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381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2.22 23:59
조회
27
추천
1
글자
9쪽

264화

DUMMY

“재밌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재밌는 것 같아. 이때를 기다렸던 것만큼.”


남자가 신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미주의처럼 황홀하게 그를 사로잡은 것이 붓인지 아니면 캔버스 너머에 있는 존재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또한, 그 존재가 정신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어떤 예술을 지향하는지는 그보다 더 수수께끼라서 남자 본인조차 모를 것으로 보였다.

다만 남자는 키프로스 섬에 사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결코 아니라는 것과, 그의 붓질을 존속하게 하는 건너편의 존재는 따라서 반드시 갈라테아라고 하는 상아로 만든 조각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듯하다. 얼굴 윤곽 부분을 세심하게 칠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를 동시에 지껄일 줄 아는 남자가 고른 색은 미색과 낙타색의 중간 정도의 색감을 지닌 것으로, 그리 밝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들려오는 대답에서 이 존재가 남자의 한마디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것과, 남자가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긴 시간 동안에 실체를 대신하는 것들에 만족할 만큼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재밌지는 않아. 심각한 거야.”


남자가 잠시 붓놀림을 멈추더니 저쪽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코앞에 있는 그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림이 한 말은 아니었음에 그의 표정은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적이 있는 것처럼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을 어느새 짓고 있었다.


“비극은 인생이 즐거운 자들이나 좋아하는 거라면, 희극은 그 반대의 경우겠지. 그리고 내가 이 후자에 속하는 것일 테고.”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남자는 붓을 잡았다. 오롯이 남의 앞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그의 지금 심정을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뒷모습이었다. 겉으로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 모두 뒤로 버려졌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다듬어진 감정은 깔끔해 보여도 온전하지 않았고,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그림자처럼 뒤에서 보이는 그를 쓸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모델이 그와 정면을 마주하며 그를 타일렀다. 정확히는 이젤을 사이에 두고 외친 것이었으나, 그건 너무 오래 놓인 것이라서 장애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적당한 때에 황호한테 돌아가겠지?”


남자가 그림 속 존재를 마주하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그려내는 모든 사물이 조각처럼 실제로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여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갈라테아는 아니더라도······ 아니, 갈라테아일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도 갈라테아를 원한 적이 없으니까.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갈라테아를 통해서 무엇이든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아주 수월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이야기야. 아마도 네 그림이 완성되면 돌아가려고 해. 그동안 시간을 너무 끌었던 것 같아.”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지. 다들 굼뜨게만 행동했으니까.”

“네가 모든 걸 너무 감추기만 해서 그래.”

“그 반대야. 난 모든 걸 드러내고 다녔어.”

“그래 봤자 넌 모든 걸 다 무(無)로 돌려놓았을 뿐인데.”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버린 남자가 제게 어울리지 않은 꾸중을 금방 흘려들었다. 그가 이 쓴소리에 반응했다는 것은 고작 눈썹의 미세한 움직임으로만 관찰될 수 있었다.


“어차피 모든 건 그렇게 끝나게 되어 있어. 덧없이, 그렇게 무엇도 없이. 그러니까 날 화나게 하지 마.”

“하지만 넌 이제 더 화낼 수 없을 거야. 그렇지? 너무 지쳐버렸잖아. 정말로 무엇도 없다면 네 마음에 화나 응어리가 되고 만 궂은 감정들이 없어야지. 그릭 우리 모두가 지쳤을 거야. 너무 오래 걸렸어. 백 년 전에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을 테고.”


언제나 그림은 무례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그렇게 사람에게 말을 거는 법이다. 인사도 없이, 소개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서 다가오는 법이다. 남자는 자신이 애써 누르고 있는 감정을 거리낌없이 들추는 그림 속 존재를 향해 버석버석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 필요하기도 해.”


그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순가에 자신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에 비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물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에는 그를 위한 물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더 든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까?”


목소리는 그보다도 더 뒤쪽에서 들려왔으나 그림 속 사람이 말을 걸었다.


“고민은 언제나 노력의 맛을 깊게 하거든.”

“노력의 맛을 아는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된다고, 그 가치에 영혼을 걸어?”

