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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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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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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작성
21.02.1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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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4화

DUMMY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한 행방불명된 이의 이야기에도 어름하여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자가 성인에 다음가는 현자라면, 성인은 어떤 존재일까.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서 무작정 길을 걸으려는 자를 두고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그걸 어떻게 짐작했던 거니?”


바다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것은 실상 노대바람이 아니라 실바람이었던 것인지 그 부드러운 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며 초영이 물었다. 다소 위태롭게 갑판에 올라선 그녀의 뒷모습에 돌아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이의 뒷모습이 더 아득함을 깨달은 야담이었다.


“시간은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노를 저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래?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썼나 보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어도 그녀의 코웃음이 어째선지 바람에 실려 자연스레 야담에게로 가닿았다.


“이제 당장에 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지난날에 자신이 야담을 닦달했던 것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바닥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 육지를 바라보는 일보다 더 수월하기만 해서, 그녀는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무엇이든지 때가 되어야만 하는 법인데, 내가 그걸 알면서도 너무 이기적으로만 굴었던 것 같아.”


그녀는 자신이 야담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대화의 대상이 바다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 성급했던 걸까? 많은 사랑이 그 감정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지는 것처럼, 내가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시간을 견디지 못한 쪽은 백면인 것 같더군.”

“그러니? 참, 나는 이번 일 때문에 그게 줄곧 궁금했어.”


하늘에 떠오른 달처럼 번뜩이며 얼굴을 든 초영이 성큼이 다가와 야담 앞에 앉았다. 다리를 꼬았으나 평소의 그녀다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왜 우리 중에 아무도 시간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일까?”


바람결에 시야가 방해받지 않도록 두 귀를 단단히 붙든, 우아하고 세련된 미를 추구해오던 자신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행동을 하며 초영이 물었다.


“그야 시간은 감정이 아니니 그렇지, 너답지 않게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군.”


야담이 실소를 터뜨리며 대꾸했다. 그 역시 평소와는 다르게 더욱 감정적인 상태였다.


“너는 기분이 어땠니?”


초영이 그 웃음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말인가? 아주 최악이야.”

“아니, 백면의 내생이 실은 고도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약속처럼 굳건하게 흘렀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 약속이란 너무 덧없어서 항시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다행이던가. 침묵은 대답하기로 다짐한 야담 덕에 깨지고 말았다.


“결국에 우리 모두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주화와 나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었더군.”

“그래, 맞아. 그리고 누가 알았겠니? 그 시작에는 내가 백면과 함께하고 있었을 줄이야.”

“너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백면이 말하지 않은 탓이 더 커.”

“만약 백면이 그때 우리에게 말했으면?”


질문을 마치자마자 손에 땀이 찼다. 무릎을 감싼 손을 까딱거리며 움직여보았지만, 땀이 마를 리가 없다. 초영은 눈을 깜빡이며 바람을 기다렸다. 바람은 이미 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바람을 기다렸다.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군.”


야담이 비관적 결론을 최대한 담담하게 도출해냈다.


“그렇지? 내 생각도 같아. 지나간 일을 가정한다는 게 정말 우습기는 해도······ 그런 희망마저 없으면 무슨 수로 미래를 그려보겠어? 그래서 정말 많이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그때 백면의 사생활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결국에 똑같은 현재에 처했을 거라는 거야.”


초영이 옆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넓고 머나먼 풍경은 계속해서 시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알았지? 고도훈에 대해서 말이다.”


풍경이 실어나르는 시간 속에서 야담이 화제를 돌렸다.


“······여러 기억을 접했던 거지, 뭐. 백면이 내생을 난연으로 이끌었던 게 단순히 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고.”

“삼백 년이 지나지 않아도 변치 않을 사랑이라는 건가?”

“그래. 참 대단하지 않니? 차라리 걔가 사랑의 성인이었으면 좋았을 거야.”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서서히 심연도가 이들에게로 다가올수록, 실제로 야담과 초영은 자신들이 그곳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홍우현이란 사람 말인데.”


막상 도착하면 비겁하게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영이 미리 운을 떼고야 말았다. 지금 일러둔다면 언젠가 모두 알게 되겠지.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사랑 아니었나.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언어로만 사랑할 따름이지······.

그러니 이번에는 나도 그러도록 하자. 아직 진심에 이르려면 더 가야만 한다. 이 바다보다도 더 긴 여정을, 두 다리가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떠나야만 한다. 초영은 입을 닫기가 무섭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에게도 녹수가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나 봐.”

“듣자하니 그자는 모르는 모양이군.”

“맞아. 그래서 내가 고도훈에 대해서 새로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월촌에 머물러 지내면서 알게 된 것도 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하기가 좀 그렇네.”

“그 딸도 설마 백면의 내생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면 본인이 그렇다든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혹시 전해 들은 거 뭐 없니? 새 내생에 관한 꿈에 대해서 말이야.”


야담이 노를 보다 거칠게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전혀 없다. 나 또한 한동안 돌아오지를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 말을 하고 나니 초영의 눈에는 야담의 피곤해 보이는 낯빛이 더욱 선명하고 자세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까? 그런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과거로부터 초연해 보이는 그의 어깨가 단지 미래의 짐을 짊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 얻은 단서가 어떤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지는 결국에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네.”


초영이 턱을 괴며 눈을 위로 떴다. 노르스름한 원구(圓球) 하나가 통통 튀지도 않으면서 쫓아온다. 무엇이 무엇을 쫓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지만, 확실히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초영.”


야담이 무거운 목소리로 배에서 내리는 초영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짧은 대답과 함께 초영이 뒤돌아보자 야담은 모래 한 줌을 쥔 손처럼 자신이 간직한 모래를 언제까지 스스로 품을 수 있을지 두려워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너를 벌할 작정이지?”


도덕이 반드시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의도는 초영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아니면 그가 너무 자신의 방식대로만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벌하다니? 백면의 사랑에 대해서 모르쇠 발뺌했던 죄 말이야? 글쎄, 그걸 죄라고 표현하려니까 마음이 더 안 좋아지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서 너에게 묻는 거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걸 알려면 백면에게 직접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지?”


초영이 걷기 시작하자 느린 걸음으로나마 그녀를 따라가며 야담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백면이 우리보다 더 한 수 위일 테니까.”

“그 녀석이 이미 자신을 벌하려고 했으니 그렇다는 뜻인가?”

“그렇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


자신을 따라잡도록 기다려준 초영이 야담의 얼굴이 제대로 시야에 담기자마자 바로 말을 이었다.


“백면, 그 애는 자신을 벌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야. 그것도 우리를 상대로.”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걷지 않았다. 이 길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 익숙했다. 이 두 성인에게는 가야 할 길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던 것이다. 길은 발이 닿는 곳에 있으며 꿈은 마음이 닿는 곳에 있으리니.


작가의말

즐거운 연휴 보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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