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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곤 사가 - 은색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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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버터바
작품등록일 :
2023.05.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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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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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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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82화 - 신성 아크사 제국(16) (카운트다운)

DUMMY

아리우노스 로세툼 백작이 중앙홀을 가로질러 열심히 뛰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찼고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기쁨이 넘쳤다.


그가 잠시 졸고 있을 때 엘람 감독이라는 자가 와서 트에의 소식을 알렸다.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 성문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에 로세툼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어떻게 트에와 알게 된 사이인지 한편의 시나리오를 썼던 엘람은 그저 웃으며 로세툼의 뒤통수에 대고 파이팅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중앙홀 문 안쪽을 지키던 사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로세툼을 쳐다봤다.


"로세툼 사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헉···. 헉···. 문."


"예?"


"문 열라고!"


로세툼의 호통에 사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문고리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중앙홀의 문은 신성력을 가진 사람만이 여닫을 수 있었는데 로세툼은 고위 사제이면서도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모르 성의 사제들은 로세툼 백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성력은커녕 마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데다가 성황 이외의 사제들에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황이 곧 법. 성황이 직접 고위 사제자리에 임명한 로세툼이었기에 아무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 로세툼은 기다리지 못하고 문틈을 비집으며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사제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지금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기랄, 운동을 좀 해 놓을 걸 그랬네."


로세툼은 불룩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딱히 배만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지금 그의 발걸음을 늦추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사실이었다.


겨우 아크사 성 성문 안쪽 초소 부근에 도착한 로세툼은 숨을 크게 몰아 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내고, 땀에 젖어 흘러내렸던 머리를 잘 정돈했다.


"가발이라도 좀 챙겨올 걸 그랬나? 오늘따라 머리가 더 비어 보이는구먼. 아, 사제모가 있었지."


로세툼은 뛰어오느라 사제복 안에 꾸깃꾸깃하게 넣어놨던 사제모를 꺼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 위에 얹었다.


대충 정비를 끝낸 로세툼은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보게, 잠시 문 좀 열어주시게나."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로세툼을 알아보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백작님 오셨습니까!"


"누군가 했더니 파울로였구먼. 이거 잘 됐군."


"무엇이 잘 됐다는 말씀이신지···?"


파울로라고 불린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로세툼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선임이야? 지금 초소 말일세."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바로 여기 앞에서 누굴 좀 만나기로 했거든. 금방 다녀오겠네."


"네. 그럼 여기 출입 대장을 써 주시면······."


파울로가 성문으로 들어오고 나간 이들의 이름과 서명이 있는 두툼한 책자를 로세툼에게 들이밀었다. 그러자 로세툼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어허, 이 답답한 사람 같으니.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잖아!"


"아무리 잠깐이라도 출입 대장에 기록은 하셔야 합니다. 제가 함부로 생략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성황이 직접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 고위 사제들은 성안에서 자리를 지키게 되어 있었다. 성황이 회의 중 확인해야 할 사항이나 필요한 것들이 생기면 즉각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회의장에서는 성황이 에피르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거물급 손님과 회의를 하는 상황에 출입 대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건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이 멍청한 녀석이 내 시간을 뺏고 있구나. 트에가 기다리다 지쳐서 가 버리면 어쩌지?'


"좋아, 파울로. 나한테 진 빚 중에 4분의 1을 탕감해주지."


빚 이야기가 나오자 파울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풍족한 도시 성 아크사였지만, 어느 도시나 그렇듯 빚을 진 주민들이 있었다. 생계를 위해서, 혹은 아픈 가족의 치료비를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빌렸다.


로세툼은 가장 돈을 잘 빌려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의외로 그 이자도 적정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상황에 따라 돈을 갚는 시기를 연기해주기도 했기 때문에 급하게 돈이 필요한 많은 사람이 로세툼을 찾았다.


이는 로세툼 나름의 전략으로 고위층 사이에서는 '성황'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 상대로는 쉽지 않았다. 성황이라고 해 봐야 성안에 사는 높은 분일 뿐, 그와의 친분은 일반 주민들에게서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대부업이었다. 성황의 자리를 노리는 이상 성 아크사 주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로세툼은 원래도 가문의 재산이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성황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면서 생기는 수입도 어마어마했다.


그는 성 아크사에 복지 시설들을 세웠고, 서민들에게 저렴한 이자로 돈을 빌려줬다. 머리는 좋은 데,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장학 사업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리우노스 로세툼 백작이라는 인물은 고위층 내에서는 망나니 같은 이미지였지만,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는 훌륭한 자선사업가로 통했다.


신성력과 마나를 다루지 못하고, 신체적인 능력도 딱히 뛰어나지 않은 로세툼이었지만 기억력 하니만큼은 상당히 뛰어났다. 그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파울로의 가족 사항을 살폈다.


