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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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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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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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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67화

DUMMY

이제 현자는 있어도 천자(天子)는 더는 없는 곳에서 어쩌면 이러한 명칭은 곧 명예를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성인은 명예를 바라고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 세간의 무상한 변화 속에서도 각자 개인 몫의 삶에 충실히 임하면서 살고 있었다. 꿋꿋하게 살아가리라 믿었던 열두 명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은 정녕 그중 한 명인 백면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이든 틈이 생기려면 양측이 벌어져야만 한다. 비록 균열의 원인이 된 시초의 충격은 그가 가져왔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자극을 견디지 못한 쪽은? 과연 그때도 오로지 백면 한 명만을 탓하는 게 옳은 것일까. 그런데 누가 그를 탓했다고 그러지?

곡이 끝났을 때 도진은 이렇게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박수를 치거나 찬사를 보내는 식의 답례를 생략하고 말았다. 벽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있는 그의 앞으로 조이가 다가가 그의 시야에서 지휘봉을 흔들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다.


“아, 미안. 감상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나 봐. 정말 대단한 연주였어.”


한 박자 늦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조이가 칭찬을 들었음에도 언짢은 기색으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박수를 아끼지 않는 도진을 노려보았다. 뒤늦게 신선한 공기를 쐬기라도 한 것처럼 후련하면서도 감격에 찬 미소를 지어 보여도 조이에게는 들킬 수 없는 실수였다.


“뭔가 좀 이상한데.”

“아이는?”


연습이 끝난 후 남아 있는 단원들이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조이가 다시 도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얼떨떨하게 있었고 조이는 아까와 같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그의 상태를 살피는 걱정의 눈길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자 넌지시 말을 걸었을 때 은근슬쩍 대답을 회피하는 도진에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딴소리하지 말고. 뭐가 안 돼서 그러지?”

“그런 거 없어. 그런데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오늘 분명히 네가 데려갔잖아.”

“잃어버리거나 어디 두고 도망친 거 아니니까 안심해. 애를 안고 지휘할 수는 없잖아. 행정과에 맡기면 다들 알아서 잘 돌봐주시거든. 그리고 말이야.”


조이가 말을 멈추더니 도진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엄포였다.


“아까 들어왔을 때도 그거랑 똑같이 말했던 거 알지?”

“내가? 아까도 똑같은 걸 물었다고?”


삿대질로 제 목을 스스로 겨누며 도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그러니까 아닌 척 굴면서 넘길 생각은 하지 말고. 넌 능청스러운 거랑은 완전히 거리가 멀거든.”


마찬가지로 조이도 손가락으로 그의 얼빠진 듯한 얼굴을 가리키며 그에게 솔직해질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요했다. 표정을 꾸미기에는 너무 늦었단 직감에 도진이 얼굴 근육에 들어가 있던 힘을 풀고 얕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저항을 그만뒀다.


“백면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도진의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 본인이 살아 있다면, 꿈에 나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조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나 씨도 귀천까지 다녀왔지만 여전히 그건 모르고 온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려. 그리고 나나 씨가 이쪽으로 온 뒤로 백면은 더 이상 내 꿈에 나오지도 않았잖아.”


잡념을 몰아내려는지 도진이 기둥에 가볍게 머리를 부딪혔다. 혹시 그가 마음이 상한 것을 아닐까 싶어진 조이가 눈을 살짝 찌푸린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아니면 사정이 있었거나.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은 대개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더라고. 아니면 혹시 섭섭해서 그래?”

“처음에는 솔직히 그랬어. 섭섭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감정에 치우친 표현 같고······ 나는 그럼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존재했을지 그런 걸 모르게 되어버린 것 같았지.”

“그런 건 모두가 하는 고민이야. 12성인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을걸.”


연속으로 제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조이의 시원스러운 답변에 도진이 허탈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고 싱겁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놓인 조이가 고개를 숙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참, 아까는 제대로 말을 못한 것 같은데 곡은 정말로 좋았어.”


