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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하루에 헛소리 하나씩

확률과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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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작품등록일 :
2019.06.19 23:01
최근연재일 :
2019.07.23 06: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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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0,615

작성
19.07.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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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커버업

DUMMY

기말고사가 끝났다.

이제 곧 여름방학이다.


중간고사는 중학교 때보다 석차가 꽤 잘나왔다.

성적표를 본 엄마가 진짜는 기말고사라며 기합을 넣었다.

칭찬만 하면 얼마나 좋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이번 시험은 진짜로 자신이 없다.

소영이 그룹에 휘둘리며 시간을 빼앗긴 것도 있고.

다른데 집중하느라 자습부3에서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도 있다.

다 변명일 뿐이다.


중간고사 때 갖춰진 시스템은 더욱 고도화되었다.

첩보부에서 수집한 데이터가 암호 해독부로 전달된다.

암호 해독부에서는 데이터를 입력하고 가공하여 새로운 데이터를 뽑아낸다.

스마트폰 스프레드 시트에 들어간 로우(RAW) 데이터가 형형 색색의 막대 그래프로 치환된다.

전체석차, 과목별 석차, 등락률.

진로상담자료로 써도 손색이 없을 양질의 데이터들이 만들어졌다.

청춘의 열정이라고 해야 할지 재능 낭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한솔의 전교 1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험을 치기도 전에 그 녀석의 눈빛에서 이미 결과를 예견했다.

나의 관심사는 차한솔의 화학 성적.

평균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과목에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나는 그 대신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화학 몰빵.

차한솔과 나란히 설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러나 또 한 문제 차이.

잡힐 듯 말듯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시험지 유출된 거 아냐? 어떻게 한 문제만 틀리냐?”


“쉿. 그런 이야기 했다가 신성모독으로 잡혀간다.

모의고사 성적도 전국 1등 이라는 거 같던데?”


“아멘.”


과장인지 진짜인지 모를 모의고사 성적의 소문까지 신화처럼 퍼져나간다.

차한솔은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의 신이 되었다.


“소연아 성적 좀 올랐어?”


“전혀.”


“이상하네. 시험 전에 차한솔 손만 잡아도 점수가 오른다던데.”


“그게 뭐야.”


궤변과 카리스마, 우상숭배 하듯 따르는 추종자까지.

녀석이 진짜로 교주가 되었나 보다.

소영이가 웃으며 다가와 내 귀에 속삭인다.


“키스라도 했으면 기말고사 걱정 없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


키스라는 단어가 내 귀를 간질이자 목덜미 아래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 녀석과 키스라니.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다.

아니 거짓말이다.

옆에 앉은 그의 얼굴에 손을 뻗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키스라는 단어로 제한되지 않는 모든 방법의 접촉을 통한 교감을 갈망했다.


짐짓 못 들은 척했다.

더 생각했다가는 망상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2등 싸움이 치열하다.

중간고사의 2등은 수학의 몰락과 함께 아이들의 눈 밖으로 벗어났다.

주요 과목인 국영수 중에 약점이 있다면 경주마로서의 가치가 없으니까.


"마녀가 2등이네."


1학년 1반 이승연.

입학식때 입학생 대표로 나왔기 때문에 기억한다.

한번 보면 잊기 힘든 그 치렁치렁한 흑발.

그 긴 머리를 묶지도 않고 머리띠도 하지 않았다.

책상에서 필기 할 때면 머리카락이 책상 위에 흐드러져서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본인은 이름 대신 불쾌한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1반이랑 4반 구기대회 준결승 할 때 차한솔만 노려봤다던데.”


“근데 또 졌으니 이번엔 저주라도 하는 거 아냐?”


“이번엔 안 했다는 보장 있냐?”


“소름 돋네.”


껌에서 단물이라도 짜내려는 듯 잘근잘근 씹어댄다.

나에 대한 소문도 이런 식으로 퍼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언짢아진다.

