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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반영웅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1.12.15 15:36
최근연재일 :
2022.08.01 21:00
연재수 :
70 회
조회수 :
4,763
추천수 :
37
글자수 :
440,565

작성
22.01.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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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검정 하양(8)

해당 작품은 가상의 작품으로. 특정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정말로 제가 써도 되는 거예요?”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되묻고 말았다.

그럼에도 백발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한 번 휘둘러보겠는가?”


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고.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1미터가 넘는 칠흑빛 검신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흡수했다.


“맙소사······.”


나는 들뜬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제대로 힘을 줘, 위에서 아래로 대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무게감이 바람을 갈랐다.

그런데 그 결과가 당혹스러웠다


“역시···. 혹시나 했지만 무리였군.”


백발노인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나는 수직 베기를 끝낸 양손 중, 왼손을 펼쳐 보았다.

팔에 핏줄이 서고 근육이 떨린다.

대검을 몸통 중간까지만 휘두르려했지만, 통제되지 않고 바닥까지 닿았다.

수직 베기에 실패한 것이다.


“······역시 무리였어,”


백발노인이 탄식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물건을 드는 것과 휘두르는 것은 다르다.

심지어 자유자제로 다루는 건 더욱 격이 다른 일이다.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힘이 부족하다 느낀 건 처음이었다.

노인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200근이네.”

“네?”

“약 120킬로그램. 냉장고 하나의 무게라 보면 될 거네.”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말을 잃었다.

두 팔만으로 휘둘러야 하는 검이 120킬로그램이라니.

무게조절 능력자가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무기였다.


“자네라면 괜찮을 줄 알았네. 하지만 늙은 노인의 착각이었구먼······. 이리 주게. 내가 다른 놈으로 가져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건 오기나 욕심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검을 휘두를 때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명의 대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말이다.


‘하와이와 맞먹은 거대한 거북이의 일부.’


적색 이터인 아쿠파라(akupara).

놈의 일부로 만들어졌으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흐읍!!”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확실히 무식한 무게였지만. 무식한 건 내 쪽도 매한가지였다.


“그만두게. 애초에 그건 범인(凡人)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부웅.

노인을 무시하고 검에 몰두하였다.

양팔을 위로 올리고 전과 같이 수직으로 내리쳤다.


“휘유~”


늑대가면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만큼 이번 결과는 달랐다.

대검의 끝 부분이 땅에 닿지 않고, 정확히 상체의 중간 지점에 멈춰 섰다.


‘됐다.’


수직 베기에 성공하였다.


“이럴 수가······.”


노인이 입을 벌린 채 닫을 줄을 몰랐다.

나는 검의 평탄한 면이 하늘을 향하게 쥐고,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검의 궤적너머로 노인의 놀란 표정이 보였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대검을 휘둘렀다.

한참 뒤에 대검을 내려놓았을 때는, 온 몸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후우, 이런 느낌이네.”


방심하면 손에서 벗어날 거 같은 감은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제어 할 수 있었다.

맨 처음 단검을 다뤘을 때처럼 흥분되기까지 하였다.


“젊은이!”


백발노인이 덥석 손을 잡았다.

다시 유품을 돌려달라는 말을 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곧 쓸모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꽉 쥐었다.


“내 자식이 죽지 않게 해주어 정말로 고맙네.”


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대장장이의 정수이자 큰 아들의 유품.

그에게 있어 무명의 대검이란, 단순한 철검이 아닌 걸지도 모르겠다.



*



“미리 말해준 장소에서 대기해. 낌새가 보이면 다시 연락할 테니. 용의 정수리를 노려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잭이 수신기 너머에서 지시를 내렸다.

나는 송수신기가 없는 두 사람에게 눈짓하였다.


“두 사람 모두 이곳을 벗어나세요.”


지붕 위로 대검을 던지고. 발코니 난간과 지붕 끝을 붙잡고 올라갔다.


“끼에에엑!!!”


저 멀리에서 용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히어로는커녕 어떠한 외부인력도 오지 않았다.

바라지 않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까워져만 갔다.


“할아버지. 부탁해. 물.”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도망갈 줄 알았던 늑대가면과 백발노인이 함께 있자, 비명이 절로 나왔다.


