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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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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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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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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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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1화

DUMMY

남자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 이야기나 할 거면 가버려!”


절규의 울림은 여전했으나 영월은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갈 기미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남자가 당장에 자신의 눈을 찔러버릴 테니, 그의 손에 들린 펜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그는 물러서야만 했다.


“넌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걸 알기에 너도 네 내생들 근처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이지. 그 조각들 없이 너는 불완전과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할 테니까.”


유리가 아닌 철제로 만들어진 창은 한 번 밖에 나가버리면 남자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게 할 것이다. 남자의 마음이 들린다지만,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 ‘천우’라는 두 글자를 끊임없이 되새기기만 하는 중이라 그가 어떤 짓을 하는지는 직접 이 안에 있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다.

결국에 영월은 문의 손잡이를 놓고 돌아와 남자의 시선 끝에 자신의 발이 보이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녹수와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지? 다른 것들은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혀가지만······ 그건 도무지 짐작할 수 없군.”


남자가 술에 취한 것처럼 헤프게 웃었다.


“모르겠는데.”

“숨길 생각하지 마라.”

“정말로 모르겠어. 내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내가 대화했던 게 녹수가 맞았나?”

“정신차려라, 백면.”


허리를 굽힌 영월은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흔들어댔다. 바람이 가는 방향에 옛 사랑의 목소리가 따라오는 듯이 그는 너덜너덜하게 움직이기만 할 뿐, 영월의 바람대도 되지는 않았다.


“영월. 넌 정신병자들의 마음을 들은 적이 있어?”


남자가 천장을 보며 웃다가 정색하고는 역시나 천장에 대고 외쳤다.


“내가 그 세월을 살고도 그런 이들은 안 대해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응. 그런 줄 알았어. 내가 볼 때 너는 고작 잠들면 자연스레 꾸는 것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았거든.”

“어째서지?”

“모르겠네. 아무튼 말이야, 영월. 나는 그 정신병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 그런데 넌 참 대단한 것 같네. 그런 걸 들을 수 있다니.”


남자의 손에 들린 펜을 뺏은 영월이 한숨을 쉬었다.


“내생 앞에서 행동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내 앞에서 지켜줬으면 좋겠군.”

“아냐, 그것의 두 배, 수천 배는 더 잘 지키고 있어. 너희가 내 마음을 모르도록 난 늘 마음 가는대로만 살아야 했거든. 그러니까 정신병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는 거야. 마음 가는 대로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거든. 불쌍한 사람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되어버렸네.”


남자가 실소를 터뜨리며 바닥면으로부터 머리를 일으켰다.


“넌 네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가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등을 붙잡아주며 영월이 타일렀다.


“그래. 너희랑은 다르게 말이지.”


냉소적인 어조로 말한 남자는 제게 닿은 손길이 자신의 얼음을 녹이려는 온기인 줄 알고 재빨리 내던졌다. 영월이 한걸음 물러서자 남자가 완전히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널 찾아오게 그냥 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남자가 말했다.


“네 정체를 들킨 것뿐이다.”


영월이 그의 표현을 정정해 주었다.


“그래, 이제 그럴 때도 되었잖아. 무슨 이야기든 끝을 맺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야기라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널 꼭 사람이 아닌 사물 취급하듯이 이야기하는군.”

“우린 사물이야. 이름이 있으면 모든 게 사물이 돼. 이름이 있으면 모든 존재가 어김없이······ 주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그래서 너의 주인은 사랑이었다는 건가?”


이제까지 남자를 사로잡았던 벽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영월이 말했다.


“어째서 허무가 아니고?”


그가 뒤돌아 남자를 바라보자 정말로 취기가 돌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남자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간신히 옮겨왔다.


“나는 허무의 주인이지. 허무가 나의 주인은 아니야. 하지만 사랑은 아니더라고.”

“그것 참 대단한 사랑이군.”

“그렇다니까. 초영도 몰랐던 사랑이니까.”


울상은 희한하게도 살웃음과 다를 바가 없이 보여서 자칫 그가 기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정은 그렇게 저들끼리 잘 섞이며 어울리고 지내나, 그 감정의 주인인 인간은 왜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일까.

남자의 눈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자신조차 그가 웃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라며 영월은 일부러 배려 차원으로 그의 옆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녹수가 죽었다는 건 알지?”


