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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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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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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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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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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2화

DUMMY

다행히도 그가 알맞은 시간에 도착했다고 초영은 생각했다. 언제 올지는 몰라도 이 정도 시간대에 온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작은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타인의 소원을 이루어주다가도 이렇게 작은 기쁨이 제게 일어날 때면 그녀는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감싼 어느 한 나무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만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장에서부터 느꼈다.

감정이 너무 벅찼기 때문일까. 계단 아래쪽에 대고 말을 하려니 소리보다도 먼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저 머리통을 잡으려고 다리를 재촉하자니, 이쪽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귀찮은 심정 때문인 것 같다.


“야담!”


다행히도 정 없어 보이는 저 머리에도 귀가 제대로 달린 모양이다.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그녀가 이리 생각한 데에는 시간의 공백이 야담을 낯설게 보이게 한 영향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불가피한 심적 변화로 인해서 이제야 모든 게 새롭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놓쳤던 것이 보이는 것일지도.

야담의 귀가 하늘에 걸린 원형 언저리에 가서 그 달빛을 가릴 듯 말 듯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을 오묘하게 쳐다보며 초영이 실웃음을 걸쳤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왔구나, 너?”

“태강의 발목을 붙잡은 게 역시나 너였군.”

“그래, 걘 내 쪽에서 더 필요했거든.”

“과연 그런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만.”

“우리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어차피 일은 제대로 진행될 거야. 태강한테 따로 맡겨둔 게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굴지는 말지 그러니?”

“그렇군.”


싱겁게 끝난 대화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길을 걸었다. 꽃집으로 향하는 길에 여름날의 풍경은 넘쳐났지만, 신선한 박하꽃의 향기도 이들의 정서에는 새 바람을 불어넣지는 못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서로의 걸음이 느릿해지는 것을 감지할 무렵, 야담이 무심히 말을 걸었다.


“뭐가?”


시치미를 뗀다기보다는 한 번이라도 더 의문을 가지고 싶어 하는 듯한 초영이 상냥하면서도 무력한 어조로 대꾸했다.


“혹여 착각은 아니겠지?”


오히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은 야담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걷는 내내 길바닥을 둘러보았다.


“내가 설마 그랬을까 봐?”


반대로 초영은 하늘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달이 그녀를 따라오는 게 은근한 위로가 되어서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밝은 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긴, 자신할 수는 없겠네. 너희한테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다녔는데 결국에 모든 문제가 나 때문이었던 게 밝혀졌으니까.”


그녀가 한 걸음 늦추는 탓에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박자가 어긋나고 말았다. 야담이 다시금 맞추어보려고 했으나 초영이 그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어쩌면 너랑 싸웠어야 하는 건 주화가 아니라 나였던 모양이야.”


야담이 자신보다 앞서 걷게 하며 초영이 씁쓸하게 말했다. 자신을 침잠하게 하는 격정이 버거웠는지 말에 실린 무게가 심상치 않다. 야담이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고통에 자신을 전부 내맡긴 촛불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건 너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이후의 일이다. 무엇보다도 백면이 개입하기 전의 일이야.”

“애써 그렇게 말하지 마. 야담. 너의 그 유일한 장점인 냉정함을 잃지 말라는 말이야. 너라도 판단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니?”

“이상한 소리는 사절이다.”


초영이 천천히 걸어서 야담의 옆으로 왔다. 둘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느려서 닿으려는 꽃집이 마치 자신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영원히 길을 내어주는 허상, 그 신기루가 아닌지 두 사람 모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어.”


야담의 귀를 바라보며 초영이 운을 뗐다. 만에 하나 저 귀가 사라지면, 이 이야기를 들을 존재가 사라져버리면 속으로 해야 했던 반성은 기회가 아닌 후회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눈을 떼기에는 겁이 났다.


“백면과 그 여자, 두 사람 사이의 일 말인가?”


야담이 그만저만한, 알 수 없는 미지근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아니. 그 일은 짐작도 할 수 없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내가 이야기하는 건 백면의 내생에 대해서야.”

“그렇군. 어느 내생을 말하는 것이지? 그 녀석의 내생은 모두 다 이상한 구석이 다 있기 마련이니까 짐작하기가 쉽지 않군.”

“원래 모두가 다 이상한 점은 하나씩 가지고 있어, 야담. 백면이 유독 튀었던 건 걔가 그걸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녀석을 일반적인 인간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군.”


초영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직한 웃음소리로 그의 이야기를 긍정했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화제를 돌리는 듯싶던 초영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눈빛으로 야담을 응시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여름이 지나가면 곧바로 노년에 접어들 것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뭘 말이지?”


야담이 멋쩍게 눈썹을 문지르며 포장된 길을 확인했다. 돌부리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놓이지 않는 마음은 한숨을 마음대로 쉴 수도 없을 만큼 중력을 거부한 채로 그의 기분을 어지럽혔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말이야. 어떻게 할 거야?”

“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그러니?”

“벌을 너무 적게 받아서 그렇다고 하는 편이 더 내 의견에 어울리겠군.”


초영이 입을 가리며 새침하게 웃어버렸다. 그의 개성이 묻어나는 대답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어서다.


“그렇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몰라. 그렇지?”

“죄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아버리지.”

“넌 그 영혼을 없애는 일을 하고 말이야.”


초영이 얼마간의 침묵을 갖더니 야담의 어떠한 대꾸도 없이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알아낸 게 하나 있어. 여기 난연에 있으면서 종종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였거든. 풀기는 쉬운 문제였는데, 그것 역시 문제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던 거야. 정말이지, 너무 늦게.”

“그게 뭐지?”

“내가 그 여자가 비는 소원을 들었다고 했잖아.”


대꾸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초영은 야담의 귀를 쳐다보는 것에 만족하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난 그때 왜 그 마음이 들렸는지 잘 알지 못했어. 네가 까먹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마음이 아니라 기억을 읽잖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정말로?”


마침내 여명의 꽃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그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야담이 그곳만을 응시할 동안 초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야담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알고 있었지. 그건 백면의 마음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말이야. 백면은 네가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원했겠지. 마찬가지로 그 녀석의 소원이었을 테니까.”

“알고 있었구나! 나는 그 내용이 너무 웃겨서 그만 그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어. 왜 우리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걸까?”

“······인간은 애초에 다른 이의 마음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널 자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나 보군.”

“그래, 맞아. 여기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여길 벗어날 수 없었지. 벗어나기 싫었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야담, 넌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니?”


초영이 자신의 시야에 슬쩍 기웃거리며 여명에게 가리를 주저하자 야담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버렸다. 초영은 인상을 쓰면서도 그에게 대항하지는 않았다.


“너 역시도 나와 같이 저쪽이라고 생각할 텐데.”


무표정만으로도 밤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든 야담이 턱짓으로 꽃집을 가리켰다. 마침 여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이들을 발견한 즉시 고개를 꾸벅거리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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