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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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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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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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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DUMMY

때로 계절만이 수상하다가도 그 원인은 날씨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날씨가 대개 궂은 편이기는 하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자각에 이르기까지는 다소의 망각이 필요한 법이니 그렇게 되면 기억이 고발장을 들고 거칠게 반격해오는 법이다.

초영과 야담이 돌아온 다음날, 이 월영전에도 심창잖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백면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넘실거리는 풍경에도 자비와 인내가 넘쳐나서 침묵 속에서 재채기가 터진다고 해도 금방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만큼의 평화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면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자고 누군가가 다짐했을 때, 모든 것이 차츰 색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의 잔해를 그저 콘크리트 밑에 묻어두기만 하는, 오직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몰인간성처럼 자연에는 결코 침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침묵으로 매몰차게 묻으려고 하는 모략이 분위기 속에 깃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왜 이러지?”


어깨가 결리는지 그 부분을 안마하듯이 두드리며 태강이 묵언의 긴장 속에 뛰어들었다.


“왜?”


주화가 옆에서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이야. 역시 황호를 괜히 만났나 봐.”


곱씹으며 생각하니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비양심으로 인한 수치심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누구도 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가 연신 왼쪽 어깨를 주물럭거리는 탓에 그런 듯하다.


“황호를 만났었다고?”


황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까지 그사이 태강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야담이 탁자 위를 까딱거리던 손짓을 멈추고 태강을 쳐다보았다.


“야담은 그때 없었지, 참. 내가 찾아다니기 바빠서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네.” 태강이 주접스레 말을 이었다. “응, 그랬었어. 나를 만나야겠다고 했거든. 이쪽에서 찾아오라지 뭐야. 왜 다들 나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그러는 건지, 참. 아무튼 갔더니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집에서 살고 있지 뭐야. 슬픔에 빠진 인간들이 괜히 거지처럼 다니는 게 아니었나 봐. 다 황호가 그 꼴을 하고 다니니까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은 거겠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맞은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초영이 어느덧 눈을 부릅뜨고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화와 가장 끝자리에서 이방인 같이 멀리 떨어져 앉은 달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석과 영월은 이 자리에 없었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지?”


야담의 질문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초영이었다. 잠을 쫓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진심을 드러낸 것인지 그녀는 태강을 무섭게 노려보며 턱을 괴었다.


“아, 그야 내가 다 이야기한 뒤에 너희가 왔으니 그러지. 궁금하면 어디 사는지도 다 알려줄게. 너희 둘 빼고 다른 애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어.”


금방 나은 듯이 어깨를 쉽게 으쓱거리며 태강이 해명했다.


“황호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이야기했니?”


초영이 여전히 달려드는 눈빛으로 태강을 주시하며 물었다. 졸음에도 속도는 시간에 저항하는 추억처럼 쏜살같이 내달려서 태강을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응, 그럼. 내가 비밀 같은 게 있을 거 같아? 맹세코 홍연한테 약속하는데, 그러지 않아.”


태강이 선서하듯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홍연은 지금 없잖아. 그렇게 맹세해봤자 뭔 소용이니?”


쉽게 물러나지 않는 잠결에도 예리하게 태강을 찌르는 데에는 능숙한 초영이었다.


“너무하네, 정말. 달목! 그래도 이런 면에서는 나 믿을 만한 녀석이라고 네가 대신 말 좀 해줘. 내 신뢰도가 어쩌다가 하락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무척 섭섭하니까.”


태강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달목을 보려고 애썼다. 골치 아프고 유해무익하기만 할 대화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달목이 모습을 감추려고 몸을 뒤로 빼며 대답으로 충분할 법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잖아.”


주화가 안쓰럽게 태강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니? 설마 내가 원래 그런 애였다는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지?”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고 또 그게 쟁점도 아니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그럼 뭔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지난번에 난연에 있을 때 말이야. 네가 천규를 숨기려고 했었잖아.”


말하면서도 과연 견책할 상대를 바로 고른 것인지 의심이 들어 주화의 목소리가 막판에 가서는 시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야 그건 천규가 내 동생이니까 그랬지!”


태강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래, 알아. 그래도 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만 기억해. 너를 나무라거나 꾸짖으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도 너의 그 잘못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잖니?”


태강의 언성에 덕분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게 된 초영이 몸을 꼿꼿하게 펴며 팔짱을 꼈다. 등받이에 무게를 실으며 다리를 꼬는 것인지 약간 뒤틀거리는 자세에 그녀가 드디어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경우는 다르지! 황호는 내 형제도 아니잖아. 내가 젊을 때 그렇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의 모습을 하는 형제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진심으로 억울해져버린 태강이 강력하게 외쳤다.


“형제는 나이로 맺어지는 게 아니잖아.”


웬일인지 주화도 그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와 대리하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태강 혼자만의 생각이다. 실제로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저의가 없는 그녀였다.


“알아. 하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성격을 가진 황호랑 내 동생이랑 같은 취급을 하니까 화가 나서 그래.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 절대로! 천규는 황호랑 아주 다른 애야. 그야말로 가장 용감한 사람이거든.”


열변을 토하는 동안에 태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천규가 너보다는 철든 애인 건 확실하니까.”


입술을 푸르르 떨며 초영이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옆에서 야담이 아무 의미 없이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까지도 자신을 배반하는 신호로 보이는 태강이 슬픔에 침잠하는 울상이 되어버린다.


“정말 너무들 하다니까.”


그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거니?”


초영이 물었다.


“응. 갈 거야.”


확고했던 처사와는 반대로 태강은 께지럭거리기만 할 뿐,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다.


“알겠어. 네 말 믿어줄게. 황호랑 별 이야기 없었다는 거지?”


사람을 구슬리는, 혹은 어르는 어조로 초영이 태강을 붙잡았다.


“그래! 정말이라니까.”

“그랬겠지, 그래도 황호가 널 왜 찾았는지는 좀 궁금하네. 왜 하필 너였던 거래?”

“날 무시해서 그렇게 묻는 건 아니지?”

“전혀! 그럴 리가 없잖니. 이제 와서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다가오는 게 이상해서 그러지.”

“누가? 설마 나?”

“널 말하는 거겠니? 황호 말이야.”


자신에 대한 오해가 완전히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강이 헤실헤실 웃으며 초영의 따가운 눈초리를 가뿐히 무시했다.


“특별한 건 없었어. 우리의 근황이 궁금해서 나를 불렀던 거래. 다들 알다시피 내가 제일 친화력이 좋고, 또 그만큼 제일 친절하기도 하잖아? 맨날 톡톡거리는 누구랑 다르게 말이야!”


그제야 그는 얄밉게 초영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참 좋겠네.”


단번에 말뜻을 파악한 초영이 심드렁하게 비꼬자, 태강은 이제 아쉬울 것이 없다는 듯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난 그럼 이만 갈게. 아무래도 좀 쉬는 게 좋겠어. 불려만 다녔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오늘은 왜 이렇게 어깨가 아픈 건지 모르겠어. 아직 그럴 때도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난 먼저 일어날게.”


이미 일어난 지 한참 지난 후였으나 태강은 방금 막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행동하며 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간 후에는 침묵이 다시금 시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쓸고 지나가버린 것을 하나씩 더듬고 파헤치고 있던 야담이 어느 순간에 돌연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특별한 대화가 있었던 것 같군.”


이는 각자의 잡념에 묶여 있던 다른 성인들을 단숨에 해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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