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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하루에 헛소리 하나씩

확률과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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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작품등록일 :
2019.06.19 23:01
최근연재일 :
2019.07.23 06: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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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0,615

작성
19.06.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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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니가 왜 거기서 나와?

DUMMY

"사각, 사각, 차륵, 사각, 사각."


칠판에 빼곡히 적힌 글자.

가끔 공책을 넘기는 소리 이외에는 흑연이 종이에 갈리는 소리뿐인 교실에는 적막감마저 감돈다.

21세기에 판서라니.

이 시대착오적인 교육 방법이 아직도 현장에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 좌절스럽지만 어쩌겠어? 그게 현실인데.

샤프심을 다시 장전하고 필기를 계속하려 하는데 군데 군데 빈 책상이 눈에 들어오니 나도 모르게 "후우~"하고 한 숨이 나온다.


학생의 체력증진과 협동심 향상!

그럴듯한 슬로건 아래 연중행사인 남자축구 3라운드가 진행중인다.

축구선수로 선발된 인원은 운동장에서 시합 중이다.


학생의 체력증진과 협동심 향상?

체력증진 부분은 선수로 뛰는 일부 학생의 체력증진의 의미라면 다소 과장이 있는 슬로건으로 이해해줄 수 있다.


문제는 협동심 향상 부분이다.

구기대회 선발 인원은 수업에 빠졌으므로 필기 복사본을 받게 된다.

누구는 팔이 빠지도록 필기하고 누구는 복사한 프린트를 받고.

협동심이 향상되기는커녕 뼈대만 겨우 올린 협동심마저 무너져내릴 지경이다.

모집 요강을 '운동 특기가 있는 학생에게 체력증진과 특혜 제공'이라고 고쳐야 되는 거 아냐?


"지기만 해봐라."


우승을 한다면 학급에 다소 간의 포상이 주어진다고 하니 덜 억울하겠지.

문득 대회 경과가 궁금해져 창밖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니 시합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스코어는 0:0.


스포츠 만능의 반에이스 소영이 남친 우석현 덕분에 이전 시합은 모두 낙승이었는데 이번 상대는 만만치 않은가 보다.

스코어보드 상단의 대진표가 눈에 들어온다.


[4반 vs 6반]


'4반? 4반이라면 차한솔 있는 반이잖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선수들을 살펴보지만 너무 멀리 있는 데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차한솔이 반을 대표해서 축구 선수로 뽑힐 리가 만무하다.

딱히 체격이 좋거나 운동을 잘 할 것 같은 스타일은 아니니까.

독서토론회나 과학경진대회라면 좀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없는 사람 찾는 것을 그만두려는 찰라 열심히 뛰어다니는 선수들 사이에 꼿꼿이 서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을 할 때는 자세를 낮춰서 안정감을 높이는 것이 기본이다.

하물며 몸싸움이 허용되는 축구를 하는데 마실 나온 어르신 마냥 똑바로 서서 걸어 다닌다니.

하지만 그 녀석은 평소 같이 똑바른 자세로 운동장에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고 있다.


'심판인가?'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체육선생님이 호르라기를 부는 모습을 보니 차한솔이 선수인 것은 확실했다.

'4반에 운동 잘하는 애들이 없나?'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반과 호각으로 겨루고 있으니,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마지막 가능성만 남게 되었다.


'운동을... 잘해?'


뜻밖의 미스테리를 해결하기 위해 필기 따위는 제쳐두고 창밖의 축구 시합에 열중하게 되었다.

공격 진영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니 공격수인 것 같기는 한데 공과 별로 관계없는 먼 사이드 쪽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맹렬하게 공싸움을 하고 있는 와중에 녀석은 다소 한가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해? 뛰어."


입 밖으로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옆자리 소영이가 내 어깨를 쿡쿡 찌르더니 눈짓으로 '어떻게 돼가?'라고 묻는다.

소영이는 남친이 활약하는 축구시합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운동장이 보이는 자리는 창가 쪽 뿐이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서 보여주었더니 알아들었는지 손을 불끈 쥐며 화이팅!하고 포즈를 취했다.


