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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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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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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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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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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DUMMY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으니 우선 내 말부터 들어봐. 쓸데없이 힘 낭비하지 않도록 일단 가만히 있고. 이제부터 너는 최대한 건강한 척을 해야만 하거든.”


태강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몸을 고리한 냄새가 묻어나는 침대에 밀착시키며 기운을 비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럴듯한 베개도 없는 데다가 비위에 거슬릴 정도로 쾨쾨한 악취 때문에 그리 효과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다른 수가 없었으므로 눈을 질끈 감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


코는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까닭에 얼굴만은 최대한 위쪽으로 돌리며 태강이 물었다. 말똥해진 정신에 선명해진 시선을 회복할 무렵도 되었지만, 그는 구태여 눈을 뜨지는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러는 편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덜 무리를 줄 것 같아서다.


“그야 네가 나를 되돌아오게 한 거로 보여야 하니까 말이지.”

“뭐? 그럼 내가 널 살린 게 아니란 말이야?”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녹수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 나부꼈다.


“그건 이미 이룰 수 없는 기적이었는데, 아무리 너라고 한들 어떻게 이뤘겠어?”

“그럼 네가 안 죽었다는 말이지? 하지만 황호는 네가 죽었다고 했는데!”


좀 전에 받은 경고를 계속 지킬 수 없을 만큼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태강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직 우울한 감정이 잔여물처럼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침 한번 삼키면 그만인 일인 것처럼 태강은 이 사실을 꿀꺽 속으로 넘기며 금방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이 은둔지에 강제로 칩거하면서부터 수없이 속으로 불렀을 그 이름의 주인을 돌아다보았다.


“뭐야, 완전히 할망구잖아.”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나타난 전권대사 같은 녹수는 태강이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예상하던 모습에까지 들어맞아서 그런지 태강의 말투에는 실망감도 본의 아니게 조금 드러났다.


“그래, 할망구일 수밖에 없지.”

“부활한 거면 젊어지거나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거라면 해서도 안 되지만,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례한 말만 지껄이는구나. 젊어졌다가 갓난아이가 되어버리라고? 큰일 날 소리야.”

“어째서?”


녹수는 과거에 뜬소문이 돌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쌩쌩해 보였다. 특히나 태강이 쓸데없이 열을 올리거나 골이 울리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도로 눕힐 때의 손아귀는 그야말로 상당했다. 그녀는 등이 조금도 굽지 않았으며, 머리가 세고 주름이 는 것에 비하면 자세 또한 아주 바르고 정정한 노부인처럼 보였다. 그야 늘상 나이가 들었을 때면 녹수는 이런 모습을 유지했지만, 지금에 와서 정상적인 모습의 그녀를 마주하다니 태강은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후에도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아, 팔꿈치 부딪혔어!”


엄살을 부리는 아이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길로 그의 말을 무시한 녹수가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지 뒤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뒤에 있어? 저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든가 해. 누워서 이야기하려면 불편하단 말이야. 혼잣말하는 것 같고.”


이를 알아챈 태강이 스스로 궁리할 의사가 전혀 없는 탓에 옆으로 누운 몸을 바깥쪽을 등지게 하도록 돌리며 녹수를 올려다보았다.


“이쪽이 더 좋을 거야. 황호를 맞이하려면 얼굴이 제대로 보여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있으니까 귀신같이 보이기만 한데.”

“말을 함부로 하는 걸 보니 그래도 내 등장 덕에 우울증은 극복한 모양이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견해를 듣자 놀란 태강이 머리를 들려다가 말고 철퍼덕 떨어뜨리며 오직 두 눈만을 끔뻑거린다.


“우울증이라니? 그건 병이잖아. 난 아무런 병에도 안 걸렸는데.”

“그게 병이라는 거야. 아주 심각한 병이지, 보이지 않으니 고칠 수도 없고 너처럼 그렇게 말을 바꾸어버리기만 하면 누구든 속이기 아주 쉽거든.”

“그럼 황호가 나를 병들게 했단 이야기야, 지금?”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겠지. 더 불분명한 표현으로 듣고 싶다면, 널 죽고 싶을 만큼 슬프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고.”


