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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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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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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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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74화(수정)

DUMMY

뒤죽박죽이다. 물건만이 엉망인 것이 아니었다. 기억 또한 그러했다. 짚는 곳마다 집히는 추억에 흉터를 건드리는 것처럼 가슴이 아릿하기까지 했지만, 곧 그 순서가 시간을 거슬렀다는 점에서 가슴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폭포가 흐르듯이 초영의 미간이 뒤틀리게 된 무렵도 이쯤이었다.


“뭐가 없나요?”


그녀가 원한다면 당장에 물이라도 한잔 떠올 기세로 도진이 등을 약간 구부렸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긴 침묵 끝에 낸 첫마디였다.


“아니. 기억이 없을 때는 오히려 할 말이 많아져. 책의 첫 장과도 같다고 할까나? 아무것도 없는 빈 종잇장을 넘기고 나면 그 뒤에 수많은 낱말이 정렬된 것처럼. 그런데 이 경우는 달라. 전부 다 배열을 이탈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도저히 알 수 없게 해버린 꼴이거든. 확실히 유품으로 남겨둘 만한 물건들이기는 해.”


초영의 앞에는 화분 두 개를 제외하고서라도 도진이 빌려온 백면의 각종 유품이 즐비했다. 오직 이것들만이 그래도 순서를 따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제일 먼저 집어 든 것은 여명이 받았던 만년필이었다. 아무래도 시집과 관련이 있을 것이 눈에 훤하니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도진 또한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제일 궁금해하는 것부터 말해줄게. 아마 제일 흥미로운 걸 거야.”


초영이 느닷없이 지은 눈웃음에 당황한 도진이 긴장했다.


“이건 가짜야.”

“가짜라니, 그렇다면 백면의 유품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으음, 아냐. 그건 아니야. 백면이 이 애의 주인인 건 맞아. 걔가 썼던 거니까. 그런데 이건 백면이 죽은 후에 가진 물건이야. 생전에 사용하던 게 아니라 사후에 사용했단 소리지.”

“그럼 그게 어떻게 암실에서 나왔던 거죠?”

“그러게. 영월도 주면서도 이상한 점을 못 느꼈나?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걔는 알고 있어야 할 텐데. 하긴, 걔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데 선수니까 뭘 기대할 수 있겠니? 만년필은 백면이 죽은 뒤에야 나온 물건인데 말이야.”


그 역사를 모르고 있던 도진은 초영이 가볍게 던진 필기구 하나를 받아드는 데에도 큰 힘을 들여야만 했다. 제 손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조심스레 관찰하면서도 그는 도구를 다룰 줄 모르는 원시인인 양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했다.


“그럼 이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래도 언어는 진심이나 의지만큼 쉬이 잃어버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무의미하다는 것까지 언어로 여기는 언어야말로 감정에 미숙한 인간이 기대어 쉴 수 유일한 방편이었으니.


“녹수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단 게 좀 부끄럽네. 우리는 좀처럼 암실에는 잘 들어가지 않으니까.”

“어째서죠?”

“거긴 너무 어둡잖아. 어둡기만 하니? 창도 없어서 공사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공기까지 탁해. 그런 곳에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니? 성인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어. 다만 영월이라면 그곳이 더 편할지도 모르지.”

“영월 님의 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초영이 대답 대신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똑바로 뜬 자신의 눈을 가리켜가며 말을 잇는다.


“그 애 한쪽 눈은 어둠에서 더 빛을 보니까 말이야. 무의식 속에서 진심을 읽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야. 참, 그리고 이 만년필은 녹수랑 백면이 몰래 주고받은 편지에 쓰인 것 같아. 간간이 내 험담도 좀 넣었더라고. 혹시 나보다 먼저 만나게 된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너라도 확실히 언급해 줘야 해. 알겠지?”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 좋아. 이제는 반지를 볼까? 이거라면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초영은 나나가 받은 안경과 조이가 받은 시계 사이에 놓인 반지를 집어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루비가 박힌 반지는 안수가 전해 받은 것이었다.


“이건 딱 봐도 짐작되지 않니?”


네 번째 손가락에 넣은 반지를 곧 빼낸 초영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굴렸다. 꼭 보름달을 오랜만에 마주한 것 같은 즐거움이 그녀의 얼굴에 전반적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혹은 그 달이 걸린 하늘을 실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설움을 한 번에 씻어낼 정도로 많은 양의 비를 흠뻑 만끽하는 것처럼 눈동자는 금세 촉촉해졌다.


“두 사람의 것인가요?”

“백면이 주인은 아니야. 물론 그 애가 남긴 물건이기는 해도, 그 애의 반지는 아니고 단지······ 단지 그 애의 마음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당연히 알지?”

“알 것 같습니다.”


