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해전 (1)
철썩이는 파도가 거대한 함수에 밀려 쓰러진다.
무거운 쇳덩이가 바다를 가르며 흰 파도를 입김처럼 흘리고 수많은 항적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많은 거함이 푸른 수면 위로 항진했다.
일본 해군 제1함대.
연합함대 철의 거성들.
나가토, 무츠, 이세, 휴우가, 후소, 야마시로, 공고, 하루나까지.
총 8척의 전함이 열을 이루며 남중국해의 바다를 나아갔다.
목표는 말레이만.
세계 최대의 전함,
이순신을 잡는다.
“해군성에 보고. 우리, 남중국해에 진입.”
“남견함대 사령부에서 입전! 호위 부대, 현재 쿠안탄 근해로 진격 중.”
거함들의 머리 위로 함대 직속 경항공모함 호쇼와 즈이호의 항공대가 편대를 이루어 지나갔다.
기함 나가토의 함상에 선 야마모토는 결의에 찬 눈으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항공대의 보고는 어찌되었나?”
“아직 적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마모토는 실망한 듯 작게 혀를 찼다.
그가 보고를 기다리는 부대는 베트남 방면에 주둔한 해군 제22항공전대.
80여 기의 96식 쌍발 폭격기 ‘G3M’을 장비한 이들은 남방 해상에서 핵심적인 장거리 타격 수단이다.
남방 그 어느 해역이든 이들의 장대한 항속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뢰도 장착 가능하여 대형함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이 하늘의 용사들로 이순신을 때려잡는다.
아니, 잡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발목을 붙잡기만 하면 된다.
뒤는 연합함대 자랑의 제1함대의 주포가 해결할 테니까.
“장관, 말레이반도의 작전을 뒤로 물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결의를 다지는 야마모토의 옆에서 참모장이 불안한 듯 조언했다.
현재 일본 육군은 베트남에서 타이만을 건너 말레이반도에 상륙하는 작전을 계획 중이다.
이를 엄호하는 건 해군의 몫.
만에 하나 상륙 중인 해변에 이순신함이 나타나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작전을 늦추더라도 안전을 확보하자는 말이었으나 야마모토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작전은 당초대로 진행한다.”
위험하지만 동시에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던 절호의 기회이기에.
이순신함이 남방이 위치한 것으로 드러났으니 더는 태평양을 경계하여 전함 부대를 본토에 박아 둘 필요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함대결전의 시기! 더 늦어지면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가 저 증오스러운 전함과 합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순신을 때려잡는다는 숙원은 다시금 요원해지는 것이다.
타도 이순신.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야마모토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그의 직위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조선 함대를 격파하여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것도 잠깐이다.’
개전 초, 귀중한 항공모함을 무려 4척이나 일거에 상실한 책임은 여전히 그에게 있었다.
사실 그중 1척, 히류는 대파된 채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지만··· 결국 제1항공함대라는 조직이 사라져버리고 사령부도 증발해 버린 건 변함없다.
당장 군령부에서는 야마모토가 책임지고 연합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다.
여기서 이순신을 잡지 못하면 확실히 경질이다.
특히나 해군 항공부장이던 그의 숙원 사업, 제1항공함대를 망쳐버린 그 원한도··· 결코 작지 않았다.
“선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놈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남방에서 놈이 안정적으로 주둔할 거점은 싱가포르뿐이니 말이지.”
“그렇게 나온 이순신을 우리 함대와 항공대가 협공하여 쳐부순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그렇네, 참모장.”
꽤나 정교한 함정이다.
말레이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구에서 나올 수밖에 없으니 사실상 외통수나 다름없는 격.
하지만 참모장은 왠지 모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제 생각에는 제22항공전대만으로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전투의 영향일까.
하기야 대만 항공대와 제1항공함대의 연속 공격에도 이순신은 살아남았다.
항공력으로 전함을 무찌르기 어렵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생각은 여전히 달랐다.
“나는 수반함은 몰라도 이순신은 확실히 발이 묶일 거라는 것에 걸지.”
해상 항공력은 아직 그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나구모 때문에 1항함이 궤멸당해서 그렇게 보일 뿐. 집중된 항공 세력의 위력은 전함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함이 여전히 자신의 손에 남아있기 위해서라도.
주먹을 움켜쥔 제독은 조용히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
같은 시각, 싱가포르 앞바다.