충동에 이끌려 다시 일어나려던 태강이 주먹을 쥐면서까지 자신을 저지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 넘어간 침이 단순한 잔여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혓바닥에 물혹이라도 잡힌 것처럼 입을 옴짝달싹하는 게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난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럼에도 꼭 전해야만 하는 한마디가 있었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생명력을 지니는 거야. 죽음이 없다면 삶 자체가 죽음이 되어야만 할 테니까. 그러니까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안 좋게 생각하지 말아야 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인간과 다른 우리라고 슬프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태강의 더욱 복잡해진 심정을 단번에 이해한 녹수가 해가 되지 않을 만큼 따끔한 위로를 건넸다.


“아냐, 그거랑은 좀 달라. 아냐, 많이 다른 것 같아. 천규가 죽었을 때는 시계 시침에 손이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면, 이번에는 분침과 시침에 동시에 내 두 눈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 좋을까? 정말로 그랬어.”


이제 시간이 흐른 만큼 어쩔 수 없이 코를 찌르는 냄새에 내성이 생겨버린 태강이 황호와 있었을 때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그게 바로 슬픔인 거야.”

“슬픔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아? 슬픔을 느끼지 않고서는 좀처럼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슬픔을 느껴서 반성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반성이 아닐 거야. 분노 역시 마찬가지거든.”

“그럼 무슨 감정을 느껴야지 반성할 수 있는 건데?”


우울증보다는 궁금증이 더 악화된 탓에 태강이 이번에도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침대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태강의 자세가 안정적으로 보일 때 황호가 들어섰다. 아직 녹수가 물음에 대답하기 전이다.


“믿을 수 없어.”


구석에서 멀찍이 서 있는 녹수와 눈이 마주치자 황호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는 쪽보다 발을 더듬거리기로 작정한 것인지, 진전이 없어 보이는 걸음새로 천천히 녹수에게로 향했다.


“내가 말했지?”


아직 녹수에게서 충분한 설명을 듣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태강은 황호의 느릿한 걸음걸이 덕분에 녹수와 은밀히 두 눈을 맞추고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기에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발언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정말인 건가?”


녹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질문에 대한 대답은 태강의 몫인 것을 분명히 할 만큼 황호의 목소리는 그 시선과는 반대로 녹수를 겨누고 있지 않았다.


“그래, 오랜만이야.”


오랜 세월이 지나 재회한 사이처럼 녹수와 화호는 감격에 찬 광경을 그려냈다. 이를 낯설게 지켜보던 태강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기억도 그대로고?”


황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

“아는 것도 그대로겠지?”

“그래.”

“생각도 그대론가?”


한 박자 놓친 것인 양 녹수가 아주 짧게 뜸을 들였다.


“당연히.”


하지만 그것을 알아챌 정신이 없던 황호는 긍정의 의미를 지닌 대답이 돌아오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녹수와 덥석 손을 잡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말로 해냈구나. 녹수 네가 살아 돌아올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하지만······ 조금은 의심할 필요가 있었지. 회의감은 일의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감정 아니겠어? 그 마음고생 덕분에 이렇게 진짜 네가 돌아오게 되었다니! 태강!”


혼자 들떠서 웅변하던 황호가 대뜸 태강에게 눈길을 던졌다.


“왜, 왜?”


당황하고 만 태강이 두려운 눈짓으로 그의 부름에 응했다.


“녹수가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지?”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도리가 없었다. 태강은 자신이 금기를 어긴 적이 없음을 밝힐 수 없는 노릇에 어벙하게 “어, 어어.”와 같은 말소리만 내면서 급히 머리를 굴렸다.


“걸어서 돌아왔지. 저 애가 나를 여기로 불러들였거든.”


더 지체하다가는 속셈을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녹수가 서둘러 대답을 가로챘다.


“하지만 이 애는 널 소환한 게 아니라 부활시킨 걸 텐데.”


태강이 너무 오래 시간을 끌어버린 탓일까, 황호가 금방 이성을 되찾은 듯이 차분해진 어조로 트집을 잡았다.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두 방법 모두 원하는 것이 돌아온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어.”


그러자 녹수가 맞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치며 대답했다. 한편, 그녀는 상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적절한 미소를 보이는 순간은 놓치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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