‘도망치라 했는데 왜 올라온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내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백발노인은 태연히 혀를 찼다.

노인은 늑대가면을 보고 말하였다.


“쯧,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목은 마르더냐?”

“할아버지. 나쁘다. 작다. 착한 마음.”

“뭣? 현우야, 이 짐승가면 쓴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게야.”


이런 상황에서 태연히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이상했지만.


“······물을 안줘서 나쁘다는 말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하. 그런 게냐?”


백발노인은 늑대가면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둘 사이에서 다툼이 시작될 거 같았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 두 사람을 도망치게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제멋대로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들도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했을 테니. 멋대로 하게 두기로 했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두 사람 사이에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염병, 도와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기 족치고 있어! 나가서 아무 백화점에나 가서 족치고 앉아 있으면 될 것을!”

“나는 일했다. 할아버지가 대검 들면. 허리 안녕이었다.”

“뭐, 뭐얏?”

“허리. 안녕. 이었다.”

“이, 이게 지금 나를 늙은이 취급하는 게야?”


늙은이 취급을 받은 노인은 버럭 화를 내고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그 모습에 경악했다.


“할아버지!”


그가 뛰어내린 지붕 쪽으로 달려가 밑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노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노인이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물병 하나가 손에 쥐어져있었다.


“옜다. 마셔라.”

“할아버지 고마워~”


늑대가면이 굶주린 사람처럼 물을 들이켰다.

백발노인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 한 마디를 하였다.


“염병···. 고마우면 우리 집 좀 안 부서지게 뭣 좀 해보던가.”


아무렇지 않은 듯 뱉은 말이었지만, 그가 어떤 심정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났다.

평생을 살았던 터전이 사라지게 될 위기이니.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할아버지.”

“왜 불러!”


역시 백발노인은 기운이 빠져있었다.

나는 화제도 돌릴 겸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잭이랑은 어떤 사이예요?”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턱을 두 번 어루만졌다.


“도련님과 내 관계 말이지?”

“네.”


나는 백발노인과 잭의 관계가 궁금했다

하양이에게는 아가씨. 잭에게는 도련님이라 부르는 관계가 말이다.


“그래··· 돌이켜 보니 벌써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구나.”


노인은 옛 기억을 읽어내리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첫째 놈이 길 잃은 도련님을 데려온 게 아직까지 생생히 떠오르는구나. 그때는 도련님도 꼬맹이 시절이었지.”

“그때 잭의 나이가 어땠는데요?”

“글쎄다. 목소리가 아직 가늘었던 때였으니 제법 어렸을 게다.”


꼬맹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면,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의 나이라는 거였다.

그런 어린 나이에 빌런 구역에 들어와서 길을 잃었다니.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에는 많이 놀랐지. 아무리 길을 잃었다 해도 집까지 아이를 데리고 온 건 위험했으니까.”

“집까지 데려온 게 위험하다고요?”


길 잃은 아이를 데려온 게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노인은 금방 의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자칫하면 납치라는 누명을 씌거나, 젊은 피에 미친놈들이 뭔 짓을 할지 모르는 법이니 그러지.”

“그렇게 치안이 안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래, 별로 못 느끼겠지? 하지만 옛날에는 제법 이름과 어울리는 마을이었지. 도둑질과 살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으니 말이야.”

“그런 곳에 길을 잃다니······. 잭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던 걸까요?”


노인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글쎄다.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들어왔다는데······. 확실한 답은 두 사람을 데리고 온 큰아들만 알고 있겠지.”


여동생.

노인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시기상으로 십 년 전이면 10살 정도인 하양이의 나이와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인이 말한 여동생은 하양이랑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잭에게 친동생이 있어요?”

“응? 모르고 있었나? 잭과 쏙 빼닮은 여동생이 한 명 있네.”


갑작스러운 정보에 말문이 막혔다.

돌이켜 보니. 잭이 나를 아는 거에 비해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부모는요? 그에게 부모는 있어요?”

“부모라······. 도련님에게 들은 바로는 여동생과 단둘이 있는 거로 알고 있네.”

“여동생은요? 최근에 본적 있어요?”

