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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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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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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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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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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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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화

DUMMY

그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혹은 모든 게 평범하고 지리한 하루같이, 언제든 쉽게 관심을 끌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홀연히 시야에서 없어졌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모개흥정으로 인생을 다 팔아버린 사람인 양 그의 걸음걸이가 막힘없이 터덜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걸어가는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나나 또한 알 도리가 없었다.


“노를 만들 재목을 고르듯이 신중해야 해.”


무엇보다도 허름한 집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던 태강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은 채로 으레 우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책상에서 불을 밝히는 초 하나에 의지하여 희미하게 살피는 것이어도 역시나 가난은 도저히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봐, 듣고 있어?”

“응. 듣기도 하고 보고도 있어. 매우 바쁜 상태야.”


태강이 새로 가져온 호두나무 의자에 앉으며 늙은 황호가 혀를 찼다. 이는 그를 더욱이 보통의 노인처럼 보이게 했는데, 조금 구부정한 등이 특히나 그러했다.


“노를 만들지 뭐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의자는 잘 가져온 것 같네. 한심하게 어디서 낡은 의자 하나 훔칠 작정이었지?”


그러나 황호가 어떻게 나이 들었는지는 태강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부실하고 허약한 슬픔이라는 감정에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는 게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엉성한 감정의 틈에는 잡념이 들어차기 마련이다.

태강이 의자를 두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황호가 그를 못마땅하게 흘긴다.


“지금 의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뭘 부탁했는지 모르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알면서 그러지 못할 건 또 뭐야. 대충 재목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의자는 호두나무로 만들었거든.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난 이 나무로 만든 게 제일 좋더라. 뭐든지 간에. 그럼 난 호두나무로 정했어. 이제 황호 너만 결정하면 돼.”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네.”

“그러니까 비유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늦여름의 아침이 지닌 풍경은 싱그럽기는 하여도 풀 내음이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은 못하리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바로 앞에서 모두 누릴 수 있다고 한데도, 낡아 빠진 집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면 무덤가에 있는 나무처럼 본연의 존재가 가진 가치를 잃고서 항상 공중에 떠도는 의미만을 찾아다니리라. 그리고 바람의 속도를 쫓는다고 해도 그 용도는 영영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가운데 모든 것이 실로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자가 있다면 늦지 않게 용기를 얻어 밖으로 나서기를. 한 발자국이면 충분한 그 모험 속에서 비록 아침을 잃는다고 하여도 낮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낮 또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밤은 이 둘보다 더 오래 머물러 색다르고 경이로운 풍경으로 백합이 몰래 뿌리를 내린 자리까지 비밀로 해줄 터이니.

그렇게 느닷없이 즐거워진 기분으로 태강이 대화 도중에 밖으로 나섰다. 낡은 문은 잘 닫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방적이었고, 고작 몇 걸음이면 충분했기에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잔소리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정신이 사납네. 어쨌든 명심해야 할 건 네 마음이라는 거지.”

“마음에 새겨야 할 게 마음이라니, 뭐가 그래? 되게 웃기네.”


밖은 더 어두컴컴했다.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거미줄을 치듯이 하늘에 선을 그어놓는 바람에 더욱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래도 달이 있는 곳을 찾아낸 태강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더 들어 보였다.


“그야 네가 해야 할 일이니까.”


황호도 이제 뒤돌아서 태강의 뒤통수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에 그는 태강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마치 과거를 상대로 이야기하듯이 중얼거렸다.


“천규한테도 성공한 적 없는 일이야. 그런데 녹수를 상대로 그럴 수 있을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슬픔 속으로 가라앉은 눈길로 태강이 달을 향해 물었다. 실은 끝까지 망설일 줄 알았다. 그런데 나나를 만나고 온 뒤로는 이상하게 결심이 섰고, 그대로 그는 호두나무 의자를 들고 황호를 찾아온 것이다.


“마음에 현실을 담아두면 돼.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담아두고 그걸 직시해. 그렇게 하다 보면 될 거야.”


황호가 여전히 빈자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


태강이 얼굴을 순식간에 내리고는 황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렸다. 그러고서는 날아가는 말소리가 자그마한 촛불에도 그만 거대한 불길을 만난 것처럼 타버리는 것이 몹시 애달픈 듯한 얼굴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내 마음이 현실이거든. 그래서 황호 네가 말하는 방법이 확실한지 잘 모르겠어. 믿을 만한 방법인 거야? 네가 경험했다거나.”

“마음에는 따로 방법이 없어.”

“그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네가 굳게 다짐하기를 바라는 거지. 백면이 목숨을 끊었을 때만큼이나 강하고 흔들리지 않을 다짐 말이야.”


뭔가 못마땅한 것인지 황호가 추위에 떨 때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태강에게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를 두렵게 지켜보고 있던 태강이 마지 못해 입을 연다.


“······그래, 좋아.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확 와 닿네. 역시 경험이 중요하긴 한가 봐. 노력은 해봐야지.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누굴 살리고 싶은 마음이 이제 전혀 없거든. 이참에 나도 사라져서 사람들 머릿속에서 기적이라는 단어를 아예 없애버리는 게 어떨까 생각 중이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거야말로 정말 웃긴 소리야, 태강.”


황호가 도로 자리에 앉더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다시 시선을 교환할 수 있었다.


“어째서?”


태강이 매우 불쾌했는지 눈독을 주듯이 황호를 바라보았다.


“그야 인간은 절대로 기적을 잊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잊어버릴 수도 있어.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말이야.”

“기적은 상황을 뒤엎는 것이기에 절대 불가능할 거야.”

“그렇다면 슬픔은 어떨 것 같은데?”


이번에는 황호가 비슷한 시선으로 태강을 대했다.


“슬픔은······ 아니, 그러니까 슬픔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사라질 수 없어. 슬픔과 허무는 결코 사라질 수 없어.”

“난 행복일 줄 알았는데.”


태강이 무심하게 대답하자 황호는 방금 자신이 시원스럽게 웃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인 양, 편벽(偏僻)한 생각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였다.


“실은 말이지.”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행복은 너무나도 잊기 쉬워. 그건 자꾸 잊어버리게 될 거야. 덧없는 건 나 같은 슬픔일 텐데, 덧없는 것들은 무게가 없으니 견디기에 너무 쉬워서 자꾸만 끌어안게 되고 행복 같은 것은 짐짝처럼 여기는 게 인간이거든.”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독백은 어느새 방백이 되었고, 청중 또한 없다는 사실에 그의 방백은 다시 독백이 되었다. 다음에는 뒷말을 마저 더 잇지 못했기에 독백은 무대 위를 내려가 그대로 혼잣말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니까 신중해야 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태강.”


황호가 화제를 돌리듯이 고개를 돌려 태강을 외면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따지면 마음이야말로 나의 현실이야. 현실을 담으려거든 마음이 뭔지 제대로 알아야겠단 말이지. 자칫 알지도 못했다가는 내 마음에 맞지 않은 현실을 담아버리는 바람에 분수에 넘치는 짓을 저지를 수가 있잖아.”


태강 역시 그를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마음이 현실이라고 해서 그렇게 현실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알잖아, 너도 실패했다면서.”


비소가 섞인 말투로 황호가 달갑지 않은 소리를 꺼냈다.


“그래, 그러면 나의 마음이 곧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내가 입증하면 되겠네.”


태강은 갑작스러운 오기에 혈기를 더하여 당당하게 외쳤다.


“좋은 생각이야.”


황호가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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