전함 이순신의 함교.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말레이반도 앞바다의 전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전쟁이 아니라면 관광 왔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대공 함교 위에서 바닷바람을 쐬며 열대 모자를 들자 환한 햇살이 반짝거렸다.
“여기 정말 휴양지 같지 않나, 항해장?”
“예, 그렇습니다.”
항해장도 미소가 만발하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싱가포르에서의 수리 후, 에어컨이 함 내 곳곳에 그 손길을 뻗치자 말 그대로 삶의 질이 달라졌다.
사람이 여유가 생기니까 판단력이 바로 서고 활기가 넘친다.
진즉에 고집 부리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할 걸 그랬다.
정말로 전시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객선처럼 유유자적 남방의 푸른 바다 위를 순항했으리라.
그래 전시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전탐실에서 정시 보고. 근처에 적영 없음.”
“어떻게 1기도 안 지나다닐 수도 있지?”
“없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근처를 지나는 항공기라면 우리 비행기는 아닐 텐데.”
항해장이 의아해하며 묻지만 나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그야 여기가 하필이면 그 쿠안탄 앞바다라는 말이다.
원역사에서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상징하는 전투가 이 주변에서 벌어졌다.
말레이 해전.
영국 해군의 신형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구식 순양전함 리펄스가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공습으로 침몰한 전투다.
2척이나 되는 대형 주력함이 어떠한 해군 함선의 개입도 없이 오직 공군력만으로 침몰한 사건.
이는 항공력이 곧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동시에 느리고 비싼 전함이 대량생산 가능한 항공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징하는 전투였다.
그러니까.
“항해장, 여기서 사이공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지?”
“예? 분명··· 430마일(약 800km) 정도입니다.”
나는 전함의 종말이나 다름없던 사건의 근원지에 세계 최대의 전함에 타고서 항해하고 있다는 소리다.
430마일 거리면 평범한 전투기나 공격기는 무리지만 항속거리가 긴 일제 쌍발 폭격기로는 충분히 닿는 거리다.
너무 불안한 일 아닌가?
물론 당시 영국 함대와 우리 13기동부대는 두 가지의 큰 차이점이 있다.
우선 항공모함이 직접 방공 엄호 중이다. 트럭에서 합류한 정운함에서 직접 전투기를 띄워주니 웬만한 공습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다.
당장 우리 기동부대의 자체 방공망도 현재 전 세계에서 최상급이고.
“싱가포르 비행장하고는 연락되고 있지?”
“예.”
두 번째로 우리에겐 육상 비행장에서 발진할 항공세력도 있다.
원역사의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투기 1대의 엄호도 없이 작전에 나서다가 침몰했다.
하지만 나는 싱가포르에서 수리하는 동안 일찌감치 말레이 주둔 영국군에 어느 정도의 항공 지원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비록 일본 육항대의 공세로 대다수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그래도 버팔로 전투기 10기 정도는 지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이들이 지속적으로 함대 상공을 엄호해줄 것이다.
그래, 공습은 문제가 아니겠지.
다만···.
“함대, 침로 030으로 변경.”
“침로 030 잡아.”
신호병들이 깃발을 올리며 함대가 일제히 방향을 돌린다.
13기동함대의 본 목적은 쿠안탄 부근에 접근 중이라던 적 수송선단을 요격하는 것.
싱가포르를 나선 우리는 줄곧 지그재그로 항해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혹시 모를 잠수함의 뇌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드넓은 태평양과 달리 사방이 섬으로 막혀 있는 바다이다 보니 잠수함에 포착당할 가능성도 크다.
당장 싱가포르 앞바다에도 기뢰가 잔뜩 깔려, 돌아오느라 시간이 걸린 참이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쿠안탄 부근까지 왔건만.
정작 근방에 일본 선단은커녕 배 한 척도 안 보인다.
“쿠안탄 쪽에는 소식 없나?”
“예, 아직 아무것도···.”
이윽고 항해장이 불안한 듯 말을 잇는다.
“역시 오보가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함대를 물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적은 아직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몰라.”
“작전이 그렇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역시 불안합니다.”
그거야 그렇지.
상륙하는 적도 없고 공연히 적 항공세력의 작전 범위에서 얼쩡거리는 셈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는 살짝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전탐실에서 보고! 적 정찰기 포착!”
마침내 기다리던 보고가 들렸다.
함대 상공으로 다가오던 일본 해군의 쌍발 정찰기.
금방 정운함의 요격기가 발진해 쫓아냈지만 이미 적기는 우리를 포착했다.