시합의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커다란 타이머가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로 비기나?'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석현의 강력한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크게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경합된 공은 바닥에 닿을 새도 없이 누군가의 머리를 맞고 멀리 날아간다.

공이 사이드라인을 벗어나기 일보직전 차한솔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공을 잡는다.


한솔은 팔을 들어 신호 하더니 공을 툭툭 치며 중앙으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수비수가 한솔의 마크를 위해 다가서는 순간 한솔의 발을 떠난 공은 중앙으로 빠르게 뛰어들던 공격수의 발을 향한다.

앞에 서있던 세 명의 수비수가 공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어 보지만 공은 마치 벽을 맞고 튄 것처럼 공격수 발을 맞자마자 반사된다.


분명히 빈 공간으로 흘러가는 공이었는데 어느새 차한솔이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며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공격수를 마크하던 수비수들이 당황해서 한솔 쪽으로 우르르 쏠린다.

하지만 차한솔은 원래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툭 하고 공을 중앙 공격수와 골키퍼 사이로 공을 굴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몇 번의 패스만으로 1:1 노마크 찬스.


"우와!"


나도 모르게 입에서 꽤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구기대회에 무슨 일이 났음을 짐작한 아이들이 창가 쪽으로 기린처럼 목을 늘인다.

교탁 의자에 앉아 있던 선생님도 구기대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술렁거리는 애들을 혼내지 않고 창문으로 다가가서 경기 결과를 확인한다.


"너네 반 졌다. 필기 계속해라."


"아, 뭐야~"


그러지 않아도 무지막지한 양의 필기로 지친 반 아이들이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아쉬운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풀리그니까 나머지 경기 이기면 돼."


남친의 패배 소식에 다소 의기소침해진 소영이를 위로해주었다.


"고마워. 너는 항상 긍정적이라 좋아."


소영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부러 밝은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특혜니 뭐니 하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진심으로 우리반의 구기대회 우승을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실망은 커녕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마 종례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딩동~ 딩동~"


"아, 필기!"


딴청을 너무 피웠는지 수업종이 칠때까지 필기를 다 하지 못했다.


"소영아 필기한 것 좀 보여줄래? 부활동 끝나고 바로 돌려줄게."


"나중에 천천히 돌려줘도 돼."


"내일도 수업이 있는데 그럴 수 없지. 어차피 자습부니까 끝나고 바로 돌려줄게.


아, 약속 있어?"


혹시 데이트 약속이 있나 싶어서 물었다가 '너무 눈치 없이 물었네.'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 약속은 무슨.

그럼, 특활 끝나면 같이 집에 가자."


내 질문의 의도를 진짜로 몰랐는지 모르는 척해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미소를 머금은 소영이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조금 뭉클해졌다.


"드르륵."


축구시합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한숨 돌리고 있을 법도 한데 이미 차한솔은 정자세로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다 어제 일이 생각났다.

녀석이 먼저 인사하기 전에는 인사하지 말아야지. 공부하는데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나만 인사하려는 것 같아서 자존심도 상하는 조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왔구나?"


"흡.. 으..어."


허를 찔렸다.

녀석이 먼저 인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빼버렸는데.

갑작스런 인사 공격에 당황해서 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차한솔은 별 반응 없이 다시 참고서로 고개를 돌린다.


무관심일까? 아니면 나름 배려를 해준걸까?

문득 녀석 앞에서 괴상한 소리를 낸 적이 꽤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이상한 소리를 많이 내는 야생의 원숭이 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녀석의 의미없는 몸짓 하나를 해석하려고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니 갑자기 약이 올랐다.


'무슨 상관이람!'


가방에서 소영이의 노트를 꺼낸다.

자수 무늬 표지의 핑크색 노트에 귀여운 글씨로 적힌 [1학년 6반 김소영].

'이 공책의 주인은 미소녀 입니다.'라고 주석이 달려있는 것 같았다.

나란히 놓인 내 군청색 체크무늬 노트와 비교된다.

고등학교 입학 전에 나름 고심해서 어른스러운 디자인으로 골랐는데 지금 보니 '나는 공책입니다.'라고 써있는 것 같았다.


일단 필기부터 마치자.

