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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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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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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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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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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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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68화

DUMMY

“그래서 내가 알려주려고 왔어.”

“네?”

“네가 어제 내내 고민하던 거 말이야.”


뜻밖에 나타난 건 초영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등장은 그야말로 도진의 것이기는 했다. 강의가 끝났는지 문을 열고 서서히 줄을 지어 빠져나오는 사람들 끝으로 도진이 나왔을 때 그를 가로막은 건 벽에 기대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던 그녀였다. 즉, 등장으로 인한 충격과 분위기의 전환은 그녀의 손아귀에 있던 것이다.

도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의실 문에 조그맣게 난 창 너머로 기현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학생들보다 먼저 나간 것으로 보이며 강의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 생각을 어떻게 읽으신 거죠?”


비밀을 들켰다기보다는 비밀이 이전에 존재했단 것을 몰랐단 듯이 놀란 도진이 물었다. 초영이 제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어서다.


“생각이 아니라 기억을 읽은 거야. 어제 네가 다른 애와 나누었던 대화 말이야. 만약 내가 마음을 읽었다면 오늘이 아니라 어제 왔겠지?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흑석한테 캐내서 알아왔지.”

“아, 그렇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른 곳에서 말씀을 들어도 될까요? 아무래도 장소가 좋지는 못한 것 같은데.”

“물론이야.”


되도록 다른 사람의 눈에 들지 않도록 뒤쪽으로 난 계단으로 건물을 나가고자 결심한 도진을 순순히 따라나선 초영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안 할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혹시라도 태강을 만나게 된다면 나한테 직접 찾아와줄래?”


그러다가 몇 계단 안 남은 차에 갑작스럽게 도진의 등에 대고 부탁을 털어놓았다.


“태강 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눈치껏 걸음을 늦춘 도진이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확신의 대답에 앞서 초영이 선뜻 내놓지 않은 말의 속뜻을 물었다.


“그 애가 천규를 빌미로 한 수작에 결국 넘어가 버린 것 같아.”


화근을 만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쉽게 떨칠 수 없던 초영이었다. 그녀는 입술 부근을 손바닥으로 괴롭게 감싸며 그렇게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누구의 수작에 말이죠?”


번개가 내리꽂히듯이 도진은 초영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한 질문은 순전히 초영의 대답에 대한 일종의 반사 작용이었을 뿐, 당장에 그녀에게서 진실을 요구하는 심문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암묵 속에서 걷기 시작했다.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지라 도진은 발길이 닿는 대로 초영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는데, 운이 좋게도 어느 한 곳이 외진 구석에서 느릅나무 그늘 밑에 벤치를 두고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초영은 다리를 꼬고 앉은 후에야 비로소 도진을 마주 보며 자신이 이곳으로 온 목적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황호 말이야. 네가 이미 의심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진이 너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 애가 아니니까 이미 어렴풋이 예견은 하고 있었을 거라고 봐. 그렇지 않니?”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는 없어. 지나친 겸손은 때로 너를 거짓에서만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진실에서도 멀어지게 하니까. 태강 그 애가 이미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자취를 감춘 거로 보아선 분명해.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너희한테 전하라고 했던 이야기는 전부 하고 갔다는 점이라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황호 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그 길로 안내할 작정으로 도진이 두 눈에 힘을 실었다. 자신 역시 황호의 뜬금없는 방문에 동행해야만 했던 적이 있었기에 언제든 그곳에 다시 찾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은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어. 우리도 그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거든.”


초영이 손을 저어가면서까지 도진의 제안을 사양했다. 당장에 일을 해결하려고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더 큰 곤액(困厄)을 치르고 말 것이라는 판단하에 물러나서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부터 대충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된 도진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영이 말을 이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도진아. 난 널 도와주려고 온 거야.”

“저를요? 저는 글을 쓰기만 하면 됩니다. 초영 님의 도움을 무작정 거부하겠다는 말은 맹세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딱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제 노력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대화가 이어질수록 어째선지 제 입장만 난처해진 것 같아 말을 하는 도중에 도진은 어깨를 안으로 웅크리며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참, 너희는 아직 모르겠구나.”


초영이 손뼉을 치며 제일 먼저 일렀어야 할 사실을 떠올렸다.


“너희가 너희와 같은 백면의 내생으로 알고 있던 고여명 씨는 사실 내생이 아니야.”

“예?”

“말한 그대로 알아들으면 돼. 자세한 건 내가 너를 도와주면서 털어놓을게. 자세한 것보다 확실한 걸 들으려면 아무래도 백면을 직접 만나야겠지만, 어차피 너희 모두 곧 만날 거란 예감이 드니까 이건 네 스스로 결정하면 돼.”


초영이 빠르고 간단히 끝낸 상황 정리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도진은 초영이 진정하라는 말을 별도로 건네기 전까지 기억이 끊긴 사람처럼 어물거렸다.

백면은 정말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서 모두를 농락한 것일까. 복수의 차원으로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가지고 그럴 수가 있지. 아니면 어차피 자신의 영혼에 불과하니 그것은 어쩌면 자학이었던 것일까.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이 그 어떤 노력에도 파괴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롯이 사랑의 실패로 인해서만 그런 슬픔이 생겨날 수 있을까. 나는 모를 것이다. 사랑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으니.


“아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 고도훈이 바로 백면의 내생이었으니까. 그 애가 살인을 한 성인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해. 지금까지는 저주를 받은 불쌍한 성인이었을 테지만, 저주를 내린 성인이었다는 관점이 한 번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어떻게 될 거 같니?”


초영이 도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아주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사색은 시간과 시야를 모두 요구하므로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내다보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도진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글쎄요······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아마 아닐 거야.”

“그렇다면 똑같이 12성인을 상대로 악담을 비롯해 저주를 퍼붓게 되는 건가요?”

“그런 사람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아니라고 해둘게.”


조금씩 핵심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스무고개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던 도진이 그만 초영을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건성으로 한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는 꽤 진지했다.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거야. 우리가 자신들의 마음에 끌려다니는 존재들이 아니란 걸 명백히 알게 되는 날이 될 거거든. 어때, 도진아? 너는 그런 날이 오면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거라고 보니?”

“지금 이 논외의 이야기가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역시나 그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널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네가 쓸 글이 어떤 글인지를 알기 위해서 묻는 거니까.”

“지금 이 모든 게 하나로 엮어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지. 왜 안 되겠니?”


초영이 팔짱을 끼며 새침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피로해 보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도 머리를 묶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도진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느리게 입을 뗐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어느 쪽이 더 모두를 위한 선택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알기 전에 제 생각조차 무엇이지 제대로 모르겠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을 더 바라는데?”


별안간 도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해도 긴장하고 있었다. 겁을 먹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수도 있으나, 이는 그 누구도 명백히 밝힐 수 없는 점이다.


“저는······ 저는 진실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 일이 제게 주는 부담감도 견디고자 노력하는 중이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그쪽으로 널 도와줄게. 그 시집과 백면의 유품에 얽힌 기억을 모두 너한테 사실대로 들려주겠다는 거야.”

“어째서죠?”

“나도 내 몫의 부담감을 떨쳐내야만 하거든.”


아주 오래전, 엉겁결에 떠안은 그것이 제 살과 뼈를 집어삼키는 것까지는 묵과하더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먹어치우기 전까지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초영은 생각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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