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386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2.24 23:59
조회
22
추천
1
글자
9쪽

266화

DUMMY

며칠이 지나도 소용이 없는 일인가 보다. 아니, 마음이 걸린 일에 시간이 필요하던가? 마음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삶일 것이다. 그렇다지만 삶은 시간을 전제로 만들어질 텐데 어째서 마음은 시간이 아닌 삶만을 선택한단 말인가. 모든 심적 고통이 어느 시각에서부터 생겨났는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느 착각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이 피나는 노력이야말로 불필요한 것이 될지 모른다.


“뭐야! 피잖아!”


생각이 이리도 왕성한 혈기를 품고 있는 줄도 몰랐다. 태강은 제 손에 흐르는 피를 마치 눈물을 흘리듯이 바닥에 떨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처럼 그게 뭐야?”


산발치의 오솔길에서 그는 그렇게 경건한 마음가짐을 너무도 간단하게 내려놓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때 황호가 수풀이 우거진 곳을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왔다. 그러고는 넓적한 바위에 놓인 자신의 핏방울을 징그럽다는 듯이 보고 있는 태강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몰라.”


정갈한 수도승 차림새에 발꿈치부터 어깨까지 자신의 모습을 훑은 태강이 당당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옷이 뭐가 중요하겠어?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게 아니야.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 보이는 것조차 판단할 수 없어.”


황호가 그를 흘기며 혀를 찼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로 온 그는 완전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한 채로 몇 걸음 뒤에 서서 태강이 바위 위에 도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모르는 소리! 한때는 옷차림으로 신분을 보여주던 때도 있었어. 그리고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 역할을 하거든.”


태강이 두 무릎을 탁탁 치면서 허구의 군중을 향하는 것처럼 위엄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슬픔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 원한다면 얼마든지 티가 나지 않는 감정이 바로 슬픔이거든.”


웬일인지 추레한 모자를 쓰고 오지 않은 황호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몸을 반쯤 돌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강은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수심이 더 깊어지는 변화를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더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거야 네가 그런 쓸데없고 영양가도 없는 소원들에 군말 없이 따라주니까 그렇지, 이 줏대도 없는 늙은이야!”

“태어나면 반드시 늙게 되어 있어. 누구든지.”

“아, 참. 진짜 답답한 소리만 하네. 네가 지금 늙었으니까 나는 그냥 단순히 하는 이야기였다고.”


태강은 전혀 도를 닦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구부정하게 앉아서는 뒷목을 잡은 채로 탄식했다.


“그나저나 왜 온 거야?”


하지만 다른 것에 연연할 겨를이 없는 그였기에, 이 짜증은 단순하게 극복되었다. 따라서 곧장 황호에게 건넨 질문에서는 수상한 저의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네가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


아주 우울한 목소리로 대꾸한 것치고는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나를 못 믿어도 정도가 있지,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 중에 가장 변덕이 심한 게 너니까.”

“너무하네. 그렇다면 너를 위해서라도 한 가지만 더 알아둬. 편견 속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편견이 아니라 오로지 진실이라는 걸 말이야.”


역시나 속상했던 감정을 금방 풀어버리고는 태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가장 변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황호가 뒷짐을 지며 물었다.


“그래! 그 편견에 대한 네 확신만큼이나! 그리고 나는 늘 상황에 맞게 대처할 뿐이야. 가장 중요한 건 순간이거든.”

“그럼 손은 왜 다친 건데?”

“순간의 실수였지.”

“순간이란 건 정말 무서운 거였네. 피까지 흘리게 되니까.”


태강이 황호가 있는 쪽을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명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든 피를 흘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순간이 곧 삶이니까.”


더 이어질 대화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는 대충 일언한 뒤에 바로 마음을 다스릴 침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물이 떠내려오듯이 그는 황호의 목소리에 붙잡히고 말았다.


“내가 도와줄까?”

“아니, 도대체 뭘? 지금 나 혼자 잘 해나가고 있는 거 안 보여?”


갑작스러운 난입에 세 번이나 참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방해는 용납할 수 없어진 태강이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지 않는데.”


황호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태강을 골렸다.


“네가 아까 한 말을 그렇게 금방 배신해버리면 어떡해.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부 판단할 수 없다며!”


더는 참을 수 없어진 태강이 눈을 부릅뜨면서 황호가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길은 생각만큼 날카롭지 못한 탓에 누구도 피를 흘리지는 않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자기 딴에는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 농담이었는지 황호가 추억에 잠긴 노인인 양 실실거리며 웃었다.


