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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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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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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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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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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0화

DUMMY

더 밝은 쪽의 눈만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반만 떴을 때 사물이 더 잘 보일 때도 있다. 그건 아무래도 이 호박색 눈이 평상시에는 영 쓸모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알 안경을 다시 썼을 때 그는 비로소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은 로제티의 「발견」처럼 뿌리치려는 여인과 그녀를 억지로 붙잡는 남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수레가 있고, 하얀 양이 올가미에 걸린 상태로 이들이 있는 쪽이 아닌 다른가를 응시하고 있다. 바로 그림 밖의 영월을 말이다.


“역시 그림에는 재주가 형편없군.”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술잔을 들여다보듯이 그가 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너의 그 눈은 여전히 쓸모없고. 겉은 달을 닮은 눈알 주제에 제대로 보이는 게 있어야 말이지. 실속이 없어.”


남자가 이미 반듯하게 정리된 머리를 굳이 쓸어넘기며 탁자 위에 앉았다. 담배를 쥔 것처럼 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고부라지게 웃다가도 그는 속내 깊은 곳에 아무도 찾지 않은 낡은 우물을 간직한 것처럼 슬픈 눈망울로 영월이 보고 있는 그림을 무상하게 쳐다보았다.


“내 걱정을 해주다니 참 고맙군. 그렇다면 이제 놀이는 다 끝난 건가?”


영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그로써 두 사람의 시야가 얼추 비슷한 위치를 갖게 되었지만, 이들은 마주하기는커녕 서로를 등진 채로 각자의 시선에만 몰두했다.


“아니. 놀이라면 시작한 적도 없는걸. 난 논 적 없어.”

“방랑 예술가처럼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런 말은 잘도 하는군.”

“방랑은 아니지. 이번 생은 거의 작업실에만 묶여서 지냈거든.”


남자는 자신의 입을 가만두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인지 귀에 꽂은 펜을 빼서 그 뚜껑으로 아랫입술을 콕콕 찔렀다. 그런다고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나, 그에게는 퍽 위안이 되는 행동이었다.


“귀천에 와서도 그림을 그릴 거라면 뭐 때문에 내생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한 거지?”


영월이 바닥에 돌덩이처럼 방치된 캔버스를 발로 건들며 말했다. 이로써 이 둘은 남자의 또 다른 작업실 안에서 대화 중임이 드러났다. 수도에 있었던 곳과 다르게 사방이 트인 이 작업실은 남자가 귀천으로 도망 온 이유이기도 하다. 사방이 모두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지만, 군데마다 색색의 안료가 튀거나 묻은 자국이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무늬처럼 있어서 묘하게 안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아, 그건 신경 쓰지 마. 우리랑은 관련 없으니까.”


걷어 올린 소매가 느슨하게 내려오자 양팔을 번갈아 쓸어 만진 남자가 무심하게 굴었다. 그는 조색판을 옆으로 치우고는 곧 한쪽 다리를 오그렸다. 그다음에는 다른 쪽 다리를 그 위에 포개어 앉아서는 아예 책상다리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네가 날 제일 먼저 찾아올 줄 알았어, 영월.”


남자가 표정을 바꿀 때 생기는 주름의 각도까지 섬세하게 짜인 듯한 교묘한 웃음을 보였다.


“나를 제일 먼저 만난 건 아닐 텐데.”


영월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남자가 이번에는 그 미소의 실오라기가 풀어지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뭐, 그건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내가 녹수랑 제일 친하긴 하잖아. 그건 좀 이해해 줘. 내 마음 알지?”

“그런 농담할 생각은 없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진지해졌거든.”


남자는 펜의 모서리로 자신의 턱을 찌르며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 거지?”


이러다가는 대화의 진전이 없겠다 싶어 영월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남자의 굽어보는 듯한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전혀 다른 방향을 보며 말했다.


