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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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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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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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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0화

DUMMY

“먹고 싶은 사과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과가 아닌가?”

“먹고 싶은 사과면 그림 속에 있을 이유가 없죠.”

“왜? 먹고 싶은 사과야말로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거잖아.”

“그 이상의 사과를 원하는 게 예술일 테니까요.”

“왜 그 이상의 사과를 원해야만 해? 먹고 싶은 사과,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사과에 만족하지도 못하면서 그 이상의 사과는 왜 원하는 건데?”


나나의 입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물어졌다. 하려고 했던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궁여지책으로 떠오른 건 역시나 세잔이었다. 자신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그림이 망가지게 되니 이상하게도 더 세잔의 사과에 가까워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 착각이겠지.


“사과를 그냥 사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사과가 사과라는 걸 아는 사람이 예술가일 테니까요.”

“그래? 그럼 너는 예술가가 아니겠네? 사과를 자꾸 사과라고 생각하잖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생각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려니 세잔의 사과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보니 연필을 처음 쥔 아이보다도 더디게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폴 세잔의 화풍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면 극심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태강의 의견에 대꾸할 수 있을 정도로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나나에게는 오직 수긍하는 길만이 도리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태강이 생뚱맞게 처음 등장했을 때의 말을 반복했다.


“전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요.”

“했잖아. 지금까지 계속!”

“없어요. 교훈이 아니라 사과라고 한다면 굳이 부정하지 않겠지만요.”

“그래, 내가 말한 게 그거였어. 너는 자꾸만 사과를 통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잖아.”


망친 그림에서 처음으로 눈을 뗀 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태강을 톡 쏘아댔다. 그러나 독은 없었기에 성인은 멀쩡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좀 제대로 해보면 될 일이야. 네가 사과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쳐. 그런다고 사과가 네 말을 그대로 전해줄 것 같아? 전혀 아니야. 먹고 싶은 사과든 예술적인 사과든 사과는 어쨌든 말을 못할 거란 말이야. 그런데 네가 욕을 한들 도대체 알 게 뭐야?”


결코 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가능하다면 순간을 붙잡고 그 안에서 머무른 채 이 말을 한동안 곱씹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그날 택시 안에서 꾼 이상한 꿈처럼. 온통 자신의 모습으로 들어찬 방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세잔의 사과는 백설공주의 사과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설령 아니라고 반대하는 이가 있더라도 세잔으 사과는 백설공주의 사과와는 명백히 다른 것으로 구별될 것이다. 그 지점에서 사람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교훈이라 대표되는 각종 의식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는 소리다.


“뭔가 이상해요.”


그런데 대답은 무의식적으로 나오고 말았다. 태강의 말을 새겨들었다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한없이 엉뚱한 말이었다.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만 같지? 그렇지 않아요?”


이는 동의를 구하는 어조였으므로 질문이라기에는 태강이 솔직하게 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나나는 그림과 태강을 번갈아 보았다. 시야를 연속적으로 움직이니 전혀 다른 둘이 같은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왜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려야 했고, 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이렇게······ 뭐라고 말로 설명이 안 되는데, 되게 희한하지 않아요?”


나나가 똑같은 식으로 다시 물었다.


“그······ 그건 잘 모르겠네. 난 순전히 놀러만 온 거거든.”


거짓 변명임이 드러날 정도로 태강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나의 물음이 닿으려고 하는 진실에 대해 그 역시 알 방도가 없었으나, 나름 가출 청년이라는 것이 들통나지 않았으면 해서 부자연스럽게 굴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상한데요.”


잃어버렸던 감을 되찾은 것인지 나나가 금방 그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아냈다. 그림에 얽매여 있던 마음을 놓아버리니 주변의 사물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덕분이다. 특히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는 태강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은 더욱이나.


“하나도 안 이상해. 우리가 꼭 필요해야지 만나는 사이였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어요. 정말 놀러 온 거면 갑자기 방에 나타날 리가 없죠. 문으로 들어왔을 거 아니에요.”

“아냐, 문으로 들어왔어. 네가 날 못 봐서 그래. 사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잖아.”

“거짓말하지 마요.”


태강은 손에 묻은 물감을 다소 원망하듯이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짓을 했다기보다는 이리도 빨리 들킬 줄 몰랐다는 식의 차분한 눈길이었다.


“백나나. 너는 기적이 언제 일어난다고 생각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치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감이 말라갈수록 도드라지는 지문에 시선을 빼앗기며 태강이 물었다.


“기적이요? 그런 질문은 너무 뜬금없잖아요.”

“방금 네가 더 끈금없었어. 그래서 언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는지 네 생각을 말하면 돼.”

“음, 아무래도 기적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럼 그 순간은 언제인데?”


나나가 지루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는 태강을 굉장히 고리타분한 사람인 양 대하며 말한다.


“그건 성인이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적어도 본인 담당 분야잖아요. 경력도 많으신 분이 그런 걸 묻는 의도가 뭔지 모르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경력이 경험이 되는 건 아니야. 경력은 얼마나 버텼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지, 얼마나 해냈는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거든. 아무거나 좀 이야기해 봐. 너도 기적을 수없이 바라고 살았을 거잖아.”


태강이 문을 두드릴 때의 시늉으로 캔버스 표면을 건드리며 재촉했다. 워낙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한 탓에 나나는 좀처럼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 눈짓은 그녀에게 대답을 떠올릴 만한 충분한 시간을 안겨주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 아니다, 말하고 나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살면서 궁지에 몰리는 때는 더러 있으니까. 너무 힘들 때? 아니지, 힘들 때는 너무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 아닌 것 같고······ 기적이 가장 필요한 상황이라면······.”

“역시 뭔가를 잃었을 때겠지?”


나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태강이 이어받아 대신 답변했다.


“그런가요? 뭔가를 얻고 싶을 때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의외지사를 목격한 사람처럼 나나가 당황하며 물었다.


“사람들의 욕심은 뭔가를 잃었을 때 생기는 거야. 자신이 잃어버린 게 뭔지도 모를 때, 특히 더 잘 생기고 더 커지지. 무지 속에서만 욕심은 번성할 수 있거든. 그리고 그 욕심은 기승전결을 요구하지 않고, 기도 없으면서 결을 요구해. 그걸 보통은 기적을 원한다고들 하지.”


기계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태강의 무미건조한 말씨에는 기적을 혐오하는 자의 인내가 담긴 듯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묻는 거예요?”


웅변에 쓰일 문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고 그러니 왜 물어봤냐고 따질 작정이었으나 태강이 그림을 너무 애달프게 바라보는 바람에 나나는 소심하고 예의 바르게 말하는 쪽을 택했다.


“난 네 생각이 궁금했지, 내 생각은 궁금하지 않았거든.”


태강이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제 생각이 도대체 왜 궁금한데요?”

“천규를 이해할 수 없어서 말이야.”


나나가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이름이 들려 눈을 크게 뜨자 태강은 오히려 그녀와 눈을 또렷하게 맞추며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래, 내 동생 천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왜 그런지 궁금하지?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 애가 죽으려고 한 이유가 뭔지 이야기를 들어서 그래. 그리고 난 이제 백면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 너한테는 옛정을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직감한 나나가 곧바로 입을 열려고 하자 태강은 제 손을 갖다 대고는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너는 사과를 계속 그려. 그게 네가 할 일이니까. 그런데 기왕이면 진짜 사과를 앞에 두고 그리는 게 어때? 사과는 잘 상하지 않으니까 오래 먹을 수도 있을 거고, 원하는 만큼 그릴 수도 있을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겠지.”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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