도진이 그녀의 옆얼굴을 가려버린 머릿결에 대고 정신을 차린 듯이 아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듣기 좋은 말투로만으로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조이가 금방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큰둥하게 그를 마주했다.


“음······ 너 아까도 그 이야기했어. 내가 가서 살아 있나 확인하고 나서야 하기는 했지만. 정말 무슨 근심이 있는 모양인데?”

“아, 그랬나? 하지만 연주에 대한 감상과 곡에 대한 감상은 별개일 수 있잖아.”

“같아야지. 그래야 지휘자에 대한 예의 아니겠어? 네 친구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나도진?”


조이가 매몰차게 눈을 흘기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웃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동안에 잊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한테 왜 이 곡을 주신 거래? 다들 처음에 듣고 깜짝 놀랐어. 나도 그렇고. 이렇게 대위 선율이 효과적인 음을 내는 곡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아, 역시 성인은 다르구나. 이러면서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니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어때? 네가 가서 물어본다면 알려주실 것 같은데.”

“그건 싫어. 난 선입견을 가진 상태에서 곡을 해석하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왜 물어본 거야?”

“내가 왜 이 곡을 선물로 받은 건지 궁금해서 그러지. 그런데 네 말대로 모르는 게 더 낫긴 하겠다. 만약 그 의도가 나랑 관련된 게 아니라 백면이랑 관련된 거라면 더욱 말이야. 그런데 넌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무심코 꺼낸 이야기가 제대로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직설적으로 다가온 것도 아니건만 안색이 더 나빠진 도진을 고민으로 앓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그가 떠맡게 된 막중한 임무였나 보다.


“생각보다 어려워. 문학이라는 게. 그 시집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내가 곧 백면이 된 것만 같아.”

“네가 곧 백면일지도 모르잖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안 그래도 헷갈리니까.”

“왜, 틀린 말도 아닌데. 우리 모두가 백면일 테니까. 어쨌든 우리도 백면이 남긴 일종의 유품일 거 아니야. 나 자신을 물건 취급하기는 싫지만.”


조이의 말에 도진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비밀의 밀도를 측정하는 법을 알아냈다고 외칠 기세로 화색이 도는 얼굴을 조이에게로 들이밀었다.


“바로 그거야, 그래! 그걸 알아내려고 하면 되겠네.”

“뭐야, 이중인격자처럼? 뭐가 그건데? 백면?”

“아니, 백면의 유품 말이야.”


도진이 구두를 보란듯이 제 두 발을 들었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자세에 다섯 살의 아이처럼 걱정 없어 보이는 해맑은 얼굴은 덤이었다.


“그런데 넌 지금 그 표절한 교수에 대해서 뭔가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어?”


조이가 그의 발을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던 거였어. 물론 교수님도 마찬가지로. 표절을 당한 쪽에서 아무래도 백면의 시집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집을 낱낱이 밝혀야만 해. 애초에 그게 문학 작품이 아니라 그저 연인 간에 주고받은 편지에 불과했다면······ 더욱이 문학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를 알겠는데, 그 사람을 끌어내리는 데에 백면의 작품, 아니 그 편지가 그렇게 중요해?”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도진이 의기소침하게 있는 것보다야 지금이 훨 나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광기게 맞먹을 정도의 활기를 갑작스럽게 되찾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해. 그 사람은 백면의 작품에 흠집을 내려고 하거든.”

“뭐? 어째서? 백면이랑 관련도 없는 사람이잖아.”

“그건 맞아. 혹시 무슨 속셈이 있나 의심도 해봤는데 그래도 작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럼 왜 굳이 그 시집을 깎아내리려는 건데? 그걸 신경쓰는 사람이 요즘에 누가 있다고.”


조이의 질문에 도진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곧 불안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걸 모르겠어. 분명히 백면만은 아닐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 다른 누군가가 누군지를 모르겠어.”


백면이 심은 불씨를 불꽃으로 일구고 그 불꽃을 불길로 번지게 한 성인이 과연 녹수일까. 도진은 자꾸만 자신을 붙잡은 의심의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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