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356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2.16 23:59
조회
29
추천
1
글자
10쪽

258화

DUMMY

“역시 그렇지?”


초영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일제히 태강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림자처럼 널리 뻗어 나가는 그것은 실상 불언(不言)이라기보다는 암묵(暗默)에 가까운 침묵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태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어깨를 주무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증을 달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꾸며내는 말에 자연스레 반응하지 못할까 봐 전신에 무리를 가하느라 어깨가 경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니까. 역시, 돌려서 말하는 게 쉽지가 않단 말이야.”


침대에 철퍼덕 몸을 맡긴 태강이 천장을 쳐다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팔베개를 한 채로 그 리듬에 발을 까딱거리던 그가 곧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래도 아직 팔이 자리자리한 탓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때마다 털썩거리는 소리는 그의 근심이 내는 소리인지 그의 신경을 못살게 괴롭힌다.


“정말 짜증이 나네. 까놓고 말해서 나랑 관련도 없는 일이긴 하잖아.”


초영이 그랬던 것처럼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등을 구부리더니 무릎 위로 팔꿈치를 얹었다. 그러고는 뭔가에 골몰하는 이처럼 얼굴을 감싼 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듯이 콧대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그는 자신에게 떠넘겨진 의무들에 대해 곱씹는 중이었다. 이 모든 걸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왜 자신이 이것들을 씹어 삼켜야만 하는 것인지 인간은 왜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는 이 근본적인 문제의 까닭을 그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설마 모두 나한테 기적을 바라고 있는 걸까?”


기적이란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다. 설령 지천에 널리고 널린 게 꿈이어서 인간의 사고와 지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해도 기적은 인간이 꿈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에게도 기적을 바랄 권리가 있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토록 이기적인 것이다.


“······어쨌든 난 들어줄 수 없을 거야.”


마른세수로 끝마친 고뇌에 태강이 일어나 방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그는 몇 걸음 가는 것이 전부로 보일 정도로 종종 멈추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갔다. 막다른 벽을 만나면 좌절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기적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에 불과한 터, 만들어야 하는 것이 비로소 기적인 것이다. 그러자 태강은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돌진했다.

곧장 찾아온 곳은 흑석의 작업실이었다. 그런데 자신보다도 먼저 그를 만나러 온 손님이 있었다. 손님이라는 표현보다는 동료라고 일컫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어쨌거나 이곳의 주인은 떡하니 혼자서만 자리에 앉아 있는 흑석이었으니 주화 또한 방문의 뚜렷한 목적 없이는 마음대로 나들 수 없는 처지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거의 다 된 것 같아.”


태강이 바람처럼 나타났을 때 흑석이 처음 건넨 말이었다. 아직 태강이 불청객처럼 갑자기 등장한 줄 모르고 있던 때라서, 당연히 이 대사의 수신인은 주화였다.


“거의 다 됐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강은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워낙에 살갑게 물어온 터라 흑석은 따지기는커녕 묻는 말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천일나무에 어느 정도의 물의 양이 필요한지를 거의 다 알아낸 것 같단 말이야.”

“정말? 그럼 살릴 수 있는 거야?”

“······모르지. 아직 시도해보지는 않았거든. 이론적으로만 도달했다는 소리거든.”

“뭐야, 그럼 다 된 것도 아니네.”


시무룩해진 태강이 귀를 파면서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주화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많은 양의 말을 어디서 구하려고 그래?”


마음에 붙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요즘, 주화가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물을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아니면 속세에 나가서 구해와도 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물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잖아. 어떻게 해서든 시도를 해봐야지.”

“그러다가 만약 실패한다면? 그럼 물만 낭비하는 거잖아.”

“······우리가 그런 걸 따질 처지는 아닌 것 같아. 초영 말대로 고도훈의 영혼이 사라진 이상, 백면은 계속 완전하지 못할 거 아니야. 어쩌다 보니 이거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잖아.”


주화의 심려가 자신의 것과 약간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흑석이 난처하게 웃으며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주화가 괜히 침식불안하여 꺼낸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마땅한 수가 없었으므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물이 얼마나 많이 필요하길래 그래? 천일나무가 그렇게 물을 많이 먹어?”


태강이 중간에서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주화의 근심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 같아. 아무리 많은 물을 줘도 소용이 없더라고. 나무 몇 그루 가지고는 턱도 없는 노릇이었어. 헛된 수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물을 줄 때마다 간간이 잎사귀 몇 개 정도가 싱싱한 연녹색으로 변하기는 했거든. 그래서 그걸 토대로 잎사귀 하나를 되살리는 데 소모되는 물의 양을 구해서 계산해보니 나무 전체를 되살리려면 얼마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알겠더라고.”

“뭔 소린지 모르겠네. 아무튼 희망이 보인다는 거잖아.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다는 거야?”

“천 톤. 정확히 천 톤이 필요해.”

