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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수상함 님의 서재입니다.

대한제국 전함이 일제를 찢음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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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수상함
작품등록일 :
2024.07.29 13:23
최근연재일 :
2024.09.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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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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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진주만 (2)

DUMMY

의용병 2개 대대.


입대하기에는 살짝 늦거나 이른 나이도 섞여 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히 양질의 인력이다.


지금까지 이순신함에서 발생한 사상자 결원을 전부 채우고도 인원이 남을 정도. 뿐만 아니라 13기동부대의 다른 함선들에도 충분히 보충 인원을 공급할 수 있다.


비록 간부 없이 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결원이 채워진 만큼 고참병들을 부사관으로 진급시키고 훈련하면 된다.


어차피 4개월간의 수리 일정으로 시간도 넉넉하다.


정말로 뜻밖의 호재다.


가장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보급이라니.

역시 별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했건만 제독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다 자네들 13기동부대의 활약 덕일세.”

“예?”

“충무공의 이름으로 왜놈들의 항공모함을 4척이나 때려잡고, 그놈들 중 가장 큰 전함을 단독으로 박살 낸 한 민족 최강의 전함.”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낯부끄러운 칭호인데.

정말 진지하게 읊조린 제독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명성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면 정녕 대한의 건아라고 할 수 있겠나? 나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자원하려고 들었을 걸세.”


그리고 명단표를 건네며 말을 잇는다.


“이 모두가 자네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거야.”


전부.

우리의 이름을 듣고 찾아왔다는 말이다.


충무공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싸운 그 나날들을 보고서.


새삼 우리가 이뤄낸 일들의 무게를 가볍게만 생각한 기분이 든다.


“보급 같은 건 걱정하지 말고 싸우게, 사령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어깨를 두드린 류시원 제독이 입꼬리를 올린다.


“자네는 전투만 신경 쓰면 돼. 지금처럼 말이야.”


미소 짓는 제독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


이순신함으로 돌아가자 간만의 상륙으로 들뜬 수병들이 눈에 보인다.


설탕 뿌린 빵을 들고 가던 수병들이 나를 마주치더니 벽에 붙으며 기립한다.


“어, 맛있게 먹고.”


긴장한 것 같아서 손을 흔들며 후딱 지나쳤다.


복도에서 뭐 먹으면 흘리고 그럴 텐데. 괜스레 지적했다가 누가 보면 내리갈굼이라도 일어날 거 같아 그만두었다.


여태껏 그렇게 달려왔는데 좀 풀어줘도 상관없지 않겠나.


그보다도 맛있겠다.

나도 저런 거 맛나게 먹을 자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아이스크림을 양동이에 한 아름이나 받아온 수병도 있었다.


냉동고에 넣을 새도 없이 간부 병사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바람에 순식간에 동났지만.


기호품으로 주로 술이 제공된지라 달달한 음식의 수요가 많을 줄 몰랐는데. 이참에 아이스크림 기계도 하나 구비 해야겠다.


함 내 기호품 보급용으로 주류 창고가 있긴 한데 그래도 둘 다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나도 딱히 술만 마시는 편은 아니고.


“이건 뭐야?”

“금일 특식입니다.”


함장실로 들어가자 당번병이 웬 얼음이 담긴 접시를 대령한다.


화채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는 다과.


보급이 풍족해지고 외박으로 인원도 줄자 조리장이 간만에 실력 발휘를 했다는 듯하다.


차가운 접시를 손에 들고 한입 떠먹으려는 찰나.


책상 위에서 아직 못다 한 서류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전사자 통지서들이다.


“······.”


결원이 보충되었다는 말은, 원래 직무에서 빠진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다.


전시에 결원이란 대부분 사상자를 의미하는 말이고.


업무부터 빨리 해결해야지.

조용히 접시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하나하나,

이름들을 읽으며 결원을 파악한다.


