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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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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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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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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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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화

DUMMY

“난 죽어가고 있나 봐.”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더럽고 낡은 침대에 앓아누운 태강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사병이라도 걸린 것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혼돈천지인 그의 헛소리는 어디에도 근간을 두지 않은 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폐가에서 유일하게 새것인 의자에 앉은 황호가 자비나 연민도 없는, 텅텅거리는 총소리처럼 태강의 등을 향해 눈길을 연달아 쏘아댔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난 진짜 죽어가고 있다니까. 이대로는 내가 죽어서야 녹수가 부활하겠어. 아이고, 난 아직 죽을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고개만 힘겹게 돌린 태강이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워낙 미동에 불과했기에 시선이 마주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그렇게 투덜거릴 힘이 남았다는 건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야.”

“고작 죽어가는 게 살아 있다는 증거라면 얼마나 서려운 삶일지 생각을 좀 하고 말해.”

“넌 어차피 끝없는 삶을 자유롭게 누렸잖아. 우리 중에 죽는 게 서러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어! 나! 바로 나 말이야. 난 완전 서러워.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서러워. 설령 이번 생이 내 마지막 생이라고 하더라도 요절은 절대 사절이라고.”

“젊어서 죽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제 동생의 죽음을 모욕하는 것만 같아서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킨 태강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기세로 황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늙고 행색이 초라한 탓에 그렇게까지 날이 선 눈길을 보낼 필요가 없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후회하는 인생은 언제 끝내도 상관없거든.”


부족한 판단력과 그로 인해 엎질러는 눈물, 저질러진 잘못들로 흉하게 점철된 젊음을 조롱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난 후회하는 게 아니야. 내가 정녕 쓸데없이 삶을 후회했다면 죽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게 되었겠지.”

“좌우지간 죽음이란 소리 아니겠어.”

“비꼬려거든 나를 비꼬든가 해. 괜히 기분 나쁘게 하지 말고.”

“난 비꼰 적 없어. 네가 그렇게 알아들었던 것뿐이지.”


말이 통하지 않아 죄 없는 혈압만 상승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넘게 굶은 터라 뱃가죽이 등이 아니라 천장에 닿을 지경인 태강은 결국에 대꾸를 관두고 도로 누웠다.


“날 왜 이렇게 만드는 거야?”


얼마 있다가 그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황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후에 별다른 기척이 나지 않아서 황호가 계속 같은 자리에서 섬뜩하리만치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챈 탓도 있다.


“그래야 녹수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거야?”

“넌 죽지 않을 거야. 죽을 만큼 슬픈 것일 뿐.”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가 죽어버리는 거라고.”


시부렁거리며 나름대로 한 진담에 탄성과 탄식이 섞인 소리가 뒤에서 태강의 등을 간지럽혔다.


“염려하지 마. 넌 나로 인해서 더욱 심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너한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노인의 지혜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바람에 태강은 황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슬픔에 대해서 네가 더 잘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그러므로 그는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쏘아붙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몫이잖아. 인간의 희노애락은 물론이며 그 죄를 심판하기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거 말이야.”


황호의 목소리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덤덤하기만 했다.


“다 아는 것처럼 구는 게 아니라 다 알아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넌 내 마음을 듣지도 못하면서 뭘 다 안다고 그래? 난 인간이 아니라 성인이야.”

“아무래도 네가 우리 존재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래. 아무래도 넌 이만 자는 게 좋겠어. 내가 있으면 불편하기만 할 테니 잠시 나가 있도록 할게. 늙은이를 내보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지만, 보는 눈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겠어?”


곧이어 황호의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문턱을 넘는 지점에서 태강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외친다.


“청년을 죽게 하는 노인네가 과거가 아닌 바로 지금 현재인 것만큼 다행스럽지 못한 게 어디에 있겠어?”


자리를 박차고 나서고 싶었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거짓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에 태강은 보는 눈이 하나 없어도 속이는 이 하나 없이 정말로 온몸이 아린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어깨가 아프다 싶으면 재빨리 눈이 아프기 시작했고, 이 목통(目痛)에 적응할 무렵에는 야속하게도 발목이 저리게 되었다.

이 알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은, 실제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어서 부르기 곤란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증상을 빠짐없이 설명할 만한 표현이나 단어가 없어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지 합리적인 이심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버릊어 놓았다.

그래도 잠은 죽음과도 같이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하는 것이니, 태강은 얼굴 곳곳에 주름을 새겨가는 수고까지 해가면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느닷없이 내용이 정확하지 않은 꿈을 꾼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장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눈부심증 같았던 그 꿈은 그에게 덧거리 같은 통증을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것인지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써는 도저히 가려낼 수 없을 때, 그는 황호가 돌아온 듯한 기척을 감지했다. 잠깐의 잠에도 여전히 뻐근한 눈을 조심스럽게 뜬 바람에 문 쪽으로 향해 몸을 돌렸어도 그의 시야는 흐릿하기만 했다.


“뭐야, 벌써 온 거야?”


제 앞으로 사람 형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태강은 더는 기다리지 않고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 방향을 조심히 둘러보며 물었다.


“진짜 우연처럼 등장하네. 기왕이면 더 있다가 오지 그랬어? 이렇게 지독하게 슬퍼 보니까 말이지,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좋더라고.”

“역시 그렇지?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밖에 없으니까.”


들려오는 대답에서 묘하게도 친절한 느낌이 묻어났다. 이에 태강은 언쟁이 오갈 것을 경계하던 마음을 반쯤 놓아버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런 것 같아. 혼자가 되는 게 두려운 인간들은 이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나 모르겠어. 뭐, 어차피 다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다 그런 거니 어쩌겠어.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뭔데?”


안으로 들어온 황호는 의자에 앉거나 제 앞에 오거나 하지를 않더니 뜬금없이 침대 뒤로 가서 뒤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니까 날 좀 혼자 내버려두라는 거지.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좋을 거 같아. 네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옆에서 훼방만 놓으면 그게 도대체 돕는 거라고 할 수 있겠어? 날 그냥 두면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괜히 돕는 척 시비 좀 걸지 말았으면 해.”


그 약속을 당장 지금부터 지키려는 참인지 뒤에서 대꾸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태강은 기다리다 지쳐 억지로 일어나려고 꿈틀댔다. 그런데 뒤에서 이런 행동을 저지하는 손길이 어깨 위에 얹어졌다.


“뭐야? 나 다 잤으니까 이제 일어날 거야.”


어찌나 곤하게 잔 것인지는 몰라도 눈을 뜨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은 몰랐다. 속눈썹 사이사이에 풀이라도 붙여둔 것인 양 눈을 깜빡거리려거든 따끔한 맛을 먼저 거치지 않으면 안 됐다.

태강이 이토록 슬픔으로부터의 회복보다도 시야의 회복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할 즈음에,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거야?”


그제야 목소리의 신원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태강이 몸을 굳힌 모습로 가만히 몇 초 동안 버티고 있었다. 처음부터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지만, 제 몸 상태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의심하려고 들지 않은 잘못이 크다.

태강은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자 겨우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목마저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너야?”

“그래. 나야, 녹수.”


자극이 언제나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돌연 충격을 몰고 나타난 목소리는 태강이 눈을 바로 뜨게 하기 충분할 만큼의 변화를 일으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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