“다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으니까.”


뒤로 대화는 끊겼고, 그림 속의 존재는 자신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에게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자가 붉은 안료를 섞어 입술에 혈색을 주고자 붓을 새로이 갖다 댈 때, 비로소 다시금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좋은 작품을 그리려고 그 작품 하나에만 몰두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야 그만큼 좋은 작품이 나오겠지.”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너무 결과에만 집중하지 말고 과정을 봐야 해. 나는 그저 여기에서 네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애초부터 붓을 쥐기로 한 건 너였잖아. 그렇다면 너는 그렇게 감상적인 태도를 항상 유지해서는 안 될 테니까.”

“그렇다면 난 내 작품을 감상할 자격도 없단 소리야? 그거 너무 잔인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스스로를 교화할 수 없다는 거잖아.”


이번에도 남자는 냉소적으로 굴었다. 그는 입술을 칠하는 데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 입술을 칠하다가 오늘이 끝나버릴 것 같이 남자는 그 작은 부위엣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이건 네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니까. 조금만 더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봐.”

“네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왜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지?”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너를 가장 오래 지켜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건 나밖에 없을 테니까. 화가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자의 시선에서 네 모습을 바라보라는 거지.”


남자는 이내 만물을 멸시하는 견유(犬儒)가 되기로 결심한 것인지 더 차가워진 눈빛으로 잠시 침묵 속에 빠졌다. 한편으로 절대 놓지 않는 붓처럼 의심도 없이 놓치지 않는 그의 시선이 모든 것을 낯선 존재로 바꾸어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모든 걸 다 바쳐서 그린 작품 속에서 어떤 비밀이 있는 거지?”

“너무도 쉬워.”

“그런데 나는 왜 모르겠지?”

“그야 네가 계속 붓을 쥐고 있으니까 모르지.”


그림 속 존재는 마침내 그에게 잠시 붓을 내려놓을 것을 암시적으로나마 권유했다. 남자는 마지 못해 들고 있던 붓을 귀에 꽂으며 그림이 뚫어지도록 그 안의 존재를 응시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잠시 놨어. 그러니까 이야기해.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누구의 말보다도 더 기분이 나빠서 제대로 집중이 안 될 정도니까 얼른.”

“간단해.”

“원래 간단한 것은 결국에 복잡한 것을 압축한 말에 지나지 않아. 시적인 표현이지.”

“그래? 내 말은 어쨌든 정말 간단하다는 거야.”


남자가 성가시다는 얼굴로 거의 떨어지려는 붓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다시 집었다. 이윽고 붓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놓였을 때 그림 속 존재가 마침내 대답한다.


“시력을 잃어.”


간단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에 명료한 대답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상관없어.”


그래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끝내듯이 반응하고는 애써 반듯하게 공중에 뜬 붓을 우악스럽게 집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7 276화 21.03.06 24 1 9쪽
276 275화 21.03.05 24 1 9쪽
275 274화(수정) 21.03.04 25 1 9쪽
274 273화 21.03.03 26 1 9쪽
273 272화 21.03.02 28 1 9쪽
272 271화 21.03.01 24 1 9쪽
271 270화 +3 21.02.28 27 1 9쪽
270 269화 21.02.27 23 1 9쪽
269 268화 21.02.26 26 1 10쪽
268 267화 21.02.25 24 1 9쪽
267 266화 21.02.24 22 1 9쪽
266 265화 21.02.23 26 1 9쪽
» 264화 21.02.22 28 1 9쪽
264 263화 21.02.21 24 1 9쪽
263 262화 21.02.20 25 1 9쪽
262 261화 21.02.19 25 1 9쪽
261 260화 21.02.18 26 1 9쪽
260 259화 +2 21.02.17 29 1 9쪽
259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6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8 1 9쪽
255 254화 21.02.12 25 1 9쪽
254 253화 21.02.11 25 1 9쪽
253 252화 21.02.10 29 1 9쪽
252 251화 21.02.10 30 1 9쪽
251 250화 21.02.09 29 2 9쪽
250 249화 21.02.09 32 2 11쪽
249 248화 21.02.07 33 3 9쪽
248 247화 21.02.06 40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