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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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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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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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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DUMMY

이 모든 건 새벽녘의 어스름으로 미루어보아 다음 날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전의 사건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여름날의 기승스러운 날씨부터 꺾여버렸다. 사기까지 꺾일 뻔한 처지에 등을 떠미는 감시의 눈길이 없었더라면 한없이 바닥에 늘어져서는 달팽이 뚜껑 덮듯이 무념무상으로 하루를 보냈을 듯하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이러는 거야?”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니야. 그 애한테 가서 물어봐.”

“그 애라면 백면을 가리키는 거지?”


오솔길을 거닐며 중얼거리는 모든 말은 꼭 울려 퍼지지 않더라도 이상하리만치 메아리처럼 뒤통수에 섬뜩하게 꽂히는 것이 있었다. 불청객이 쫓아오지 않았나 싶어 돌아본 태강이 자신이 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때마침 말하자 녹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 그 애는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뭐? 그럼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화가 놀이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야?”

“걘 자기 자신이 싫을 뿐이야. 아무튼지 내가 한 말은 명심해 둬. 이 뒤로 우리는 줄곧 황호 곁에 있어야만 하니까. 이번이 너한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이번이 처음이었잖아!”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 태강은 자신이 상황만이 아니라 진상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하지만 차라리 그게 다행이야.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안 될 테니까.”

“그거야 맞지만······.”

“모든 존재는 반성할 줄 알아야 해. 반성과 참회가 없다면 삶은 죽음이나 다름없으니까.”


산책은 아마 이 무렵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 어찌나 팔팔하고 정정한 것인지 녹수는 태강을 성큼 앞질러서 먼저 걷고 있었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와의 동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했다.

그녀는 이제껏 분노한 저이 단 한 번도 없을까? 모두 머리통이 땅에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충격과 공포를 느낄 때, 그녀는 유달리 노여워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응어리는 모두 세월이 잔주름 사이로 묻고 지나간 것처럼 녹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관되게 보이는 고답적 태도는 그녀가 진실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바로 서기까지 진실이 비밀에 기대어 있어야 한다면, 이번이 정녕 마지막 기회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뇌리에 스쳤다. 태강은 달려가서 녹수를 바짝 쫓더니 이내 원하는 만큼 거리가 좁혀지며 걸음을 늦추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이건 꼭 알고 있어야겠거든.”

“그래.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더라도 딱 하나쯤이라면 설명할 수 있겠지.”

“황호는 말이야.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려는 거야? 걔랑 관련도 없잖아.”

“관련이 없다니?”


마침 소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서자 살갗에 닿는 하루의 온도는 더욱 내려앉았다. 등골에 간간이 흐르는 것 같던 땀도 식어버릴 만큼 서늘해졌다. 그리고 딱 그 정도로 녹수의 눈빛 또한 차분해졌다.


“물론 우리 열두 명이 어떻게 서로한테 완전히 관련이 없겠어? 그런데 나는 지금 그런 연관성을 따지자는 게 아니거든. 백면의 사생활에 황호가 그렇게 깊게 관여할 만큼 그 둘은 친하지도 않았잖아.”

“그런 거라면 황호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

“걔한텐 이런 거 묻기 싫어. 또 이상하고 우울한 소리만 늘어놓을 게 뻔해. 그리고 시간도 없다며. 짧게 이야기하자. 걘 왜 백면이 실패한 사랑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걔도 뭐 그 여자를 똑같이 사랑하기라도 한 거야? 성격상 쌍방은 아니었을 것 같고, ”


이 가운데에 폭소가 왜 터져 나왔는지는 녹수 자신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분장을 지우고 나서 허전해하는 광대의 얼굴처럼 한껏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진지해 보이는 태강의 얼굴 탓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니면 진실을 고발하는 자들은 대개 그것이 뭔지 제대로 모르는 표정을 짓고 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마지막 질문은 녹수의 기분을 띄울만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역시 너는 너만의 방식이 제일 잘 어울리는구나.”


