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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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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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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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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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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6화

DUMMY

“아무래도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네요. 아니면 설명이 한참 부족했거나.”


도진이 머리를 꺼벅대며 뒤로 물러섰다. 겸연쩍은 얼굴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그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고, 또 서로 간에 갑작스럽게 격조하듯이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나는 최근부터 자신을 옥죄는 이 거리감이라는 것이 생각만 해도 거북스럽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세잔이 고작 거리감을 상실하고 그림을 얻었다면, 자신은 그림을 포기한 대신에 거리를 감지하는 능력 따위를 얻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착각도 잠시,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그래봤자 시력뿐이라며 그녀는 남몰래 자조적으로 한탄해야만 했다.


“괜한 이야기는 아니야. 사실인 것 같거든.”


나나가 눈을 비비면서 멋없게 대답했다.


“아직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아무래도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게 맞는 것도 같아. 그림보다는 내 인생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아무래도. 내가 있지 않고서는 그림도 없을 거라며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말을 이을수록 그녀의 상념은 격식을 갖춘 옷을 입은 것처럼 도진에게 멋스럽게 전달되었다.


“참 이상하네요.”


도진이 한고(寒苦)에 질색하듯이 장난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을 돌렸다.


“이상하다니?”

“사람이 있지 않고서는 그림이 없는 게 분명히 맞을 텐데 말이에요.”


나나가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기준이 예술이라고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니, 기억이 언제라도 역사로 취급받을 수만 있다면 도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나나가 소극적으로 동조하며 다시금 회상에 잠겼다. 예술은 뭐길래 도대체 인간을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게끔 하는 경계선이 되어준단 말인가. 하지만 예술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왜곡선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나의 마음이 갑작스레 무거워졌다.


“그래도 나나 씨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예요.”


도진이 그 짐을 들어올리듯이 가볍게 맞받아쳤다.


“지금 그리고 있잖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기는 해도.”


나나가 심드렁하지만 짧게 하소연했다.


“아뇨. 그러니까, 내 말은······ 나나 씨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 거라고?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알죠. 나 또한 글 같은 걸 쓸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요.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건 이쪽에서도 마찬가지일지 몰라요.”


눈끼리 부딪히는 순간에 두 사람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웃고 나서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런대로 이 순간만은 초연해질 수 있는 지혜를 배우게 된 듯했다.


“그래서, 어떤 걸 쓸 건데?”


나나가 엉망인 꼴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들여다보는 동안에 잔뜩 내려간 입꼬리만큼이나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네요. 계속 고민 중이거든요. 아무래도 현재의 이 일과 관련된 거긴 하겠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 비밀은 절대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도진이 내리뜬 그녀의 속눈썹에 하얀 먼지가 붙은 것을 발견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긴 나도 내가 뭘 그릴지 모르면서 계속 그리고 있어. 그런데 그리고 나서 나중에 보면, 내가 그린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거더라고.”


나나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완전히 떴을 때, 도진은 그 하얀 점이 먼지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손 어딘가에 진작부터 묻어 있었을 하얀 물감이었을 것이다. 손금 사이를 파고들어 굳어버린 덩어리가 나나가 눈을 비비는 동안에 부서져 하필이면 가늘고 짧은 속눈썹에 기적같이 달라붙었을 것이다.


“그런가요? 뭘 그리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마나 망설이는 사이에 도진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안 돼. 비밀이거든.”


나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꽤 건방진 어조로 거절했다. 장난기가 여기저기서 묻어나는 터라 그 손가락질에 초조할 틈은 없었지만, 도진이 듣기에는 짓궂은 대답임에는 변함없었다.


“어째서요? 나는 나나 씨한테 전부 말한 것 같은데요.”

“아니지, 너도 네가 뭘 쓸지 아직 모른다며. 그러니까 이건 공평한 거야. 다 끝날 때까지 절대 서로 말하지 않기로 하자.”

“언제 글을 다 쓸지도 모르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럼 기한을 정해두고 쓰는 게 어때?”

“기한이요? 그런 건 굳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도진에게 조언하기에 앞서 나나가 유경험자로서 어깨를 당당히 폈다.


“그림은 뭐 안 그래? 음, 이번 경우는 그런 경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한정되었다는 걸 늘 깨달으면서 글을 쓰면 좀 더 좋을 것 같아. 나도 그렇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을 때도 그랬거든.”

“시간이 무한정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거군요.”

“맞아! 기껏 이것저것 말해놨더니 그 한 문잦이 내 몇 마디보다 더 멋진 표현이네.”


나름 가르치고 있던 선배의 입장이라는 것을 금세 망각한 것인지 나나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도진이 멋쩍게 턱을 두어 번 긁으며 나나의 과찬을 사양했다.


“그럼? 누가 한 명언이기라도 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다니? 누가 한 말인데? 설마 12성인 중에 한 명이 말한 건 아니지?”


그렇다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물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나가 도진의 입 모양을 그 어느 때보다도 주시했다.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특히 그분은 더더욱 아니니까.”


가장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일그러진 나나의 얼굴에 대고 도진이 심심한 위안을 전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나나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이가 한 말이에요.”


도진의 말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조이가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정말로 솔밭에서 바늘을 찾은 것과 같은 충격 혹은 이변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백면이 조이에 대해서 꺼낸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일까. 하여간에 나나는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놀랍죠? 그 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도진의 질문에 나나는 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가 없었다.


“조이가 가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멋대로 행동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가 않죠. 인간은 가장 깊은 바다에 이를 수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어제 조이가 한 말이에요. 그런데 나나 씨도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조언에 따라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당분간은 우리도 각자 멋대로 행동해야만 하겠죠? 백면이 직접 눈앞에 돌아오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신에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일 수는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떠날지 간을 보듯이 걸음을 주저하다가 결국에는 나나가 손짓으로 권유하는 탓에 도진이 먼저 등을 보이고 말았다.


“가을까지 완성해.”


그 등에 대고 나나가 소리쳤다.


“가을까지는 너무 무리인 것 같지 않나요?”


나나를 마주하지 않고서 도진이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 그리고 미완성이면 미완성인 상태로도 가치가 있을 거야. 정말로 네가 쓰고 싶은 글이라면 말이지.”


나나는 미완성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가 글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무책임하게 도진에게 이 말을 던진 데에는, 그 무엇보다도 그가 글을 완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 이상한 곳에서의 여정을 마무리지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자 했다.


작가의말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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