"파울로. 첫째가 학교 갈 나이가 됐지? 로세툼 장학회에서 후원해주겠네. 성 로잔 아카데미에 보내주지. 전액으로!"


"성 로잔 아카데미에 저, 전액으로 말입니까?"


성 로잔 아카데미는 아크사 대륙에 있는 그 어느 아카데미보다 좋은 곳이었다. 당연히 학비도 비쌌는데, 한 학기에 일반 병사의 5년 치 연봉이 필요한 곳이었다.


"얼른 대답해. 나 바쁘니까. 아니면, 다른 병사를 불러주게. 답답해서 안 되겠으니까!"


"아닙니다, 백작님. 얼른 다녀오십시오."


"그래?"


"예, 물론입니다. 들어오실 때까지 제가 초소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혹시 누군가 백작님을 찾는다 싶으면 크게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로세툼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파울로의 팔을 한 번 툭 쳐주고는 초소 바로 옆에 나 있는 간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


성황은 맞은 편에 앉은 클레이 일행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교류회다 뭐다 해서 이렇게 먼 곳까지 모시게 된 것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성황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세 명의 고위 사제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크사는 제국이지만, 실제 권력은 황제보다 성황에게 있었다.


황제는 아크사 제국만을 다스리지만, 성황은 에피르를 섬기는 모든 이들의 정점이었다. 그런 성황이 3대 역적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고위 사제들이었다.


"사실 교류회는 다 명목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을 모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성황이 신호를 보내자 고위 사제 중 하나가 아크사의 지도를 한 쪽 벽면에 걸었다. 거대한 아크사 지도의 중간중간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작은 글씨로 '마물'이라고 쓰여있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크사 제국은 마물을 토벌하고 세운 나라입니다. 초대 성녀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마물을 물리치셨지만, 모두 없애는 데는 실패하셨죠. 저 빨간색으로 표시된 땅은 마물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도록 통제 중이지요."


엘람이 클레이를 툭 치더니 그의 무릎 위에 손가락으로 '사육장'이라고 썼다.


"최근 마물의 구역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하급 마물들만 살던 곳이었는데 한 달 전부터 중급 마물이 목격되기 시작했습니다. 경계석이 아직은 버텨주고 있습니다만, 이론적으로 결계석으로는 중급 마물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엘람이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이 건물 안에 계신 사제님들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에피르 사제는 치유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퇴치는 쉽지 않습니다."


"성기사분들도 계시던데."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마물과 직접 싸워본 성기사들이 얼마 없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물 퇴치 시범을 보여주십사 하고 이렇게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엘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파드를 지목했다.


"우리 파드 용사님 앞에서는 중급 마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부탁, 들어드리겠습니다."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이 노인네가 주책을 부려봤는데 흔쾌히 받아주시니 어찌나 감사한지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 선임 원로 사제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다."


선임 원로 사제가 앞에 서서 설명하는 동안, 엘람은 클레이의 손바닥을 자신의 허벅지에 얹어 놓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계속 써 내려갔다. 클레이는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면서 의사를 표시했다.


잠시 눈가를 좁히며 생각을 정리한 엘람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얘네는 우리를 황제 암살범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성황 암살범으로 만들 생각 아닐까?]


옥타는 성황의 다음 그릇이었다. 근친이라는 금지된 관계를 통해 자신에게 한없이 가까운 유전 형질의 자손을 생산하던 성황은 마침내 황비와의 사이에서 최고의 신체 조건을 가진 옥타를 낳았다.


안단트의 보고에 따르면 내일 해가 뜰 무렵 아크사의 수도 이모르에 큰 습격이 있다고 했다. 어렵게 얻은 자신의 다음 그릇을 성황이 그런 위협에 노출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게 엘람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중앙 성기사단 서열 1위인 옥타가 곁에 있는 상황에서 황제가 암살당한다면, 모든 책임도 당연히 옥타가 질 수밖에 없었다. 성황이 육체의 그릇을 바꾼 이후에 계속 옥타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똑똑.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황 폐하."


그때, 회의장 문이 열리고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옥타 티아스가 나타났다. 황비는 들어서는 옥타를 보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성황은 그녀가 억지로 떼어넣고 온 옥타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엘람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우리는 황제 그리고 성황의 암살범이 되겠네. 그리고 성황은 이곳에서 옥타의 몸으로 옮겨가겠지.]


*


두리번거리는 로세툼의 귀에 달착지근한 음성이 휘감겼다.


"로세툼 백작님."


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로세툼 백작을 고개를 힘차게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딱 붙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부채로 얼굴 아래쪽을 가리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로세툼은 그녀가 트에임을 단 번에 알아봤다.


"트에!"


로세툼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막 그의 손이 안단트의 손에 닿으려는데 차가운 검날이 그사이를 가로막았다.


"트에 아가씨. 이런 곳에서 함부로 남자와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 백작님,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주십시오."


