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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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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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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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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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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9화

DUMMY

태강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나나의 입이 떡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심기가 불편해져서 입술이 샐그러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수도 있다. 이번에도 그녀는 소식을 듣자마자 엄습한 소격감에 여명을 후에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고민하느라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근거는?”


행동이 생각에 일치하기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므로 머릿속이 아직 복잡한 것과 별개로 그녀가 뱉은 말은 아주 짧았다. 그래도 그녀로서는 타당한 물음이었다. 태강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준 적이 없기에 혹시나 도진이 그 이유를 물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이제 차근차근히 알려주시겠죠.”


도진이 머쓱하게 눈을 슴벅거리며 대답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별로 놀랍지 않아.”

“이게 놀랍지 않다고요?”


이내 나나가 멍한 눈을 감았다 뜨면서 도진보다 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도진이 자연스럽게 받아넘겨 어째서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저번에 이미······ 아! 왜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나나의 입이 또 벌어진 것이다.


“뭘 말이에요?”


오히려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 쪽은 도진이었다. 나나의 태연한 반응이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을 단번에 증폭시켰다.


“저번에 내 방에 성인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났었거든.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 어쨌든 그때 나한테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줬는데······ 도중에 갑자기 멋대로 나가버리고 그다음에 난 바로 그림을 그리려고 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걸 받아들인 거야.”

“나나 씨답지 않게 이상하네요.”

“어째서?”


꼭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어떤 형벌이 가해질지 몰라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나나가 줄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종류의 일이라면 저보다 더 많이 걱정하고 그랬었잖아요.”


그러면서 도진은 식탁 가운데 놓인 화분 중 하나를 무심코 매만졌다. 아직도 생기를 되찾지 못하는 이파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이 아닌 삶에 집착하게 됨을 보여주는 손짓이었다. 죽음을 대변하는 병이나 시련이 어떤 존재에게 찾아오게 되면 사람은 그 존재에게서 서서히 손을 떼기 마련이다. 다만 도진이 손길을 거둔 이유가 아픈 존재를 다루는 법을 몰라서인지, 혹은 순전히 그러고 싶지 않아서인지는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너무 놀랐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모든 게 말이야. 정말로 그 사람이 백면일까? 뭘 하다가도 이 생각만 하면 도저히 집중할 수 없어지거든.”


나나가 언제라도 머리카락을 격렬히 쥐어뜯을 기세로 머리를 감싸더니 곧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백면이 아닐 이유가 없다면 그분이 바로 백면이겠죠.”


허공에서 손짓을 멈춘 도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나나가 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즉시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은 쪽으로 변한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만큼 나나 씨가 그림에 모든 걸 바치고 있단 뜻이니까요.”


도진의 이 잔잔한 위로에 드디어 침착성을 되찾은 나나가 서서히 감추고 있던 얼굴을 제대로 들어올리며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있어요?”


그는 나나를 배려해서 그녀의 고민에 조금이나마 될 법한 화제를 골랐다.


“도둑이 든 그날 이후로 조금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나아지고 있다니요?”

“다른 화가의 그림을 따라서 그리려고 애쓰지 않았단 말이지. 중요한 사실을 제일 먼저 들어놓고 깜빡한 것도 있으니까, 그냥 털어놔야겠다.”

“뭘 숨기고 있었던 건가요?”


도진이 짐짓 실망했다는 듯이 표정을 꾸미고는 나나를 놀렸다.


“그건 아니야.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건 또 내가 사는 세계랑 관련이 더 많은 부분이었으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었거든. 여기서는 표절이 아닐 테니까.”

“표절이라니, 표절 문제라면 벌써부터 지긋지긋하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이건 좀 다른 문제야. 월계에서 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표절은 아닐 테니까.”

“백면이 그림을 표절했단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맞아. 그것도 여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명작을 쏙쏙 빼돌린 거지.”


자신이 그런 수치스러운 짓이라도 한 것인 양 나나가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건가요?”


나나에게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표절 문제라면 생각만 해도 피곤해지고 마는 도진이 나나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응.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림을 보는 일은 정말로 좋아했고, 그걸 부정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내가 확실히 기억해. 전부 유명한 화가들이니까. 아니, 유명하다고 하기에는 잘 안 알려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확실한 건 거의 다 그 화가들을 대표할 만한 그림었다는 거야. 내가 처음 봤던 그림을 빼면 말이지.”

“처음 봤던 그림이라면 그분의 그림을 말하는 거겠죠?”

“맞아. 이 사람에 대해 알지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말할게. 그래야 내가 헷갈리지 않을 테니까. 폴 세잔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정말로 유명해. 어느 정도로 유명한지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이 그린 사과는 후세의 사람들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거든.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는 폴 세잔의 사과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은 그 사람들의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베꼈으면서 세잔의 그림은 이상한 걸 베낀 거야.”


낯선 이름에 놀라기도 잠시, 나나가 꺼낸 이야기는 그녀가 속에 혼자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꽤 복잡했다. 그러므로 도진은 말 속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손짓으로 허공을 두드리며 나나의 말을 끊었다.


“잠깐, 잠깐만요, 나나 씨. 그렇게 유명한 화가라고 하면 꼭 그 사과 그림이 아니더라도 무슨 그림이든지 이 화가의 그림일 것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 이건 완전히 다른 그림이거든.”


나나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가설을 부인하며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폴 세잔의 그림인 건 맞긴 해. 그런데 이건 완전히 졸작 취급을 받는, 그리고 딱 그런 대접이 적당해 보이는 수준의 그림이라는 거지.”

“대단한 화가라면 졸작이라 그래도 다르지 않을까요?”

“그건 화가가 아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야.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 모두가 세잔이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말하게 해준 그림이 그 작품이었으니까. 제일 궁금한 건 그 사람이 다른 세상의 그림을 어떻게 알고서 그대로 따라서 그렸는가 하는 문제인데, 정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뭐 내 머릿속에 들었다가 나오는 거야 일도 아니었겠지. 그래서 이건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어. 하지만 이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고.”

“걸작이 아니기 때문인가요?”


역시나 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그날, 사과에 관한 이상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태강 그 사람이 나한테 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거든.”

“태강 님이 뭔 말을 하셨던가요?”


이야기에서 도저히 흥미를 거둘 수 없어진 도진이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랬어. 그리고 사과에 대한 토론, 아니 어찌 보면 그건 그저 논쟁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마음에 걸렸고, 그 뒤로 세잔의 사과를 닮게 그리려고 하지 않고 내가 직접 산 사과, 그러니까 내가 보는 그대로의 사과를 그리려니까 남자가 왜 그 그림을 그렸는지 더욱 이해할 수 없어진 거야.”

“설마 사과가 아니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도진이 정성껏 추궁한 끝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나나는 농담으로 알아들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부정했다.


“전혀 아니야! 오래 둬도 괜찮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직접 그리다 보니까 느끼게 됐거든. 그거랑 관련은 없어. 내가 새로 품게 된 의문은······ 세잔의 의도야 아무도 모르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말이야. 왜 세잔이 다른 화풍을 흉내 낸 그림을 그 남자가 또 흉내를 냈을까? 세잔의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그림에서는 세잔이 아닌 다른 화가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정도거든.”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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