정운룡이라는 캐릭터의 능력은 내 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피로도 덜 느끼고 전투 시의 집중력과 판단력도 남다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대단한 능력이 많지만 특히나 체감되는 건 기억력이다.


이 몸은 참 기억력이 좋다. 오랜 시간 전의 기억도 사소한 일 하나까지 다 떠오를 정도로.


전사자 통지서의 결원 목록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세부 사항도 머리에 들어가서 잘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 부서에서 누가 부상을 입었고.

그중 누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는지.


누가 전사했고.

만일 그 녀석이 나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봤다면 그 기억까지 떠오를 정도로.


이러니까 서류를 만지기 싫은 것도 있었는데.


물론 희생 없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나는 충무공이 아니니까.


그분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몸으로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야 했고 그 결과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 연합군에서 우리보다 잘 싸운 전함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애초에 이렇게 펜을 끄적거리며 감상에 젖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다.


반년간 쉴 새 없이 싸운 이후.

모처럼 안전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니 새삼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안락함이 정말 마약처럼 내 마음을 옥죄는 거 같다.


이대로 전선에서 물러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생각해보면 할 만큼은 해줬지.


연합함대의 공세를 견제하고 야마토를 침몰시켰으며 놈의 상세한 성능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해군의 가장 잠재력 있고 중요한 부대인 ‘제1항공함대’를 궤멸시켰다.


이 정도면 진짜 할 수 있는 건 다 해준 거 아니냐?


무엇보다 이 세계를 만들 때 그토록 바라던 전함과 전함의 싸움도 원 없이 이루었다.


희생은 충분하다.


어쩌면 미 서해안에서 가능한 오래 쉬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냥 진급시켜 달라 할 걸 그랬나.”


풀썩―

작업을 멈추고 침대에 드러누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피로가 덮치며 서서히 눈이 감겼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


발밑이 흔들린다.


주위가 온통 소란스럽고


정박 중에 누가 이렇게 난리를 피워?

다들 쉬고 있는데.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바다였다.


“어···?”


본 적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앉아 있는 장소는 어느 나무배의 갑판 위.


이순신함의 함교보다 큰 정도의 갑판 위로 지독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물러서지 마라!”

“화포의 장전은 멀었느냐?”


전투의 함성이 사방에서 빗발친다.


바닷물이 끈적하게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사방에서 총포 소리가 들리고 화살이 주변을 빗발친다.


그럼에도 난간에 줄지어 선 병사들은 동요 없이 침착하게 방패를 들고서 버틴다. 전부 사극에서 볼법한 갑옷을 입은 채다.


“조금만 더 버텨라!”

“화포수 2보 앞으로!”


더군다나 창과 화살로 뱃전 너머의 적을 공격하며 틈틈이 총포도 퍼붓는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나는 분명 진주만에 있었는데?


다시 주위를 둘러보자 등 뒤로 함교처럼 장대가 솟아있는 게 보였다.


나는 이 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판옥선이다.


“운룡아!”


그 순간,

천둥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분명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장대 위에 선 장군이 성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난히 눈에 익은 갑옷을 차려입은 장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이들은 전부 뱃전에서 적과 싸우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며 말한다.


“네가 죽기를 바라느냐? 네가 내 손에 죽기를 바라느냐?!”


그리고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는다.


당장이라도 나를 벨 듯 검 끝을 향한 채 번쩍거리는 칼날.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장은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멀어지려 했으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어느새 코앞에서 눈을 마주쳤고 마치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도망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더냐?!”


거친 호령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


“함장님? 계십니까?”


눈을 뜨자 함장실의 천장이 보인다.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뭔 꿈이지, 대체.

개꿈··· 은 아니고.


충무공 이름 땄다고 정말 충무공이 꿈에 나타나 훈계한다고?


참 진귀한 경험이다.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들어와.”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은색 머리카락의 항공 소위··· 아니 중위가 들어와 경례한다.