"뭐야. 호위 주제에 어딜 함부로 나서는 거야!"


로세툼이 신경질을 내자 안단트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백작님, 사정이 있답니다. 조금 한적한 곳으로 가실까요?"


안단트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우아하게, 하지만 가련한 느낌을 담아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젖어 있음을 눈치챈 로세툼은 마음이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성문에서 멀어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소, 트에?"


로세툼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더니 한 민가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곧 중년 여성 한 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집 밖으로 나와 안단트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우리 집으로 가시어요. 아가씨 덕분에 저에게 행운이 찾아왔답니다. 글쎄 갑자기 백작님께서 오셔서는 빚을 다 없애준다고 하시지 뭐예요."


"그렇군요. 다 부인이 에피르의 뜻대로 잘 사셨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어머, 말씀도 참 예쁘게 하시네요. 그런데, 실례지만 안방에 있는 침대는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얼마 전 에피르의 곁으로 떠난 남편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거든요. 백작님도 아가씨도 제가 참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땀과 그런 것으로 침대가 더럽혀지는 건 조금······."


그녀의 말을 이해한 안단트가 차가운 표정으로 곁에 선 개장수를 가리켰다.


"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 분이 다 처리해 주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리기 싫으면 백작님도 저에게 함부로 굴지는 않으실 거예요."


"어머, 어머. 저는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죄송합니다. 백작님이 하도 여자를 밝히다 보니. 어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담. 얼른 들어가 보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 안단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자리에 섰다. 몇 초나 지났을까, 그녀의 감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좋아."


눈가를 만져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안단트.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건의 여주인공의 얼굴이 되는 그녀는 보며 개장수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보면 에밀리아 님보다 훨씬 무서운 분이다. 에밀리아 님이 난폭하긴 했지만, 그래도 겉과 속이 동일하신 분이었지.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안단트 님은 완전히 여우다. 정말로 여우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거 아닐까?'


개장수는 안단트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안단트가 조용히 속삭였다.


"얼굴을 보니 아주 실례되는 생각을 한 모양이네요. 나중에 봐요."


창백해진 개장수를 뒤로하고 안단트가 로세툼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녀의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다 보니 어정쩡한 자세가 되긴 했지만 로세툼은 마냥 좋았다.


로세툼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안단트의 몸에서 달달한 냄새가 올라와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냄새가 아주 좋···. 아니지. 흠흠. 그래, 무슨 일이오, 트에?"


"말씀드릴 수 없어요. 백작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거든요."


안단트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살짝 들어 치마 속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연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아쉽다!"


"네? 아쉽다니요?"


"네? 아하하하. 이 로세툼 백작의 힘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아쉽다는 뜻입니다. 하하하. 큼."


그러면서도 로세툼의 눈은 연신 안단트의 가슴골과 살짝 드러난 허벅지 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안단트가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들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자 로세툼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로세툼은 태연한 척하기 위해 식탁 위에 놓여있던 잔을 들었다. 다행히 집주인은 차를 마시고 있었는지 잔 안에 내용물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로세툼이 따뜻한 차를 머금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데 안단트가 입을 열었다.


"저, 성황에게 바쳐진대요."


푸후후훕.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찻물이 안단트를 적셨다. 안단트의 관자놀이에 굵은 힘줄이 솟아 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어머, 다 젖었네."


안단트는 일부러 가슴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을 강조하며 몸을 흔들었다. 로세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성황에게 바쳐진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결정하신 일이니까요. 제가 나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긴 하지만, 할아버지는 싫은데."


"아, 큼. 우리 트에 양은 연상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니, 그런데 이상하네요. 성황 폐하의 일이라면 제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그분의 취향은 어린아이랍니다. 아, 그렇다고 트에 양이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모르죠, 저도! 제가 지금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제가 잘못 찾아왔네요. 그래도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백작님 얼굴을 뵙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을 완전히 거짓말쟁이 취급하시고. 전 갈래요."


안단트가 일어서려고 하자 로세툼이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시 앉혔다.


"거짓말쟁이라니요. 그럴 리 없죠. 저도 트에 양 연락처를 안 받아 놓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어젯밤에 눈을 뜬 이후로 계속 트에 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로세툼의 남자다운 고백에 안단트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의 자태에 로세툼이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성황 이 나쁜 늙은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이 가련한 여인도 차지하려 하다니. 그럴 수는 없다!'


안단트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아주 작게 말했다.


"저는 아직 남자를 모른답니다. 그런데 그런 할아버지에게 제 처음을 바쳐야 한다니. 너무 서러워요. 이러려고 지킨 순결이 아닌데."


로세툼이 속으로 더욱 크게 외쳤다.


'으아아아! 절대로 성황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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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188화 - 신성 아크사 제국(22) (성황을 자극하라) 24.02.10 19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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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화 - 신성 아크사 제국(16) (카운트다운) 24.02.02 24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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