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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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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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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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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1.02.2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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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70화

DUMMY

“그럼 표절은 아니지 않나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도진이 오해가 없도록 하고자 짚이는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그건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이 초반에 그런 서투른 작품들만 가져다가 그렸으면 나도 이런 고민을 안 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완성도가 높은 그림만 베끼다가 왜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런 그림을 따라 그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거든.”


오지랖일지는 몰라도 뭔가 의도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진 나나가 슬쩍 사견을 더하며 더욱 골몰했다.


“그 질문을 하려면 백면이 아니라 나나 씨 자신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함께 고민하던 도진이 1분이 채 안 되었을 때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백면의 저의가 무엇이든 간에 그 그림이 월계의 것이 아니고 그 화가가 월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백면보다는 나나가 더 깊게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그림을 내가 그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가 대답할 수 있어? 난 세잔도 백면도 아니잖아.”


도진의 제안을 상당히 회의적으로 받아들인 나나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금방 다 아는 것처럼 굴었던 게 후회될 정도로 그녀는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을 알고, 또 그들의 그림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알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은 별개로 존재할 뿐이다. 본래의 개체로 실존을 논하기 위해서는 이름으로부터도 멀어져야 한다.

「사계절」을 그린 화가가 세잔이기에 그 작품은 여전히 전해지는 것이다. 만약에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림은 유일하게 갖고 있던 미술사적 가치마저 잃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고 하여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 사람이 그러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건 나나 씨 기억에서 나왔을 게 분명하잖아요.”


도진이 제 탓을 아니라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허심탄회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랬다면 분명히 나나 씨의 생각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백면의 일부라며.”

“일부가 때로 전체를 이루기도 하죠. 빠진 조각 하나 때문에 전체는 완벽해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나나가 도진의 말을 곱씹는 동안에 자신의 입술을 짓이겼다. 잘근잘근 씹어도 삼켜지지 않은 것이 이성인지 감성인지 도통 모르겠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말하자면, 백면은 애초에 화가도 아닌 성인이었으니 무슨 목적을 갖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뭘 그려야 할지 모르니 나나 씨의 기억을 훔쳤을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이건 별로 설득력이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왜? 난 그게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잘 그려진 그림이라면 실력만 있으면 되지만, 제대로 그려진 그림을 그리는 건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잖아. 노력이라는 단어로도 제대로 설명이 안 될 만큼.”


반대되는 의견에 부딪혀 다소 난처하게 된 도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나나 씨, 내 생각은 좀 달라요. 나나 씨는 백면이 예술에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적 없어요?”

“없으니까 다른 그림을 베낀 걸 수도 있잖아.”

“그랬다면 나나 씨가 방금 이야기한 그 「사계절」이라는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았겠죠. 우리는 백면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백면이라는 큰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가정하면 나나 씨의 생각이 곧 백면의 생각일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다면 백면도 똑같이 그 그림을 형편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죠. 그래서 일부러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림들만을 골라서 이곳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을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이든 달은 존재하기 때문에 한쪽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면 다른 한쪽에서도 틀림없이 그럴 테니까요.”

“엄연히 다른 세상이기도 하잖아. 꼭 그렇지만은 않을 테고.”


월계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어느 순간에 두 곳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체감한 나나였다. 그러나 시비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왠지 모르게 서로가 서먹해지게 되는 발언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럼 그 「사계절」이 이번 전시회에서 어떤 반응을 얻게 되는지 보면 되겠네요.”


핑거스냅을 선보이며 도진이 나나의 의문을 해소하고자 새로운 조건을 걸었다.


“그 그림을 가지고 올지 어떻게 알고?”


아직도 못미더운지 나나가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


“나나 씨가 본 그림이니까 분명히 가지고 오지 않을까요?”

“내가 봤다고 해서 가져온다는 소리는 무슨 근거로 하는 거야?”

“저 역시 백면이니까 하는 소리죠.”


능청스레 구는 도진은 아파서 아무런 행동도 못했던 도진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나나는 당황해서 적절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음 발언권을 그에게 순순히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백면이 예술에 재능이 있다고. 아니면 최소한으로 예술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이에요.”

“사랑앓이가 반드시 예술로 승화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예술을 좋아했을 거라는 거죠.”