“중위 한유리, 함장실에 용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직접 면담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했지. 함대에 몇 안 남은 전투 조종사라서 주의 깊게 관리하던 참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니, 그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왜 그러나?”

“그 괜찮으십니까?”


무언가 이상해 이마를 쓸어넘긴 손을 들어보자 식은땀이 잔뜩 묻어있었다.


하여간.

어지간히 긴장했던 모양.


“방이 좀 더웠나 보네. 앉아 있어.”


에어컨은 잘만 가동 중이지만.

그렇게 적당히 대꾸하며 응접용 소파 위에 유리와 마주 앉는다.


엉거주춤 앉은 유리가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린 채 입을 다문다.


“······.”

“······.”


왜 이렇게 어색하지.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아 그래.

상담은 왜 신청했는지 물어봐야지.


“저기···.”

“응?”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화채···.”

“?”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한 입도 안 먹고 놔둔 화재가 눈에 들어온다.


얼음이 다 녹은 채 물이 넘친 접시.


“안 드십니까?”

“어?”


걱정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접시를 향하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이 없어서··· 자네 먹겠나?”


대답도 없이 곧장 접시를 가져간다.


아니 그래도 나 한 입도 못 먹었는데.

뒤늦게 나눠 먹자고 할까 싶은 마음이 든다.


헌데 정말로 게걸스럽게 먹는지라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래··· 많이 먹어라.

젊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지.


그동안 단게 많이 고팠던 걸까.


순식간에 접시를 싹 비워낸 유리는 곧이어 나와 눈이 마주치곤 다시 어색하게 몸이 굳었다.


잠시 얼음보다 차가운 침묵이 지나간 후.


“그···.”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다는 요청을 하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였다.


얼마간 눈을 깜빡이고서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함대에 남은 전투 조종사는 자네와 항공대장뿐이라고 아네만?”


입을 꾹 다물고 앉은 유리.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고뇌가 느껴진다.


“어째서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다고 생각한 건가?”

“동료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침통한 목소리로 울먹이듯 말을 이었다.


“제 잘못입니다.”


무릎에 얹은 손이 주먹 쥔 채 부르르 떨렸다.


“협동을 생각하지 않고 저 혼자만 잘난 듯 움직였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필요로 했을 때 그 자리에 없었고··· 그 대가로 모두를 잃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순간.


“더는 하늘을 날 면목이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타이만에서 야마토와 싸운 그날. 13기동부대의 하늘을 엄호하는 항공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일본 1항함 소속으로 추정되는 정예 조종사들의 맹공.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선진적인 파이터즈 스윕 전술.


오로지 전투기를 중심으로 한 제공 작전에 우리는 단 2기의 생환기를 냈을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싱가포르로 후퇴한 이후로 나는 정운함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당장 필수적인 보급만 받고 다윈으로 도망치느라 바빴으니까. 거기서도 정운함은 아시아 함대와 함께 먼저 보내느라 항공단을 살필 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원 소속지는 엄연히 이순신함이다.


그녀를 케어할 상관은 바로 나라는 뜻이지. 더군다나 대련에서 그녀를 데려온 것도 나 자신이었고.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순신 함대 소속으로 동료들을 잃는 경험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유감이네, 중위.”


어쩌면 나는 그녀를 제공권 잡아주는 편리한 도구로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전함과 전함의 싸움을 하는 데 공습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하는, 그저 그뿐인 부품.


“자네와 항공대가 필사적으로 일본 항공대와 싸운 그날. 우리 함은 일본의 신형 전함과 맞붙었어.”


그녀를 마주하고 나서야 결심이 들었다.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네. 적의 신형함을 격침하고 남방 공세의 예봉을 꺾었어. 적 주력 함대의 활동을 주춤하게 만들고 그사이 상당수의 연합군이 무사히 전선에서 후퇴할 수 있었지.”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목숨을 잃은 장병들은 캐릭터 따위가 아니다.


각자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이들이다.


