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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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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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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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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1.02.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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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53화

DUMMY

“농담하시는 거죠?”


여명이 하마터면 놓칠 뻔한 화분을 무릎으로 받치는 덕에 파열음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초영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섰다. 야담에게 끌려오듯이 들어오기는 했으나 막상 이야기하고 나니 무더위 속에서 겨울바람을 들이마신 것처럼 시원함과 오싹함이 교차하는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니요,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손님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의 생활에 여명은 나름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무작정 타인을 대하면서 죗값을 치르기보다는 더 나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생활을 원하고 있었기에 고독을 전제로 하는 참회의 시간은 그에게 크나큰 만족감을 안겨주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작정 성인들이 들이닥쳤을 때 자신이 또 다른 문제의 중심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그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 한적한 전원생활을 택한 적은 더더욱이 없었다.

어째서 추위를 맞으며 이제라도 묵묵히 땅속에 뿌리를 내리려는 백합꽃이 통째로 뽑혀버리는 듯한 충격을 재차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겨울이 지났기 때문일까, 혹은 아직 겨울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계속 저희 조상님 중 한 분을 조사하시던 것 아니었나요?”


그 까닭을 도무지 모르는 여명이 대답하다 말고 질문을 해버렸다.


“맞아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그렇게 뜬금없다는 표정은 짓지 말아요.”


여명이 들고 있던 화분을 대신 바닥에 내려놓으며 초영이 말했다. 야담은 아까부터 이 작은 정원을 둘러보기만 할 뿐, 이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여명은 이를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배회가 신경에 거슬리기보다는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일까 하는 두려움을 일게 했다.


“하지만 분명히, 저는 백면의 내생이 아니었나요? 그렇게 알고 있고 또······ 그래서 그분의 유품이라고 하는 물건까지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백면의 내생이라고 하던 이들 중에 자신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가장 침착한 이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고여명일 것이라고 초영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가장 시간을 끌었던 사람이 여명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그가 자신이 타인의 일부라는 점에서 방황하거나 고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그리고 그것이 타당한 것일까. 모든 합리적인 사고가 실리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건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장 잘 보여주는 교훈일 터.

그렇다면 그는 백면의 내생 중에서 가장 경솔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고여명은 백면의 내생이 아닐 것이라고, 초영은 또 한 번 자신을 설득하게 된다.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초영이 흘러내린 머리를 매만지지도 않고서 말했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요?”


여명이 창가 쪽에 마련된 노란 튤립 앞에서 동상처럼 고요해진 야담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는 거예요. 어차피 전적으로 내생의 꿈에 의존해서 내생을 파헤쳐온 것이지······ 우리가 근거를 찾아낸 적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확실한 것처럼 믿으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죠. 어차피 우린 인간의 꿈에까지 간섭할 순 없으니까요. 그런 존재가 하나 있기는 한데, 영월은 입이 가벼운 쪽이 전혀 아니니까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나 씨의 꿈에 나타나서 그렇게 다음 내생을 찾아낸다는 것 말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백면의 내생인 게 꽤 명확한 것 아니었나요? 제가 어머니와 재회하기 전까지 나나 씨가 다른 꿈을 꾼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어쩔 줄 모르며 여명은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사막 한가운데에 놓여도 지금보다는 더 길을 잘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변장을 즐기는 자는 진실을 볼 줄은 알아도 진실을 말할 줄은 모르는 법이지.”


튤립 한 송이를 쥐어 꼼꼼하게 살피던 야담이 눈길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백면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왜?”


초영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는 통에 서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모습 중에서 어떤 모습으로 말해야 할지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꽃을 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한없이 평범하고 흔한 튤립이었는지 이내 꽃을 내려놓으며 야담이 초영 옆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저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여명이 조심스럽게 말한 것과 달리 초영은 고개 끄덕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래요. 그리고 영혼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돌아오기 마련이라니요? 누구의 영혼이 말이죠?”

“누구긴 누구겠어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인 것 같은데. 당연히 백면이 사랑했던 그 여자죠.”

“설마 제가 그분이라는 말씀을 하려는 건 아니시죠?”


간담이 서늘해진 여명이 양팔을 감싸 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건 아니에요. 그런 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인간의 죽음에는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요. 중한 죄를 지어서 영혼이 없어져야 할 이유를 얻지 않은 이상.”

“그렇다면 전 도대체 누구죠?”


여명이 혼란스러운지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떨구었다. 백면이라는 존재가 모르긴 몰라도 제게 크나큰 의지가 되어주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여명 씨는 고여명 씨 그 자체인 거죠. 그 누구의 일부로 속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사람 말이에요.”


초영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렇다는 거예요. 진실은 후에 밝혀질 테니까······ 실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지난번에 당신 할머님의 기억을 몇 번이고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았잖아요.”

“······네.”


여명이 아주 힘없게, 그리고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케 할 만큼 작게 대답했다.


“그때 실은 할머님의 기억 속에서 녹수를 보았어요.”

“······12성인 중 한 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증오와 같은 감정을 다루신다는.”

“맞아요. 언젠가 한 번 오래전에 다녀갔더라고요. 심연도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그 애 얼굴을 잊어버리겠어요? 앳된 얼굴이었으니 더 알아보기 쉬웠죠.”

“그분이 왜 저희 할머니를 만나신 거죠? 죄라면 아버지에게 있는 것인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이마를 짚던 손이 곧이어 얼굴의 전반을 가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을 가릴 수 없음이 두려운지 벌벌 떨렸다.


“그래요, 그럴 거예요. 그래서 다녀갔을 거예요.”


초영의 목소리 역시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녀갔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도대체 언제 오셨었길래······!”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던 여명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 몸 어딘가에서라도 부디 피의 흐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통을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어진 것은 시간뿐인 듯하여 고통은 배가 되어가기만 한다.


“고여명 씨가 태어나기도 전이에요. 감이 오죠? 그리고 이 문제는 고여명 씨와 어쩌면 아무 상관이 없을 거라는 거예요.”

“제가 상관없다니, 그렇다면 저는 왜 도진 씨며, 나나 씨며 그리고 심연도에도 다녀오고 그랬어야만 했던 거죠? 그 시간이 저한텐 정말 소중했는데 말이에요.”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야담은 여명의 괴로워하는 눈빛을 지켜보다가 초영이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자마자 느닷없이 운을 뗐다.


“당신의 아버지가 실은 백면의 내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이 아니라, 그 영악한 살인자 고도훈이 백면의 내생이었다는 뜻이지.”


이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게 되면, 백면이 성인으로 끝끝내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알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날이 저무는 것을 반길 이 하나 없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밤이 떠나는 것을 좋아할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하루는 돌고 돌아야 하니, 고통의 까닭은 사실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말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엇보다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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