기분 나쁜 경험 때문에 지나치게 민감해진 걸까?

리더 그룹에 끼어서 잘 모르는 아이들의 뒷담화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각 없이 던져대는 비수들에 내가 맞을 까봐 어색한 미소로 묵인하는 내가 싫어진다.


그 녀석은 반에서 어떻게 해내고 있을까?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고 나는 그 녀석이 만들어 놓은 공간으로 들어간다.

매일 꿈이 펼쳐지는 원더랜드로.



내일은 방학식.

하지만 방학전 파이널 이벤트가 남아있다.

구기대회 결승.


4강부터는 각 반의 아이들이 응원전을 펼치기 때문에 나름 흥미진진하다.

2학년이 되면 수업 대신 구기대회 응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아마도 수업 시간 중에 진행되는 고등학교 마지막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결승전은 1반을 꺾고 올라온 4반과 7반을 꺾고 올라온 우리반이다.

전력상으로는 필드의 에이스 우석현이 있는 우리반의 우세가 점쳐 지지만 지난번에 일격을 당했기 때문에 결과는 알 수 없다.

4반에도 골을 잘 넣는 스트라이커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필드의 지휘자 차한솔이 있다.

딱히 차한솔을 주목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들 사이에 우승팀을 맞추는 사설 도박판이 열렸는데 그것마저 백중세였다.

낌새를 느낌 선생님들이 결승전에 돈을 걸다가 걸리면 정학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그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는 것을 안다.

대회에 학급 봉사점수가 걸려 있으니 이미 이 대회가 내신을 걸고 하는 도박판이나 마찬가지다.


"6반 화이팅! 우석현 화이팅!"

"4반 화이팅! 또 이겨버리자!"


각종 구호가 난무하는 가운데 뜨겁게 시합이 시작된다.

센터 서클에서 공을 밟고 서 있는 차한솔이 멋지다.


공을 뒤로 돌리고는 사이드 쪽으로 빠지는 차한솔.

우리반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가운데 4반은 수비하기에 급급하다.


"슛! 슛해!"


흥분의 도가니.

광란의 카니발.

그 와중에도 차한솔을 바라고 보고 있으면 그 녀석의 템포에 맞춰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다.


전반은 0대 0.

데자뷰가 느껴진다.


"차소연 너 우리반 배신할 거야?"


"배신이라니?"


"오늘은 석현이를 응원하라구!"


소영이가 응원의 열기에 취해서 큰소리로 나를 나무란다.


"아니, 나는 조용하게 보는 걸 좋아해서. 축구를 잘 모르기도 하고."


변명을 해보지만 마음속으로 차한솔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소영이가 눈치를 준다.


"너 개인적으로도 우리반이 이기는 게 좋을걸?"


"당연히 우리반이 이기는 게 좋지!"


"잘 생각해봐. 차한솔이 우승의 주역이 되면 그 인기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시험 기간에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한솔에게 접근하는 4반 여자애들을 봤다.

여친은 필요 없다고 시크한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자에게 관심 많을 사춘기 소년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페로몬을 풀풀 풍기는 암고양이들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안되지!


"우석현 화이팅!"


"그래, 이제 기합이 좀 들어갔네!"


열띤 시합 끝에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경기 결과는 2:1.

6반의 승리였다.

여러가지 의미로 완벽한 결과였을 텐데.

시합이 끝나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니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목 받는 게 싫어서 응원을 했다는 사실이 나의 폐부를 찌른다.

그에게 힘을 주었어야 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영악해진 걸까?


교실로 들어가는 마지막까지 한솔을 눈으로 쫓아 보지만 한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응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아서 불안하다.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결국 보내지 못했다.



"그만 자고 일어나! 방학이라고 빈둥대기만 하면 학원 보낼 꺼야!"


"하아아암. 일어났어요!"


잠은 깼지만 침대에 누운 채로 천정을 바라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무기력증이라고 해야 하나?