만일 이 세상이 내가 설계한 시나리오 때문에 만들어진 세계라면.


그 전개에는 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야마토 격침은 오로지 내 결단으로 시작된 작전이네. 내가 결단했고 내가 실행했지.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피해도 나에게 그 책임이 있네.”


이 세상의 모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거창한 말이 아니다.


내가 그 게임이 현실이 되도록 의도한 것도 아니고.

애당초 나에게는 그런 신적인 능력도 없으니까.


그저 내 앞에 닥쳐온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대련에서 자네를 데려온 건 오로지 내 판단이었네. 나는 한 번도 그 결정을 후회해본 적이 없어.”


잠깐의 침묵 후 입을 열자 유리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전투에서 피해가 컸다면 그건 오로지 내 책임이야. 야마토를 잡겠노라 결단한 건 나였고, 적 항공대를 막으라고 명령한 건 나였으니까. 그러니 비행대장이면 몰라도 중위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어. 이것만큼은 보장하지.”


이윽고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네.”


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정말 최고 중의 최고만 모았다.


포술장, 항해장, 작전관, 통제관, 말단 통신관에 전탐장과 보수장까지.


장교와 부사관은 물론 말단 수병들까지 가능하면 가려서 선정했을 정도로.


이들 중 누구라도 없었다면 이순신함은 그날의 결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중위는 잘해주고 있어. 내가 보증하지.”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조용히 중위를 바라보았다.


“한 중위가 비행을 그만두고 싶다고 결정한다면 나는 그 결정을 존중하겠네. 자네가 힘들다면 그만 날아도 돼. 누구도 그걸 강요할 순 없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는 유리.


농담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본래 소속은 이순신함이니까.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내 책임이기도 하다.


만일 그녀 스스로가 더 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내보내 봐야 모두에게 좋을 게 없다.


나도 억지로 싫은 일에 참여시키고 싶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는 오직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그렇기에 내가 이 사람들을 모은 거고.”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말을 잇자 유리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묻는다.


“함장님께서는.”

“음?”

“어째서 더 싸우겠다고 결심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질문이다.


글쎄.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꿈에서 충무공이 나와서 호통칠 정도니까.


잠깐 고민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후방에서 농땡이 피우다가 어느 날 픽 죽으면, 먼저 간 장병들이 하늘에서 내 목을 꺾어버리려 들지 않을까?”

“···예?”

“그냥 그뿐이야.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고 싶고, 그러려면 저 망할 왜놈 새끼들을 때려잡아야 하니까. 언제까지고 배 위에서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좋은 대답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고개 숙인 유리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한참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허튼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요청은 잊어주십시오.”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말인가?”

“무책임한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하다.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가 이순신함의 머리 위를 지켜준 덕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작전할 수 있었다.


이윽고 다리를 꼼지락거리던 유리는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이유를 실토했다.


“실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13기동부대와 동행한 사관생도 중 항공 장교를 지망한 녀석들을 진주만에서 속성 교육 했는데, 다들 기초적인 조종법만 알지 제대로 나는 법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통제관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에 편대장 기체가 어떤 건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햇병아리라는 모양.


하와이 한인촌에서 모집한 조종사 출신 자원병들도 있지만 이 양반들도 농업용 비행기 자격증만 있으니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다.


“결국 지휘관 식별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지?”

“예, 통제를 하려고 해도 공중 집합부터 걸립니다.”


노력해도 안 돼서 결국 그녀가 포기하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던 모양.


이 녀석들도 지휘관 없이 나서지는 못할 테니 이 햇병아리들이 개죽음당할 일 없을 거라나.


하기야. 정말 그랬다면 나도 차라리 미 해군에서 조종사를 빌려왔을 테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허튼 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복수심에 미쳐서 적을 더 죽이겠노라 결의했다면 나는 강제로라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을 거야.”


