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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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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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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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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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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73화

DUMMY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여기에 있을 수만 없지.”


그러나 비가 그쳐도 진흙은 쉽게 마르지 않으니, 그 순간의 어색함을 느끼고 만 황호는 일부러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방금의 낯선 기류는 아마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 거라고 치부하고 말았다.


“어딜 가겠다는 거야?”


침대를 벗어나려는 태강이 두 사람을 등진 채로 물었다.


“그래. 꾸물거리는 건 이제 끝이야.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아니, 내 말은 ‘어디에’ 가려고 그러냐는 거지. 어디를 ‘가겠다.’ 그 자체를 궁금해한 게 아니야.”

“알면서 뭘 물어?”

“몰라서 묻는 건데.”


말하는 도중에 숨이 턱밑에서부터 막히는 듯한 아리송한 고통을 느낀 태강이 헛기침을 참아내며 빈정거렸다.


“오늘 정도는 그냥 여기에 머무는 게 좋을 듯한데.”


슬그머니 회유책을 쓰기로 한 녹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안 돼. 하루라고 해도 그 하루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아? 일을 완성할 만큼의 시작을 못 한다고 해도 결국에 어느 하루에는 일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을 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오늘’이라고 하는 하루란 말이야.”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태강이 나를 갑작스럽게 되살렸는데 나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 무엇보다도 금기를 깨뜨린 이상······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할 거 아니야. 우리 또한 인간이기에 스스로 저지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하지만 그건 너의 죄도, 나의 죄도 아니잖아. 너의 부활은 태강이 저지른 일이니까!”


모든 책임을 난데없이 전가 당하고 만 태강이 이제는 완전히 일어서서 황호의 삿대질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든 건 누구였던가. 나 자신이었던가. 과연 나 자신만이 고독도 아닌 비애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마음가짐이란 도대체!

황호가 내놓은 지적은 틀리지 않았으나 오롯이 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보다 더 회색적인 문제가 있을까. 말수가 늘수록 말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머릿수가 많아지니 방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는 어쨌거나 분명한 책임을 누구에게도 덮을 수 없다는 점에서 우선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태강은 이 일에 휘말릴 필요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 탓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내 죄가 될 수도 있는 게 내 목숨인 거야.”


무슨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태강은 녹수의 목소리가 그사이에 걸걸해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좋아.” 당장은 고집을 물리기로 한 황호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대신에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할 거야. 난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태강이 무슨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고민하는 동안에 녹수가 알겠다는 대답으로 대화를 매듭짓고 말았다. 구태여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아쉽지는 않았지만, 녹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살갗에 잘 닿지 않아서, 먼 미래를 내다보듯이 두 사람의 언행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어때? 난 황호 네가 여기서 지내고 있는 줄도 몰랐거든. 지금 아무것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야.”


그건 태강이 할 말이었다. 하지만 녹수가 눈치껏 이쪽으로 보내는 시선에 태강은 지금 그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대변하고 있음을 짐작해냈다.


“보이는 그대로야. 나는······ 그 시집을 읽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고, 네가 야담을 만난 이후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내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어. 무엇보다 네가 없었으니까.”


황호가 이미 퍼석한 제 얼굴을 무자비하게 문지른 후에 의자로 가 앉았다. 녹수도 구석을 벗어나 나오더니 태강을 끌어들이고는 함께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언젠간 그랬어야만 했어. 우리는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이런 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거야 그래.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단지 이제까지의 소행들의 한 가닥 실로 이어졌다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부터 갑자기 잘려 나가버렸단 걸 알게 되어버렸다고 하면 내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때 백면은 날 죽이고 어디로 갔는지 알아?”


녹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노인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순진무구한 눈짓으로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은 귀천에 있어.”


태강이 어버버하는 와중에 황호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은 귀천에 찾아갈 작정인 거지?”

“그렇지 않아. 백면은 가장 마지막에 만날 거야. 너도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물론······ 그동안에 네 마음이 바뀌지 않았나 해서 그러지.”

“난 그대로야. 계획은 달라진 게 없어. 하늘에 뜬 달이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면서 황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달은 물론이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걸리는 것이라고는 온통 마음에만 있으니, 그러나 근심과 걱정은 이 높이만큼이라도 솟아오를 수도 없었다.


“지금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아이가 도리질을 하듯이 고개를 흔든 태강이 두 팔을 들어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곧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팔을 흘러내렸다. 그는 듣기 싫다고 해서 곧 듣지 않아도 되는 게 어리석은 선택임을 모르는 수준의 철부지는 아니었다.


“녹수 널 죽이려고 했던, 아니 널 죽였던 게 백면이었다고? 그럼 야담이 본 건 전부 다 뭔데?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백면 이름은 전혀 없었는데. 황호 너도 다 이야기해준 건 아니지만! 난 도대체 뭐야? 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지?”


자책으로 끝난 태강의 질문은 두 노인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태강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젊음처럼 원망의 눈길로 이따금 그들을 노려보다가 또는 죄책감에 휩싸여 고개를 떨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여전히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녹수로 엄밀히 말할 것 같으면, 그녀는 입을 열지 못한 것이었다.


“녹수 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오늘은 그냥 여기서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아.”


황호가 태강의 엎어진 정수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속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자에서 일어나서 다시 문가로 나섰다.


“그때 백면이 널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를 가정한 것에 불과했지만, 마치 그 안에 미래를 바꾸는 힘이 깃든 것인 양 중얼거렸기에 태강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더욱 헤집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백면은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대고 달아난 거야?”


노력 끝에 꿋꿋해진 태강이 옆의 녹수를 슬프게 쳐다보며 말했다.


“전부.”


황호가 뒤쪽을 흘깃거린 다음에 천천히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녹수가 짧게 대답했다.


“전부라니? 그게 가능해? 걘 그냥 사랑에 실패해서 그랬던 거잖아. 그런데 뭐가 이렇게 보잡해.”

“허무라는 게 원래 그런가 봐.”

“허무라는 건 원래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거 아니었어? 그게 어떻게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 애는 우리를 원망하는 게 아니야.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거지. 그리고 그 애가 죽이려는 것도 우리가 아니야.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살아 있는 게 백면 그 아이야.”


아이를 달래듯이 따뜻한 손길로 태강의 등을 토닥이며 녹수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 말해줄게. 하지만 황호와 있을 때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돼. 어쩌면 반 정도는 믿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그건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가능할 거야. 천규가 없는 너는 용기를 낼 줄 모를 테니까.”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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