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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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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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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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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DUMMY

가출을 결심한 아이가 향하는 곳은 대개 충동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의 걸음을 끌어당기는 충동은 사실 그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려운 결심 끝에 탈출구를 지나친다고 해도 눈 앞에 펼쳐진 길이 반드시 평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태강은 비아냥스레 달려들면서 머리를 흔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일나무 밑에 제 무덤을 파고 드러누웠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만하면 충분히 자중하여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교훈을 좋아하지 않아.”


나나가 딸꾹질 같은 소리를 내며 붓을 놓쳤다. 기척도 없이 등장한 태강의 모습에 비명을 지를 때를 안타깝게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사과를 그리고 있었다. 수천 겹으로 쌓아올린 고민의 탑을 간신히 무너뜨리고는 그 밑에서 발굴해낸 결정이었다.

아마 태강이 그녀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는 이런 조언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질서하게 사방으로 퍼진 자신의 고민과 나나의 땅끝에서부터 조심히 올려온 고민의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사과가 그렇게 대단해?”


언젠가 남자가 나나에게 건넸던 물감을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던 태강이 태연하게 물었다. 얼마 칠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많이 닳아 보였다.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나나가 수정을 거듭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뭐야, 왜 대답 안 해? 비밀이야?”


태강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나에게로 다가가 서슴없이 그녀의 턱을 만졌다.


“아니면 이 입도 그려서 색칠한 건가? 어라, 그건 아닌데. 그렇지?”


차분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촐랑거리는 말투에 나나가 인내의 끈을 놓고 그의 손을 콱 깨물어버리고 말았다.


“아! 아프잖아. 뭐야, 진짜.”


지난번에 남자에게서 당했던 수모에 대한 악감정도 실어서 그런지 태강의 손가락에는 꽤 깊은 잇자국이 남았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침입하고 그래요? 이거 어떻게 신고도 안 되는 건가?”


나나가 떨어진 붓을 집으려고 바닥을 더듬거리면서도 시선은 태강에게 고정했다. 허리를 숙인 채로 손을 바삐 움직여도 좀처럼 붓이 손에 들어오지 않자, 결국에 태강이 움직여 이젤 뒤쪽에 있는 붓을 주워 직접 나나에게 건네야만 했다.

어떻게든 그것을 거절하고 싶지만, 무엇보다도 붓은 그녀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기에 나나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태강의 손에 들린 붓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신고는 무슨. 이 위대한 태강 님께서 너에게 축복을 내려주려고 왔노라!”

“그런 이야기는 심연도에서만 혹은 혼자 있을 때만 하시면 안 될까요? 보통의 인간은 그런 자뻑을 받아줄 만큼의 아량을 가지지 않았거든요.”

“자뻑? 그건 또 뭐야? 백나나는 진짜 이상한 말을 많이 아네.”

“그야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이건 그쪽에서 몹시 잘 어울리는 단어예요.”

“그렇지 않아.”


태강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침대에 몸을 누이며 나나의 주장을 부정했다. 어느 쪽에 반대하는 것인지 몰라서, 나나는 자신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쪽으로 대화를 유도한다.


“그렇지 않다니······ 설마 백면이니 뭐니 그런 이유를 대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난 이제 거기에 관심이 없거든.”

“어째서요?”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던 그가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나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오는 일이었다. 나나가 붓을 내려놓더니 스툴을 돌려서 아예 태강을 마주하고 앉았다.


“아, 너희는 모르겠구나.”


불현듯이 아침이 찾아온 것에 놀란 사람인 양 몸을 일으킨 태강이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모르는 게 또 있어요?”

“그럼, 자고로 인간에게 배움이란 끝이 없는 법!”

“아까 사람들은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나는 예외야.”


대화가 시시해졌는지 태강이 다시 누워버렸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천장은 꽤 봐줄 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모르는 게 뭔데요? 따로 해야 할 게 늘어난 거예요?”

“응? 그건 아니야.”