소영이의 동그랗고 귀여운 글씨를 따서 내 노트에 한자 한자 옮겨 적었다.

나도 나름 귀엽게 써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내 귀찮아져 원래의 글씨체로 돌아왔다.


"한가해 보이네."


"뭐?"


녀석의 한 마디에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들었다.

수업 시간에 못 다한 필기를 하고 있는데 한가해 보인다니?

생각해보면 내가 필기를 수업 시간에 끝내지 못한 것도 다 저 녀석 때문이다.


"꽤 비효율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거 보니 한가한 거 같아서. 혹시 통째로 외우려는 거라면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비효율적인 일? 뭘 통째로 외워?

어안이 벙벙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은 벌렸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녀석이 가방에서 무슨 프린트를 꺼내더니 내 책상에 툭 하고 내려 놓는다.


뭔가 해서 봤더니 오늘 필기 내용의 프린트였다.

구기대회 선수라고 프린트를 받았나 보다.

프린트를 보니까 아까보다 더 약이 올랐다.

특혜를 받았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대놓고 자랑까지 하다니 너무 한 거 아냐?


"어쩌겠어. 운동 못하면 필기라도 잘 해야지."


목소리에 가시를 실어서 한 방 날려봤지만 대미지는 오히려 내가 입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잠시 눈을 굴리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웃는다.


"그거 내가 만든 건데?"


학교 프린트를 차한솔이 만들었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서 녀석을 바라보다가 녀석이 준 프린트를 자세히 살펴봤다.

학교에서 나눠준 프린트는 누군가의 손 글씨를 복사한 프린트 였는데 이건 워드프로세서로 인쇄한 프린트였다.

주요한 문장에 밑줄도 그어져 있고 키워드에는 박스까지 처져 있는 참고서 수준의 문서였다.


"너야 말로 한가한 짓을 했구나?"


필기를 다시 워드프로세서로 옮겨서 편집까지 했으면서 내가 필기 하는 것을 비웃다니.

이성과 논리로 중무장한 차한솔의 논리적 헛점을 제대로 응징한 같아서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요즘 일한 번역기 성능이 괜찮아서 번역하고 교정하는데 걸린 시간은 5분 남짓이고, 키워드 박스 치는데 걸린 시간까지 합치면 10분 정도 걸렸나?

뭐, 한가한 짓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응? 일한 번역기?"


전혀 뜻밖의 단어에 어리둥절 하고 있으니 녀석이 이번엔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이야기한다.


"그 선생님 필기는 다 일본 논문에서 발췌한거거든. 교육의 목적이라면 논문의 일부 발췌는 문제 될 게 없으니까.

내가 한 일은 논문 다운 받아서 발췌한 부분을 기계 번역하고 편집 조금 한 것 뿐이야."


녀석의 설명을 듣고 나서 프린트를 다시 보니 뭔가 엄청난 비밀문서처럼 느껴졌다.

프린트를 넘겨보니 오늘의 필기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울 내용까지 다 인쇄되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찾았어?"


"자기가 쓴 논문이야. 수업에 너무 의욕이 없는 거 같아서 조사를 조금 해봤지.

이사장 가족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고등학교 교사를 하기에 오버스펙이더라구.

꿈을 포기하고 교사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수업 시간에 필기만 시키긴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서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면 안되는 어른들의 사정을 엿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가라 앉았다.


"이거 나 줘도 돼?"


"난 또 인쇄하면 돼. 이미 한가한 짓을 해버렸으니 너에게 나눠주면 덜 한가한 짓이 되지 않겠어?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복사해주지는 마. 선생님이 곤란할 테니까."


"알았어. 고마워."


차한솔은 싱긋 웃고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녀석에게 받은 프린트를 보고 있으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지긋지긋한 필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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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첫 번째 겨울 19.07.17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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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축제 준비 19.07.15 20 0 12쪽
23 비오는 날 19.07.13 2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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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민폐녀 여사친 19.07.11 61 0 12쪽
20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 19.07.10 29 0 12쪽
19 1+1+1+1? 19.07.09 33 0 12쪽
18 1+1+1 19.07.08 30 0 11쪽
17 자상부 스타트 업! 19.07.06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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