어린 손주를 대하듯이 녹수가 태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기특해서 그러지.”


피하려는 태강의 목에 팔을 걸며 녹수는 짓궂게 굴기 시작했다. 그가 진저리를 치며 빠져나가는 통에 장난은 곧 끝나고 말았지만.


“비슷해.”


태강이 먼지를 털 듯이 제 몸을 가누는 사이에 그녀가 말했다.


“비슷하다고? 그럼 설마 그게 사실이라는 거야? 그럼 도대체 이게 무슨 막장 이야기야!”


흥분한 태강이 애꿎은 땅의 따귀를 치며 성질을 부렸다.


“진정해. 난 비슷하다고 했지, 같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그럼 제대로 말해 봐. 왜 그러는 건데?”

“황호는 그 여자의 슬픔에 심취했을 뿐이야.”

“그 여자의 슬픔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만큼 세월이 지났는데 이런 짓을 꾸밀 정도로 거기에 빠진다는 게 가능해? 그 여자보다 더 서럽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분노는 언젠가 사그라들기 마련이지만, 비애는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지. 거대한 물웅덩이를 이루고 마침내 바다로 가려고 하니까.”


녹수가 허망해 보이는 눈길로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철창에 갇힌 것처럼 하늘은 꽤 지저분하게 보였다. 그녀는 갑작스레 뭔가를 고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느꼈다. 가령 죽음이라든가, 청춘이라든가 하는 애증을 동반하는 그 단어들과 관련된 것 말이다.


“태강, 명심해. 네 동생처럼 살고 싶다면 말이야.”

“뭐?”


천규가 언급되자 여느 때와 같이 예민하게 반응한 태강이었다.


“황호가 천규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겠지. 그러지 않고서는 네가 여기에 와 있을 리가 없으니까. 네가 그렇게 단순한 애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만약 네가 복잡했더라면 인간들은 희망조차 쉽게 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뭘 말하려는 거야, 대체? 천규가 뭘 어쨌다는 건데?”

“말 그대로야. 천규는 살고 싶어서 죽었던 거야. 황호가 자신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말이지.”

“하지만 황호 걔는······!”


열이 오른 나머지 말이 금방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뒷말은 어쩔 수 없이 그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자의 몫이었다.


“그래. 황호가 아마도 너한테는 이렇게 설명했겠지. 천규는 우리 중에 누군가가 백면의 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바람에 죄책감에 못 이겨 도망쳤을 거라고. 그리고 그걸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거라고.”

“······맞아. 정확히 그랬어.”

“누가 그랬다고 그랬어?”

“영월이 그랬대. 정확히 영월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천규가 당시에 그 여자에게 용기를 심어줬더라면 행복은 장담할 수 없더라도, 둘은 어떻게든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나도 그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더라고.”


입술을 잘근거리면서도 태강의 발음은 그 망설임만큼이나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 천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경우에 말이야. 그리고 하나는 완전히 틀린 게 있어. 천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건 영월이 아니라 황호야.”

“도대체 왜? 황호는 그럼 책임이 없다는 거야? 왜 그렇게 혼자서 저렇게 우리를 등지고 마는 건데?”


불안을 가라앉힐 수 없는 태강이 주먹을 쥔 채로 그늘을 벗어났다. 그러나 풍경은 고작 그 몇 걸음만으로 달라질 리 없다. 그건 그에게 또 다른 좌절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그건 슬픔 때문일 거야.”


녹수가 애수에 젖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슬픔? 슬픔이 도대체 왜 그 이유가 되는 건데? 슬픔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 같은 감정 아니야?”

“바로 그래서 그런 거야. 모든 것을 탓할 수 있는 감정은 오로지 슬픔뿐이니까.”

“알겠어. 하지만 도대체 왜 백면 일에 황호가 그토록 간섭하는 건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야.”


항복하여 다시 그늘 안으로 들어온 태강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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