딱히 일본군에 대해 측은한 마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악인을 상대한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물들 필요는 전혀 없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놈들을 박살 내는 방법은 그야말로 차고 넘치니까.


한때 내가 애정을 가지고 모은 캐릭터를, 그리고 이제는 피를 나누는 전우가 된 이들을 그렇게 타락시키고 싶지 않다.


그건 그거고.

일단 문제를 알았으니 해결법이 필요한데.


사실 당장에 막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없다.


내가 뭐 공중전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끽해야 옛날 애니 같은 거나 조금 보고 말았지.


그래도 당장 부하가 상담하러 왔는데 아무것도 없이 돌려보내기는 뭣하지.


어떻게든 생각을 짜내자 그새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차피 훈련인 거 아예 편대장 기체를 눈에 띄는 걸로 만들지?”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유리 중위.

뭐, 일단 해보고 안 좋으면 그만두면 그만이니까.


예를 들면···.


***


“편대장용 기체 전체를 붉은색으로 칠하게 해주십시오!”


태평양 기동군 사령부 항공과 사무실.


정운함 비행대장 주용무 대령은 실로 오래간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의 앞에 기립한 한유리 중위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당당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13기동부대 사령관님께 허가받은 사안입니다!”


비행대장은 진심으로 사령관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여담이지만.


기체 전체를 붉은색으로 칠한 대장기가 훈련에서 식별에 효과가 있다고 증명되는 건 출항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


12월 중순.


한인 자원병들이 전입해, 총원 완편 상태에 들어간 이순신함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배치에 들어갔다.


일주일간 하와이의 공작함과 보급창에서 추가 정비와 보급을 마친 우리는 마침내 닻을 올렸다.


<출항―!>


미 서해안으로.


수리가 진행되는 약 4개월간. 우리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미 서해안에서 오래간만의 평화를 누리며 휴식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하다.


남방에서 쓰러져간 전우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여기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날 ABDA 함대 사령부에서 말했듯 나는 이곳으로 왔고, 또 돌아갈 것이다.


상대해야 할 적이 도사리는 바다로.


전함 1척, 항모 1척과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13기동부대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항해했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가 오기 직전, 이순신함이 서해안 항구에 도착했다.


퓨젯 사운드 공창.

미 서부 워싱턴주 브래머튼에 위치한 해군 조선소다.


작가의말

언제나 봐주시는 독자님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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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트럭 공방전 (1) +19 24.09.10 10,092 412 12쪽
46 역습의 연방 +28 24.09.09 10,417 458 12쪽
45 다시 바다로 (2) +37 24.09.08 10,611 464 12쪽
44 다시 바다로 (1) +33 24.09.07 10,725 459 17쪽
43 거인의 기상 +27 24.09.06 11,018 450 15쪽
» 진주만 (2) +43 24.09.05 11,158 452 20쪽
41 진주만 (1) +29 24.09.04 11,105 487 14쪽
40 태평양 함대 (2) +40 24.09.03 11,353 480 14쪽
39 태평양 함대 (1) +48 24.09.02 11,437 474 13쪽
38 솔로몬 해전 (2) +38 24.09.01 11,612 405 16쪽
37 솔로몬 해전 (1) +46 24.08.31 11,736 444 15쪽
36 남방 전선의 종막 (2) +34 24.08.30 11,886 425 15쪽
35 남방 전선의 종막 (1) +35 24.08.29 12,037 457 14쪽
34 타이만의 새벽 +48 24.08.28 12,133 468 13쪽
33 초중전함 vs 초중전함 +88 24.08.27 12,644 564 27쪽
32 강철의 포효 +28 24.08.26 11,367 415 19쪽
31 남방 공세 +26 24.08.25 11,225 403 11쪽
30 사냥 준비 +23 24.08.24 11,665 390 16쪽
29 대본영 발표 +16 24.08.23 12,073 400 14쪽
28 남방 수호자, 탄생 +29 24.08.22 12,256 4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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