“아! 그래, 나도 그랬지. 그리고 너는 참 잘났어.”


이제부터는 유치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습관보다 무서운 것이 천성이었던 것인지 태강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이내 명상을 포기한 모양인지 반듯하게 잡아놓은 자세를 무너뜨리고는 마른세수를 하기도 했다.


“도와줄까?”


황호가 바람을 불어오는 찰나에 시원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뭐? 날 도와준다니, 갑자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뚱딴지야?”

“나한테 좋은 수가 있어.”

“뭔데? 그게 있었으면 나한테 떠넘기기 전에 진작에 너 혼자 했어야 할 거 아니야.”


태강이 이마를 짚으며 투덜거렸다.


“나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거니까 그래. 네가 필요한 거거든.”

“그럼 그건 네가 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널 도와주는 거잖아!”

“비슷해.”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그런 건데, 뭘!”


이토록 대화가 통하지 않음에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인 태강은 가슴까지 치면서 어떻게든 자신을 답답하게 하는 역정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불필요한 노력인 듯하다.


“내가 널 슬프게 만들 거야. 어때? 슬픔만큼 가장 마음을 강하게 다스리는 감정은 없거든. 너도 알 거 아니야, 천규를 잃었을 때 네가 어떤 짓까지 저지르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돼.”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태강이 바위 위에 놓인 동상처럼 굳어서 황호를 미워하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난 이미 충분히 슬퍼. 내가 얼마나 슬픈지 내 심정에 대해서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어차피 우린 서로의 생각을 절대 읽을 수 없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 이상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팔을 뻗으며 그는 황호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도 정상적으로 난 길이 아니었기에 황호는 그에게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네가 슬픔을 잘 견디고 있는 걸로 보이는걸.”


황호가 억양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맥없이 말했다.


“그야 그걸 견뎌야지 뭘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야. 알겠어? 나는 정말 제대로 내 의사를 표명했어. 그러니까 넘겨듣지 마. 절대로!”


반면에 태강의 말투는 갈수록 빨라지는 속도를 쫓느라 그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슬픔을 견디는 건 좋은 거야.”

“알면 좀 그냥 날 혼자 둬. 아까 피를 흘린 것도 다 어느 정도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런데 슬픔을 견디지 않으면 마음이 더 강해져.”

“그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태강이 엉거주춤해진 자세로 성질을 부렸다. 소리를 지르기는 했어도 응어리가 아직 한가득인지 그의 표정은 이보다 더 언짢을 수 없다는 듯이 구겨져 있다.


“슬픔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되거든.”

“슬픔에 맡겨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슬픔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대신에 자라기만 하지. 그러니 네가 지금 붙들고 있는 그 생각을 더 키워줄 거란 말이지. 어때? 이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너 혼자 붙들고 있는 것보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정말이지, 사람이 슬픔을 느낄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슬픔이라는 깊은 강에 빠져서 모든 생각이 젖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호는 그렇게 서서히 태강을 그 강에 빠뜨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7 276화 21.03.06 25 1 9쪽
276 275화 21.03.05 24 1 9쪽
275 274화(수정) 21.03.04 26 1 9쪽
274 273화 21.03.03 26 1 9쪽
273 272화 21.03.02 28 1 9쪽
272 271화 21.03.01 25 1 9쪽
271 270화 +3 21.02.28 27 1 9쪽
270 269화 21.02.27 23 1 9쪽
269 268화 21.02.26 26 1 10쪽
268 267화 21.02.25 24 1 9쪽
» 266화 21.02.24 23 1 9쪽
266 265화 21.02.23 26 1 9쪽
265 264화 21.02.22 28 1 9쪽
264 263화 21.02.21 25 1 9쪽
263 262화 21.02.20 25 1 9쪽
262 261화 21.02.19 25 1 9쪽
261 260화 21.02.18 26 1 9쪽
260 259화 +2 21.02.17 29 1 9쪽
259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6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8 1 9쪽
255 254화 21.02.12 25 1 9쪽
254 253화 21.02.11 25 1 9쪽
253 252화 21.02.10 29 1 9쪽
252 251화 21.02.10 30 1 9쪽
251 250화 21.02.09 29 2 9쪽
250 249화 21.02.09 32 2 11쪽
249 248화 21.02.07 33 3 9쪽
248 247화 21.02.06 40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