남자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걷더니 벽에 건들거리며 기댔다.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그의 얼굴이 꼭 변장을 지울 수 없는 광대의 것 같이 보인다.


“그래. 꿈에서도 그렇고, 야담도 녹수를 만났더군.”

“녹수가 하는 말만 제대로 들었어도 야담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을 텐데.”

“숨이 끊기기 직전에 그런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남자가 지쳤는지 고개를 팍 떨구면서 영월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그럴만도 해. 녹수가 너무 완벽하게 속아주었으니까.”

“속아주었다고?”

“그래. 속아주었다는 거야. 속아주었던 것이지. 녹수는 너희 중에 유일하게 그 시집이 사실은 일종의 서한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 그랬던 모양이군.”


영월이 아까 본 그림 한 점 앞으로 갔다. 두 번째로 감상하게 되니 그림의 뒤쪽에는 강과 다리가 스케치된 상태로 멈추어져 있었다. 이것이 완성된 그림인지 미완성인 그림인지의 문제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않았으나, 여자와 남자 그 뒤의 양보다 더 뒤에, 마지막에 자리한 그 강과 다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각각 다른 색인 그의 두 눈이 똑같은 것을 갈망할 만큼 궁금해졌다.


“황호를 조심해.”


남자가 그 그림에 대고 일렀다. 영월이 화들짝 놀라 그를 마주하자 남자가 비소를 흘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넌 아마 우리 중에 누가 배신을 했는지 찾는 모양인데, 계속 그쪽에만 몰두할 거라면 황호를 조심하라고. 너희에 대한 내 마지막 예의야.”


남자가 그림을 들고서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둔탁한 음이 귓가를 때린 건지 따귀를 때린 건지 모르게끔 굉장히 얼얼한 느낌이 공간에 한동안 울렸다.


“천우라는 이름으로 내놓을 작품이 아니었나?”


바닥 끝까지 옮겨가 벽에 부딪히게 된 그림을 바라보며 영월이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야.”


남자는 작정하고 걸어가서 그림에 대고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화풀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고, 단순히 재미로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찾은 거야? 귀천에 있다는 것밖에 몰랐을 텐데. 네가 올 거라고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새삼 놀랍기는 정말 놀라워.”


그림이 더러워진 것을 보고 심호흡을 한 남자가 영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 영혼이 조각난 방법과 똑같겠지.”


영월이 무뚝뚝하게 대응하자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을 개구지게 찡그렸다. 아니면 울고 싶은 것일까. 그는 정말로 제 마음에 끌려만 가고 있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보다 더한 인간의 추락이 있을까. 내던져진 그림은 실은 그의 명성과 특혜만이 아니라 백면 그 자체였던 것일까. 그것은 벽에 걸린 그림과 바닥에 떨어진 그림 사이에서 예술성을 찾아내는 일과 같을 것이다. 남자가 이때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영월의 주목을 얻어냈다.


“장난은 하고 싶지 않은데. 다 버리고 도망친 것처럼 오기는 했지만, 나도 이곳에서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치르고 있는 중이거든.”

“백면.”

“그 이름으로 부르지는 마.”

“돌아오지 않을 건가?”

“장난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정말이야.”


영월에게 있어 백면의 얼굴을 대하기보다는 저 망가진 그림을 바라보는 게 더 편했다. 어쩌면 저 그림은 이 저주받은 성인의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널 강제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영월은 남자의 그림자에 대고 경고했다.


“그러든가. 그럼. 내가 문을 열지만 않으면 되거든.”

“즉석에서 네 눈물을 받겠다고 한다면?”

“절대 흘리지 않을 거야.”

“어째서지?”


남자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입이 없었으므로 그런 변화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허무의 주인인 내가 허무 그 자체가 되어버렸거든.”


그러기에 다음에 들려오는 대답은 남자의 것이 아니라 저 그림자의 것임이 분명했다.


작가의말

되도록 250화와 251화의 내용을 한 편에 다 넣고 싶었는데, 

250화의 분량에 넣기에는 너무 많은 것 같아

부득이하게 250화와 251화로 나누었습니다.


그냥 다음 편으로 취급해서

평소와 같은 시간대에 올릴까 고민했으나,

제 마음이라도 편하자고 이렇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올리게 되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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