“천 톤이나? 아니, 정확하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네가 알아듣지를 못해서 그렇게 말한 거니까 궁금해하지 마. 반올림도 하지 않고 확실하게 나온 숫자니까.”


흑석의 단호한 경고에 부득이하게 합죽이가 되어버린 태강이 쩔쩔매는 눈빛으로 주화를 바라보았다. 흑석이 방금 한 설명이 사실이냐고 넌지시 물어오는 것이었다. 주화가 얕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천 톤이 맞아. 네가 오기 전에 나도 흑석이 말한 대로 한 번 더 계산을 해봤거든. 정말이더라고.”

“헐! 그걸 다 어디서 구하려고 그래? 흙이랑 모래도 그렇게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여간 쉽게 구하기야 하겠지만, 한꺼번에 쓰기에는 너무 많잖아. 말도 안 되는 숫자야. 뭔 나무 하나가 그렇게 물을 많이 먹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서 먹은 물보다도 더 먹는 것 같네.”

“지금 그것 때문에 내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자신의 방을 누비던 것과는 조금 다르고 더 종종거리며 두 사람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기 시작한 태강이 발의 속도보다도 더 빨리 말이 번지는 것을 잊지 않은 듯이 투덜거린다.


“아니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네.”


흑석이 급히 태강이 곁에 왔을 때 그의 손목을 붙잡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들이 가장 공포스럽다는 것을 체감한 태강이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뭐야? 소름 끼치게!”

“아, 미안. 널 보니까 생각이 나서 말이지.”

“뭘 생각했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영감을 줄 만한 사람이었나?”

“영감 같은 건 없어. 그건 고민과 사색이라는 단어를 멋들어지게 조합하느라고 생긴 말에 지나지 않거든. 뭐, 너만 좋다면 그렇다고 해두자.”


주화가 가까이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행운과 불행이 공존하는 듯한 신기한 눈길을 구경했다. 한참을 노려보는 것 같이 둘은 마주하고 있다가 흑석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동시에 태강이 짐짓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마는 것으로 시선 교환은 끝이 났다.


“네가 나 좀 도와줘.”

“아, 안 들을래.”


태강이 두 귀를 막았으나 흑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 눈에 들지도 않을 거고, 우리도 일을 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여러모로 좋을 거야.”

“내가 좋은 건 없잖아.”

“아직 난 뭘 부탁할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싫어, 싫어. 완전히 싫어.”

“그래도 난 말할 건데.”

“그러든가. 하지만 내 대답을 미리 들어두고 잘 생각해서 말해. 절대로 싫어.”


태강이 뒤돌아 이내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흑석은 평온한 얼굴의 방향을 그가 가는 곳마다 두며 말한다.


“네가 바닷물을 이용해서 물을 제공해줬으면 해.”

“아, 싫다니까!”

“왜?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싫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잖아.”

“몰라, 나 완전 바쁘거든. 괜히 왔네, 괜히 왔어. 나 갈 거야. 나 찾지 마. 그리고 알아서 해. 그 돼지 같은 나무가 어떻게 되든 이제 나도 모르니까.”


마지막 발언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천일나무를 되살릴 수 없다면 그의 동생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을 그가 충동적으로 던졌을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꽤 진심인 것처럼 보였고,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는 의지로 흑석이나 주화가 만류도 하지 못하게끔 완전히 작업실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있잖아. 방금 한 말 진심일까?”


주화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며 물었다.


“모르겠네. 하지만 아니기를 바라야지.”


흑석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더미를 괜히 들추어 보며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7 276화 21.03.06 24 1 9쪽
276 275화 21.03.05 23 1 9쪽
275 274화(수정) 21.03.04 25 1 9쪽
274 273화 21.03.03 25 1 9쪽
273 272화 21.03.02 27 1 9쪽
272 271화 21.03.01 24 1 9쪽
271 270화 +3 21.02.28 27 1 9쪽
270 269화 21.02.27 22 1 9쪽
269 268화 21.02.26 25 1 10쪽
268 267화 21.02.25 23 1 9쪽
267 266화 21.02.24 22 1 9쪽
266 265화 21.02.23 25 1 9쪽
265 264화 21.02.22 27 1 9쪽
264 263화 21.02.21 24 1 9쪽
263 262화 21.02.20 24 1 9쪽
262 261화 21.02.19 24 1 9쪽
261 260화 21.02.18 25 1 9쪽
260 259화 +2 21.02.17 28 1 9쪽
» 258화 21.02.16 30 1 10쪽
258 257화 21.02.15 25 1 9쪽
257 256화 21.02.14 24 1 9쪽
256 255화 21.02.13 27 1 9쪽
255 254화 21.02.12 24 1 9쪽
254 253화 21.02.11 24 1 9쪽
253 252화 21.02.10 28 1 9쪽
252 251화 21.02.10 29 1 9쪽
251 250화 21.02.09 28 2 9쪽
250 249화 21.02.09 31 2 11쪽
249 248화 21.02.07 32 3 9쪽
248 247화 21.02.06 39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