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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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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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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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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5화

DUMMY

사람이 궁금증만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리고 호기심이 실은 가장 위험한 병균이라면 아마도 자신은 당장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나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밤과 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어서 때때로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하기야 해와 달이 바뀌어버린 것 같은 곳에서 이런 생활 방식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모순인 듯했다.

물 한 잔을 마시러 잠시 방 밖으로 나왔을 때, 나나는 목을 축여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새까맣게 잊었고, 문이 열려 있는 도진의 방을 바라보며 지옥 길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발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뭘 하는 거야?”


운이 좋게도 그녀는 기사회생할 기회를 얻었다. 도진이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품을 하는 모양새가 그가 이전까지 먼가에 열중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나가 있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그가 바락하듯이 탄성을 질렀다.


“뭘 하는 거냐니까? 왜 그리 놀라?”


최근 사람의 말소리보다 한 박자씩 끊어서 들리는 물소리 같은 물감의 음향에 익숙해진 터인 나나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색을 만들 때까지 심혈을 기울였다는 증거로 여러 색의 안료가 뒤섞여 거무죽죽하고 탁한 색을 만들어냈고, 그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 가죽에까지 덤벼들고 있던 것이다.


“나나 씨 모습에 좀 많이······ 놀라서요.”


타인의 외모를 지적하는 일에 낯선 도진이 말을 더듬거렸다.


“나? 왜?”


나나가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하며 물었다. 조금 더러워져서 전체적으로 꾀죄죄해 보이기는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얼굴에 말이에요. 뭐가 묻은 것 같은데.”


도진이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으며 손가락으로 대충 나나의 얼굴 부분을 가리켰다.


“그래?”


나나는 소용없는 손길로 몇 번 얼굴을 문지르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급히 도망가려는 도진을 쳐다봤다.


“뭘 하는 거냐니까?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데?”


눈을 실오라기 같이 가늘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지런히 공부에 빠져드는 것은 퍽 도진스러운 분야였지만, 저렇게 개방적인 자세는 그의 것이 아님을 나나는 몇 개월 동안의 생활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한 일 꾸미는 건 아니지?”


이제 더 이상의 골칫거리는 적극적으로 사절일 수밖에 없는 나나가 도진의 뻣뻣한 형상에서 의심점을 짚으며 그림을 보듯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혀, 그럴 리가요. 나나 씨가 저를 의심한다면 그보다 더 어울한 일은 없을 거예요.”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인지 도진이 나나 쪽으로 걸어와서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한 후에 비로소 멈추었다.


“그럼 뭔데?”

“고민거리가 좀 있어서요.”

“고민? 뭔데? 다른 사람은 알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난 비밀 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가까이서 마주한 나나의 꼴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눈 밑이 칙칙한 것이, 하늘이 구름에 뒤덮인 때에 그녀를 만난 것만 같았다. 물론 도진은 자신의 상태 또한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 정상의 모습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비밀이 아니라면 말해도 되는 거잖아.”


나낙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서둘러 입을 가리기는 했으나 이미 늦은 듯했다.


“말하기가 좀 어색해서 그래요.”

“왜? 이상한 거 아니라며. 그럼 어색할 이유도 없지.”

“낯설어서 그러죠. 뭔가를 하는 게.”


나나가 머무는 방은 이제 제법 그녀의 것이 되었는지, 문의 손잡이에서부터 그녀의 개성이 묻어났다. 잠시 시선을 돌린 도진이 알록달록해진 그것을 바라보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나도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그거 말고 뭐가 또 있던 거야?”


쏟아지는 졸음을 이제는 견디기 버거운지 나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짓눌렸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법하다. 다시금 눈을 크게 뜨는 데까지 그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으니.


“책을 쓰기로 했잖아요.”


도진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마음을 다잡은 후에 대답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거잖아.”


나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진을 흘겨본다.


“아니, 그거랑은 좀 달라요. 진짜로 글을 쓰려고 해요. 책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에요.”


확실히 도진의 말이 옳았다. 비밀이랄 것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건 정말로 말하기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뭔가를 한다는 소식에 나나는 은근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겠네. 어차피 가서 수업도 듣고 그래야 하는 거잖아. 이러나저러나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면 기왕이면 제대로 해보는 게 더 좋지.”


그래서 일부러 더 목소리를 꾸기며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나나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나나 씨한테 말하기까지는 좀 고민했거든요.”


도진이 이번에는 눈썹을 긁적이며 서먹하게 굴었다.


“나한테 말하기까지는?” 나나가 도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말꼬리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한테는 다 이야기했다는 거야?” 못내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그래도 그와 함께한 여정이 있어서 그렇다.


“오해하지는 말아요. 나나 씨한테 말하기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완전히 잘못 짚었어요. 단지······ 나나 씨가 그림을 그리기까지 느꼈을 부담감이라든가 책임감 같은 것에 대해서 이전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이런 상황헤 닥치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뭐를?”

“나나 씨가 왜 그림을 피하려고 했는지 말이에요.”


나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자신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도진이 벌써 찾아낸 것 같았다. 얄팍한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눈을 색안경처럼 가리고 있던 호기심과 욕심이 마침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양심과 진심이 눈앞에 타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은 충격을 얻었을 뿐이다.


“정말? 그게 뭔데?”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추려다 보니 그녀의 말투는 자칫 도진의 이야기를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만약 도진이 엉망진창인 그녀를 가까이 대하지 않았다면, 그는 또 한 번의 사과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해도 될까요?”


어쨌거나 도진은 나나에게서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자신은 남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언제나 명백히 알고 있었다.


“말해줘.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서 돌아갈 생각도 접고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거거든.”


나나가 자신의 얼굴을 벅벅 닦아내며 말했다. 러나 닦여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손에 묻었던 것들과 뒤범벅이 되어서 그녀의 얼굴을 더욱 이상한 색깔로 물들여놓기만 했다.


“이걸 내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나 씨한테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잖아요.”


도진이 근심하는 투로 말했다.


“방금 내가 말했잖아. 나도 모르는 거락. 나도진 네가 알고 있는 거라면 오히려 나한테 더 잘된 일이야.”

“오해일 수도 있어요.”

“오해 받는 것보다 인정 받지 못하는 게 더 억울하고 서러워. 그래서 그게 뭔데?”


나나가 고집스럽게 나오는 통에 도진은 그녀의 질문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나 씨는 계속 그림을 그려왔잖아요.”

“그랬지.”


도진이 어쩔 수 없이 뗀 운에 나나가 금방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응, 그랬어.”


씁쓸하기는 해도 이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림을 순수하게만 좋아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의 갈등 때문이었죠?”

“무슨 소리야?”

“그림에 평생을 바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게 두려웠냐는 말이에요.”


차라리 처음부터 거짓말로 대답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나는 지금 이 순간을 맹 슬프게 여겼다. 혹은 흐르는 시간 전체를 그렇게 여겼을 수 있다. 시간이 과연 어느 방향으로 흐르건, 끝내는 하나의 삶이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질 테니 말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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