매일 매일 기운이 하나도 없다.


무기력증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강력하게 의심되는 것은 바로 다이어트.

조깅을 몇 일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미세먼지가 심할 때 운동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뉴스를 듣고는 얼씨구나 하고 관둬버렸다.

운동 안하고 살 빼는 비법?

그냥 굶는 거지 뭐.

배가 고프니 새벽에 눈이 떠진다.

그렇게 몇 번 반복했더니 생활 패턴이 무너졌다.


"학교 가고 싶다."


뜻밖의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학교를 왜?

재미 없는 수업, 불편한 인간관계 그리고 차한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다시 얼굴을 베개에 처박는다.


"안 일어날래?!"


"일어 났다고요!"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찬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기에서 나온 물줄기가 피부에 튕겨 사방으로 흩날린다.

타올로 몸을 말리다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살이 좀 빠졌나?

손으로 옆구리 살을 쥐어본다.

탄력 있는 살들이 손 사이로 빠져나갈 거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부드러운 지방이 한 움큼 쥐어진다.


하얀 바디 타올을 몸에 두르고 방으로 들어간다.

서랍장을 열어 꼭꼭 숨겨놨던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꺼내보았다.

수영복을 바닥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입어야 되잖아?"


몸에 두르고 있던 타올의 올을 풀자 힘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조심스럽게 수영복에 몸을 넣는다.

너무나 경건하게 행해져서 무슨 의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장대 거울을 통해 내 몸의 구석 구석을 살폈다.

현관의 전신 거울에 비쳐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미친년 취급을 받을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비키니 색에 맞춰 입술에 빨간 립글로스를 발라보았다.

뭔가 부족하다.

얼굴에 로션으로 수분을 공급하고 메이크업 베이스를 발랐다.

너무 오랜만이라 화장하는 순서도 헷갈린다.

스튜디오에서 실장님이 했던 화장 순서를 떠올린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그 위에 다시 셰이딩을 한다.

그렇게 몇 겹으로 얼굴을 감추고 나서 블러셔로 볼에 포인트를 주었다.


"이러곤 못 나가잖아."


화장은 그런대로 예쁘게 된 것 같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적당한 선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드러내고 싶다가도 행여나 들키기라도 할까 덜컥 겁이 난다.

그렇게 마음을 꼭꼭 숨기고는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내 마음도 잘 모르겠다.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웃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진다.

좋아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정신병이 아닐까?

뭔가 차한솔이 할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온다.

조금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야이, 미친년아! 아침부터 뭐하니?"


"엄마!! 왜 노크도 안하고 들어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소리도 못 들어? 빨리 옷 입고 밥 먹어!"


이왕 미친 거 제대로 미친 게 뭔지 보여준다.

수영복 위에 커버업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끼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여보! 얘 좀 봐! 얘 진짜 미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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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수학여행 19.07.22 34 0 12쪽
28 문제 있는 신입부원들 19.07.19 2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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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첫 번째 겨울 19.07.17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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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축제 준비 19.07.15 20 0 12쪽
23 비오는 날 19.07.13 23 0 11쪽
22 하트 여왕 19.07.12 22 0 11쪽
21 민폐녀 여사친 19.07.11 61 0 12쪽
20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 19.07.10 30 0 12쪽
19 1+1+1+1? 19.07.09 33 0 12쪽
18 1+1+1 19.07.08 30 0 11쪽
17 자상부 스타트 업! 19.07.06 39 0 12쪽
16 웰컴 홈? 19.07.05 26 0 12쪽
15 새로운 시작 19.07.04 24 0 12쪽
14 작은 왕국 19.07.03 27 0 12쪽
13 워터파크 19.07.02 23 0 12쪽
» 커버업 19.07.01 23 0 11쪽
11 안경과 신데렐라 19.06.30 30 0 11쪽
10 대체 현실 (2) 19.06.29 2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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