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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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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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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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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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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3화

DUMMY

솔직하게 말해서 녹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살아 있건 죽었건 어느 쪽이든 녹수와 황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오로지 안건이었으며,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어도 녹수가 죽은 존재로 황호에게 인식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이것이 쉽게 넘길 사안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그럼 너도 녹수랑 만났던 거야?”


흑석이 누구 못지 않게 자신도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비밀로 해두지.”


영월이 그 어떤 지진이나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기세로 대답하기를 단칼에 거부했다.


“젠장, 지금 상황에서 비밀로 해둬서 뭐 어쩌려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알아야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냥 순간에 충실한 채 시간이 흘러가는 걸 체감하려니 문득 불안해지기까지 한다고.”


정수리부터 뒤통수까지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흑석이 자신의 꼴을 망치면서까지 소리쳤다. 화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 하소연에는 이렇게 억누른 감정이 하나씩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염탐꾼이 있을지 모르니 내 의지에 의한 선택만은 아니다.”


영월이 시를 읊듯이 나직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염탐꾼이라면 아마 지금 여기에는 없을 거야.”


초영이 주위를 대충 둘러보며 대꾸했다. 천일나무 그늘 아래에서부터 그가 돌아온 것인지 살폈던 그녀가 누구보다도 확신하며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렇군. 아무래도 벌써 움직인 모양이군.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이번 여름을 허탕하게 보내고 말았군. 먼저 다가오니 방심했던 탓이겠지.”


영월이 가려진 얼굴 속에서 비릿한 한숨을 조소처럼 짧게 흘리며 말했다.


“그건 너한테만 해당되는 소리겠지. 우리한테는 전혀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태강을 뭔 꾀로 자신 편으로 데려간 걸까?”


초영이 붙임성이 없는 사람처럼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뻔합니다.”


달목이 저쪽에서 고개를 돌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천규를 핑계로 끌어들였겠지요. 태강의 약점이라고 하면 천규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겠네. 역시······ 그 애가 그러는 데에는 천규만이 이유겠지.”


너무나도 당연한 걸 잊고 있었다는 것에 놀란 초영이 박수까지 치면서 태강이 동생을 잃었을 적의 일을 드디어 회상해냈다. 잊지는 않고 있었으나 기억은 시간만큼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개인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 초영은 기억을 퍼즐 조각처럼 개별의 것으로 여기면서도 전체의 그림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자신이 곧 한심하게 생각되어서 이윽고 울상이 되어버려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천규에 대해서 도대체 뭔 말을 했길래?”


다음에는 주화가 조곤조곤한 말투에 비해 그리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호가 천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어느새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수구리며 사색하고 있던 흑석이 그 자세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규에 대해 뭔가를 우리 이상으로 알 만큼 황호가 천규랑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을까?”

“모르지.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황호는 언제나 제삼자인 듯이 굴면서 남을 관찰하기 좋아하잖아. 그리 좋은 습관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다가 보면 상황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우리가 놓친 일부분을 금방 잡아냈을 수도 있어. 그게 하필 천규였을 수도 있겠지.”

“천규가 죽은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 그걸 또 모르겠네. 설마 백면도 연관된 일인 건지 싶어. ”

“그건 아직 단서가 없지만, 내 생각엔 분명히 천규도 어딘가에 연루가 되었기에 그 애 이름을 들먹이며 태강을 꼬드겼을 거야. 더불어서 태강이 동요해야 할 정도라면, 죽음쯤은 당연히 걸었겠지. 천규가 왜 죽었는지 황호는 그 이유라도 알고 있던 거 아닐까?”


자문과 반문을 오갔던 주화와 흑석의 대화가 역시나 그런 방식으로 중단되자 의문은 어느 경지까지는 풀린 듯싶었다. 그렇지만 영월이 그사이에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초영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영월의 입장에서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난입했기에 그저 물러서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그는 언제라도 의식을 조종하는 무의식의 실체처럼 연해(淵海)와도 같은 결코 정제될 수 없는 자연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기에,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초영에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얼굴이란 정말로 얼굴에 지나지 않아서,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오해를 남기거나 태강에게 그러했듯이 그리움을 남기거나 한다.


“어쨌든 지금 태강은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러니까 이제 녹수를 만났는지 만나지 않았는지 말해도 되지 않겠어?”


초영이 고개의 각도를 조금도 틀지 않으며 날이 선 목소리로 화제를 바꿔버렸다.


“그렇군.”


영월이 심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만났지. 그리고 너희가 기대하는 수준의 대화는 나눴다고 장담할 수는 없더라도 분명히 말을 주고받기는 했다. 무척 짧은 시간, 찰나라고 부를 만큼의 그 시간 동안에만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었으니.”


주화가 갑자기 불안해진 얼굴로 앞에 놓인 화분의 윗부분을 부여잡으며 말을 더 이으려던 영월을 가로막는다.


“녹수는 그럼 괜찮은 거야? 그렇게 크게 다쳤었는데 무사하다는 게 반갑기는 해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그래. 잠깐이더라도 직접 봤으니까 영월은 분명히 알 거 아냐.”

“그런 것 같더군. 정신 상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백면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더없이 건강해 보였다.”

“다행이다.”


이를 그나마 건질 수 있는 희소식쯤으로 여긴 주화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화분에서 손을 뗐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정도 만족이 된 주화의 모습을 보고서 흑석이 바로 영월에게 질문을 건넸다.


“내 생각이 맞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더군.”

“그게 다야?”


영월이 보기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듯했다. 급하게 뒤돌아 시선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보이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도 비밀이 싱거운 탓에 수치심을 느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는 오해가 아니라고 판단이 될 정도로, 초영을 제외한 나머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날에 비로소 그리고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니 미리 말하지 않도록 하지.”


그러면서 영월은 누구 하나 이견을 내보인 적도 없는데 서둘러 자리를 떴다. 허둥지둥 일어난 흑석이 그를 붙잡으려고 해보았지만, 이미 양실을 벗어난 뒤였다. 어찌나 문을 황급히 닫았던 것인지 반대편의 암실로 들어간 기척이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뭐야, 뭔가 이상한데.”


자리에 도로 앉으며 흑석이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이에 즉각 맞장구를 치는 이는 없었다.


“나 먼저 일어날게.”


어쩌다 보니 제일 먼저 반응했던 이가 역시나 첫 번째로 자리를 뜨게 되었다. 흑석은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이만 갈까?”


주화가 화분을 다시 품에 안으며 초영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


초영이 주화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차마 피하지 못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부드럽게 동행을 거절했다. 주화는 머뭇거리다가 별도의 인사 없이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두 사람은 초영과 달목이었다.

달목이 역시나 적당한 때를 찾아서 몸을 일으킬 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초영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니?”


그녀는 동시에 감기려는 눈을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눈썹에 바짝 힘을 주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장 달목에게로 다가갔다. 꽤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달목은 결단코 순간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 꾸민 무표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그리고 아까도 들었던 대답을 내놓으며 달목은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러 저도 가보도록 하지요.”


당장의 충동으로는 그를 강제로라도 붙잡아 아까 영월과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털어놓게 하고 싶었지만, 다소 허망해 보이는 초영은 그러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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