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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하루에 헛소리 하나씩

확률과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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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작품등록일 :
2019.06.19 23:01
최근연재일 :
2019.07.23 06: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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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0,615

작성
19.07.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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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민폐녀 여사친

DUMMY

고기 굽는 냄새와 지글지글 기분 좋은 소리가 후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오늘은 저녁은 고기인가보다.

심호흡을 하듯이 냄새를 한껏 들이켜보았다.

불고기는 아니고 스테이크인가?


"엄마~ 오늘 저녁..."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방금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떠오른다.

화들짝 놀라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네."


한솔은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듯 했다.

테이블을 돌아보니 내 가방이 놓여 있다.

한솔이 챙겨주었나 보다.


그 옆에 내 교복이 잘 개어져 놓여있었다.

스커트와 윗도리 그리고 그 위에 브래지어.

깜짝 놀라서 양팔로 가슴을 감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브래지어도 안 걸치고 맨 살에 흰색 면티를 걸치고 있었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마음의 소리가 머리 속에서 무한 반복 된다.

맙소사 이것도 개어 놓은 거야?

정리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왜 건드렸냐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정신이 혼란스럽다.


한솔이 눈치 채지 못하게 브래지어를 살짝 집었다.

아무 디자인도 안 들어간 베이지색 브래지어.

티셔츠를 입은 채로 팔만 빼내어 꼼지락 거리며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문득 집에 분홍색 레이스 달린 예쁜 것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해하기 힘든 연상 작용에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와버렸다.


"아직도 술 안 깼냐?"


"나 안 취했어."


맥주 한 캔 마시고 어떻게 이런 추태를 부릴 수 있을까?

술이 웬수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나 보다.

머리 속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밥 먹어. 사실 밥은 없지만."


민망함에 쭈뼛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등심 스테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곁들여진 야채가 돈까스에나 어울릴법한 채썰은 양배추라는 것 정도가 옥의 티.


"나이프 없으니까 가위로 썰어줄게."


요리용 가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썰어 놓는다.

고기 덩어리의 단면에서 핏물 섞인 육즙이 흘러 내린다.


"엄청 비싸 보인다."


"선물 들어온 거니까 비싸겠지."


"누구한테 들어온 선물?"


한솔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마음 속의 경고 등에 불이 들어온다.

화제를 돌려야 된다.


"내가 먹어도 되는 거야?"


"안될 건 뭐람? 선물 시즌이라 많이 들어올 거야. 메뚜기도 한 철이니까."


포크로 고기 한 덩이를 찍어서 입에 집어 넣었다.

고기가 입에 들어가자 마자 고소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스테이크는 집에서도 먹어봤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도 먹어봤지만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이다.


"우와 맛있다! 입에서 살살 녹는데?"


"소가 운동을 못 했나 보지."


"엥?"


"등급 높은 고기라는 게 결국 마블링 잘 된 고기니까.

굽기 전에 마블링 상태를 보니까 초고도비만은 기본이고 지방간에 고지혈증까지 왔을 것 같던데."


갑자기 먹고 있는 소고기에게 죄책감이 느껴진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어?"


"이면을 볼 수 있으면 취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소고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맥주 마시고 취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맛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응. 맛있네."


서글프게도 고도 비만이던 고지혈증이던 고기가 맛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제정신이 좀 돌아오니 심각하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와 닿았다.


"오늘 미안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누구나 일탈을 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


"너도 그래?"


강철 멘탈의 차한솔도 현실에서 일탈을 꿈꾸는 걸까?


"항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그가 꿈꾸는 일탈이란 어떤 것일까?


"하지만 꿈을 꾸는 거랑 실제는 완전 다른 문제니까. 정신 차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존대말이 나와 버렸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하면서 한솔의 집을 나선다.


"정말 미안해. 진짜 정신 차릴게."


"정신 못 차렸는데?"


"응?"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한솔을 멀뚱히 쳐다 보았다.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힌트를 주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잠시 판토마임을 하다가 포기하고 지적한다.


"그러고 가려고?"


그제야 내가 한솔이 준 옷을 입은 채로 집에 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이 바뀐 채로 집에 들어갔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힐뻔했다.

누구 옷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갈아 입어야지."


"저쪽 구석에 가서 갈아 입어."


구석이라도 사방이 뻥 뚫린 한솔과 같은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니.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한 마디 거든다.


"안 볼 테니까 걱정 마."


"그건, 아는데... 그래도."


귀찮게 군다고 생각했는지 썩 좋은 표정은 아니다.

그래도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나가 있으면 되지?"


"정말 미안해."


문으로 향하면서 혼잣말 하듯 툭 던진다.


"아까는 보던 말던 훌렁 훌렁 잘도 벗더니만."


"뭐... 뭐라구?!"


귀가 의심되는 한 마디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솔이 힐끗 돌아보더니 한 소리를 더한다.


"말은 안 했는데 아까부터 어깨 끈 다 보여."


"히익! 아까 다 봤지?! 저질! 변태!"


내가 난리 법석을 떨어보지만 녀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띄우고 문을 나섰다.


"기억 안나."


기운이 쭉 빠진다.

역시 레이스 있는 걸로 입을걸.


"삐,삐,삐삐."


천천히 옷을 갈아 입고 있는데 현관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다 안 입었어!"


"그럴 것 같아서 빨리 하라고 하는 거야."


S다!

원래 성격이 저랬나?