“물론이네. 얼마 전에도 학교 잘 다니고 있다며 인사하러 왔었지.”

“학교요?”

“그래, 도련님과 달리 아가씨는 줄곧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네.”

“허······.”


알지 못했던 사실을 제 삼자의 입에서 들으니 놀라웠다.

잭이 이런 면에서 철저히 비밀을 지킬 거 같았는데. 주변인에게 말을 한 것을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남매가 우리 집에 들어온 뒤···”


노인은 잭을 처음 만났을 때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무명이 남매를 들여오자, 노인은 화를 내며 두 사람을 내쫒으려 했다.

그러나 무명이 완강한 반대하며 다음 날이 밝으면 사무소 가는 길에 바깥으로 데려가겠다 말했다.

결국 백발노인은 큰아들의 고집에 못 이겨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때에는 도련님이 이 마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상상도 못했지.”


하룻밤 재운 뒤 남매를 보내고. 노인이 다시 어린 잭을 만난 일은 2주 후의 일이었다.

다시 만난 잭은 여동생이 아닌 포도색 머리의 남자아이와 함께 노인에게 찾아왔다.


“도련님이 그 아이와 함께 온 이후, 거리의 모두가 훌륭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네. 덕분에 거리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져 갔지.”

“잭이 데려온 아이가 거리를 바꿨군요.”


노인은 또다시 말을 멈추고 고심했다.


“글세······. 그 아이가 뛰어난 치유능력자인 것은 맞지만. 그 아이로는 이 거리에 뿌리박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거네.”

“뿌리박힌 문제요?”

“가난 말일세.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지.”


지금의 분위기를 만든 게 잭의 일이었다니.


“가난을 잭이 해결했다는 건가요?”


내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도련님은 말이지······.”


잭은 그들에게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다 줬다.

싸움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이터를 사냥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은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외에 전문직을 하고 있던 사람.

즉, 백발노인처럼 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과는 직접 고용 계약까지 맺었다.


“불공정한 계약은 아니죠?”

“허허. 평생 계약서란 걸 본적이 없는 사람도 불공정한 계약이란 것을 알 거네.”


한 달 마다 백만 원의 돈을 지원 받는다. 현재의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나중에 그가 왔을 때 모른척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가 잭이 제안한 계약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련님을 믿고 따르게 된 걸세. 죽기만 할 뿐인 인생에서 살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 말이지.”


노인의 얼굴에는 잭을 얼마나 은인으로 여기는지가 드러나 있었다.

분명 그에게 있어서 히어로란, 세상에 두 명의 존재만이 유일무이할 것이었다.

잠시 동안 노인에게서 빌런 구역과 잭의 관계를 자세히 들을 수 있던 그때였다.


“현우야. 준비해.”


송수신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수다는 여기까지인 듯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검을 쥐었다.

하지만 내가 긴장한 것에 비해서, 용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게이트 앞에 선 채 몸을 곧게 피고 있을 뿐. 그가 준비하라고 했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잭? 지금 움직이는 거 맞아?”


내가 반신반의하며 물은 그 순간.

타앙.

길의 끝자락에서 총성이 들렸다.


“움직였네!”


용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총성이 들린 방향을 바라본 거지만. 우리가 위협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잭, 들려? 놈이 이쪽을 봤어. 그런데···”


계속해서 들리는 총성.

덕분에 용의 시선이 완전히 이 방향에 집중되었다.

쿵쿵.

머릿속이 경종을 울려댔다.

지금 이 총성은 잭이 인위적으로 만든 소리인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일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한 마음이 싹텄다.


“끼에에에에에에!!!”

“또 움직였네!”


용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놈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좌우로 흔들며 물결을 그렸다.


“놓치지 마!”

“무리입니다! 너무 힘이 세요!”

“피해! 모두 피해!!”


갈고리를 매단 밧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와 함께, 용의 몸에 이어진 밧줄이 하나 둘 떨어져나갔다.


“끼에에엑!!”

“움직인다! 모두 도망쳐!!!”


사람들이 소리쳤다.

밧줄이 풀린 용은 더욱 몸을 위로 뻗었다.

놈은 그대로 가속을 줄이지 않고, 밑으로 곤두박질 쳤다.

