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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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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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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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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76화

DUMMY

“괜찮지 않니?”


밤잠을 자는 사람보다는 낮잠을 자는 사람을 깨우기가 더 쉬운 법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나나는 후자에 속한다. 첫째로, 실제로 현재 밖은 대낮인 탓이고 둘째로, 나나를 제외하고서 백면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어떤 잠이든 간에 깨어나지 않고서는 잠이 아닌 죽음이다. 그러니 사람을 깨우는 일을 좀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그 길에 앞서 머뭇거려서도 안 된다.

도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초영은 유류품을 찾으러 가듯이 나나의 방으로 난입했다. 문을 두드리기는 하였으나 나나가 알아챌 만큼의 넉넉한 여유 따위는 주지 않은 것이다.


“어머, 도대체 이게 다 뭐니?”


난장판이 된 것은 기억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잠은 어디서 자는가 싶을 정도로 침대 위에도 그림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줄줄 흘러 떨어진 물감 자국이 또 무의식의 형상을 서서히 완성해 나가고 있었으며, 나나 또한 오랜 칩거 생활 동안에 폐인이 된 것처럼 대낮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으로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 몇 알이 인상적이었다. 썩은 것은 없었으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과들은 사과 그 자체가 아니라 혹은, 그래, 사물 그 자체였을 뿐이다. 그러니 끼니를 잘 챙기지 않아 보이는 나나 또한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 그것을 좀처럼 탐하지 않았으리라.

초영을 급히 뒤따라온 도진도 고통의 소굴 같은 이 현장을 목격하고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은 경탄이었다.


“뭐, 뭐야?”


이제 막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고 새 캔버스를 놓았던 참이라 나나는 그 뒤로 쭉 백지상태였다. 그림이 완전히 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이치였다. 하얀 천과 하나가 되어 있던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을 쫓는 두 얼굴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너무 놀라서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으나 본능적으로 캔버스를 붙잡는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유요? 모르겠는데요.”


뚱한 얼굴로 끌려 나온 나나는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싱겁게 대답했다. 감정에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너무 날이 선 관찰력에 그만 감정이 찢기어진 것인지 모를 만큼 그녀는 백면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도 무덤덤했다. 그래도 자신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는 두 명분의 시선이 버거워서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금 입을 열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몰라요. 달이 밤에 뜨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아니 무슨, 제가 달을 만든 사람도 아니고 말이에요. 게다가 전 살면서 학교 다닐 때도 이과 반이 있는 복도 근처에 가본 적도 없어요. 만약에 그림을 포기한다더라도 그러면 문과 쪽으로 가고 말지. 여하튼 과학이니 뭐니 그런 거에 어울릴만한 합리적인 설명도 못 하고, 밤에 뜨는 달을 두고 뭘 의심해본 적이 없거든요.”


혹시나 비난이 쏟아질까 봐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자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질척거리는 집요한 시선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진 역시 이것은 자신들의 상상만으로는 불가한 영역이라고 여겼기에, 막상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이렇게 나나에게 끝까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진짜 모른다니까요?”


나나가 대답이라기에는 한참 기대에 못 미치는 소리를 외쳤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초영이 가늘게 뜬 눈초리로 나사가 빠진 듯한 화가를 추궁했다.


“정말 몰라요. 월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어쩌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기도 벅찰 만큼 바쁘거나 정신이 없는데 달이 밤에 더 잘 어울린다는 걸 누가 알겠어요?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지. 왜냐면 이런 건 과학자들도 모를 테니까요. 한번 이론을 얻고 나면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기만 하는데 어울리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오히려 그건······ 그건, 너무 예술적이지 않나요? 심미안을 그렇게 대놓고 요구하는 거 말이에요.”


말을 하는 와중에 저 스스로 감탄한 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되겠군요.”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예술적으로? 달이 밤에 어울리는 걸 예술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야?”


제게 들어온 질문을 내쫓으려다가 도리어 무리한 부탁을 하나 더 짊어지게 된 나나가 짜증을 부리기 직전 단계의 억양으로 말했다.


“시집에 있던 시처럼 말입니다. 시 내용이 아마 ‘클 때는 떠오르느라 나의 얼굴로도 가릴 수 없더니 떠오르더니 작을 때는 나의 손톱으로도 가려지로소니’ 였었죠? 그런 식으로 달이 왜 밤에 더 어울리는 것인지 나나 씨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 돼요.”

“그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잖아.”

“그래야 예술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않았더라면 세잔은 화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이해로 위장한 수많은 오해 속에서 그가 진정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화가가 되어서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려서였다. 그러니 도진의 부탁도 영 못 들어줄 만한 것은 아닌 듯하다고 생각한 나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저를 향한 시선들이 점차 누그러졌을 무렵에 말문을 뗐다.


“낮에는 해가 뜨기 때문 아닐까요? 낮 동안에는 줄곧 하늘에 해만 걸려 있었는데, 하루를 마칠 때쯤에는 하늘에 다른 게 걸려 있잖아요. 아, 정말 어렵네. 그런데 이거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에곤 실레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런 화가도 따로 글재주를 갈망했을 정도로 말을 잘하는 것은 모든 능력과는 다른, 별개의 능력이라니까요.”


최선을 다한 것을 의미할 정도로 나나가 얼굴 살을 구긴 탓에 초영과 도진은 뒤따라 달려들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벙긋거리면서 그녀를 한 번 더 재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망설였다. 두 사람 역시 자신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 나나는 미안해져서 그만 자신이 한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중에 이들의 궁금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머릿속이 환기되는 듯한 기묘한 감정을 느낀 나나가 손뼉을 쳤다.


“달이 뜨면 밤인 줄 알기 때문 아닐까요?”


그녀는 자신도 이유를 모를 만큼 들떠서 말을 마친 후에도 연달아 박수를 터뜨렸다.


“달이 뜨면 밤인 줄 안다니?”


달이 뜬 사실만으로는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월계인들은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다.


“요즘 사람들은 바빠서 하늘을 쳐다볼 시간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문득,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이 있는데 그럴 때 달이 있으면 벌써 하루가 끝났다는 걸 실감하게 되거든요. 해가 떠 있으면 하루가 언제 끝나나 하는데, 달이 떠 있으면 하루가 끝났다는 걸 알게 돼요. 이걸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시적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달이 있음에 밤이 있다는 거예요.”

“달이 있음에 밤이 있다는 건, 그만큼 달이 큰 의미를 가진 건가요?”


도진의 물음에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 듯이 나나가 얼굴을 금세 굳혔다.


“그건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렇지 않을까? 오히려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는 항상 달이 있지만,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달은 기다려야만 하거든. 밤을 기다리느냐 혹은 낮을 기다리느냐에 따라 기다리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낮을 기다리는 사람은 해를 더 반길 수도 있잖아.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게 맞을 것 같아. 아니, 맞을 거야. 나도 지치고 힘든 날에는 하루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면서 하늘에 달이 뜨기를 기다린 적이 있거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걷고 있으면 괜히 달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서 변함없이 영원한 친구를 얻은 것처럼 위로도 받고 말이야.”

“달이 따라온다니요?”

“그냥 내 착각인 거지. 하늘이 어두우니까 달이 더 잘 보여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잠자코 듣던 초영이 나나의 마지막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 애가 그런 소리를 한 거였네.”


자신의 의지대로 나나를 끌어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그녀는 자부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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