여태껏 보여준 모습은 모두 연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 것 같아서 급하게 옷을 갈아 입었다.

빌렸던 옷은 잘 개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됐어!"


"다녀왔습니다."


의미불명의 인사를 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꽤 즐거워 보였다.

들어오다가 테이블에 개어 놓은 옷을 보더니 한 마디 한다.


"어차피 빨래할 건데 뭐하러 개어 놨어?"


"잠깐 입었는데? 땀도 안 흘렸어."


한솔이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듯 입술에 힘을 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시 입으라구?"


깨끗하니까 또 빨 필요 없다는 생활정보(?)를 알려줬다고 생각했다.

한솔의 말을 듣고 나니 굉장히 이상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셔츠 돌려 입기는 무슨 플레이지?


"나, 갈래!"


"바래다 줄게."


"아냐. 혼자 갈 수 있어."


다른 때 같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정말로 혼자 가고 싶었다.

나는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솔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모습은 평범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지 따라 나선 한솔과 나란히 걷고 있으니 자꾸 의식이 된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평범한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 가려고 다짐했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뛰려고 든다.

그리고 스텝이 꼬여서 우스꽝스런 모습만 보인다.


"어디 살아?"


"지안 아파트. 왜?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아도 돼."


집 앞까지 바래다 주려는 줄 알고 손사래를 쳤다.


"어느 쪽인지 알아 둬야 다음번에 집으로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서."


"다시는 술 안마셔!"


술기운에 한 미친 짓이 이렇게 생생히 떠오르는데 어떻게 견디는 걸까?

그래서 그것을 잊으려고 또 술을 마시는 건가?


"조금 아쉽네. 그럼 나는 간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이틀 같은 하루가 이렇게 끝났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소영이가 나를 화장실로 잡아 끈다.


"어제는 뭐 하자는 플레이?"


"미안. 한 모금만 마시면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사실은 안 마시고는 못 버틸 것 같아서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소영이가 사뭇 진지하다.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거랑 질척거리면서 꼬장부리는 거랑 헛갈리지마.

남여 사이에 어느 정도 환상은 남아있어야지.

그렇게 나가면 잘 돼봤자 남사친이야."


친구로 남는 것은 분명히 싫다.

남사친.

남자 사람 친구.

언밀히 말하면 친구와 같은 뜻이지만 어감이 다르다.

남사친과 여사친의 관계는 어떨까?


"어제일 덕분에 조상현이 너한테 관심 껐다더라."


"뭐, 한 가지는 성공했네."


"남자 격퇴술을 익혀서 어쩌겠다는 거야?"


"괜찮지 않아?"


귀엽게 심통을 내는 소영이 손을 이끌고 다시 교실로 향했다.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승연이가 부실에 가져온 개인용 컵은 고양이가 그려진 검은색 머그였다.

우연이겠지?

차한솔과 이승연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교 친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친구와 남사친 두 단어의 차이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친구랑 남사친은 같은 뜻일까?"


"친구 중에 남자면 남사친이니까 포함 관계 아냐?"


승연이가 집합론으로 설명한다.

차한솔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하나?

공부를 많이 하면 그쪽부터 연상 작용이 일어 나는 것 같다.


"그런 뜻이기는 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때마침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남자가 근처에 있으니 의견을 물어본다.


"친구는 환경종속 변수고 남사친은 특성종속 변수니까 다르지."


차한솔다운 이야기.

오늘도 나를 실망 시키지 않는다.

승연이가 노트를 펼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필기를 하려나 보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친구를 만드는 거지. 놀이터부터 시작해서, 학교, 직장에서 항상 친구를 만들잖아? 즉, 환경이 바뀌면 친구도 바뀌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친구는 환경에 종속된 변수지."


쓰러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사람.

차한솔이 내린 친구의 정의는 빈말이 아니었나 보다.


"환경이 바뀐다고 꼭 친구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잖아?"


"초등학교때 친구가 평생을 같이 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그건 환경을 극복한 관계가 아니라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만든 거야.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잖아? 평생 가는 친구가 드문 이유지."


나와 차한솔의 친구 관계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끝날 것임이 명백해졌다.

나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모르고 그는 나와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남사친은?"


"성별이 다르다는 특성 때문에 만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필요성이 유지되는 한 관계는 계속돼."


"무슨 필요성?"


"친구가 필요할 땐 친구로 만나고 남친이 필요할 땐 남친으로 만나고. 친구도 아니고 남친도 아닌 대리 만족을 위한 완벽한 대용품."


그에게 남사친이란 세상에서 가장 이용해 먹기 편리한 존재였다.

그와 내가 남사친과 여사친의 관계가 된다면 그 끈은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얄팍한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남친, 여친과 구별하기 위해서 쓰는 말이잖아? 구별이 필요하다는 자체가 혼동이 올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거야. 심지어 짝을 찾는데 실패한 경우 남친과 여친으로 관계를 재정립하기도 하지."


"실패한 경우에만?"


"실패한 경우에만. 처음부터 남친, 여친이 되지 않은 이유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편리하고 얄팍한 관계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그의 실패만 바라야 한다면 그 것이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뚤어진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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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축제 준비 19.07.15 21 0 12쪽
23 비오는 날 19.07.13 23 0 11쪽
22 하트 여왕 19.07.12 23 0 11쪽
» 민폐녀 여사친 19.07.11 62 0 12쪽
20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 19.07.10 3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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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자상부 스타트 업! 19.07.06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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