나나가 그리던 사과가 완성된 모습으로 천장에 그려졌다. 어린애가 그린 것 같긴 하지만 막상 그림이 완성되고 작품이라고 불려지면 역시 봐줄 만할 것이다. 이토록 상상 속에서 짧게 휘파람을 부르며 태강이 빈정거렸다.


“그거 알았어? 고여명이 백면의 내생이 아닌 거.”

“뭐라고요?”


구적이 멈추자 나나가 차례를 넘겨받은 플루트처럼 언성을 높였다.


“실은 고도훈이 백면의 내생이었던 거지. 그리고 그 파편 하나를 야담이 완전히 없애버린 거고. 정말 완벽하게 엉망진창이라니까.”

“그럼 백면이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예요? 사람을 속인 거잖아요!”


나나가 주먹을 쥐면서 화를 냈다.


“그거야 나야 모르지. 난 정말 이제 아무 관심이 없다니까? 그리고 궁금하면 백면한테 직접 물어봐.”


태강이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곧 나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무엇을 감지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나가 자신이 현재 온전치 못한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뭐예요?”


난데없이 찾아온 적막을 빠르게 물리치며 나나가 물었다.


“뭐냐니? 나잖아. 태강!”

“그런 건 제발 좀 하지 말고요. 뭔가 이상해서 그래요.”

“땡! 틀렸어.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다들 나만 찾느라고 피곤해서 그래. 정말 내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니까. 역시 아무래도 천규라는 이름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을까? 백나나, 너는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 존재인지 상상도 못할 거야.”


은근슬쩍 흘린 천규의 이름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가 인위적으로 밝아지는 모습을 포착한 나나가 손으로 허리춤을 찌르며 그를 수상스럽게 노려본다.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남이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올 리가 없잖아요. 내쫓기 전에 빨리 말하든가 아니면 빨리 사라지든가 하세요.”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떤 사인데 그래?”

“굳이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면 웬수 사이가 되겠네요.”

“몰라, 나 오늘은 안 들어갈 거야. 나도 방황이라는 걸 좀 해봐야겠어. 백면도 자기 마음 몰라준다고 그렇게 나를 고생하게 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떻게든 엇나가려는 요점을 되짚어보았다.


“저한테 피해를 주잖아요.”


그러고는 곧 억장이 무너질 것처럼 감정이 담긴 말을 어렵게 뱉었다.


“네가 그리다가 갑자기 막히면 내가 도와줄게. 그럼 됐지? 유능한 조수 하나 뒀다고 생각해.”

“제가 조수를 둘 입장이 아니라서요. 또 원하지도 않거든요.”

“어째서? 백면도 그렇게 생각하더니 너도 그런 소리를 하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요목조목 계속해서 따져오는 태강의 집착에 폭발해버리고 만 그녀가 소리를 지르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태강은 놀라거나 함께 짜증을 부리지도 않더니 일어나서 그녀가 그리고 있던 그림 앞에 섰다.


“그야 네가 백면이잖아.”


물감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캔버스 위에 손을 뻗은 그가 물건을 잡는 것처럼 그림 속의 사과를 쥐기 위해서 이상한 손짓을 보였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그림을 망치고 있잖아요!”


애써 칠한 색들이 한데 뒤엉키는 것을 괴롭게 지켜보며 나나가 절규했다.


“그렇게 먹고 싶어지는 사과는 아니라서 말이야.”

“그야 당연하죠! 그림이잖아요!”


나나가 바락바락 대들 듯이 고개를 쳐들고 태강에게 맞섰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눈길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왜? 그림이어도 진짜 사과여야지. 먹고 싶어지는 사과 말이야.”

“이건 그런 사과가 아니에요. 그림이라고 해서 진짜처럼 그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아······ 진짜 어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네. 그림이라면 원래 현실을 본따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너무 시시하잖아. 애가 그린 것 같고.”

“먹고 싶은 사과는 예술적 가치가 없잖아요!”


나나가 태강을 뒤로 밀어내며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처참한 광경을 똑바로 지켜봤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림이 망가지느니 차라리 이렇게 마음이 망가지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작가의말

부디 건강 잘 챙기셨으면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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