“사랑과 예술이 어떤 관계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겠어. 그런데 또 무슨 이유가 있길래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나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도진이 목을 가다듬었다.


“이건 어쩌면 내 처지 때문에 그렇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떤 처지?”

“가족은 가져본 적 없는 처지 말이에요. 첫 번째 사랑은 모두 거기서 시작되잖아요. 나는 단 한 번도 그걸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건지도 모르고 그러기 때문에······ 말도 안 도는 주장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들어볼래요?”


반대로 도진이 질문을 마친 후에 나나는 그가 뒷말을 더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목청을 죽였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립거나 어느 순간이 그리울 때 사진을 보거나 기억을 회상하기도 하잖아요. 그 안에 자신의 진실된 감정과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죠.”

“각자의 사연에 있으니까 뭐 그렇겠지?”

“그렇게 자신의 것만이 아니었던, 누군가와 공유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될 거예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을 더 관찰할 수 있었죠. 하지만 항상 마음이 원하는 대로 본인이 원하는 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나도 정말 동감해. 때로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쳐버리거든.”


상실감은 모든 것을 치워버리면서도 자신만을 남겨두는 탓에, 어떻게든 부활하려는 사랑의 앞길에 장해물만이 될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백면은 일종의 촉발 장치로써의 예술을 좋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림에 집착하게 된 것일 수 있죠.”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하필 그림이야?”


나나가 나뭇가지 위에 오른 늙은 부엉이처럼 눈을 뜨더니 대뜸 이와 같이 물었다.


“그럼 나나 씨는 왜 많고 많은 것 중에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는데요?”


동굴 속에 있는 박쥐처럼 눈을 번득이며 도진이 반문했다.


“그거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림을 그리면 내가 마땅히 살아 있어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거든. 행복이랑은 약간 거리가 멀어. 사는 동안에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림이 탈출구로 보인 적은 이제까지 없었어. 그런데도 그림을 그리면 내가 이대로 살아 있어도 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그런 이유를 얻은 기분이야.”


머뭇거리면서도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자 나나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아마도 백면도 비슷한 이유로 그림을 선택했을 거예요. 참, 그나저나 하나 아쉬운 게 있군요. 백면은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전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그렇네요.”


대화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을 침묵 속에서 보내다가 나나가 뒤늦게 더한 말 한마디로 인해 오늘의 대화가 정리되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현실이 어떻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거구나. 그렇다면 세잔도 그랬던 거겠지?”


이들의 암호같이 난해한 고집이 어렴풋이 읽히는 듯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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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19 동지세미
    작성일
    21.03.01 01:43
    No. 1

    지나가다가 들려서 읽고 갑니다. 작년 공모전 작품이군요. 꾸준함과 성실함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건필하시길!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로즈리
    작성일
    21.03.01 22:49
    No. 2

    응원의 댓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용기를 얻었네요. 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좋은 이야기인 것 같지 않아 망설이는 때가 참 많은데, 그래도 제 노력이 조금이나마 글 안에 드러난 것으로 느껴져서 따뜻한 위로 또한 얻었습니다. 부족한 작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동지세미
    작성일
    21.03.02 01:13
    No. 3

    저도 매일이 그렇습니다^^ 같이 건필! 꼭 정상에서 뵜음 하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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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화 +3 21.02.28 28 1 9쪽
270 269화 21.02.27 23 1 9쪽
269 268화 21.02.26 26 1 10쪽
268 267화 21.02.25 24 1 9쪽
267 266화 21.02.24 23 1 9쪽
266 265화 21.02.23 26 1 9쪽
265 264화 21.02.22 28 1 9쪽
264 263화 21.02.21 25 1 9쪽
263 262화 21.02.20 25 1 9쪽
262 261화 21.02.19 25 1 9쪽
261 260화 21.02.18 26 1 9쪽
260 259화 +2 21.02.17 29 1 9쪽
259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6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8 1 9쪽
255 254화 21.02.12 25 1 9쪽
254 253화 21.02.11 25 1 9쪽
253 252화 21.02.10 29 1 9쪽
252 251화 21.02.10 30 1 9쪽
251 250화 21.02.09 29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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