서서히. 지붕 위로도 미세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용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이시여.”


노인은 양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용의 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땅울림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거를 느끼며 입 꼬리를 올렸다.

검을 쥔 두 손이 떨렸고.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했다.

공포의 존재를 마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잭. 얼마나 남았어?”

“20초. 그 자리에서 보일 때까지 15초 남았어.”

“내가 죽으면 가족에게 알려줄 거지?”

“그게 걱정이 되면 하지 말았어야지.”


말이라도 해주겠다하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실망스러운 그때,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 계획대로라면 잘 될 테니까.”


지붕 위에서 대기하다가 놈의 머리 정중앙에 대검을 꽂는다.

이런 허술한 계획이 잘 되면, 왜 놈의 등급이 적색 이터이겠는가.

그가 말한 건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였다.

다시 송수신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나타날 거야.”

“그래, 땅울림이 점점 커지네. 네 말대로 이제 곧······”

“잭!!!”


송수신기에 끼어든 건, 하양이의 목소리였다.

송수신기 너머에서 아이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잭 놓쳤어! 아이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이?

거리의 광경을 목격한 순간,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쥐를 잡고 도망쳤던 아이와 나에게 화분을 떨어트렸던 아이들.

빌런 구역의 아이들이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이쪽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현우! 듣고 있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지금 맡은 일에 집중해.”

“어. 응. 그래···. 그렇지?”


용을 죽이는 게 최우선 상황이다.

그에 비해 어린 아이 몇 명쯤은······.

몇 명쯤은 가벼운 희생이다.


“잘 들어! 이게 실패하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러니까 다른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마!”


아이들은 포기하고 죽게 두자.

그렇게 해야 사람들, 이곳을 구할 수 있다.

위험도는 낮추고 성공률은 높이고 그리고 손실도 줄이고······.

그리한다면 정말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봐 젋은이! 지금 뭘 하는 건가!”


노인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쓸 새도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거리의 바닥에 안착하였다,

그대로 망설이지 않고 움직여 아이들을 붙잡아 세웠다


“얘들아. 지금은 위험하니 저쪽으로 가 있을래?”


무언가에 겁을 먹어있는 아이들은 순순히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야!”


아이 한명이 다리를 다쳤는지.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현우! 당장 그 자리에서 벗어나! 젠장! 다 포기하고 도망치라고!!”

“젠장. 알고 있다고.”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송수신기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다리를 다친 여자아이를 안아 올렸다.


“꼬마야 미안해.”


상냥하게 말한 다음, 아이를 지붕 위쪽으로 던졌다.

지붕 위에서 백발노인의 두 눈이 커졌다


“무. 무슨!”


노인은 황급히 손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나를 보는 노인의 얼굴에서 충격 받은 빛이 엿보였다.

그 빛은 내가 아이를 던져서 생긴 충격이 아니었다.

노인은 난간에 매달려서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만두게! 이런 마을 망해버려도 괜찮으니 얼른 올라오게!!!”


노인은 나를 잡아주려는 듯 손을 뻗어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거리는 나 혼자만이 남아있었다.


‘3. 2. 1.’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다가왔다.

정확히 잭이 말했던 15초가 지나자, 더욱 강하게 땅이 울려댔다.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골목 끝 집이 부서졌다.

지붕이 날아가고 유리창과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를 지나는. 거대한 용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딱 맞춰서 나타났네?”


농담 같은 이야기였다.

용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놈은 크고 흉측한 입을 벌렸다.

마치 새우 앞 고래처럼, 자신의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후우···.”


대검을 들었다.

그토록 무거웠던 대검이 지금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침착하게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이상할 정도로 감각이 날카로웠고 마음도 침착했다.

두 눈을 놈에게서 피하지 않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용.

이제는 땅울림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놈의 입속이 두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제 금방이었다.


“흡!”


오른쪽으로 돌며 검을 휘둘렀다.

정면을 피하고 입의 옆쪽을 공략했다.

쩌적.

돌연, 무언가 부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슴이 철렁였다


“제기랄!!”


이미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이판사판으로.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검을 밀어 붙였다.

단단한 턱 뼈로 예상되는 무언가를 부러트렸다.