도진은 그 원 너머로 보이는 초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이걸 전하려고 간 날 죽었던 거야. 불쌍하기도 하지. 내가 기억이 아니라 순간을 읽어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니?”


취기가 도는 듯이 두 볼이 슬프게 붉어진 초영이 초점을 또렷하게 잡아내며 도진을 마주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제정신이었다. 성인의 도움이 있건 없건 간에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이 두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언젠가부터 날 때부터 이별에 내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초영 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때 그 여자를 죽이려고 온 암살자는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그래! 너희도 그 기억을 본 적이 있구나.”

“예, 흑석 님이 주신 부채로 말이죠.”


초영은 곧 한쪽 볼을 짓누르다시피 심히 턱을 괴고는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역시 이건 너무 괴로운 일이야.”


곧 반지를 탁자 위로 내려놓은 그녀가 말했다.


“혹시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요?”


도진이 저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아니. 그 뒤로는 이 반지를 누구도 쥔 적이 없어. 영월이 암실에서 꺼내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이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알 것 같아도······ 잘 알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반지는 백면 그 애가 직접 만든 거야.”


역시나 마찬가지로 도진의 손에 반지를 올려주며 초영이 이야기했다.


“흑석한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는데 흑석 걔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던 거지. 그래도 백면 걔는 아무렇지 않아 했어. 오히려 자신이 직접 이런 소중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더 뜻깊은 일이라고 여겼던 거지. 그 뒤로 백면은 정말로 결심을 현실로 만들어냈고 반지도 만들었던 거란다. 여기까지만 말할게. 그 애가 사랑을 잃은 날 이후로 이 반지에 손도 대지 않았단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일 테니까.”


괜히 진실을 알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올 정도로 도진은 반지를 바라보면서 이상한 우울감을 느껴야만 했다. 사랑을 잃어본 적이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면, 자신 역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서, 어느 시점에서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사랑의 부재가 곧 사랑의 상실이 될 수 있었던 건가? 언어로 정의하지 못할 감정이라면 대체······ 애써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지?


“마음이 들리지 않으니까 그래.”


도진의 속마음을 눈치껏 알아채고 있던 초영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예?”


화들짝 놀란 도진은 도저히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들을 수 없어서 그래.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까. 들리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삶을 이어나가면서도 그것을 버틸 수 없다고 믿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그래서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믿는 거야.”

“말로 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초영은 뭔가를 줬다가 빼앗는 게 가장 파렴치한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도진의 손에 들린 반지를 다시 낚아채갔다.


“될 수 있어.”

“그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어떻게든 알 수 있게 되어 있어.”

“전혀 방법이 없다고 해도 말인가요?”

“그래.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여겨도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게 사랑이야. 때로는 그리 달갑지 않은, 혹은 가장 서글픈 방식으로라도 말이지. 바로 이 반지처럼.”


그녀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면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다시금 보고 말았다. 언젠가 나나와 도진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부챗살 너머로 바라보던 이별의 순간이었다.


“이제 다음으로 시계를 보도록 할까?”


그녀는 반지를 빼지 않은 채로 기억 속을 헤엄쳤다.


그녀는 애통함이 붉은빛을 내는 반지를 빼지 않은 채로 기억 속을 헤엄쳤다. 그 반지의 주인은 오로지 기억 속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74화에 오류가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혹시 이와 같은 설정 오류를 발견하셨다면 언제든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존에 마련한 구상에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나, 간혹 이렇게

수사법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고도 하니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님에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초영이 도진의 속마음을 듣고 있는 것으로 제가 묘사했는데,

이는 명백하게 제가 저지른 실수입니다.

‘도진의 속마음을 천천히 알아채고 있던 초영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로

제가 표현했더군요.

아무래도 기억을 읽는 존재는 초영뿐이기에

여러 명의 심리와 행동을 그려내던 중 제가 잠시 헷갈려서 표현한 듯합니다.

부끄럽게도 이를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확인하였습니다.


‘도진의 속마음을 눈치껏 알아채고 있던 초영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로

수정하였으니, 부디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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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269화 21.02.27 2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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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265화 21.02.23 26 1 9쪽
265 264화 21.02.22 28 1 9쪽
264 263화 21.02.21 25 1 9쪽
263 262화 21.02.20 25 1 9쪽
262 261화 21.02.19 25 1 9쪽
261 260화 21.02.18 26 1 9쪽
260 259화 +2 21.02.17 29 1 9쪽
259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6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8 1 9쪽
255 254화 21.02.12 25 1 9쪽
254 253화 21.02.11 25 1 9쪽
253 252화 21.02.10 29 1 9쪽
252 251화 21.02.10 30 1 9쪽
251 250화 21.02.09 29 2 9쪽
250 249화 21.02.09 3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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