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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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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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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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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5화

DUMMY

그러나 이미 영혼을 얻은 그림은 관중이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떠드는 법이다. 고로 명작이라 하는 것은 곧 누군가 하나가 그림의 허점을 찾을 때까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수다쟁이다.


“보이지도 않게 되면 어떻게 그림을 그리려고 해?”


남자는 스스로 이렇게 나루(覶縷)한 명작을 그리고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점차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대사가 있건 없건 모든 작품 속의 예술은 인물은 이토록 아픈 곳만을 찌르니까 기존의 사람보다 더 성가신 존재였다. 그러다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상처가 독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과연 예술일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인생일지 남자는 문득 그런 의문을 가졌다.


“들을 수 없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거야 언제라도 한 번 음악을 만들 수 있던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이전에 그림을 그렸던 사람한테도 전혀 문제없는 일이야.”

“음악은 음을 떠올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악보를 볼 수라도 있잖아. 그런데 너는 네가 어떤 걸 그리는지도 모를 텐데 괜찮다고?”


입술에서만 머물러야 할 붉은색이 입가를 벗어나 턱 끝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질문에 집중하느라고 붓을 잘못 놀린 것이었다. 남자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들었을 때보다 침착하게 대응하며 마치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듯이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가 색다른 질문에도 여전히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어째서?”

“이제 난 그림을 그리지 않을 테니까.”

“이번 생에서는 계속 그림을 그릴 줄 알았는데.”

“이제 끝이야. 어차피 이런 일에 관심도 없었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려거든 삶을 위한 삶부터 살아야 할 텐데 그러기에 나는 영 글렀거든.”


놀랍게도 남자는 핏자국처럼 남겨진 부분을 수정하지 않았다. 고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지 그는 마치 모든 붓질이 의도되었던 것처럼 더 과감히 손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이젤 너머로 보이는 존재는 간신히 목소리만으로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 같은 생각을 하고 그래?”

“전혀. 대다수가 평범했더라면 인간은 이런 그림을 보려고 미술관 같은 데를 가지를 않았겠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 집안 어느 구석에 위대한 화가가 그린 그림과 위대한 음악가가 만든 악보를 반드시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넌 모든 기억을 다시 갖고 언제든 태어나는 존재잖아.”

“온전하지 않은 영혼을 갖고 태어난다면 그건 고통이야. 평범한 인간만도 못한 거니까.”


남자는 그사이에 대화를 여운 없이 끝내버리는 재주를 터득한 것인지 아무렇게나 공을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반면에 공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그림 속 존재가 실체를 얻지 않고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전혀 고민해본 적 없는 그는 끈질기게 들려오는 메아리를 다시금 감당해야만 했다.


“평범한 인간만도 못한 거라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니까.”

“그렇다면 천우의 이름으로 내거는 전시회를 그 애한테 넘기는 이유도 그거랑 비슷한 거야?”

“그런 건 왜 물어? 이건 내 일이야.”


남자가 무심코 잠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더니 저 너머의 산을 바라보듯이 이젤 위로 모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정작 끝나기도 전에 도로 앉고 말았다.


“하지만 감상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건 작품이 아니니까. 물어볼 수도 있지.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작품보다 더 가치가 없는 건, 사람을 끌어당기지 못하는 작품이니까. 그런 면에서 난 영월과 다르게 생각해. 넌 꽤 괜찮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어.”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그림 속 존재가 주도권을 빼앗긴 듯했다. 이번에는 상대와의 거리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돈 남자는 환상이 깨진 것처럼 기운을 잃고 말았다. 오로지 실망감이 묘연한 채로 남아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순간만은 조금이나마 솔직해지자고 다짐했다.


“아니, 그건 영월 말이 맞아. 난 그림에 재주가 없어.”

“시를 써서 풋내기처럼 사랑 고백하던 때에도 넌 똑같이 이야기했어.”

“그때랑은 달라. 적어도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털어놓았던 거거든.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아니야.”


괴로워진 남자가 최대한 그림에 닿지 않으려고 몸을 뒤로 빼면서도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지금 네가 그리고 있는 것들도, 지금까지 그린 것들도 전부 네 사랑에 연관된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아니야. 그게 아니야. 전부 내 그림은 아니야.”

“백면의 그림은 아니겠지만······ 천우의 그림은 맞지 않아?”

“전혀 아니야. 어느 쪽의 나라도 해도 그건 내 그림이 아니거든.”

“그렇다면 네 사랑보다는 백나나가 월계가 아닌 세계에서 태어나 자란 이유랑 관련이 있다는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를 떨기 시작한 그는 불안을 참지 못하고 숨을 길게 내쉬다가 곧 몸을 더욱 웅크렸다.


“알겠어. 그것까지는 묻지 않을게. 그건 네 결정이었고, 또 너만이 책임질 수 있는 결정이었으니까.”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림의 존재는 그리 유창하지 않은 말 한 마디로도 남자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 궁금한 게 하나 있어. 그건 너도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뭔데?”


나무가 자라듯이 등을 편 남자가 그림에 대고 물었다.


“백나나한테 정말로 전시회를 넘길 거야?”

“어떤 면에서 넘기는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 같은데.”

“내가 어떤 걸 염두에 두고 말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남자가 코가 간지러운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어서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상대방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잠깐 멈추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 애는 아예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을 걸 거야. 네가 네 그림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림이 경고하듯이 그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세 번째로 같은 대답이었다.


“그럼 네가 그걸 의도했다는 뜻이야?”

“걘 미술을 하고 싶어하니까.”

“너도 그렇다면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단 거야?”

“그거랑은 달라.”

“백나나는 너의 일부잖아. 그런데 어떻게 너랑 다를 수 있겠어?”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었지만, 남자는 아까 몸서리치지도 않고 아주 평온하게 그림이 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다른 인생을 살면 그렇게 되는 거야. 같은 영혼을 가졌다고 해도, 영혼을 나누어서 가졌다고 해도 함께할 수 없으면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어.”

“그리고 그런 사랑은 애석하게도 내 삶에는 없었지.”


아마 남자가 이때 자신의 모델을 제대로 바라봤다면, 그는 자신이 어떤 눈길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동정의 시선을 원한 게 아니었으니 그에게는 그런 수고를 겪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전시회는 걔가 갖게 될 거야.”


남자가 노력한 끝에 뱉어낸 한마디는 아까 들은 질문에 대한 자신의 보다 더 정확한 의견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로 도망 온 거지?”


그 노고를 알고 있는 그림이 상냥하게 물었다.


“어, 맞아.”


잠시 망설임으로 진전이 없었던 남자가 드디어 아까와 같은 붓질을 하게 되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돌아가면 황호한테 안부를 전해줘.”


정녕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지 상대에게 농담조로 말을 걸기까지 했다.


“뭐라고 전해야 좋을까, 그래.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 되겠네. 너도 잘 지내고 있었으니까, 나도 잘 지내고 있었다고 이야기해.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날 그 시집을 들여다봐도 답은 안 나올 거라고. 내 영혼의 일부에 기대서라도 그건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럴게. 그런데 전시회를 열지도 않을 거면서 넌 왜 그림을 계속 그리는 거야?”


또다시 파고드는 질문에 남자는 짐짓 당황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냥. 그리지 않고서는 도무지 삶을 견딜 수가 없거든.”

“그럼 너는 삶을 위한 예술을 하고 있는 거구나.”

“뭐,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어떤 정의에도 개의치 않아진 남자가 다시 입가에 초연한 손길을 뻗었다. 실수로 생긴 자국은 여전히 지우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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