열 걸음도 차이나지 않는 거리.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가자. 이걸로 끝났으니까.”


남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눈치 챘을 때는 목에 칼이 박혀 있었다.


“쿨럭.”


나는 칼이 박힌 목을 부여잡았다.

몸이 균형을 잃고 왈칵 피를 토해냈다.


“끝난 거지?”

“어, 끝났어.”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다가갔다.

나는 쏟아지는 혈액을 손으로 받쳤다.

그들의 말대로 끝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양아···.”


나는 분통함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팔로 바닥을 짚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점점 시야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져 왔다.

하양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이를 보는 내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렸다.

내 손에 닿은 아이의 얼굴은, 내게 도망쳐라 외쳤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멍청한 녀석.’

‘네 까짓 게 무얼 하겠다고 그래!’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지.’


결국 주위 사람들 말이 다 맞았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 여긴 게 잘못된 거였다.

적어도 나는 티처와 검은 닌자에게 협력을 요청했어야했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건. 빌런도, 잭도, 광신도도 아니었다.

내 안일했던 생각과 판단.

어리석은 만능감에 사로잡힌, 내 어리석은 결단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제발 누구라도······.’


나는 아이의 손에 매달려서 눈물을 흘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아이를 구해줬으면 했다.

아이의 손을 감싸 쥐고 내 어리석음을 탓하며 울부짖었다.

그런데 울부짖은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푸른빛으로 변하였다.

천장도, 바닥도, 전부. 사방이 푸른빛에 둘러싸였다.

나는 믿기 힘든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러게.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네.”


당장이라도 떠날 거처럼 보이던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아무래도 죽기 직전에 보이는 환상은 아닌 듯하였다.


‘이건 대체······.’


이내 나는 푸른빛이 하양이의 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품을 뒤졌다.

발견한 것은, 하양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착용하고 있던 푸른 목걸이.

목걸이에 달린 푸른 광석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작된다.”


싸이코의 말과 함께, 목걸이에서 나온 푸른빛이 허공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는 물감처럼 작은 점을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의 바람이 불었다.

허공의 점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작았던 점은 서서히 벌어져서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검정과 푸른색이 뒤섞인 타원의 형태.

게이트.

갑작스레 나타난 재난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수고해줬어 다들.”


게이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오페라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긴 코트와 정장을 입은 금발의 여성.

게이트에서 나온 건 그녀 뿐 만이 아니었다.

검은 흑발과 간신히 눈만 가릴 정도로 망가진 한국 전통 탈을 쓴 남성.

그녀의 뒤를 따라서 이매탈을 쓴 남성도 나타났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는 남성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분량을 반으로 나눌까 했지만, 주에 한 번 연재이니 괜찮지 않을까 해서 통째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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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악惡(3) 22.03.18 42 0 14쪽
60 악惡(2) 22.03.14 37 0 13쪽
59 악惡 22.03.11 37 0 14쪽
58 추적 그리고 잠입(8) 22.03.09 42 0 14쪽
57 추적 그리고 잠입(7) 22.03.07 36 0 16쪽
56 추적 그리고 잠입(6) 22.03.04 35 0 12쪽
55 추적 그리고 잠입(5) 22.03.02 36 0 15쪽
54 추적 그리고 잠입(4) 22.02.28 35 0 13쪽
53 추적 그리고 잠입(3) 22.02.25 34 0 13쪽
52 추적 그리고 잠입(2) 22.02.23 39 0 13쪽
51 추적 그리고 잠입 22.02.21 36 0 12쪽
50 관계(3) 22.02.18 38 0 17쪽
49 관계(2) 22.02.16 36 0 15쪽
48 관계(1) 22.02.14 42 0 15쪽
47 검정 하양(9) 22.02.07 42 0 19쪽
46 검정 하양(8) 22.01.31 45 0 21쪽
45 검정 하양(7) 22.01.28 41 0 15쪽
44 검정 하양(6) 22.01.26 41 0 17쪽
43 검정 하양(5) 22.01.24 4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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