“뭘 말이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용건을 포기하지 않는 영월의 태도가 우스웠는지 남자는 입을 비쭉거리며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체했다.


“어떻게 영혼을 그렇게 조각냈냐는 말이다. 그래서 널 찾을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더군.”

“자존심이 상했나 봐?”

“이건 알량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 자존심 말고 중요한 게 따로 있나?”


이와 같이 고리타분한 소리를 예상하고 있던 남자가 불만스럽게 영월의 의문을 내쳤다. 그는 사라져버린 대화의 행방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래. 그 방법은 나중에 묻도록 하지.”


영월이 체념했는지 턱을 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부등호가 바뀌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남자의 귓등이 보이는 부분을 바라보며 말할 때 그는 남자가 그동안의 공백 동안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은 선택이야.”


남자가 펜을 바닥에 놓으며 흐뭇해했다.


“돌아가진 않을 거야.”


그러면서도 암울한 소리를 태평하게 꺼냈다.


“천일나무가 죽어가는데도?”


영월이 외알안경이 빠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찡그리며 무섭게 반응했다.


“응.”

“넌 정녕 우리가 다 죽어가게 둘 생각인가?”

“전혀 아니야. 그보다는 관심이 없다고 하는 쪽이 맞겠지.”


무릎을 두드리며 탁자 아래로 착지한 남자가 몸을 피며 바닥에 있는 캔버스를 주웠다. 그가 그것을 벽면에 기대어 두는 동안 영월은 남자의 뒤통수만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내 영혼은 온전하지 않아. 나한테 기댈 생각하지 마. 천일나무 일이라면 나도 모르거든. 난 내가 아무리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자기 영혼밖에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말에 가시가 있군.”

“몸에 뼈가 있어서 그래.”


탁자 주위를 배회하며 남자가 발소리를 정확하게 냈다.


“내가 너희를 죽일 거라는 말을 정말 믿었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그는 한쪽 벽면 앞에 멈추어서 커다란 그림을 구경하듯이 벽의 흠집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를 죽이지 않아. 내가 죽이려고 했던 건 나 하나야. 내가 어떻게 영혼을 부서뜨릴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거든.”

“지금의 너는 언제든 마음을 들킬 수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걸 잊은 것 같군.”

“그래, 들을 거면 들어. 제발 좀 들어줬으면 해. 내 영혼이 그리고 내 운명이 그렇게 망가지게 된 건 전부 내 사랑이 무너지면서부터니까. 너흰 죽어도 모르겠지. 그래서 나한테는 너희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거야.”


영월이 있는 방향으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들면서 그의 얼굴빛은 선명하게 때로는 흐릿하게 변하면서 그가 흥분했음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정말로 벽면이 그림 작품이기라도 한 건지 이를 응시하는 그의 뒷모습까지도 그림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눈을 깜빡거릴 수 없게 된 남자였다. 그는 뭔가에 묶여 있어 서러운 듯한 느낌을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를 죽이려고 했었지.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던 건 아니야. 너희가 사라져버리길 바랐던 것밖에 없어.”

“그것 역시 대담한 생각인 건 똑같군.”

“그런가? 인간은 원래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빼는 게 어때? 어차피 전쟁도 끝났으니 허무 같은 건 이곳에 더는 필요없을 것 같은데. 봐!”


남자가 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인간들은 내가 없어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내가 한때 있었는지도 모르며 살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고.”

“철없는 소리다. 그 애들도 언젠간 너에 대해 교육받게 되어있어.”

“그래, 교육을 받겠지. 하지만 난 그 애들에게서 이해받지는 못할 거야.”

“인간 중 누구도 우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백면.”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들리자 남자가 귀를 틀어막았다.


“난 이제 더 이상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둬.”

“네가 어떤 이름을 가졌건 넌 백면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아니, 절대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렇게 되겠지.”


귀를 감싸도 영월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그는 안간힘을 써서 눈과 입까지 닫아버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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