곧 놈들의 지휘부에도 연락이 닿겠지.
“항해장, 항로 계산 그대로인가?”
“예, 이 위치라면 보내드린 그대로 가셔도 좋습니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항해장.
계획대로다.
“좋아. 함대, 침로 090으로 변침.”
“침로 090 잡아.”
함대가 일제히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
몇 시간 후,
남견함대 기함,
중순양함 ‘쵸카이’.
까마득한 야밤의 바다.
사령관실에 앉은 남견함대 사령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은 부하 참모장과 대국을 두며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이 쿠안탄 앞바다에서 나타났다고?”
“예, 아무래도 타이만의 아군 상륙지를 기습하려는 게 아닌지···.”
부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자와는 조용히 기물을 놓았다.
“항공대는 어찌되었나?”
“준비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작전 행동이 곤란했다고 전해왔습니다.”
“흠, 판단이 늦었군.”
대답과는 별개로 여전히 바둑판에 눈을 집중하는 오자와.
땀을 뻘뻘 흘리던 부관은 내심 제독이 대국에 정신이 팔리느라 답변이 늦기를 바랐다.
그가 보고를 올리는 사령관실은 초카이함 내에서 몇 안 되는 쾌적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영미 열강 해군과의 결전을 상정한 일본 해군에 있어서 편의 시설은 사치였다.
저 귀축영미에 대항하려면 포탄 한 발, 어뢰 한 발을 더 실어도 모자랄 판이니까. 그렇기에 화장실이나 에어컨 같은 편의시설은 반드시 필요한 장소가 아니면 과감히 생략했다.
다소의 불편함은 개개인 스스로의 정신무장으로 극복하면 그만.
그 대가로 일본 해군의 함선은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오자와가 좌승한 이 ‘초카이’만 해도 10문에 다다르는 8인치(203mm) 주포에 더해 4연장 어뢰 발사관을 총 4기나 장비했다.
타국 중순양함의 1.5배에 다다르는 어마어마한 무장.
그나마 초카이는 덩치가 커서 거주성이 나은 편이다. 이전 급인 묘코급 중순양함은 그야말로 전투 이외에 모든 걸 포기한 수준이다.
“타이만으로 가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로 돌아갈 생각인가?”
한편,
오자와는 참모장 앞에 바둑알을 놓으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니, 어쩌면 우리 선단을 기다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보고에 따르면 이순신 함대는 수많은 항공기의 내습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격퇴했다고 한다.
개전 초, 13기동부대를 기습한 대만 항공대만 해도 피해가 만만치 않은 수준.
그렇기에 적은 대공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더욱 과감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오자와는 상대가 계속 그렇게 판단해주기를 바랐다.
그의 지휘 아래, 제22항공전대는 강력한 대함 공격력을 갖추었으니. 그들은 지난번처럼 비효율적인 폭격이 아니라 저공 침투를 통한 어뢰 사격으로 끝장을 볼 예정이다.
개전 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적은 정밀한 항공초계 또한 동반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준비해야겠지.
오자와는 자신의 남견함대 수상함으로 이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함대, 그대로 쿠안탄까지 전속 전진하도록. 날이 밝으면 항공대와 동시에 공격할 수 있도록 자리 잡는다.”
“예, 제독!”
해상과 공중에서의 동시 공격.
속도에서 월등한 고속부대이기에 가능한 선택.
“전투의 핵심은 주도권. 그리고 이 시대의 주도권은 항공기가 쥐고 있지.”
오자와가 바둑알을 놓으며 말한다.
고속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항공기는 느리고 비싼 전함을 유연성에서 압도한다.
총력전의 시대에 있어서 이는 결전병기라는 존재의 몰락을 나타내는 사실.
오자와는 자신의 손으로 이를 증명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음?!”
거대한 충격이 초카이를 뒤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독! 괜찮으십니까?”
“이런, 대국이···.”
바둑판이 엎어지자 오자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교로 올랐다.
“함장, 무슨 일이지?”
“적습입니다! 적 수상함대 다수! 본 함에 포격 개시!”
다시금 포탄이 초카이 주변에 떨어지며 발밑이 마구 흔들렸다.
참모진의 부축으로 균형을 잡은 오자와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크게 흔들리는 함교 밖.
거대한 물기둥이 초카이를 덮칠 듯 솟아올랐다.
“노리는 건 선단이 아니라 우리였던 건가.”
46cm 함포탄의 거대한 물기둥을 보며 오자와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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