이때부터 대검은 용의 몸을 미끄러지듯 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스스로의 인내심을 시험해야했다.

검을 쥔 손에서 피가 흐르고 팔과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깨의 위치는 어긋날 거 같았고 목의 힘줄은 터질 듯이 팽창하였다.

눈과 코에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한 눈 팔 새가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이를 악물었다.

검을 놓는 순간에 실패할 것이다!

촤아아악.

놈의 몸이 핏물을 흩뿌렸다.

이를 악물고 버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돌연, 용의 몸을 관통하던 검이 가벼워졌다.

검 끝이 오른쪽 바닥에 처박혔다.

나 또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 하아······.”


눈앞이 회색으로 보였다.

애써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칠흑빛 자태를 잃지 않은 대검과 바닥을 채우는 피 웅덩이.

나는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살벌했던 용의 가속은 멈춰 있었다.

놈은 배가 반쯤 갈라진 채로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끝난 것이다.


“하하···”


검을 쥐었던 손을 펼쳐 보았다.

살갗이 모두 터져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에 절어있었다.

이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인 상태였다.

그래도 해냈다.


“해냈어! 네놈이 해냈다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붕 위에서 백발노인이, 나를 보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노인은 한참을 외치고. 이번에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바빴다.

나는 코피를 닦으며 노인을 불렀다.


“이봐요. 할아버지.”


손으로 브이 자를 펼쳐 보였다.

온몸의 근육이 부어오른 거 같았고, 뼈와 관절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안전하게 용의 머리 정중앙을 꿰뚫어야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친 사람도 없고 마을도 지켜냈으니 다 잘된 것이다.

털썩.


“어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버렸다.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할아버지, 잭에게 연락 좀 해줘요!”


나는 노인에게 외쳤다.

지금 몸 상태로는 연락조차 할 힘이 없었다.

그렇게 여기어 노인에게 부탁하는 것인데.


“······할아버지?”


그런데 노인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선 채로 굳은 동상을 보는 거 같았다.


“할아버······”


다시 한 번 노인을 부르려던 그때였다.


“도망치게!!!”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털이 쭈뼛 서고 온몸의 근육이 위축된다.

동시에 등 뒤에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


노인의 다급한 목소리 속에서 하늘을 가린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확인했었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혈액의 고동이 멈춘 것도 확인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죽었다고 생각했던 용이, 죽지 않고 살아나 흉측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메리 설날입니다 여러분.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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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조사(6) 22.08.01 39 0 10쪽
69 조사(5) 22.07.03 36 0 16쪽
68 조사(4) 22.06.23 30 0 12쪽
67 조사(3) 22.05.08 36 0 12쪽
66 조사(2) 22.04.30 35 0 16쪽
65 조사 22.04.17 38 0 17쪽
64 악惡(6) 22.04.10 40 0 18쪽
63 악惡(5) 22.04.03 41 0 20쪽
62 악惡(4) 22.03.26 38 0 15쪽
61 악惡(3) 22.03.18 42 0 14쪽
60 악惡(2) 22.03.14 37 0 13쪽
59 악惡 22.03.11 37 0 14쪽
58 추적 그리고 잠입(8) 22.03.09 42 0 14쪽
57 추적 그리고 잠입(7) 22.03.07 36 0 16쪽
56 추적 그리고 잠입(6) 22.03.04 35 0 12쪽
55 추적 그리고 잠입(5) 22.03.02 36 0 15쪽
54 추적 그리고 잠입(4) 22.02.28 35 0 13쪽
53 추적 그리고 잠입(3) 22.02.25 34 0 13쪽
52 추적 그리고 잠입(2) 22.02.23 39 0 13쪽
51 추적 그리고 잠입 22.02.21 36 0 12쪽
50 관계(3) 22.02.18 38 0 17쪽
49 관계(2) 22.02.16 36 0 15쪽
48 관계(1) 22.02.14 42 0 15쪽
47 검정 하양(9) 22.02.07 42 0 19쪽
» 검정 하양(8) 22.01.31 45 0 21쪽
45 검정 하양(7) 22.01.28 40 0 15쪽
44 검정 하양(6) 22.01.26 41 0 17쪽
43 검정 하양(5) 22.01.24 4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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